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라 킹- Old Flames Never Die (A decade of Jazz diva,1992) 음악

90년대 백인여성 보컬이면서도 흑인재즈 특히 50년대-60년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보컬색을 보여준 산드라 킹의 곡중 가장 멋진 곡.

사실 늦가을에 들으면 죽음이지만, 선선한 저녁이면 언제든 어울리는 곡...

Sandra King- Old Flames Never Die (1992년)



오리와 거위가 놀고 대나무집이 있는 고려 정원 (1202년, 태재기(泰齋記) 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우리는 고려시대의 정원모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실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을 겁니다. 필자의 흥미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이시기의 정원모습인데 문헌에 나오는 기록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한국전통정원 (즉 조선후기풍 정원)과는 많은 양식적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자꾸 발굴할 수록 우리 문화는 더욱 풍부해지겠지요. 다음은 [동국이상국집]의 태재기라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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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전집
태재기(泰齋記)

대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귀로는 시끄러운 소리가 싫어서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는 화려한 것이 싫어서 푸른 산빛을 보지 않는다면, 번거로운 마음이 때로 싹트는 것이다.

그러나 산수의 좋은 경치를 먼 곳에서 구하기는 쉬우나 가까운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중(城中)에서 구하여 얻지 못하면 교외(郊外)에서 구하고 교외에서도 얻지 못하면 그때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비둔(肥遯, 여유있는 은둔)을 사모하고 독선(獨善, 자기일신만을 수양함)을 즐거워하여 세속과 떨어져 원유(遠遊)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때문에 산수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은 부귀의 낙을 누릴 수 없고, 부귀를 매우 즐기는 사람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으며 이를 겸하는 자가 적다.
(주: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자연의 멋진 풍광을 멀리가야 즐길수 있고, 집에서는 못 즐기니, 부귀가 있는 사람들은 인공적으로라도 즐겨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주사(知奏事) 우공(于公)이 부귀를 누리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얻으려 하되, 제성(帝城)도 오히려 멀다 하여 마침내 대궐 곁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으니, 이는 옛날 정 원외(鄭員外 원외는 벼슬 이름)가 살던 곳이다. 당시에는 황무한 동산과 잔폐한 별장뿐이었는데, 공이 얻은 뒤에는 샘물 줄기를 찾아 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어서 마시고, 세수하고, 차 끓이고, 약 달이는 수용을 모두 이 우물로 하며,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해서 대규모 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 심고, 거위와 오리를 그 가운데 놓아 길렀다.

심지어 풍헌(風軒)ㆍ수사(水榭)ㆍ화오(花塢)ㆍ죽각(竹閣)까지도 그 제도를 사치하게 하였으니, 삼십육동(三十六洞- 온세상)의 경치를 모조리 주문(朱門)ㆍ화옥(華屋)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어찌 반드시 비돈(肥遯)하고 원유(遠遊)한 연후에야 산수의 낙을 누릴 수 있으랴?

공(公)이 높은 구릉(丘陵)의 평평한 것을 가리켜, 이것은 나의 망궐대(望闕臺)라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뜻이 있구나, 공이 이 대를 이름지은 것이. 지금 공이 후설(喉舌 승지)의 책임을 맡아, 조석으로 용안(龍顔)을 가깝게 모시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다 하여 사는 곳을 대궐에 가깝게 하고, 그래도 또 부족하게 여기어 망궐대를 이루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옛사람이 말한 ‘마음이 왕실(王室)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또 우뚝 솟은 것을 가리켜, 망월대(望月臺)라 하고, 날개치며 나는 듯한 것을 가리켜 쾌심정(快心亭)이라 하고, 따라서 나에게 말하기를,“내가 이름지은 것은 이와 같네. 내가 아직 이름짓지 못한 것을 그대가 나를 위하여 지어 주게.” 하였다. 내가 이름짓기를, 동산은 방화(芳華), 우물은 분옥(噴玉), 못은 함벽(涵碧), 죽헌(竹軒)은 종옥(種玉)이라 하였으니, 모두 그 형상을 말한 것이다. 총합하여 그 재(齋)를 태(泰)라고 이름하였다. 《주역》 태괘(泰卦)에 이르기를,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사귀어 그 뜻이 동일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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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주사 우공이라는 자가 고려시대의 정승인 정씨성을 가진 사람의 황폐해진 별장을 구입해서 다시 화려하게 꾸몄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12세기말~13세기초의 인물인 고려 우승경(于承慶)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1202년 글에 나오는 지주사(知奏事)가 된 인물이지요. 이 글이 수록된 [동국이상국집]이 이규보(李奎報, 1169∼1241년)의 문집이므로 시대도 맞습니다.

