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애플 [불구경 콘서트] 세 곡 (서울, 석류의 맛, 청색증) (2016) 음악

한국 락밴드 라이브기획 역사상 역대급으로 매우 마음에 드는 공연기획. 포스터도 최고느낌.

사실 어떤 특정밴드 혹은 앨범의 기조에 따라 라이브 무대를 어떻게 꾸미느냐는 작품의 느낌을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주는가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핑크플로이드의 라이브가 밋밋한 조명아래 이뤄진다면 그 느낌은 반도 안될 것.

그런 면에서 해피로봇레코드의 문화기획사 '민트페이퍼'가 기획한 작년 10월 (2016.10) 쏜애플의 이 '불구경' 라이브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쏜애플의 2.5 집격인 '서울병'의 서울과 석류의 맛의 몽환스럽고 음울하고 진한 색감과 옅은 전구라이트가 점멸되며 밴드를 둘러싼 관중을 비추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밴드를 가운데 두고 팬들이 죽 둘러선다

마치, 무슨 종교집회같은 느낌마져 드는데, 이번 앨범의 기조와 잘 어울린다. 
쏜애플- 불구경 중 '서울' (2016년)


쏜애플- 불구경 중 '석류의 맛' (2016년)


쏜애플- 불구경 중 '청색증' (2016년)



교차기록-17세기초 온돌방 유행의 정확한 추정시기, 그리고 고려시대 난방 모습- 방안의 난로(화로) 역사

2000년 논문인 [고려식 온돌집의 형성및 전개에 관한 연구]를 보면 이러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편, 마루와 온돌구조 자체적으로도 많은 역사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에서 온돌과 마루의 결합과정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며, 결합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마루와 온돌의 결합은 언제 우리나라에 완전한 전통주택의 정형(定型)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온돌과 마루가 연접(連接)해서 한 건물을 이루는 방식은 적어도 고려시대 후기 이전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온돌과 마루가 연접하는 방식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전면온돌의 출현이다. 전면온돌이 널리 확산되는 것이 13세기경이라고 가정한다면 그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온돌 옆에 마루나 부엌과 같은 다른 실이 달라붙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짐작된다고 하여 마루와 온돌의 결합과정과 시기를 제시하고 있다 (주: 이는 하류층의 이야기로 상류층의 경우 13세기중기이후가 되겠습니다). 

또한, 상류계층까지 온돌구조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東文選의 公州東亭記의 기록만으로는 온돌과 마루가 고려시대에 결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주택 안에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문화의 지역적 이동과 전파에 따라 온돌과 마루가 다른 지역에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두개의 구조가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3세기로 추정하는 것이 대세였지만 최근에 말흘리 유적의 발견으로 12세기중엽으로 거슬러간다는 학설이 등장했습니다.
창녕 말흘리건물지로 확인된 최자의 삼도부에서 발견된 정형한옥의 성립시기

이 논문에 나오는 [동문선]의 公州東亭記 기록은 이것입니다.
以面勢之東偏而建賓樓。南嚮而崇主宇。西序南廡。共十四閒。更衣之次。設食之所。冬以燠室。夏以涼廳。
지면의 넓이를 참작하여 지대가 동편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거기에 빈루(賓樓)를 세우고 남향으로 주건물을 높이 지었다. 서편의 행랑과 남편의 행랑이 모두 14칸이요, 옷 갈아입는 장소와 음식 차리는 장소며, 겨울에 사용할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시원한 대청까지 모두 마련되었다. 

즉 마루방과 온돌방이 여름과 겨울용으로 마련되었다는 이야기로 이 건물은 손님을 맞는 객관으로 보입니다. 이런 온돌방(노인, 손님, 병자용)과 더 많은 수의 마루방의 공존경향은 13세기에서 임진왜란직전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익(李瀷, 1681~ 1763년)의 [성호사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려시대 아집도대련 중 차를 따르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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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과 청성잡기 기록으로 보는 17세기초 난방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침어판청(寢於板廳)- 마루판자에 거처함

