모노- 아껴둔 사랑 (Whitemoon, 2000) 음악

슈가맨 1에 나온 모든 그룹중 가장 반가웠던 이들이 바로 '모노'였다. 프로그램 취지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90년대에 나온 수많은 형태의 음악중 이들은 가장 세련된 음색을 내던 밴드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량에 비해 히트곡은 1집의 [넌 언제나]와 2집의 준 히트곡인 [파라다이스]정도에 그쳤기에 현재는 위키백과에도 실려 있지 않은 아쉬운 인지도의 밴드였기에 슈가맨의 깜짝 출연은 더욱더 반가웠고...

이들의 '역량에 비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아래의 마지막 3집에서 발표한 이런 곡때문이다. 가성의 매력이 뭔지 보여주는 정말 좋은 곡.

모노 (Mono)- 아껴둔 사랑 (2000년)


우연한 기회조차 
잔인하게 외면한 운명도
그대와의 만남을 끝내 허락했죠 
이제서야

힘겨웠던 하루 하루의 생활이 
이제는 새롭기만 해
부러워해야 했던 남들의 모습속에 
내가 있는 걸

애써 태연해 하지만 
들뜨는 마음은 결코 숨길 수 없나봐요 
낮설은 내 표정에 다들 놀라요

2절
헤어지고 난 뒤에 기다리는 
그대의 전화는
내 삶의 소중한 기쁨이 되 버렸죠 
어느새 난

하지만 두려울 때도 있어요
나의 미래가 

그대에게 집착하는 모습만 
보일까봐

힘겨웠던 하루 하루의 생활이 
이제는 새롭기만 해
부러워해야 했던 남들의 모습속에 
내가 있는 걸

애써 태연해 하지만 
들뜨는 마음은 결코 숨길 수 없나봐요 
낮설은 내 표정에 다들 놀라요

가진 것 하나 없는 날 
거짓말처럼 아끼는 
그대를 사랑해요
줄 것도 하나없는 
날 용서해요



신화시대에 가까운 야생의 땅, 17세기 이전의 조선의 숲과 땅 모습 (1) 역사전통마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97년작 [원령공주]의 시대배경인 무로마치 시대 (1336~ 1573년), 즉 14~15세기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소개한 글로, 당시 생각보다 이 원령공주의 시대가 그리 오래된 (즉 고대이전 신화시대)이 아닌 흔히 말해 동아시아의 중세정도의 시대였음을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됩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의 문화재복원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 무조건 원형고집이 아니라 유연성이 있으면서도 최대한 고증으로 가는, 그러나 원칙은 '복원에 한표'를 던지는 긍정적 사회분위기. 모르는 것은 최대한 근처의 사료와 자료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구현해내는 자세. 그리고 무엇이든 그림으로라도 그려내서 가시성을 확보하는 형태의 움직임. 

그러한 '노력'에서 탄생한 문화재나 문화작품은 사람들에게 그 진정성과 Credibility가 전해진다. 원령공주를 보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작품들이 다루는 역사적 시각성은 '에이 저럴리가 있어?'가 아니라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의 재현과 진정한 창조이다. 부정적의미가 아닌, 긍정적의미의 '만들어진 전통'은 그렇게 탄생한다.

사극을 만들때의 태도나, 복원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할수 있는 한 철저하면서도 상상력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유연하고 긍정적인 자세라는 것은 분명 배울 점같다. 원형고집과 돈벌이라는 양극단을 포함하는 모아니면 도, 한계를 그어버리는 경직성과 그 반대로 스스로 목을 죄는 경박함으로는 아무것도 생산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의미있는 저서가 작년 2017년 우리 학계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의 생태환경사의 전문가인 김동진박사의 [조선의 생태환경사] (푸른역사)가 그것으로 이 책은 여러 분야에서 참고할 만한 좋은 내용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한반도의 들판과 숲, 그리고 논 밭의 모습을 그려낼 여러 분야에서 꼭 참고해야할 연구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일단 삼국, 통일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중기까지의 한반도의 들판과 숲, 그리고 인간들과 야생의 모습에 대해 살핀 부분을 발췌해 소개해 드립니다.
=======