그런데 이 별장의 모습중 정원의 모습이 고려시대 귀족의 정원의 한 모습으로 꽤 의미있어 보여 소개합니다.
今知奏事于公居富貴之中。致山水之美。以帝城猶謂之遠。遂卜於 帝闕之傍。是昔鄭員外所居也。當時茂苑殘莊而已。公得之。尋泉脈之攸出。築石而甃之。凡飮吸盥漱。煎茶點藥之用。皆仰此井。因泉之汎濫者。瀦作大池。被以菱芡。放鵝鴨其中。至於風軒水榭花塢竹閣。無不侈其制。使三十六洞之景。盡入於朱門華屋之內矣。又何必肥遁遠遊。然後享山水之樂耶。公指崇丘之亞然者曰。此予之望闕臺也。

"당시에는 황무한 동산과 잔폐한 별장뿐이었는데, 공이 얻은 뒤에는 샘물 줄기를 찾아 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어서 마시고, 세수하고, 차 끓이고, 약 달이는 수용을 모두 이 우물로 하며,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해서 대규모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가득 심고, 거위와 오리를 그 가운데 놓아 길렀다. 심지어 풍헌(風軒)ㆍ수사(水榭)ㆍ화오(花塢)ㆍ죽각(竹閣)까지도 그 제도를 사치하게 하였으니, 삼십육동(三十六洞- 온세상)의 경치를 모조리 주문(朱門)ㆍ화옥(華屋)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

일단 산천수가 나오는 곳을 찾아 우물을 만들고, 이 물로 인공연뭇을 만듭니다. 그리고 연꽃으로 채우고 거위와 오리등을 놓아 길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공연못을 만드는 장면은 2014년 고려시대 거찰인 '실상사'의 정원유적 뉴스를 통해 한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전북 남원 실상사에서 국내에서는 유례가 없는 초대형 고려시대 정원시설이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됐다조계종 산하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정안 스님)는 실상사(주지 응묵) 담장 바깥 구역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강돌을 바닥에 촘촘히 깐 평면 타원형의 독특한 모습인 연못과 여기에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로(入水路)와 빼내는 배수로,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터 2동을 비롯한 정원시설을 찾아냈다고 11일 밝혔다. 사찰 내부에 연못을 만들어 보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조경 목적으로 추측되는 정원연못의 흔적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실상사 인공연못 유적지

"샘이 넘쳐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저수해서 연못을 만들었다"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배수시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실상사 연못지의 추정연대가 바로 실상사 대목탑이 지어지던 12세기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사단은 "이번에 발견한 원지는 그것이 위치하는 방향성을 고려할 때 실상사 경내에 위치한 고려시대 초기 목탑 터와 동서방향 축이 일치한다"면서 "나아가 이 일대에서는 고려 초기 유물이 집중 출토하는 점으로 보아 이 정원시설은 실상사 경내 목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즉, 태재기에 나오는 이 고려정원의 연못은 실상사 연못지와 수십년차이를 두지만 건축학적으로 비근한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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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다음 부분이 인상적이라 원문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至於風軒水榭花塢竹閣。

"風軒" 풍헌이라 함은 바람이 통하는 집이란 뜻으로 정자를 뜻하는 듯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水榭", 수사는 물의 정자라는 뜻으로 아마도 아래 그림식의 건축을 지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래 그림은 같은 당대 건축적 교류가 많던 송나라의 그림으로 물정원의 정자를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은 특히 화가가 유송년 (劉松年,?~약1225년)으로 시대가 이 글이 쓰여진 1202년과 동시대입니다. 제목은 [水榭论韵].
13세기초 水榭论韵중 물위의 정자모습

다음으로 '花塢'(화오)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화오는 '꽃의 둑 혹은 꽃의 성채'라는 뜻으로 보통 '화려한 화단'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라는 글자는 보통 '낮은 성채'를 뜻하는데 이는 아마도 꽃밭의 주위를 꽤 높은 장대석따위로 꾸며서 이런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필자가 특히 주목한 (어찌보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바로 묘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竹閣"(죽각)까지도 꾸몄다...라는 부분. 현재 한국전통건축학계에서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는 '대나무 건축'에 대해 예전에 '죽루'라는 제목으로 한번 알아본 적이 있었지요.


