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미국 유아채널 전통문화 프로그램 역사전통마

한국의 국가 브랜드 마켓팅은 정확히 어떤 식으로 기획되고 있는지 단편적인 지식들로만 파악이 가능합니다만, 해외에서 보는 시각으로는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전통 마켓팅'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화유산,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 홍보화 전략이 이웃국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삼성-현대-엘지로 대변되는 기업 이미지와 (그나마 한국이라는 국가와 이미지가 연결안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국전쟁, 그리고 북한이라는 커다란 이미지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물론 미국의 경우에 한해.

조금 안다는 분은 '인터넷 최고속국가' 정도의 이미지가 덧붙여질 지 모르겠습니다. 게임하는 젊은 세대들은 '스타크래프트 강국'정도의 이미지도 있더군요. 하지만, 국가 브랜드 (경제와 문화경쟁력- 특히 관광이미지 그리고 문화계 (영화, 드라마등)와 연계되는) 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별 영향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최근 SBS에서 방영된 "한국의 전통, 新한류의 길을 열다" 입니다. 이 다큐를 보면 중간중간에 일본과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미국내의 홍보전략이 (리틀 도쿄, 차이나 타운의 모습은 무채색의 뉴욕한인거리와 잘 대비됩니다), 어떤 식으로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지 잘 지적합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가장 강력한 요소중 하나인 '전통 건축물'에 대한 (즉 하드웨어적인) 부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전통건축물과 강렬한 인상없이 이미지창출은 힘듭니다, 프로그램의 길이상 이해되는 부분이었습니다만.

예전에 올린 관련 포스팅입니다-클릭 (포스팅 말미에 다큐 프로그램 동영상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한번 보시길)

요는 미국내의 서적들, TV 프로그램들, 그리고 영화내에서의 이미지등 국가 이미지를 결정할때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Kpop등의 대중문화가 아닌 '전통문화'와 그 다양한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에 의해 결정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비단 관광뿐 아닌, 영화-드라마속의 응용와 결합해 온갖 부가 문화물을 창출, 다시 그 국가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선순환의 시스템을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해 한국문화가 헐리웃에서 쓰인적은 전무합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 다루는 부분은 미국의 아이들채널에 등장하는 중국문화와 일본문화의 홍보 (혹은 교육)입니다. 우선 중국것으로 국내에 방영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미국 아이들 채널의 대표격중 하나인 닉 주니어 채널 (Nick Jr)에 고정프로그램인 중국관련 인기프로, '니하오 카이렌'입니다. 카이렌은 인형등이 대중서점에서 팔리고 DVD로 나올정도로 인기리에 상영중인 프로입니다. 중국어, 중국문화, 사고방식등을 카이렌이라는 중국여자아이와 동물들을 통해 배우는 인기프로그램입니다.

대나무 숲에서 노는 카이렌- 아래 일본프로에도 나오듯 대나무는 '중국과 일본의 것'이라는 이미지가 굳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대나무는 동아시아, 즉 한국문화가 아닐까요? 그런 이미지는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타이틀 영상중.
카이렌에는 서유기등 온갖 중국문화가 등장합니다. 주인공들은 "Going to China" 노래를 부르며 중국여행을 가곤 합니다.
예예(중국어- 할아버지)로 불리는 할아버지가 손오공을 소개해주는 장면.
두번째는 고정프로는 아니지만, 닉 주니어의 중간중간에 각국 (인도, 동남아, 일본등)의 미국내 엄마들이나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자기전에 들려주는 식으로 짧은 자국의 전통 동화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중, 일본 전통동화입니다. 기모노를 입은 부인과 남편, 그리고 참새등이 등장하는 설화입니다.