15~19세기 한반도에서 진행된 생태환경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러브록의 이러한 주장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17~18세기) 천방과 화전 개발은 조선 성립 이전과 이후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조선의 생태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방은 냇가를 막아 관개함으로써 하천에 연한 저습지와 무너미를 논으로 바꾸었고, 하천은 산록에 위치한 숲에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광범위한 땅을 새로운 경작지로 개간하는 수단이 되었다. 
습지와 무너미, 완만한 산록의 숲은 오랫동안 야생 동식물이 번영을 누리던 영역이었다. '산림천택', 혹은 '산림수택'이라 불리던 이곳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실과 국가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공간에서 대다수 민인들이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하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이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누린다'는 새로운 국가운영이념을 채택한 결과 야생의 공간은 논밭이 되어 삶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개와 닭이 서로 호응하여 우짖고', '밥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는' 경관으로 바뀌었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번창하는 동안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번성을 누리던 야생의 세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농경지는 오늘날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싼 가장 특징적인 경관이 되었다.


4.1 퍼센트, 깊은 숲 속에 일군 땅

그러나 농지 개간에 가속도가 붙고 있던 고대사회 역시 촌락과 촌락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촌락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백성들은 정복전쟁에 대비하고 빈번하게 출물하는 야생동물을 제어하기 위해 일정한 방어, 사냥시설을 마련하고 있었다. 아직 한반도의 광대한 야생공간에 비해 인구는 불충분했고, 농경지로 개간할 땅은 많았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이용하던 가용공간의 구체적 면모는 어떠했을까.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래는 13-14세기경을 배경으로 하는 [호랑이형님(웹툰)]에 나오는 원 모습.
이른바 [신라촌락문서]로 알려진 고대문서는 이를 살필 수 있는 적절한 사료다. 당시의 도량형에 대한 연구성과를 고려하여 분석하면 [신라촌락문서]에 나타난 4개 촌락의 촌역중에서 농경지 면적은 4.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촌역 중 경작지는 대략 2~7%가량이었고, 농경지의 비율이 낮은 신생촌은 3년 동안 농지개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신라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 인근의 정황이 이러했으므로, 당시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본다면 농경지는 4%보다 낮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서원경의 모촌을 오늘날 청지시 초정약수터 일원으로 비정한 이인철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모촌은 서원경과 마찬가지로 큰 산자락 끝에 놓인 분지성 평지에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고작 4%미만의 경작지. 나머지는 야생의 땅입니다. 이런 모습은 호족의 중심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촌과 비슷한 곳에서 발달한 취락의 모습은 신라 하대에서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에 각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의 중심지에서도 드러난다. 상주의 아자개(?~?)나 벽진장군 이총언 (858~ 938년)등은 큰 산에 성을 쌓았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들에 농경지를 일구었다. 큰 산과 평지가 이어지는 그곳에 호랑이와 같은 맹수가 일상적으로 출몰하면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의이씨의 시조가 되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 (?~?)가 살던 '전의' 역시 차령산맥 바로 아래 넓게 펼쳐진 땅이었다. 흥미롭게도 전의이씨 시조의 마을에도 호랑이와 호랑이 먹이의 전설이 전하고, 이는 경부선 철도 개설 당시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인철은 이곳을 [신라촌락문서]의 사해점촌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은 고대사회 이래 개발이 집중되었지만 아직 많이 남아있던 큰 산아래의 넓은 들을 개간했다. 경주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러한 땅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반을 닦은 호족은 통일신라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다.
사다리 모양, 10~14세기의 농업경관

고대사회 이래의 경작지와 주거지의 입지 특성은 고려시기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서긍은 고려시대 경작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산골짜기에 놓인 '사다리 모양의 논과 밭'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고려시기에도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숲과 늪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은 야생의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큰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치 서부 개척기의 미국처럼 숲과 야생동물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산비탈을 개간한 곳에서 농사를 지었고, 때로는 다락밭 (계단밭)을 만들기도 했다. 

마을에 인접한 샘이나 계속의 작은 시냇물은 벼농사에 이용되었고, 저수지를 만들어 산자락 아래 펼쳐진 논에 물을 대거나 섬 둘레에 둑을 쌓아 만든 갯바닥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넓은 들판이 농경지로 이용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호남평야와 같은 지역이 산자락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향해 점점 개간되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하면 일부 지역이 경작지로 이용되었고, 
농업의 중심지는 여전히 산자락에 근접해 있었다. 황산벌로 불린 논산의 부적면 일대는 여우들이 뛰놀고 있었고, 여행자들은 갈대와 억새숲을 지나 관촉사에서 쉬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랑이형님]이란 작품의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이런 모습을 잡아내었는지... 여말선초 즉 13-14세기의 한반도 모습인데 바로 이 모습이 이 연구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산자락 아래 인간의 마을과 작은 경작지 (그것도 바둑판이 아닌 계단식). 그리고 그외에는 거대한 야생의 땅. 아마도 당대 조선땅의 대다수의 마을이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현재의 황산벌은 당시의 모습을 조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산자락 아래에 경작지로 일굴만한 논경지, 그리고 그 뒤로는 여우떼가 우글대던 벌판. 현재도 억새풀 투성이지만 강도들이 숨어있진 않습니다(...)
현재의 황산벌