이 글들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문헌기록이 12-13세기의 대나무 누각에 관한 것들이었지요 (두번째 글은 조선전기 것). 즉 고려말의 기록들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태재기] 역시 13세기극초반의 것 (1202년)의 것이므로 당시 별장등에 유행하던 양식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문헌기록이 쌓이고 있군요. 여기 나오는 "竹閣(죽각)"은 말 그대로 '대나무 집'이란 뜻입니다. 閣 (각)은 보통 꽤 대규모의 집에 붙이는 명칭이므로 이 대나무 건물은 꽤 규모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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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풍헌을 만들고, 연못위의 정자를 만들고, 그 안에 연꽃과 오리, 거의등을 놓아 키우고, 꽃이 만발한 화단을 꾸미고, 대나무 집까지 만든 정원..... 이 곳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요즘 우리가 민속촌등에서 느껴 보기 힘든 미학을 가진 정원이었을 것 같습니다. 회화로라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야마시타 타츠로- Merry Go Round (JOY Live, 1989) 山下達郎

타츠로의 수많은 명곡 가운데 아마도 가장 훵키하고 그루비한 곡이 아마도 이 'Merry-go-round'일 것 같습니다.

원곡은 1983년의 명반 '멜로디스'에 수록되어 있으며, 아마도 타츠로 곡중 70년대의 Bomber와 80년에 나온 출세작 [Ride on time]에 실린 Someday와 함께 베이스라인이 가장 특출난 곡일 것입니다.

원래도 그루비하지만 이 1989년의 라이브실황에서의 이토의 베이스연주는 정말 좋습니다. 11분짜리 실황중 반 이상을 책임지는...

山下達郎- Merry Go Round (1989년)


真夜中の遊園地に 君と
二人で そっと忍び込んで行った
錆び付いた金網を乗り越え
駆け出すと いつも月が昇って来た
한밤의 유원지에 당신과
둘이서 몰래 들어갔지
녹슬어 엉겨붙은 철망을 넘어 
달리기 시작하면 항상 달이 떠올라 왔어.

心は粉々に砕かれ
失くしてしまった
幻のメリー・ゴー・ラウンド
愛さえ
마음은 산산조각 부서져 
잃어버린 
환상의 메리-고-라운드
사랑만이..

亜麻色の月明の下で
僕達は笑いながら愛し合った
色褪せた水玉のベンチは
滅び行く時の匂い しみついてた
아마색 달빛 아래에서 
우린 웃으며 사랑했지
빛바랜 물방울색 벤치는 
쇠퇴해가는 냄새가 배어 있었어

Repeat
きっと生まれ変わる 今なら
もう一度だけ
動き出せ メリー・ゴー・ラウンド
目を覚ませ ユニコーン!
꼭 다시 태어나 지금이라면 
한 번만 더
움직이기 시작해  메리-고-라운드 
깨어나라 유니콘!


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7)- 2층상가와 1,300칸의 행랑- 운종가(雲從街)와 대시(大市)의 조선전기모습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약 1년 반만에 쓰는 대건축물시리즈입니다 (사라진 궁궐은 한 편 그 사이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문화컨텐츠닷컴]에 나오는 조선시대 거대한 시장거리인 "운종가"편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운종가(雲從街)의 위치는 대략 혜정교(광화문 우체국 동쪽)부터 철물교(종로 3가 입구)였으나, 태종 5년 (1396년) 규모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안국동으로부터 광교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이들 건물은 2층 목조기와집이었고 상층은 창고, 하층은 점포로 사용되었다. 또한 개별 시전은 여러 행랑이 연이어 있는 건물에서 영업을 했는데 이를 방(房)이라 하였다.