젓가락과 기모노
벛꽃과 대나무, 일본 삿갓과 도롱이차림의 할아버지.
또다른 일본 설화이야기- 벛꽃놀이, 일본 벤또와 김밥이 나오는 장면.
일본의 다도문화 소개.
www.hertiage.nickjr.com 소개 (이 프로그램 말미)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중요한 것은, 미국의 아이들이 어릴때 부터 동아시아의 전통 문화/ 국가의 틀을 중국과 일본으로 고정시켜 평생 각인되는 점 때문입니다 (중국권, 일본권 문명권만 있을뿐 한국권은 없죠). 어릴때 부터 스스럼없이 자연스레 이러한 국가들의 전통문화를 접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갖는 해당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와, 아무런 서적이나 TV 프로, 영화에서 접하지 못하는 이름뿐인 국가에 대한 이미지는 어떨런지 굳이 논문을 쓰지 않아도 알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의 이미지부재의 진정한 문제는 북한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우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중국에서 아리랑을 소수민족의 문화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다고 엄포를 놓아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관련 정부기관과 해당자들. 그리고 스스로 한복입기를 부끄러워하는 분위기, 그리고 닉 주니어의 일본 엄마들 처럼, 그 숫자가 적어도 자신의 문화를 기꺼이 알리고 싶어하는 주체적 태도가 결여된 수많은 (일본인의 10배규모의) 한인들.

언제 소개하겠지만, 이미 현대화된 국가들 (소위 선진국들)에게 현대화는 국가이미지에 유의미한 역할을 거의 못준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개발도상국에게는 중요한 요인입니다만. 세계화 요인 (그중 전통문화도 큰 파이임)만이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수천년의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일부 국가는 가지고 싶어도 못가진 큰 자산입니다. 스스로, 이웃국가들처럼 이런 부분을 잘 보존하고 개발, 혹은 복원해서 우리와 살아숨쉬는 문화적 재산으로 만드는 것은 외국인들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제부터라도 나서서 해야할 일이지요.

이러한 모든 우리 스스로의 태도가 위에 소개된 SBS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외국인의 한마디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이요?....음 잘 모르겠는데...아 그게 문제예요 바로. 아무런 이미지가 안 떠오른다는 것".
일본의 도고온천 전통거리

매우 인상깊은 관련 글-국제선 비행기 안에서 발견한 "초라한 관광 한국"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블로거의 글입니다- 쉬우면서도 와닿게 잘 쓴 글이니 한번 꼭들 보시길.
발췌- "
주목해서 보셔야 할 점은, 우리의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실체 4위, 이미지 9위로 상당히 선전했는데, 이는 삼성/LG와 같은 첨단 제조산업의 활약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전통문화는 실체 33위, 이미지 32위로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이는 다시말해 실질적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 상품이 경쟁력이 없고, 외국인들의 눈에도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야기하는 문제점들을 몇가지 살펴볼까요?"


최용준- 목요일은 비 (1989) 음악

한때 이곡과 더불어 요일로 좋아하는 곡이 있었다.
목요일은 비,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식으로.

최용준은 '아마도 그건' 과 '거울이 되어'라는 대형 히트곡을 낸 바 있지만, 소속사와의 불화로 묻혀버린 아쉬운 뮤지션. 90년대초에 꽤 인기가 있었다. 갈채라는 인기드라마 주인공을 맡을 정도였지만, 앞서말한 이유로 한번에 사라져버린 가수 (최용준의 92년 앨범에 코러스를 김건모가 맡기도).
(90년대 인기있던 외모에, 허스키하면서 뭔가 불안정함과 동시에 호소력짙은 보이스컬러가 와닿던 최용준)

위의 두곡 보다도 좋아했던 곡이 바로 1집의 '목요일은 비'라는 곡으로, 전주부터 끝까지, 비올때 들으면 그냥 완전히 젖어들곤 했다. 이곡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유투브에 올려준 것으로 감사.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그래서 이렇게 눈물 흘렸니

다시 돌아 처음 그 자리야
여지껏 맴돌고만 있던거야


뽀얀 입김이 하얗게 낀 창가에 너의 이름을 새겨보았어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만 남아 날 맴돌아
바보 같은 나의
마음도 똑같이 따라 맴돌아

텅 빈 가슴에 너의 모습
지워지지 않아
깊은 밤을 잠 못 이뤘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
지친 어깨 위에 빗물만 고여

바라볼 수록 너는 멀어져만 가고
방황하는 내 모습 느껴질 뿐야
그리움만 쌓여 가나봐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그래서 이렇게 눈물 흘렸니

사람 많고 많은 그 속에 나 하나
비는 그만 내려줄수 없나봐

바라볼 수록 너는 멀어져만 가고
방황하는 내 모습 느껴질 뿐야
그리움만 쌓여 가나봐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그래서 이렇게....