일찍이 여러 기로(耆老)들의 말을 듣건대, “백 년 전에 있던 공경대부의 큰 주택을 손꼽아 보면 그 가운데 온돌은 1~2간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노인과 병든 자가 거처하기 위한 곳이요, 나머지는 모두 판자 위에서 거처했으니, 마루방 가운데에 병풍을 두르고 두터운 요를 깔아 여러 자녀가 거처하는 방을 삼았으며, 온돌에도 또한 마통신(馬通薪)을 때어 연기만 나게 할 뿐이었으니, 《소학》에 이른바, ‘청당(廳堂) 사이 휘황(幃幌)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지금은 백성의 형편이 옛날보다 곱절이나 가난한데 사치는 10배가 늘었으니,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전기까지의 (약 16세기) 상류층 저택에서도 온돌은 1-2칸으로 '병자나 노인용'이며, 나머지는 모두 '판자(즉 마루)'방에서 지내는데, 그 난방방법은 병풍을 두르고 두꺼운 요를 아래 깔아 지냅니다. 여기 나오는 온돌에도 '마통신(馬通薪)'을 땔 뿐이었다는 것은 '말의 대변'을 말린 것을 때웠다는 말입니다.

[성호사설]에는 이 '마통신'에 대해 따로 챕터를 두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다음의 것입니다.

성호사설 
마통신(馬通薪)

국가가 태평하여 30~50년을 지나는 사이에 사치와 검약이 완전히 갈라졌다. 내가 매양 어렸을 때에 보면, 사람의 집에서 말똥을 동그랗게 쌓아서 온돌방에 불을 때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먼저는 사람들이 흔히 마루에서 잠을 자고 오직 늙고 병든 자만 실내에 거처했다.” 하였는데, 지금은 사방의 산이 씻은 듯이 벗겨져서 서울 안의 장작이 계수나무처럼 귀한데 비록 천한 종들까지라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 않는 자가 없으며, 또한 말똥을 땔감으로 하는 것도 보지를 못했으니, 산에 나무가 어찌 고갈되지 않을 수 있으랴!
황산곡(黃山谷)은 말하기를 “장중모(張仲謀)가 나를 위해 겨울을 날 계책을 마련하여 기린원(騏驎院)의 말똥 3백 섬을 보내왔으므로 보향(寶香) 20병으로써 갚았다.” 하였으니, 말똥을 땔감으로 한 것이 옛적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즉, 성호 이익선생이 어릴 때까지도 말똥을 동그랗게 쌓아서 온돌을 땠는데 화력이 약해서 '미지근했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처럼 펄펄 끓는 온돌방 아랫목이 아니지요.

그리고 당시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마루방에서 잠을 잤다라는 것이지요. 이익(李瀷)의 생몰년대는 1681~ 1763년. 즉 그가 어린 시절이라면 1680년대일 것입니다. 그 때 마을 노인들을 50-60대로 보면 1620년-30년대의 인물들로 볼 수 있으니 임진왜란 직후의 세대입니다. 그때까지도 마루방이 더 많았다는 것이지요. 

보통 온돌로 인한 폐해중 하나를 나무가 민둥산이 될 지경이라는 기록을 드는데, 이 이익의 기록 역시 그에 부합합니다. "요즘은 천한 종들까지 온돌에서 자니, 산에 나무가 남아나질 않는다'라는 한탄을 하고 있지요. 성호선생이 이 책을 집필한 것이 40대, 즉 1720년대입니다. 따라서 18세기정도가 되서야 현재 우리가 인식적으로 아는 '한옥의 전체 온돌난방'이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잡힌 것입니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점(店 여관)과 온돌의 폐해

옛날에 여행자는 원(院)에서 묵었다. 중략.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때 도성의 사산(四山)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上)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글의 주인공인 김자점(金自點, 1588~1651년)은 정확히 임진왜란 (1592년, 당시 만4세) 직후를 주 활동시기로 살아간 인물이지요.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도성의 사대산에 너무 솔잎이 많이 쌓이고 산불이 나자, 이를 막기 위해 김자점이 오부의 주요저택들을 중심으로 '온돌을 설치'하고 솔잎을 땔깜으로 써서 처치하라는 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조의 재위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 그러니까, 이 [청성잡기]의 기록과 [성호사설]의 연대 즉 이익이 어린시절들은 마을 어른들의 연배 (1620~30년대)까지는 온돌이 거의 없고 마루방이라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이 두 교차기록은 현재의 상하층 할것없는 '집안의 자는 방은 모두 온돌방'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 시기, 즉 1623년에서 1640년대 정도부터 시작되어 1700년대가 되면 온 나라에 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사극의 선조 침실 (마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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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고려시대 난방 기구, 난로