넓디넓은 평택의 들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종 12년 (1021년)에 세워진 봉선홍경사 갈기비에는 이러한 정황에 대해 

처음 이 땅에는 전혀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땅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비록 갈림길로서 중요한 지점이었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없는 평택의 들판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그 사이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다.
12세기에 세워진, 최루백 (1110~1205년)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때려잡은 혜음원 역시 큰 산과 평지로 이어지는 골짜기부근이었다. 오늘날에는 골짜기를 논이 가득 메우고 있지만 당시 호랑이와 같은 야생동물이 사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을 지나려는 고려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살아서 도착하고 싶다면 말이다. 

12세기초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영토는 동해에 닿아있으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험준하고 평지가 적다. 그 때문에 농사를 산간에서 많이 짓는데,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힘써 갈고 일군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라고 했다. 평지가 적다는 말은 물론 구릉성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에 대한 표현할 수 있지만, 넓은 들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 언급이라 보는 편이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 (1375년),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속한 거평부곡의 소재동에서 2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오늘날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 인근에 위치한 곳이다. 당시 소재동은 5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중략. 정도전이 유배되었던 거평부곡의 소재동은 나주 일원에서 볼 때 매우 외진 산골에 해당한다. 바로 이러한 곳이 고려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심지였다.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정도전 역시 우리나라의 땅을 산과 바다사이에 있어 경작할 수 없는 구릉, 수택과 같은 땅이 80~90%에 이른다고 했다. 
소재동의 정도전 초가에서

고려말 조선초의 하삼도는 이런 모습이었다. 고려 말의 진황지가 복구되고 새로운 땅이 본격적으로 개간되는 태종초에는 전결 수가 120만 결정도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4세기말 고려사기 최대경작지는 약 100만 헥타르로 추산할 수 있고, 이러한 땅은 주로 산골짜기 사이의 땅과 커다란 산자락 아래 펼쳐진 아담한 들판으로 볼 수 있다. '문전옥답'(집 가까이에 있는 기름진 논)이라는 오랜 관용구처럼 고려의 마을은 산자락 끝에 놓여 있었고, 자그마한 저수지나 마을 앞의 샘물은 논농사의 근원이었다. 골짜기 밖의 무너미 땅에 펼쳐진 넓은 들과 드넓은 평원은 아직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세계였다. 
=======

사실, 이 글을 소개하는 가장 큰 목적은 '많이 쓰도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오래된 중앙집권적 정치체계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마치 조선중기정도가 되면 (혹은 멀리나가 고려시대, 혹은 통일신라대까지도) 한반도 땅의 곳곳이 개발이 끝나고 논밭이 들판에 있었으며, 깊은 숲을 제외하면 야생은 줄어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즉 일본이나 유럽처럼 지방분권이 강하며 소국들이 곳곳에 포진, 성벽으로 대표되는 정치적으로 Isoloated된 도시들이 주가 된 국가들의 땅모습과는 뭔가 다른 모습을 머리에 그리는 분들이 많을 듯 합니다. 
신윤복(申潤福, 1758~ 1814년?)등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작품들의 이런 한갓진 화전놀이는 위의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식에는 그간 우리의 '영화나 드라마'등의 고려, 조선시대묘사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 들판과 논밭 모습, 그리고 야생의 세계는 거의 그리지 않는 그간의 제한된 주제 (특히 정치사에 집중)로 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반증이 2년전 소개된 영화 [대호]같은 조선반도의 야생을 그린 드라마가 꽤나 낯선 경험으로 혹은 신선한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지만 삼국-고려시대까지는 위의 그림에 보이는 것같은 현재 멸종된 '대록'(사슴/순록의 일종)까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위에 삽화로 소개한 웹툰 [호랑이형님]처럼 적극적으로 이 시기의 '진짜 한반도의 야생'을 배경으로 쓰거나, 혹은 더 나아가 아예 [원령공주]처럼 도교와 불교가 어우러졌던 삼국-고려시대의 16세기이후의 우리 전통문화의 내음과는 사뭇 다른 신비한 세계를 보여주는 소재로 이 환경이 쓰이길 기대합니다. 그 큰 한 발자국은 바로 이런 훌륭한 연구에서 비롯되리라 사료됩니다.