조선초기에 애초에는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을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行廊)을 짓던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행랑(상가)들 가운데 번성한 곳은 운종가(현 종로1가)와 종루, 광통교였으며, 육의전(인조때 만들어짐)도 이 일대에 있었다 한다. 
현재의 운종가 유적지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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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2층목조기와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적어도 실록을 모두 뒤져보아도 이에 해당하는 문헌기록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유구연구로 밝혀진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정보에는 citation정보를 좀 적어주면 좋겠군요). 추후 발견되면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실록의 기록부터 연대순으로 살펴보지요.

문화컨텐츠닷컴의 정의에는 1396년 (태조 5)에 운종가를 규모를 확대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확실한 것이 2년전인 1394년의 기록을 보면 '행랑'을 갖춘 큰 시장(대시)에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미 태조 3년에 운종가의 원형이 되는 대시전 행랑건축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8일 무인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시장의 행랑에 화재가 나다.
대시(大市, 큰 시장)의 행랑(行廊)에 화재가 일어났다.
○大市行廊火。

이렇게 불이 나고 20여일 후, 이번에는 폭풍으로 시장의 서쪽 행랑들이 무너져서 인마가 많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8일 무술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풍우가 쳐서 시장의 서쪽 행랑이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죽다
풍우(風雨)가 갑자기 오니 시장(市場) 가의 서쪽 행랑(行廊)이 무너지고, 사람들과 말들이 많이 죽었다.
○戊戌/風雨暴至, 巿邊西廊頹, 人馬多死。

여기서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행랑'기록. 행랑이 무너져 사람과 말이 죽었음은 이 건물들의 규모가 꽤 된다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특히 요즘 흔히 보이는 열린 구조의 행랑보다 '사람이 잘 수 있는' 벽체를 갖춘 구조물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 당시의 행랑건축은 이런 것들이 보통이었지요. 다음은 같은 시기인 1398년 궁궐의 행랑기록입니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중략.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直宿 (번갈아 보초보며 잠) 중략.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芳蕃臥內廊房, 見天牧起坐, 聞訖還臥

현재 강령전의 행랑방들처럼 행랑내에 '방'을 갖춘 건축구조였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경복궁 강령전 행랑

다음은 당시 시장에서 어떤 식으로 물품을 진열하는지가 나오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태조 3년 갑술(1394년,홍무 27)
1394년 1월18일 (무오)
경시서(京市署)에서 각 시장(市場)의 이름을 판자(板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아울러 그려서 각 처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다.

즉 ‘포전 1방, 지전 1방’ 등으로 시장의 이름을 판자에 쓰고, 글을 모르는 구매자들을 위해 글대신 그림으로 품목을 그려넣어 진열합니다. 즉 호빵이 있으면 호빵 그림을 적어넣었다는 것인데...... 드라마등에서 이런 식으로 구현해도 재미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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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초 대시전 행랑의 규모

다음으로 이 행랑의 규모를 한번 볼까요. 1412년 태종대의 기록을 보면 시전좌우에 무려 800여칸의 행랑을 짓기 시작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0일 을축 1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시전(市廛)의 좌우에 행랑 8백여 칸의 터를 닦다

비로소 시전(市廛)의 좌우 행랑(左右行廊) 8백여 간의 터를 닦았는데,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昌德宮)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외방의 유수(游手)025) 승도(僧徒)를 모아서 양식을 주어 역사시키고, 인하여 개천 도감(開川都監)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점고하여 살피고, 부역(赴役)한 군정 가운데 물고(物故)한 자가 11인이고, 병든 자가 2백여 인이라고 아뢰었다.
1770년 한양도에 나오는 운종가 행랑규모

당시 행랑건설에는 2,035명의 인부와 승려군 500명이 동원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5일 경오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개천 도감을 행랑 조성 도감으로 삼아 시전을 건설하다
개천 도감(開川都監)을 그대로 행랑 조성 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삼아 이날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다. 역도(役徒)는 2천 35인 안에 승군(僧軍)이 5백 명이었다.