문화컨텐츠닷컴의 고려시대 상류층의 주거공간이라는 정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시기 상류주택에는 온돌이 시설되지 않았다. 따라서 열기와 연기를 처리하는 방식이 조선후기와 달랐다. 조선후기의 주택에서는 열기와 연기를 방 밑의 고래를 통하여 굴뚝으로 배출하며 난방과 취사를 겸하였다. 당연히 아궁이와 부뚜막을 설치한 부엌은 방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주택에서는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으므로 난방과 취사가 별도로 이루어져야 했다. 취사공간은 열기와 연기를 방출하기 쉬운 장소와 시설에 마련되었다. 핵심 주거영역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개방된 형태의 부엌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최근 발견된 대전 원골유적에서 확인된다. 온돌이 시설되지 않았으므로 바닥재도 조선후기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습기를 피하고자 실내의 대부분에 마루를 깔아 공중에 띄웠다. 동월의 『조선부』에 이러한 구조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었고, 온돌 이전의 방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에서도 판방이 대부분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바닥에는 풀로 짠 두툼한 돗자리를 깔았다. 두툼한 돗자리는 여름에는 습기를 흡수하는 기능을 하였고 겨울에는 한기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였다. 

얼마전 포스팅으로 고려시대에서 조선전기까지는 병풍을 두르고 보통 '침상'에서 자거나, 아니면 맨바닥에 두터운 깔개를 깔고 추운 지역에서는 '조선철'이라 불리는 카펫트를 깔았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런데 이런 침상, 두터운 깔개, 그리고 병풍외에 한가지 난방시설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난로' (화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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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문(詩文)을 아들 이함(李涵, 1201~?)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 중 후집인 [동국이상국집후집]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이상국후집 
고율시(古律詩)
화로[爐] 불을 쬐며

옛날엔 일개 유생이었는데  伊昔一布衣
인연이 있어 재상이 되었었네  夤緣作邦宰
재상 자리 이제 물러났거니  宰相已退老
다시 어찌 그 태도 있으랴  寧復宰相態

품팔이 잡된 일 하더라도  傭保與雜作
어느 누가 괴상히 여기랴  人亦何必怪
하물며 이 한 방안은  況此一戶壺
자봉으로 장만한 것이라네  自奉所可辦

화로 끼고 손수 숯을 피우며  擁爐自添炭
술 있으면 손수 데우곤 하지  有酒手自煖
불이 치열히 타오를 땐 / 方其火熾時
꺼림없이 손수 밤도 굽는걸 / 煨栗自不憚

이미 평민 됨을 자처하였거니 / 已許爲常人
재상으로 보아주지 말게나 / 休作宰官看
가소롭다 이 한 몸뚱이가 / 可笑一箇身
잠깐 동안에도 많이 변하누나 / 須臾多貿換 중략.

여기 나오는 시들은 모두 아버지 이규보의 것입니다. 즉 재상까지 올랐던 이규보가 은퇴하고 지은 시로 보이는 이 시에는 자신이 집적 설계한(自奉) 방의 모습이 나옵니다.  방안에 '숯을 넣은 화로'를 두고 술을 데워 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군밤도 구워 먹습니다. 그럼 이 화로는 그저 이런 간식을 데워먹는 용으로만 기능했을까요?

같은 저작의 다음 시를 보면 화로 역시 난방용으로 어느정도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율시(古律詩) 57수
찢어진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다