칸트의 오성 단상 (정보인지처리와 관련) 독서

칸트의 오성

오성이란 것은 데카르트 처럼 객관(실체)를 의식내부(주관)에 위치시키는 것도 아니고 (라이프니치나 합리론자도 마찬가지), 경험론자들처럼 외부의 존재인 물질적 실체를 객관으로 인정한 것도 아니다. 즉, 칸트의 해법은 "주관의 내부에 객관을 인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부대상의 본질은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지었다(물자체)" (남경태, 2009).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절충정도의 해법이었다.

여기서 얼마전 본 다큐의 정보 인지처리능력을 생각해본다. 즉 1백만 1천개의 정보를 오감을 통해 1초에 받아들이는 인간의 뇌에서 40개의 정보만을 걸러 기억한다는 그 부분.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도올에 의하면 빵틀) '오성'시스템이 혹은 그 하나가 아닐까.

(남경태에 따르면) 후설은 애초부터 객관과 주관의 경계는 '실체'로 파악해선 안되고, '관계'(대상에 대한 인식의 '지향성')으로 파악한다고 하지만.


1995. 96. 97년 가요 톱10 1위곡 모음 음악

건축학 개론의 시대- 1995-97년 당시의 가요중 1위곡 모음 (참고로 영화의 주제가격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일년전인 94년 발표). 당시 가요계를 잘 보여주는 곡들로 모아져 있는데, 역시 다양한 장르가 눈에 띈다.

1995년- 별로 안좋아했던 룰라의 강세, 노이즈의 끝물,  REF의 인기, 서태지의 전성기, 이소라의 데뷔. 그러나 역시 95년은 김건모 3집의 해.


1996년 1위곡들-  김건모,
김정민, 패닉, 특히 DJ 덕의 초강세.


1997년 1위곡들- HOT가 등장한 해로 어찌보면 K-pop이라 불리는 시대의 시작해 (S.E.S 등장과 함께). 언타이틀, 쿨, 터보의 인기.


언급한 김에. 전람회- 기억의 습작 (1994)

당시에는 이 가사가 이해가 안되었었는데, 이젠 와닿는다. 세월이...



한국의 사라진 선박 (3)- 거북선 (龜船) (2편)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2편에서는 언급했듯 좀더 다채로운 거북선의 모습(그림들)과 최근의 논쟁을 다룹니다. 그림은 번호를 매겨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편에서 언급한대로 거북선이 수백년동안 여러 급과 타입이 있었음을 살펴본바 있습니다.


<1> 우선 가장 처음 그림은 2005년 이후 가장 화제가 되었던 16-18세기경 그림으로 추정되었던 미국교포가 발견한 거북선들 그림입니다. 이 채색화는 그 상세함과 화려함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고 있지요. 이 거북선그림의 진위여부는 아직 검증중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자료가 부족한 우리상황에서 분명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 거북선도는 특히 서체가 바래 육안 해독은 불가능하지만 왼쪽 하단에 일본으로 반출된 후 일본사학자가 ‘해동편(역)사’에서 발췌해 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 제원이 기록돼 있어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판독이 이뤄질 경우 거북선의 완전 복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가지게 한바 있습니다 (주: 항상 그렇듯 후속소식이 없네요).
05년 기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으며, 16일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재미 한국고미술연구가인 최영래씨는 "최근 조지아대학에 의뢰해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가 최고 1640년대로 추정됐다“며 “임진왜란(1592∼1595) 후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보인다" 라고 했습니다 (05년 당시뉴스링크). 그리고 채색부분은 그림을 그릴때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등 일부에 남아있고, 나머지는 일본에 건너간뒤 덧칠한듯 보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논쟁의 몇가지 부분을 정리하면-1)
누가 그렸나- 일부에서는 조선 궁중에서 화원을 파견해 그리게 했다는 설이 있고 반대로 일본인 종군화가가 그렸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2) 언제 그렸나- 조지아대학 검사이외에도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동양미술 전문가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이 고서화는 일본의 종군화가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16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었다는 측의 주장 대 의복이 18세기모습이다라는 주장이 맞붙었습니다. (주: 2010년까지도 이정도 자료밖에 안나오니, 혹시 후속소식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학계에서 제대로 검증을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거북선도가 16세기이건 18세기이건 19세기이건  무언가 사진이나 고화를 보고 그렸거나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그렸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거북선자체의 모습들입니다.예를 들어 <3>번과 <5>번 거북선도를 보면 국내에서 발견된 거북선도중 특이한 경우로 등쪽 중앙부의 장루가 묘사되 있습니다. 이 장루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같이 등쪽 부분이 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꼬리쪽을 보면,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그림에는 거북선이 총 4대 나타나는데 부분으로 잘린 오른쪽걸 제외하면 위의 한대가 좌수영 모델, 그리고 중간의 노란 모델이 통제영 모델과 거의 일치함을 잘 볼수 있습니다 (<2>번과 비교).
특이한것은 가장 아랫쪽 타입으로 통제영과 좌수영을 합한 모델입니다. 즉 상판은 통제영의 장판형을 유지하면서, 용머리와 총포혈부분은 좌수영의 그것을 닮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좌수영 모델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목부분의 감싸개는 톧제영과 일치). 그리고 또하나 결정적인 부분이 이 모델의 아랫부분에 위치한 충돌용 돌기(도깨비)입니다. 아래 확대그림을 보면 잘 보이는데, <2>번의 좌수영모델 아래쪽의 도깨비부분과 흡사합니다. 통제영모델은 정확하게 돌기가 없습니다. 이런 근거들로 이 그림이 전혀 근거없는 위작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아랫쪽 거북선 확대도