후속편에서는 이러한 야생의 산림과 땅, 그리고 수종의 변화, 그리고 17세기 이후 화전과 천방으로 바뀌는 이야기도 소개해 보겠습니다.


시나위- 아틀란티스의 꿈 (HM SINAWE, 1986) 음악

오랜만에 들어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이 86~88년의 한국헤비메탈계의 업적은 대단하다. 저 암울한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나위- 아틀란티스의 꿈 (1986년)


아틀란티스의 꿈 (신대철 임재범 작곡)

잊혀진 과거를 지나 
사라진 태양있었네 
이곳이 태어나기 전 
문명의 대륙있었네
 
지금은 모두 찾지못할 
전설의 시간들 
신비의 꿈만 감춰있는 
환상의 순간들 

수많은 사람이 모여 
덧없이 살아숨쉬며 
지금과 다르지 않은 
세상이 되어있었네 

지금은 모두 찾지못할 
전설의 시간들 
비의 꿈만 감춰있는 
환상의 순간들 

예지하는 힘이 
살아있는 아틸란티스 
꿈을꾸며 사는 
사랑있는 아틸란티스 

간주

우리는 알진못해도 
그들의 모든 운명은 
하늘의 노여움으로 
모두가 사라져갔네 

지금은 모두 찾지못할 
전설의 시간들 
신비의 꿈만 감춰있는 
환상의 순간들 

예지하는 힘이 
살아있는 아틸란티스 
꿈을꾸며사는 
사랑있는 아틸란티스
 
아! 그러나 사라져 버렸네 
아! 영원히 잊혀져 버렸네 
아! 영원히 잊혀져 버렸네


비바소울 (Viva Soul)- Delight Funk & Green Hill Ground (Youth on the road, 2005) 음악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깝고 아까운 비바소울의 데뷔앨범 [Youth on the road].
언젠가 재평가 받아야 할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 두 곡, 다른 곡들도 그렇지만 한국형 그루브의 한 정점을 찍은 곡들이라 지금도 생각.

비바소울 (Viva Soul)- Delight funk (2005년)


비바소울 (Viva Soul)- Green hill ground (2005년)



-JOOD- 
저 멀리 보이는 하늘에 별빛같이 
나의 꿈도 역시 영롱하게 빛났고 
하지만 나와 빛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 
그저 쳐다 볼 수밖에 없었고 

딴따라 인생 너무나 힘이 들어 
빛을 보기까지의 어둠은 너무 길어 

oh,oh(oh-oh) 매일 술만 퍼마시던날의 기억 
매일 같이 반복된 slump 

그렇게 살아왔던 나의 pain ground에 
어느덧 멀리있던 빛은 나의 가슴에 
다시는 술병속에 나를 가두지 않을께 
그 맹세와 함께 할 green hill ground에 

다시금 울렁이는 처음자세 그 뜻으로 
앞으로 만들어갈 우리만의 그곳으로 

변치않는 믿음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길을 열어 
enter the new world 

-SAMUEL- 
쓰러져 가는 낡은 드럼 지하생활 4년 동안 손가락 깊이 새긴 상처 
온전치 못한 피묻은 낡은 드럼 스틱 
돌아돌아돌고돌아 여기까지 왔어 

후횐 절대 없어 내가 택한 나의 길 
시원한 소주 한모금에 시작하는거야 

supanicesliding 어렵게 찾은 이 길 
만만치 않단걸 알지만 부딪혀 보는 거야 

후회없이 나가리라 흘러가리 우리만의 고지를 위해 open mind 
세상 누구와도 싸우고 싶진 않아 결국 세월속에 파묻혀서 흘러갈뿐 

언제까지란 기약은 우리 한적없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나이우정 갈때까지 가리 

가고싶은 우리 music ground 
마지막 미소가 함박 웃음이 될때까지 


-UNCLE BOMB- 
바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 
끊임없이 넘쳐나는 신비 energy, music 

나 자신의 선택, 걸어왔던길 결코 never never 후회하지 않지 
삼만오천시간동안 많은것을 느껴 

하나하나 형성 되는 자신만의 영역 
끝이나지않는 자신과의 싸움, 점점점 더 짙어지는 목표 

tha future is now. 모든것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 
새롭게 펼쳐지는 나의 music life 
도원결의 만큼이나 끈끈한 우정으로 맺어진 우리 삼형제 