사방에서 낯을 에는 찬 바람 들어오니 / 四面難防刮面風
화로의 재 자주 날려 희미한 밑불 드러나네 / 爐灰屢撥覓微紅

거기다 눈까지 버들개지처럼 흩날리니 / 更看飛雪如飄絮
아마 하늘이 이 늙은이 얼어 죽게 하려나봐 / 天意應敎凍此翁

여름에 덥고 가을에 서늘함은 공도(公道)이니 / 夏熱秋凉道若公
차가운 날씨 역시 겨울에 합당하네 / 天寒亦合屬於冬

공평하게 분류된 계절 한탄할 게 뭐 있나 / 平分時令何須嘆
찢어진 창문 막지 않은 건 나의 게으름 탓이지 / 窓漏糊遲坐我慵

창문을 고치지 않아 한풍이 몰아닥치자 화로의 재가 날려 밑불이 겨우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규보의 시대는 12세기중엽에서 13세기중엽. 이 당시가 최근 논문 연구처럼 노인을 위한 한 두방의 특수한 시설개념의 온돌방과 이러한 대부분의 청방(마루방)의 조합이 있던 시대였음을 이 저작에서도 볼수 있는 것이, '온돌방'역시 같은 저작에 등장합니다.

동국이상국후집 
고율시(古律詩)
따스한 온돌 (暖堗)

추운 겨울철에 냉돌에 누웠으니 / 冬月臥氷堗
추위 엄습하여 뼈를 긁어내네 / 寒威來刮骨
이제 다행히 마들가리 태워서 / 幸今燒柮榾
한 가닥 불꽃이 피어 오르네 / 一束炎已發

따스한 훈기 봄 기운 같아지니 / 氤氳氣如春
이불을 펴면 누어 견딜 만하네 / 衾席稍可親
이제야 비로소 남에게 자랑하거니 / 始可誇於人
참다운 재상의 몸이라고 / 眞箇宰相身

이 몸을 아끼는 건 아니지만 / 此身非固愛
이 추위를 어떻게 견딜 건가 / 此寒得可柰
도인은 본래 덥고 찬 것 모르지만 / 至人無炎寒
내야 어찌 그를 짝할 수 있으랴 / 而我安得配

暖堗 (난돌)- 즉 온돌을 가리킵니다 (온돌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고정되는 것은 북관기사(北關記事)가 씌어진 19세기 초 이후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전에는 난돌, 온돌, 연돌등이 조선후기에도 함께 사용됩니다). 추운 겨울날 '찬 구들 (氷堗)'에 누워 있는데 나무를 때우고 온돌이 되니 살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이당시가 조선말의 여관기록들처럼 방안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지경이 결코 아니었음 (즉 앞서 살펴본 이익 선생의 '미지근한 온돌'처럼)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氤氳氣如春 온기가 올라오니 봄날 같고
衾席稍可親 이불을 덮으니 가히 견디겠다

즉 이 기록은 앞서 [동문선]의 公州東亭記 (공주동정기)에 나오는 객관의 온돌+마루방기록외에 고려시대 후반기록으로 같은 저택에 두 가지 방이 모두 등장하는 예가 될 것입니다. 

화로를 난방에 이용한 이러한 모습은 14세기 이색(李穡, 1328~ 1396년)의 [목은시고]에도 등장합니다. 

목은시고
시(詩) 즉사(卽事)

이웃집 개가 짖으니 내 집 닭도 꼬끼오 / 隣家犬吠我雞呼
해 비치는 창가에 화로 마주하고 앉았어라 / 日照南窓對火爐
샘물 길어 세숫물 바치는 어린 계집종 / 小婢汲泉供盥洗
한 덩어리 화기가 바로 요순의 시대로세 / 一團和氣是唐虞

문밖의 염불 소리 끊어졌다 이어졌다 / 門外經聲斷復連
평등하게 자비 행한 금선의 일이 생각나네 / 行慈平等憶金仙

목은시고
시(詩)
바람 소리가 귀에 가득한 때 갖옷을 걸치고 혼자 앉아서 읊조리다.

바람 소리 귀에 가득해도 중천을 넘어선 때 / 滿耳風聲日過中
환하디환한 남쪽 창가에 화로 불빛 빨갛도다 / 南牕明甚火爐紅
이불 덮고 홀로 앉으니 끝없이 펼쳐지는 생각 / 擁衾獨坐思無盡
여기 보면 추운 겨울 아침, 창문 앞에 화로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추운지 실내에서 '갖옷' 즉 '털옷(요즘 모피개념)'을 입고 있지요. 몇년전 히트사극인 [정도전]에서도 이성계가 갖옷을 자주 걸치는 장면이 나와 반가웠습니다.
 조선전기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사가집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옵니다.