아래 그림은 2004년 국내에 알려지게 된 조선전역해전도로, 거북선의 모습은 없지만 판옥선과 조선수군의 모습이 너무나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위의 그림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듯 합니다.  칠천량해전을 그렸다는 이 그림 역시 연대가 과연 언제인가가 논란이었는데,  2008년 김세량기자가 직접 일본 화랑에 찾아가서 확인한 바로는 이 그림이 오오타 텐요오라는 이미 타계한 역사화가의 1940년경 그림으로 파악된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텐요오 자신도 뛰어난 역사전문가였고, 구한말 한국에서 사라진 일본에만 존재하는 수많은 조선군 관련 문헌사료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2차대전중 일본해군성의 위탁을 받고 이 그림이 상상화이긴 하지만, 사실에 근거했다는 정황이 많이 포착됩니다. 특히 조선에는 전선이 일부 방치되어 남아있었는데 (즉 직접 볼수 있었다는 것), 이를 최초로 학술적으로 연구한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그 자료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을뿐만 아니라 아직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은 자료가 많다는 주장은 이 그림의 무게를 더 실어줍니다 (관련 글 링크).
이 조선전역도에 관한 가장 상세한 설명은 위에 언급한 링크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이 진품이라면 정말 귀한 것은 당시 조선 수군의 군복, 무기류, 군함이 이토록 자세히 묘사된 그림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채색화로써 조선수군의 갑옷이 '오방색'에 근거하고 있음을 거의 유일하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설명한대로 20세기의 그림일지라도 텐요오의 전문지식수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그런것인지 학계에서 (기자가 아닌) 좀더 철저한 고증을 하면 합니다.
전통
오방색갑옷의 조선수군
개인적으로는 재미교포가 발견한 거북선그림은 당대의 그림이거나, 18세기모델에 대한 사료나 사진을 근거로 그린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포스팅1편에서 소개한바대로 18세기 영조때 실록의 거북선 '대형화'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부분입니다. 1751년 박문수가 "총포혈이 이순신당시 6개에서 8개로 늘어나는등 대형화가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이 그림의 총포혈이 8개로 보입니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도 대형선들이죠. 2층설과 3층설중 3층타입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필자는 2층, 3층 모두 존재했다고 봄)- 관련 글 (2층대 3층)
*이외에도 포스팅아래 검색관련글에 번동아제님의 상세한 2-3층 설 포스팅이 있습니다.