당시 건축공사 약 2개월만에 중간평가가 나오는데 처음에는 힘든 역사로 생각했다가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장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태종이 여력이 있으면 종루양쪽으로도 행랑을 건축하면 좋겠다고 하자 '재목은 넉넉합니다'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전에도 살펴보았듯 원시림이 넘치던 시대답습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4월 3일 정사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행랑 조성 도감에 궁온을 하사하다
행랑 조성 도감(行廊造成都監)에 내온(內醞)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행랑(行廊)을 조성하는 일을 처음에는 모두 어렵다고 생각하였는데, 지어 놓고 보니 국가에 모양(模樣)이 있어 볼 만하다. 만일 남은 힘이 있으면 종루(鍾樓) 동서쪽에도 지었으면 좋겠다."하니,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대답하기를,
"재목은 넉넉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명년 가을과 겨울을 기다려서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

결국 시전 좌우에 수백칸 규모의 행랑이 완공됩니다. 창덕궁 문밖의 행랑에 만들었다는 조방(朝房)은 신하들이 조회를 기다리며 쉬던 방을 말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5월 22일 을사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도성의 좌우편 행랑이 완성되다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 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당시 행랑구조가 트인 구조보다는 실내를 갖춘 구조가 많았음은 같은 해인 1412년 이런 기록을 보면 잘 드러나지요.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13일 병인 1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사헌부에서 조영무를 탄핵하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여자의 일은 내가 심히 밝게 안다. 뽑히어 들어온 지 다섯 달 동안에 하루도 가까이 모신 일이 없고, 오래도록 행랑(行廊)에 있었는데, 궁중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미혹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가서 시집가라고 명하였다. 마침 거둥[行幸]을 만나서 다섯 달을 머물렀다. 나가서 있은 지 여러 달 만에 조영무가 취하였으니, 무슨 허물이 있는가? 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후궁(後宮) 6천을 놓아 보냈으니, 그 뜻이 모두 여승이 되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대간(臺諫)은 그 뜻을 자세히 진달하라."

長在行廊 행랑에서 오래 지내다

즉, 행랑에 있는 방에서 몇달씩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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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태종은 행랑에 흠뻑 빠졌는지 다시 무려 881칸을 더 짓습니다. 이번에는 경복궁의 남쪽에서 종묘까지 주욱 이어집니다. 남로에 세웠다는 5칸짜리 층루 (2층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6일 을묘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행랑 881칸을 세우고, 종루 이전, 군자고, 풍저창 건립후 다시 행랑의 역사를 시작하다

다시 행랑(行廊)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경복궁의 남쪽부터 종묘 앞까지 좌우 행랑이 모두 8백 81간(間)이고, 또 종묘의 남로(南路)에 층루(層樓) 5간을 세웠다. 또 청운교(靑雲橋)의 서종루(西鍾樓) 2층 5간을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廣通橋)의 북쪽에 옮기고, 또 용산강(龍山江)에 새로 군자고(軍資庫)를 지으며, 서강(西江)에 새로 풍저창(豐儲倉)을 지으니, 역정(役丁)이 2천 1백 41명, 승군(僧軍)이 5백 명이었다. 전 판사(判事) 이간(李暕) 등 22인이 그 역사를 감독하고,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지의정부사 이응(李膺),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이 그 일을 영솔하였다.

역시 같은 해 기록 (1413)을 보면 숙직하는 시설이 갖춰졌음을 알 수 있지요.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4월 5일 계축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순금사 대호군 최관의 건의로 각경 순관에 면전하는 법을 세우게 하다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 최관(崔關)이 상서(上書)하였는데, 글은 이러하였다.

"신은 순금사에 재임되어 행순(行巡)137) 의 법을 아는데 아직도 미진(未盡)함이 있습니다. 대개 행순은 평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여 범죄를 방지하는 소이입니다. 밤은 5경(五更)이 있고, 경은 5점(五點)으로 나누어 행순이 끊어질 적이 없어야 마땅한데, 오늘날 각경 순관(各更巡官)에 면전(面傳)138) 하는 법이 없음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제 국가가 승평(昇平)하여 염려하기에는 부족하나, 만일 변(變)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이제부터 감순 총제(監巡摠制)로부터 각경 순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행랑(行廊)에서 숙직[直宿]하도록 하여, 초경(初更)의 순관은 2경(二更)에 면전(面傳)하고, 이같이 하여 전하기를 5경과 평명(平明)에까지 이르면, 감순 총제는 그 궐부(闕否)를 고찰한 뒤에 파하소서. 또 병조로 하여금 규찰하고 다스리게 하여 무우(無虞)할 때를 경계하소서."