사가시집 
시류(詩類)

쌀쌀한 가변 추위가 창 깁을 흔들어대니 / 輕寒料峭撼窓紗
긴긴밤에 병든 삭신 괴로움을 어찌할꼬 / 病骨酸辛長夜何
막걸리 마시며 화로에 등걸불을 지펴라 / 濁酒火爐燒榾柮
백년 신세를 이런 가운데서 지낼 뿐일세 / 百年身世此中過

사가시집 
시류(詩類)
안견(安堅)의 산수도(山水圖)에 제(題)하다. 겨울 경치이다.

강 구름이 까맣게 잔뜩 끼어 눈을 빚어라 / 江雲黯黯釀作雪
옥룡이 밤에 얼어 인갑이 찢겨져 내리니 / 玉龍夜凍鱗甲裂
앞산이랑 뒷산은 온통 하얀 바탕이요 / 前山後山白皚皚
맑은 물가 흰 모래에 강물은 마실 만하고 / 渚淸沙白江可啜
고목나무는 멀리 구름처럼 검게 보이는데 / 遙看老樹黑如雲
솔바람 거세게 일어 파도같이 시끄럽네 / 松風怒作洪濤喧
어느 집은 밝은 창 활짝 열고 주렴 내리고 / 誰家簾幙開晴窓
화로를 끼고 앉아 향기로운 술잔 드누나 / 火爐擁坐杯氤氳
각종시대의 화로와 다도세트 (김포 다도박물관)

화로를 이용해서 술을 데워 마시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조선전기에는 '차를 데워 마시는' 불교문화의 영향도 아직 볼 수 있습니다. 

사가시집 
시류(詩類)
병중(病中)에 밤에 읊다 3수

봄추위가 차가워서 문 닫고 앉았노라니 / 春寒料峭坐關門
병든 삭신 괴롭고 파리하기 그지없어라 / 病骨酸辛瘦十分
자려 해도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이루는데 / 欲睡通宵渾不睡
차 끓는 소리가 화로의 온기를 보내오네 / 煮茶聲送火爐溫

두어 폭 병풍 앞에 한 등잔불을 켜놓고 / 數疊屛風一盞燈
와상 기대앉으니 고독하기 승려 같네 / 小牀扶坐兀如僧
때로 아내와 마주해 얘기를 나누노라면 / 細君相對時相語
두 귀밑 쑥대강이에 눈발이 만 층일세 / 雙鬢刁騷雪萬層

병중의 정신은 건강할 이 드물 테지만 / 病裏情神少健强
인간에 쇠한 창자 보할 약물도 없는데 / 人間無物補衰腸
가련도 해라 늙은 여종은 정도 많아서 / 可憐老婢多情思
따끈한 술 큰 잔을 마시라고 권하누나 / 煖酒深杯勸一嘗

이 장면에서 '병풍'도 등장하는데 병풍이 그냥 장식용이 아니라 '난방용'이었음은 다음의 시에서 구체화됩니다.

사가시집  시류(詩類)
설중(雪中)에 우연히 읊다

주렴에 흩날리는 눈발 뿌옇게 쌓일 제 / 一簾撲撲雪糢糊
잠시 병풍 둘러치고 화로 끼고 앉아서 / 乍掩孤屛擁火爐
조용히 술 마시어 얼굴 반쯤 붉은 채로 / 穩酌香醪酡半面
고양이와 함께 한가로이 잠을 청하네 / 閑眠分與小狸奴

차를 마시는 이야기는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다음의 시에서는 '약탕' 역시 방에 있던 화로에 데워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가시집 
시류(詩類)
갑신년 중동(仲冬) 경신일에

약 사발과 차 솥 올린 화로는 따뜻한데 / 藥甌茶鼎火爐溫
병든 삭신이 괴로워 야기도 혼매하구나 / 病骨酸辛夜氣昏
부러워라 아동들은 아무 관섭할 일 없어 / 羨殺兒童無管事
밤새도록 안 자고 시끄러이 담소하는 게 / 通宵不寐笑談喧
조선시대 카페트- 조선철(朝鮮綴, 일본소장)

또한 난로뿐 아니라 '지로'(地爐, 즉 코클과 비슷한 것)도 종종 등장합니다. 다음은 역시 조선전기의 문인인 최립(崔岦, 1539년 ~ 1612년)의 [간이집] 기록입니다.