<2> 거북선 그림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입니다. 바로 통제영과 좌수영 모델입니다. 이 그림들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직접 운영하던 당시의 타입들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흔히 교과서에선 좌수영모델을 싣습니다. 그러나 여러 근거로 충무공이 직접 만든 모델은 왼쪽의 통제영모델이라는 설이 강력합니다. 위의 일본그림과 비교하면 좋습니다.
<3> 다음 그림은 이충무공 종가에 전해저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입니다. 이런 유형의 거북선은 해군사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도수군조련전진도등에도 나타나고,1741~1800년경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진왜란 이후 17세기경 여러가지 개량이 가해 진 타입의 거북선일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관련링크).
이 타입의 거북선은 아래와 같이 용머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포가 나오거나 다른 용도로 쓰일수 있음을 추정케 합니다. 용머리가 없는 모습인데 ,다른 부분은 위모델과 완전히 같습니다. 90년대 역사스페셜(프로그램)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바 있지요. 몇몇 기록을 볼때 거북선의 머리는 쇠뇌와 같은 장치로 들락 거릴 수 있어서, 용머리로 포를 쏠때는 배밖으로 내밀고, 근거리의 적과 충돌을 감행 할때에는 머리를 보호 하기 위해서 선체 내부로 집어 넣었다는 것이 당시 내용이었습니다.
<4> 충렬사에 보관중인 거북선도들입니다. 통제영 모델과 좌수영 모델이 채색화로 잘 묘사되 있는데, 언제 그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역시 조선전역해전도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5>
이 그림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병풍그림중 발포진 거북선입니다. 가장 많은 숫자가 등장하면서, 가장 소형이자 코믹한 모습입니다.
"
바리때(승려의 밥사발)" 발 자를 쓴 모습이 귀엽습니다. 이 타입은 위에 등장하는 통제영, 좌수영 모델과 또다름을 알수 있습니다. 특히 목을 죽 뺀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용머리에서 불이나 연기를 뿜었다는 결정적인 그림이죠.
그림의 판옥선과 비교하면 이 타입이 얼마나 소형인지 알수 있습니다. 판옥선과 비교해도 승선인원이 부족하지 않다는 1606년의 선조때 기록과 비교하면 거북선의 급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실록기록- 거북선 1편)
<6> 이 작품은 보관만 해두고 언제 작품인지 기록을 잊었습니다. 아시는 분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역시 함대규모의 거북선이 출동하는 모습으로 5대에 2대정도는 거북선이 배치될 정도로 대량생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명량 해전도의 일부입니다. 개인적으로 거북선으로 보이는 선박이 몇척 있는 듯 한데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7> 마지막 두개는 완전히 재미로. 첫번째는 유명한 '믿거나 말거나'에 1942년 9월자 등장한 좌수영모델. 세계최초 철갑선이란 타이틀.
마지막은 개인적으로 발견했던 중국의 한 사이트에 올라왔던 '한국유물'중 한점입니다. 올린 중국블로거자신도 혹시 한국의 거북선의 모형이 아닐까 써놨을 정도로 재밌는 오래된 옥조각입니다. 어쩌면 그냥 거북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이 옥조각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한국유물이라고 하네요 (고려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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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전편에서 빼먹은 실록의 기록을 더 소개합니다. 귀선 (즉 거북선)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1편에서는 발견치 못했던 부분들입니다.


선조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7일(기해) 1번째기사
경연을 열다. 유성룡·이덕형 등과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유성룡
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이제 남방으로 내려가려 하니, 아무쪼록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한산도(閑山島)·장문포(長門浦)를 충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거제(巨濟)를 지키지 못하면, 다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주: 당시 모델에 양쪽에도 쇠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
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습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과 사천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

선조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1일(임오) 1번째기사경사로 돌아가려 하는 원외 유황상에게 사신을 보내 문안하다
원외(員外)
유황상(劉黃裳)이 장차 경사(京師)로 돌아가려 하니, 상이 사신을 보내 문안하였다. 유황상이 회첩(回帖)하기를, "중략.그리고 곡식을 재촉해 거두어 부산으로 실어보내는 한편, 아울러 크고 작은 귀선(거북선) 과 수병(水兵)·화기(火器)를 정돈하여 제도(諸道)에 배치한 뒤 왜적의 침범에 대비하소서 (주: 매우 흥미로운 부분으로 실록에서 가장 확실하게 '소형' '대형'급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패망할 날이 곧 닥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때문에 본부에서 왕을 위해 기뻐하지 않고 왕을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작별하고 가오니 왕은 잘 처리하십시오.” 중략.