모두 하나되어 함께 열어 가. 경이롭고 신비로운 아름다운 새 시대
편견 따윈 모두 털어내 어떠한 것에도 치우치지 않게 

* Uncle bomb. Here I 
여기 C-samuel. Here I 
여기 Jwan Jood. Here I 
우리 앞에 펼쳐진 Green hill ground


고려와 조선의 당대 도성성벽기록- 11세기 개성나성(羅城)의 8미터이상, 그리고 17세기초 한양도성의 12미터급 성벽높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나성(羅城)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란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성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어린 시절 항상 궁금했는데, 이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한자 표기(음차)라고 하지요 (대체 왜 음차가 이렇게 되는지...). 

우선 필자가 좋아하는 불독맨션의 리메이크 버젼부터...


그런데 역사를 배우면서 저 노래가 개경을 감싸던 '나성'이라는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관계없이 LA란 걸 알게 된 건 그 후로 로망이 깨지던 경험...).

원래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나성'은 바로 이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을 감싸고 있던 외성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한양성같은 존재지요). 그런데 남북으로 갈리고나선 개경을 갈 수 없으니, 자연스레 우리에게 잊혀지는 이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무너졌을지언정 사진들은 있을텐데 이에 대한 공개도 전혀 없어서, 인식적으로도 완전히 잊혀진 성이 되고 있지요. 

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개성나성(開城羅城)에 대한 정의를 한번 볼까요.
=====

개성나성은 송악산 마루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 형식의 도성이다. 도시 전체를 둘러쌓았으며 길이는 16㎞이다. 지형상 특성과 조건에 따라 돌이나 흙, 혹은 둘을 혼합하여 성벽을 쌓았다. 918년에 건국한 고려는 도읍을 개성으로 정하였고 기존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919년 그 안에 궁성이 건설되면서 발어참성은 대부분 황성으로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왕 때 3차에 걸치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방어상의 필요로 개성나성이 건설되었다.

강감찬의 제의로 이가도가 책임지고 1009년부터 1029년까지 21년 동안 도시 전체를 둘러쌓는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무려 30만 4,00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인 1391년부터 조선 초기인 1393년 사이에는 발어참성에 이어 성 안에 8.5㎞의 내성(반월성)이 축성되면서 개성성이 둘레 약 23㎞에 달하는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돌로 쌓은 성벽은 현재 밑면의 너비가 6m, 높이는 3∼4m정도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는 기본적으로 돌로 성심을 채웠으며 밑 부분의 일정한 높이까지는 계단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석비레와 붉은 진흙을 번갈아 다져올렸다. 현재 밑면의 너비는 7∼8m이다. 성벽의 높이는 3∼4m이나 그 이상의 높이로 남아있는 곳도 적지 않다. 개성나성에는 25개의 성문이 있었다. 동대문(숭인문), 오정문(선의문), 비전문(회빈문), 북성문 등 4개의 성문은 각각 동, 서, 남, 북의 큰 성문이었고 그 밖에 중간 성문 8개와 작은 성문 13개가 있었다. 큰 성문들과 기타 중요한 성문 14개소에는 옹성을 쌓아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

전체길이가 16킬로. 한양도성이 18.6킬로미터이니 약간 더 짧은 정도지만 굉장한 길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원래 나성의 높이에 대한 설명은 소개에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이렇게 무너진 고려대에 쌓은 개성의 외성인 나성은 어떤 규모였을까요?
현재의 나성 (구간별 3~4 미터 높이)

[임하필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고려성(高麗城)

고려의 도성(都城)이다. 현종(顯宗) 때 경도(京都)에 성을 쌓기를 요청하여 정부(丁夫) 30만 4400명을 동원하였다. 왕가도(王可道)가 사람들을 시켜 일산을 가지고 빙 둘러서게 하고, 높은 데 올라가서 그들을 나아가고 물러가게 하여 그 넓고 좁음을 고르게 해서 성의 기반을 정하였다. 