간이집
지로(地爐)

움푹 패인 땅속에다 멋진 화로를 만들다니 / 爲爐因地坎然幽
대장장이 할 일 없어 부끄러워 어떡하나 / 巧冶無功定覺羞
틀도 본래 번듯해서 솥과 냄비도 올려놓고 / 自有典形安鼎銚
불을 때도 이마 그을릴 걱정이 전혀 없소 / 能當焦爛受薪棷

겨울에 친하고 여름에 소원한 차이는 있다 해도 / 冬親夏遠情雖異
저녁에 덮었다 아침에 불 살려 끝도 없이 이용하네 / 暮槪朝燃用不休
이 불씨를 근시 중에 누가 활활 일으켜서 / 近侍何人能撥火
온 누리에 따스한 바람 감돌게 해 주실꼬 / 却吹餘煖遍蒼丘

역시 같은 시기 문인인 장유(張維, 1587년∼1638년)의 [계곡집]에도 이런 기록이 있지요.

계곡집
고한행(苦寒行) 중

수염에 고드름 주렁주렁 문 닫고 혼자서 신음할 뿐 / 閉戶孤吟氷滿髭
불기 없는 땅난로(지로)와 썰렁한 무명 이불 / 地爐無焰布被冷
모진 바람 밤낮으로 오두막집 몰아치네 / 獰風日夕搜茅茨

언뜻 떠오르는 서울 도성 귀한 집들 / 忽憶長安豪貴家
따스한 봄빛 은총 한량없이 받으면서 / 恩光浩蕩春無涯
여우 털옷 입고서 수탄의 술에 벌개진 채 / 孤裘獸炭醉耳熱
눈이 오든 서리 오든 끄떡이 없으리라 / 不怕人間有霜雪
지금까지도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코클(코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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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상에서 보듯,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재 온돌방을 기조로 삼는 '한옥' (즉 조선후기 한옥)의 난방 시스템은 아마도 17세기초중반, 더 엄밀하게 좁혀 1623년에서 1640년대정도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12세기중엽 혹은 최대 13세기이전에는 아주 부분적인 곳에 구들이 쓰였고, 13세기에서 16세기말까지는 노인과 병자를 위한 온돌방이 대부분 마루방이던 구조와 합쳐지는 이른바 정형한옥개념이 자리잡습니다 (이때도 지금같은 한옥은 아니지요).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이런 시스템이 유지되다가 오늘 소개한 시기에 현재처럼 온돌이 대부분의 방을 차지하는 쪽으로 흘러간 듯 합니다. 그리고 이당시까지의 온돌은 지금처럼 펄펄 끓는 온도가 아닌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난방시설도 조선전기까지는 두터운 깔개나 조선철(카펫), 그리고 병풍과 난로(화로)등을 마루방에 깔거나 설치하고 지낸 것입니다. 이 화로에 조선전기까지의 선조들은 술이나 차를 데워마시기도 하고, 밤을 구워 먹기도 한 것입니다 (화로야 20세기초까지도 방에서 자주 사용합니다만).

언젠가 그 목적에 따라 이런 모습의 새로운(역설적으로) 한옥방들도 개발되면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시원한 마룻방과 침상을 갖춘 방도 만들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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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이전 난방관련 포스팅들:



Hidden 카라 좋은 곡- 엄블렐라 & 못지킨 말 (2010, 2007) 음악

K-pop하면 여러 장르가 있지만 역시 가장 알려진 것은 '아이돌'이겠지요. 특히 본격적으로 이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H.O.T.와 S.E.S.라는 남녀 아이돌그룹이 90년대말 등장하면서 생긴 것이니...(물론 케이팝이라는 단어자체의 유래는 보통 홍콩스타티비등에서 1995년경 김건모, 디제이덕등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코너명으로 봅니다만). 하지만 2000년대 초반 한동안 아이돌그룹은 R&B 가수등에 밀리면서 침체기를 겪습니다.