광해 135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2월 17일(임신) 1번째기사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강가의
희우정(喜雨亭)·현량(玄梁)·서강(西江)·마포(麻浦)·용산(龍山)·서빙고(西氷庫)·한강(漢江)·두모포(豆毛浦) 등 7, 8촌의 어민과 상인(商人) 중 자원하는 자에게 배 한 척씩을 맡기고, 그 나머지 용주(龍舟) 및 대맹선(大艋船)과, 귀선(거북선) 몇 척도 주사청으로 하여금 풀을 덮어두고 늘 곁에서 살피게 하소서. (주: 풀을 덮어 위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인조 22권, 8년(1630 경오 / 명 숭정(崇禎) 3년) 4월 29일(무인) 5번째기사비국이 유흥치의 일로써 아뢰다
전후생략.

각 진포(鎭浦)의 전선과 병선의 원수(元數) 19척 내에서 수영(水營)의 상선(上船) 1척, 귀선(거북선) 1척·
가리포(加里浦)의 1척, 군산(群山)의 소모(召募)병선 1척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병선 15척을 서둘러 징발해야 하겠습니다.

숙종 40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12월 28일(갑오) 3번째기사이정청에서 오군문의 군제를 고치고 수군을 변통하는 절목을 올리다
수군의 제도는
《대전(大典)》을 상고하여 보니, 대맹선(大猛船) 1척에 수군 80명, 중맹선에는 60명, 소맹선에는 30명이라 하였는데, 대맹선은 지금의 전선(戰船)이요, 중맹선은 지금의 귀선(거북선)이고, 소맹선의 지금의 방패선(防牌船)이니, 병선(兵船)의 종류입니다 (주: 중맹선 즉 60명급이 들어가는 거북선- 중형입니다. 실록의 다른 시대에 125명급과, 방패선개조형이 등장하니 맹선으로 쳐도 대/중/소형급 거북선이 골고루 존재했음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선제(船制)가 차츰 커져서 큰 것은 좌우 노로(櫓櫨)사이가 혹은 24간에 이르고 노젖는 군사가 1백 20명이 필요하니, 고제(古制)의 80명의 노군(櫓軍)으로는 결코 운용할 수가 없고 귀선과 방패선의 노군 역시 그 수로 기준을 삼기가 어려운데, 토졸(土卒)로서 구차하게 수를 채워 실제로 허술하게 되었으니, 한번 변통하는 것은 사세상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중략.
각 선군(船軍)의 제정(制定)한 액수에는 전선(戰船) 1척에 선직(船直)·무상(舞上)·타공(舵工)·요수(繚手)·정수(碇手)·사수(射手)·화포장(火炮匠)·포수(砲手)·포도장(捕盜將)·노군(櫓軍)이 도합 1백 64인이요, 귀선(거북선)은 1백 48인이며 (주: 같은 기록에 대형급도 나타납니다), 정탐선(偵探船)은 79인이요, 병선(兵船)이 17인이며, 사후선(司候船)은 5인입니다. 각영과 진의 방군(防軍)에서 군포(軍布)를 마련한 수효에는
통영(統營) 8전선(戰船)의 원방군(元防軍)은 방군을 세우지 않고 사부(射夫)와 첨사부(添射夫)가 모두 7천 6백 36인으로 매인당 면포(綿布) 2필씩을 받는데 풍고(風高)와 풍화(風和)의 각 6개월에 대한 급대(給代)의 수량 및 각선(各船)의 육물가(陸物價)와 우후(虞候)에 속한 급대(給代)와 삭포(朔布)의 수량을 공제하면 여포(餘布)가 6천 5백필 남짓합니다. 좌수영·부산(釜山) 등의 진과 전라(全羅) 좌·우수영 및 방답(防踏) 등 진의 여포도 이에 준하여 다과(多寡)는 다르나 각기 정수(定數)가 있습니다. 각선의 육물가(陸物價)를 또한 마련하였고, 전선·병선·사후선·정탐선·귀선(거북선) 1척에 대해 1년에 드는 물건과 초둔(草芚) 진석(眞席) 같은 종류에까지도 모두 차등을 두어 값이 메겨져 있고, 심지어는 사후선(司候船)에 쓰는 표주박 2개의 값까지도 면포 3척 6촌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숙종 58권, 42년(1716 병신 / 청 강희(康熙) 55년) 8월 24일(신해) 4번째기사
호남과 호서의 전선 12척을 방패선으로 고쳐 만들게 하다
중략. 총합하여 논하면 제도의 전선이 남아 있는 것은 1백 21척이고 또 귀선(거북선) 5척이 있는데, 전선을 방패선으로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은 다만 호남(湖南)의 2척과 호서(湖西)의 4척과 경기(京畿)·해서(海西)의 각 3척뿐이므로 도합하여 12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 제도를 고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폐단을 줄이는 데에는 오히려 조금 보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조 7권,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3월 8일(임진) 1번째기사
전후생략.