21년 만에 공사를 마치니, 둘레가 2만 9700보(步)에 높이가 27척, 두께가 12척이었다. 즉위 초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기사년(1029, 현종20)에야 비로소 완성하였다. 공민왕 7년(1358)에 경성(京城)을 수축하는 문제로 기구 대신(耆舊大臣)에게 자문을 구하니, 퇴임한 이제현(李齊賢)이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는 이리저리 정벌하고 토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셨으니, 만신창이가 된 백성을 가지고 토목 공사를 일으킴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성에 성을 쌓지 않았으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란이 수도를 유린하고 궁실을 불태울 적에 만약 성곽의 견고함이 있었다면 필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곽을 마땅히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개경의 나성은 높이가 27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조척으로 약 8.1미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1800년대, 즉 조선후기의 문헌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외에도  고려당대의 기록이 [고려사절요] (1452년)에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20년(1029년),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可道初定城基,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29년 완공되는 이 나성은 흥미롭게도 둘레의 길이는 꽤나 차이가 나는데 비해 높이는 정확히 역시 27척이라는 기록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둘레기록은 아마도 외성 내성의 차이가 아닐까 일단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2000년대초반 북한에 가서 다큐멘터리로 찍은 나지막하게 남아있는 개성 나성의 영상기록입니다. 
2000년대초반 나성의 사진

이 잔해수준의 나성이 원래 얼마나 높았느냐는 다음의 삼국시대 성벽으로 간접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신라의 삼년산성의 남은 구간인데, 아래 보이는 여성의 키를 대강 160센티미터로 잡았을때 높게 보아 4배, 약 6미터 40센티정도로 잡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삼년산성

그럼 개성 나성의 높이는 이보다도 약 1미터 70센티나 더 올라가는 겁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외성은 방어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입니다.
=====

[고려사절요]외에 나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1614년(광해군 6년)에 이수광(李睟光, 1563~ 1628년)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국역은 안되어 있습니다). 

지봉유설

宮室部 궁실부
勝覽言開城府羅城土築 개성부 나성을 흙으로 쌓으니 경치가 뛰어나다.
周二萬九千七百步 둘레가 29,700보이며
羅閣一萬三千間 건물(각)이 13,000칸 늘어서 있고 
중략.

아쉽게도 높이는 없지만 고려사절요의 2만 9700보(步)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직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조선중기이전의 한양도성의 '높이'기록이 나옵니다. 다음의 기록.

今漢陽城石築 오늘날 한양성은 석재로 쌓았는데
周九千九百七十五步。둘레가 9,975보이며 
高四十尺二寸。높이가 40척 2촌이다.

여기 보면 1600년대초반의 한양도성이 40척 2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려 12.18미터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꽤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것이 [가장 웅장한 부분이 유실된 한양성- 1884년 사진]에 나오는 1884년의 사진중 숭례문근처의 높은 한양성구간은 11미터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양반의 키를 150센티로 잡으면 150*7= 10.5미터, 160센티로 잡으면 160*7= 11.2미터). 

따라서 17세기초반에 이미 이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귀한 기록입니다.
1884년 한양도성 구간 높이

=======

이상 15세기기록의 개성의 나성과 17세기초 한양도성의 높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당대의 수도 성벽을 다룰 때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웅장한 연출을 해주시면 좋겠군요 (아래는 2011년 출간된 [고려전쟁 생중계]라는 저서에 묘사된 고려- 몽골전쟁의 삽화입니다만, 기록상으로 볼때 이 정도의 장면이 충분히 나올 듯 합니다. 블로그이웃이신 解明님의 제보로 이는 충주산성전투를 그린 것임을 알았습니다).
1253년 고려-몽골전 충주산성 전투

사족이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어찌 보면 더 흥미로울 수 있는)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대한국 건축학계에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부분.

고려사절요 나성설명부분 중: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지봉유설 나성설명부분 중:
周二萬九千七百步 둘레가 29,700보이며 
羅閣一萬三千間 건물(각)이 13,000칸 늘어서 있다.

이 두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성벽위의 어떤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낭옥廊屋', 지봉유설에서는 '각'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廊屋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이런 이미지가 주욱 뜹니다. 廊屋은 행랑 랑에 집 옥, 즉 연결된 긴 형태의 집을 말합니다.  이런 건물이 약 5천~13000칸의 어마어마한 규모로 늘어서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흥미롭게도 [지봉유설]에서 함께 소개한 한양도성부분에는 이런 설명이 없습니다. 오직 나성부분에만 나옵니다. 시대가 다른 두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꽤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기록입니다. 어쩌면 11세기 당대의 고려 외성인 개경 나성은 8미터 이상의 높이에 저러한 행랑수비시설이 좌악 늘어선 장관을 연출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흥미로운 기록들인데 반해 아직 관심이 부족한지라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