여자아이돌에 한정지어 말하자면, 그러다가 얼마전 해체한 원더걸스가 텔미열풍을 일으키면서 재점화, 아시다시피 소녀시대와 쌍두마차, 그러다가 카라가 고생끝에 3인자느낌으로 올라서면서, 현재 활동하는 후배 걸그룹 폭발기를 이끌어내죠.

사실 이런 동아시아의 아이돌문화는 80년대 세이코 마츠다가 시발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겁니다. 솔로, 듀엣, 3인조, 4, 5인조, 떼거지(...), 그리고 유닛, 졸업개념이 모두 이 시기에 정립된 것이지요. 이 당시 컨셉은 청순함, 친숙함, 그리고 명랑함 등이 대세였습니다.

SES나 핑클, 그리고 후배인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등도 색감은 다르지만 청순함과 발랄함등으로 모두 시작했었죠.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이후 이렇게 걸그룹전성기를 맞아 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여자아이돌하면 떠오르던 이런 느낌대신 어느새 '섹시함'을 강조한 가수들이 많아집니다. 그것도 어느정도라야하는데 솔직히 천박할 정도의 컨셉으로 스스로 자박자승하는 경우도 숱하게 나오게 됩니다.
각설하고, 최근 아쉽게 해체한 카라는 이런 면에서 원래 아시아권 아이돌의 컨셉과 특히 곡의 색감이 가장 충실했던 가장 최근의 걸그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도 초창기에는 이런 곡이 많았지만 소.시의 경우 Gee를 마지막으로 컨셉이 바뀌었고, 원걸은 텔미이후에는 사실 계속 성숙한 느낌의 곡들을 히트시켰구요 (박진영이니 뭐.)

현재의 케이팝을 이끈 이 제 2세대 걸그룹들중 가장 '아이돌스러운' 곡을 많이 낸 그룹은 단연 카라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80년대 일본아이돌문화가 기저에 깔려있는 일본대중들에게 특히 카라가 히트했던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구요.

아무튼, 대표곡들도 좋지만 사실 카라는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곡들이 유독 많습니다. 흥행면에서 망했던 1집에서도 좋은 곡이 많고, 오늘 소개하는 2010년의 [엄브렐라]라는 곡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마 걸그룹들중 S.E.S.와 더불어 후일 가장 많이 리메이크가 쉽게 될만한 곡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그룹이라 생각합니다.

카라- Umbrella (2010년)


카라- 못 지킨 말 (2007년)




오주연문장전산고 발견연대 미스터리 역사

간혹 위키라든가 네이버 백과사전, 혹은 언론기사를 보다가 근현대시기 발견되거나 시작된 문화적 아이템에 대한 궁금증이 들어 개인적으로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돌아다니는 정보와 연대가 불일치하는 미스터리한 경험을 하고는 하는데, 예를 들어 예전에 김용환 화백이 그린 거북선 도록그림의 연대가 미스터리해서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발견연대는?

이규경(李圭景, 1788~ 1856년)의 조선후기 백과사전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가 발견된 경위는 역사나 특히 책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 아는 유명한 '육당 최남선의 군밤포장지발견사건'입니다. 다음은 한국위키에 실려 있는 정보:

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처음 편찬된 뒤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이 책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된 것은 1930년대, 당시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를 만든 최남선(崔南善)이 어느 날 우연히 군밤장수의 포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를 극적으로 발견하여 이 책을 입수했는데, 이때 입수된 책은 모두 60권 60책으로 이미 몇 장은 없어진 상태였고 그 편집 체제도 일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학자들은 원래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현재의 분량보다 더 많은 분량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위키
편찬된 19세기초이후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이 저서가 1930년대가 되서야 빛을 보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책이 발견된 것은 30년대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으로 발견자는 '최남선'이 아닙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겨레 기사: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이었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은 광교 근처를 지나다 군밤을 산다. 한데 군밤을 싸 주는 종이가 뭔가 이상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고서였다. 그는 군밤 포장지를 뭉치로 샀다.
권보상은 책을 광문회로 가져갔다. 광문회는 1910년 조선의 고전 문헌을 간행하기 위해 최남선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단체다. 고전에 해박한 지식인들이 책을 보고 몰려들었다. 검토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이 났다. 이규경은 저 유명한 이덕무의 손자다. 이덕무는 섬세하고 치밀한 산문이 장기지만, 박학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이규경은, 문장은 그의 조부보다 결코 나을 수 없지만, 박학으로 말하자면 조부를 능가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란 긴 이름의 책이 그 증거다.