竝須直宿行廊
행랑에서 직숙 (즉 보초)하며 지키다.

1413년 2월에 800여칸을 세웠는데, 그해 5월 총 1,360여칸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대규모 행랑이 완공됩니다. 오죽하면 "장행랑(長行廊)"이라고 표기하고 있지요.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5월 16일 갑오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장행랑 1천 3백 60간이 모두 완성되다

장행랑(長行廊)이 모두 이루어지니, 종루(鍾樓)로부터 서북은 경복궁(景福宮)에 이르고, 동북은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 이르며,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전후(前後)에 이르니, 이루어진 좌우의 행랑이 합계하여 1천 3백 60간이며, 역도(役徒)는 모두 대장(隊長)·대부(隊副), 군기감(軍器監) 별군(別軍), 각사(各司) 하전(下典)과 중[僧人]을 합계하여 2천 6백 41명이었다.

그 길이가 어느정도냐 하면 서쪽은 종루에서 경복궁으로 모두 이어지고, 동쪽은 창덕궁에서 종묘까지 이어지고, 남쪽은 숭례문까지 이어집니다. 확실한 선은 그릴 수 없지만, 지도에서 동그라미 친 부분들을 모두 연결하는 어마한 규모가 됩니다.

이중 운종가의 경우 분명 '시장'의 성격을 띤 행랑이지만, 나머지는 위에서 보이듯 신하들의 직숙소, 또는 아래와 같이 창고로 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기록들을 볼때 분명 개방형이 아닌 벽체형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18일 경인 2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호조 판서 박신(朴信)이 강변(江邊)에 창름(倉廩)을 세우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신이 조운(漕運)이 바야흐로 이르는데 창름(倉廩)이 없다고 하여 강변에다 4,50간을 짓도록 청하니, 임금이 농삿일이 한창 바쁘므로 영선(營繕)하기에 적당치 않다고 하여, 행랑(行廊)에다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命貯於行廊 (행랑에 저장하라고 명령하다)

자 이정도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랑이 15세기초 완성되었지요. 그런데, 태종은 완전히 행랑매니아가 되었습니다. 1414년, 또 다시 종루에서 숭례문, 그리고 다시 종묘에서 동대문을 잇는 행랑을 짓는 대역사를 벌입니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7월 21일 임진 1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도성에 행랑을 건축할 것을 명하다

도성(都城)의 좌우 행랑(左右行廊)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종루(鐘樓)에서 남대문(南大門)에 이르기까지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東大門)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行廊)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하겠다. 마땅히 충청도·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

종루와 숭례문은 물론, 다시 종묘와 동대문(흥인지문)을 또 잇는 겁니다. 마치 요즘 지하철 노선늘리는 식...
이 행랑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당시 울창하던 지방의 깊은 숲에서 조달하는 목재로 모자라 민가를 파괴해서 충당하는 규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414년 9월의 기록.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9월 10일 경진 3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호조의 보고에 따라 행랑 건축 공사로 철거된 민호에 저화를 지급하다.

호조에서 아뢰었다.
"행랑(行廊)을 조성(造成)할 때 파괴한 민가(民家)가 모두 1천 4백 86간인데, 그중에 와가(瓦家) 1백 26간은 매 1간에 저화(楮貨) 20장을 주는 것이 마땅하므로 아울러 2천 5백 20장이며, 초가(草家) 1천 3백 60간은 매 1간에 10장을 주므로 아울러 1만 3천 6백 장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무려 1,486칸의 민가가 부서집니다. 그중 기와집이 약 10%에 달하는 126칸. 이걸 보면 당시 민가의 초가/기와집 비율도 추정해 볼 좋은 데이터같습니다. 이로부터 약 10년뒤인 세종대왕대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세워진 어마한 행랑에서 '세'를 거두어들여 조세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20일 병술 3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호조에서 청한 가옥세 등을 전문으로 수납하는 조건
전에 행랑세(行廊稅)는 1간(間)마다 춘추 양등에 저화 1장씩을 수납하였습니다. 지금은 춘추 양 등에 각각 전 1백 20문을 수납하고,