삼가 아둔한 견해를 아래에 나열하여 진달합니다.1.
교동에 소속된 전선(戰船)이 2척, 귀선(龜船) (거북선)이 1척, 병선(兵船)이 4척, 방선(防船)이 1척 인데 각선(各船)에 모두 사후선(伺候船)이 있으므로 도합 16척입니다. 통어영을 이제 심도(沁都)로 귀속시키면 전선과 병선도 사리상 3분의 1은 심도로 옮겨 배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19세기말 고종때의 기록 두가지. 구한말까지 존재했슴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기록입니다.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2월 28일(계축) 1번째기사의정부에서 배를 수리한 감독관 조종우를 시상하도록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공충 전 수사(公忠前水使) 임상준(任商準)의 보고를 보니, ‘본 영에서 전선(戰船)·귀선(거북선)·방선(防船)·병선(兵船) 등 배 6척을 모두 개조하였으며, 전선 2척은 배 위에서 가장물을 설치하여 조운선(漕運船) 모양으로 만들어 통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고종 23권, 23년(1886 병술 / 청 광서(光緖) 12년) 4월 20일(계미) 3번째기사 (1편에서 1866년 기록을 실록 마지막 기록이라고 했는데, 그것보다 더 후대 기록입니다. 실록의 진짜 마지막 기록이 이 1886년 기록입니다. 실록이라고 하니 오래전 처럼 느껴지지만 고작 126년전 기록입니다. 이때까지도 많이 존재하던 이 선박들이 근대화의 혼란상에 모두 소멸된것은 참으로 씁슬하기만 합니다. 한척이라도 어딘가에 존재하길...).
나주(羅州)
두 귀선장(龜船將) (거북선 장군?)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니, 전선(戰船) 1척(隻),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아무 모양으로 배치하되 전선 1척에는 원래의 방수군(防水軍) 800명과 사부(射夫) 90명을 부근의 각읍(各邑)에 있는 군병 가운데에서 편리에 따라 떼 주어 급할 때 달려가서 모이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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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에 대한 마지막 목격 기록은
김병륜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씨의 아래링크글에서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거북선을 계속 보유했고, 그 같은 수군이 공식적으로 1895년에 해산된 점을 생각하면 이 같은 논쟁은 아쉬운 측면도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이 외국에서 제기될 때는 조선에 거북선이 남아 있거나 최소한 실제 거북선을 목격한 사람이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 해군 원정대가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하기 2년 전인 1883년 한국을 찾았다가 거북선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884년에는 미국의 포크 해군 대위가 경남 고성에서 거북선 잔해를 목격한 기록도 남아 있다. 유길준이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병선이라고 주장한 [서유견문]을 펴낸 해도 바로 1895년이었다.그럼에도 아무도 실제 조선 수군 근무 경험자를 만나 그들의 목격담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다. 거북선의 정확한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결정적 기회는 그렇게 아쉽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번 정리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거북선이 적어도 400년이상에 걸쳐 다양한 타입과 급이 존재했음이 사료 곳곳에서 명확히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북선에 대한 더 심도있는 연구, 특히 일본측과의 협력을 통해 국내에 없는 사료와 사진, 그림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북선의 철갑선 논쟁에 대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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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2005년 뉴욕에서 발견된 1번 거북선도의 크기와 소장자 윤원영씨 (크기가 2미터 이상인 대형화입니다).
재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북선을 보고 만들었다가 퀄러티가 떨어져서 실용화되지 못한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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