여기 보면 1920년대 중반 권보상 (權輔相, ?-?)이라는 사람이 군밤을 사다가 포장지를 보고 고서임을 간파, 자신이 일하던 '광문회'로 이를 가져가서 분석, 그 진가를 파악했다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가 1910년에 최남선이 만든 한국 고전 연구기관이었기에, 최남선이 직접 군밤을 사먹다가...라는 현재 넷상에 떠도는 이야기가 생겨난 듯 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 1920년대 일화도 약간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딱 이시기 신문에 이런 기사가 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1925년 한겨울 12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1925.12.12 동아일보


확대해 보죠.
이 부분을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즉 고구마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 쓴 사설인데, 여기 중간에 '문헌상 우리가 본것을 말하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북저변증설"이라는 챕터에 관련 어원자료가 있다는 설명을 길게 쓴 것입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1920년대중반인 1925년, 권보상이 아니라 이미 동아일보의 칼럼니스트가 이 저서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보상이 발견했다하더라도 이렇게 언론에서 가져다 쓸만큼 금방 고서의 내용이 공개되었을리도 없습니다 (현재도 이렇게 빨리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당시 흥미를 끌 사건이었을 이 '권보상이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발견했다는 뉴스' 자체는 아예 없습니다.

더군다나 1930년의 동신문기사를 보면 '조선소설사'라는 기획기사에서 이미 '오주연문'(오주연문장전산고) 내용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되려면 권보상이 발견했다는 이 저서의 전질이 꽤 판독이 되어 언론사에 알려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1920년대 발견되었다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파편적인 내용은 19세기 문헌들에 간헐적으로 부분부분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저 고구마기록이 나오는 "북저변증설"은 필자가 파악하는 한 19세기의 다른 문헌에서 나온 예가 없습니다. 

즉 (현재 시점으로는) 1925년에 동아일보가 가져다 쓴 저 북저변증설의 내용은 [오주연문장전산고]가 발견된 지 꽤 시간이 지나고, 내용이 알려진 시점이 아닌 한 나올 수가 없는 기사로 추정됩니다. 권보상 선생의 생몰년대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조선광문회 역시 1910년대에 이미 존재하던 기관이니 이 에피소드는 1920년대가 아니라 1910년대의 일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조금 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군밤 에피소드'는 적어도 20년대 당시 기사에는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럼 언제 이 에피소드가 최초로 등장할까요? 꽤나 시간이 흐른 십수년 후 1939년 새해 첫날 기사에 이런 것이 등장합니다.


1939.01.01 동아일보

읽어보면 '연전에 권보상이 동현을 지나다가 군밤장수 아이가 가지고 있던 휴지속을 자세히 보니, 세자성서한 것이 18권에서 19권이나 되는 저서인지라 30전을 주고 구입했는데...' 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나오는 연전이라는 뜻은 "年前" 연전- 즉 몇년 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정확한 이 사건의 연대는 없지요. 1910년대인지 요즘 알려진대로 20년대인지, 혹은 군밤 일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혹은 10여년 흐르면서 뭔가 살이 덧붙여진 것인지 역시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군밤에피소드 자체는 있었던 일로 믿고 싶습니다. 있었을 겁니다(!) 로망...). 

확실해 보이는 것은 '최남선의 군밤 일화'기록은 위키에서 삭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핑크 클라우드- Head song (1984) 음악

핑크가 들어가는 밴드이름은 핑크 플로이드가 당연히 떠오르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밴드는 하나가 더 있다. 

어제 소개한 기타리스트 Char가 80년대 만들었던 하드락밴드 핑크 클라우드가 주인공. 3인조로 크림~레드제플린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밴드였는데, 82년에서 85년까지 활동, 6장의 제대로 된 하드락 앨범을 쏟아낸 명밴드로 하드락이지만 그루브감이 충실해서 중독성이 강하다.

오늘 소개하는 곡 "헤드 송"은 특히나 레드 제플린의 "Tramped under foot"의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정규앨범에는 없고 베스트앨범에만 삽입되어 있다.

Pink Cloud- Head song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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