1. 서울 안 집텃세를 전에는 8과(科)로 나누어서, 1과 집터가 30복(卜)이면 저화 10장을 수납하고, 3복이 넘을 때마다 1장을 더 수납하며, 3복이 못 되는 것은 8과에는 제외되며, 1복 이상 3복까지는 1장을 수납하고, 1복이 못 되는 것은 면세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세종대가 되면 이 행랑 시전이 자리를 잡아감이 보입니다. 특히 같은 업종은 서로 모이게 해서 요즘처럼 '** 거리'가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29일 무술 3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신하들의 진언과 의정부 육조에서 의논한 것 중 시행할 만한 조건들을 취하게 하다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 최만리(崔萬里) 등이 말하기를,

"지금 공인(工人)과 상인(商人)이 민간에 흩어져 있어서 서로 이익을 다투기 때문에, 물가가 자꾸 뛰어 올라갑니다. 나라에서 이미 행랑(行廊) 을 세워 저자의 점방을 설치하였은즉, 지금부터는 공업의 종류를 분류하여 같은 종류끼리 모여 살게 하고, 경시서(京市署)에서 물가를 조정하며 위반하는 자는 철저히 징계하게 하옵소서."
특히 흥미로운 기록으로 1429년 이미 같은 품목끼리 배열된 거대시장거리에 당시의 일본을 본따 판자로 층루를 만들고 물건을 위에 두어 먼지가 묻지 않게 하자는 건의가 등장합니다.

세종 11년 기유(1429) (선덕4) 12월 3일(을해)

일본 상가(商街)의 제도는 시장 상인들이 각기 처마 아래에다 판자 층루(層樓)를 만들고 물건들을 그 위에 두니, 다만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이를 보고 살 수 있었으며, 시중(市中)의 음식물들을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모두 사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시장은 건습(乾濕)할 것 없이 모든 어육(魚肉) 등의 식물들을 모두 진토(塵土) 위에 두고는 혹은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하오니, 비옵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의 행랑(行廊)에서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종루(鐘樓) 남쪽에서부터 광통교(廣通橋)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첨(補簷)을 달아내고, 그 아래에 물건들을 진열해 놓을 층루를 만들어, 어느 간(間)은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고 죽 편액(扁額)을 달아서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또한 현재 모든 행랑시전에 '보첨'을 달자는 건의도 나옵니다. 즉, 이런 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서까래에 덧대서 비를 막는 구조가 보이시죠? 저런 것을 보첨이라 합니다.
운현궁의 보첨 (사진출처)

15세기중반, 저렇게 어마어마한 길이의 행랑가에 모두 보첨을 달았다면 정말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시설물이 들어섰으니 그 구조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정교해졌을 것입니다. 

최초로 공사가 완공된 1414년경에서 약 30여년이 지난 1446년 기록을 보면 어린 아이가 행랑에서 돌아다녀 그 아이를 찾기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기 힘든) 일이 나옵니다. 다만, 이 행랑은 박중림의 저택행랑으로 시전행랑은 아닙니다. 다만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당대의 행랑이 어떤 구조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록이라 생각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수 집현전 교리 박팽년이 아버지 박중림의 무죄를 상서하였다

장명의 말한 바도 매우 어긋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까운 이웃의 공사(供辭)에도 천보를 본 연월(年月)이 또한 같지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의금부로 옮겨서 국문한 이래로 중손은 말하기를, ‘내가 집에 있을 때에 이 아이가 행랑(行廊)에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인하여 그 모양을 보지 못하고, 죽산에 있을 때는, 일이 바빠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에 아이의 나이가 6세이므로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을 것인데, 비록 행랑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볼 수 있을 때가 없었겠습니까. 

此童在行廊, 因早暮不見其貌
雖在行廊, 豈無可見之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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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운종가와 도성의 장행랑 구조 건축물들은 임진왜란이후 (again...) 모두 자취를 감춥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규모는 이렇게 단 한두줄의 기록으로 세종지리지에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지리지 / 경도 한성부
큰 시장 [大市]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 종루(鍾樓) 【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 【대략 2천 27간이다. 】
운종가雲從街 모형



외인부대- 환상의 록큰롤 (FL 외인부대, 1988) 음악

이 당시의 임재범은 정말이지 데이빗 커버데일에게 꿇릴 것 없는 대단한 보컬.

외인부대- 환상의 록큰롤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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