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제플린- Kashmir (Physical Graffiti, 1975) 음악

역시 여러 믿을만한 사람들이 추천해 준 책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하다. 어제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저)을 끝냈는데 역시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책이었다. 어려운 책은 아니고 개설서보다 약간 더 들어간 정도로 술술 읽힌다.
Kashmir Great Lake

간만에 한국사가 아닌 원제국의 방대한 이야기를 읽고나니 머리가 한번 확 트이는 느낌. 며칠간 몽고의 초원지대를 누빈 것 같은 느낌인데, 이 감성을 끝낸 기념으로 한 곡.

자꾸만 레드제플린의 대곡 [캐시미르]가 떠오른다.

왠만하면 보통은 스튜디오 버전을 먼저 올리는데, 레드제플린은 예외적인 존재.


Led Zeppelin- Kashmir (1975년)



Oh, let the sun beat down upon my face
나를 향해 있는 태양을 압도해줘
And stars fill my dream
별들에게는 내꿈을 채워줘
I'm a traveler of both time and space
난 시공간을 여행하는 사람이지
To be where I have been
To sit with elders of the gentle race
This world has seldom seen
They talk of days for which they sit and wait
All will be revealed
내가 그 세계에선 좀처럼 볼수 없었던 명문가의 노신사와 같이 앉았던곳에서
날마다 그들은 앉아서 기다리며 모든것이 드러나게 될것이라고 얘기했어

Talk in song from tongues of lilting grace
Sounds caress my ear
경쾌하고 고상한 말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그들의 소리가 내귀에 즐겁게 들려
And not a word I heard could I relate
The story was quite clear
하지만 아주 순수했던 그 이야기에는 나와 관련된 말은 들을수 없었지

Ooh, baby, I been blind
Oh, yeah, mama, there ain't no denyin'
난 날았어요....마마...아무런 저항이 없던 곳에서
Oh, ooh yes, I been blind
Mama, mama, ain't no denyin', no denyin'
난 날았어요 아무런 저항없이.......

All I see turns to brown
As the sun burns the ground
태양이 지상에서 타오를때,모든것이 갈색으로 변하는것을 보았지
And my eyes fill with sand
As I scan this razor line
이 불모지를 유심히 쳐다보면 ,내 눈엔 모래로 가득 찼어
Can I find, can I find where I've been
내가 있었던 곳을 찾아보려 노력하면서, 찾아보려고 애쓰면서,

Oh, pilot of the storm who leaves no trace
Like thoughts inside a dream
꿈속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자취하나 없이 떠나버린 폭풍의 비행사여,
Leave the path the led me to that place
Yellow desert stream
날 이끌었던 사막의 시냇물이 있던 곳을 조심해
Like Shangri-la beneath the summer moon
I will return again
As the dust that floats finds you
Will move and search Kashmir
카슈미르로 여행할때,
난 여름달 아래의 Shangri-La로 틀림없이 돌아올거야

Oh, father of the four winds fill my sails
Cross the sea of years
With no provision but an open face
Along the straits of fear
바람의 신이여,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다를 건널때,공포와 난국에 직면했을때,
내 돛에 바람을 가득 받게 해주세요

Oh, when I want, when I'm on my way, yeah
And my feet wear my fickle way to stay
Ooh, yeah yeah, ooh, yeah yeah, but I'm down
Ooh, yeah yeah, ooh, yeah yeah, but I'm down, so down
Ooh, my baby, oh, my baby
Let me take you there
Come on, oh let me take you there
Let me take you there
나에게,내 길에 있을때
내가 길을 보았을때,넌 머물러
날 그곳에 데려다줘..

김현철- 그런대로 (32℃ 여름, 1992) 음악

김현철의 데뷔앨범이자 '춘천가는 기차'가 실린 1집 [동네]와 주류인기가수로 발돋움한 '달의 몰락'이 수록된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사이에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에 와선) 그다지 회자되지 않는 2집이 이 [32도씨 여름]이다.

1992년에 발매된 이 작품은 풋풋한 감성이 돋보인 데뷔앨범과 본격적으로 재즈의 색감을 입히기 시작한 3집사이에서 그의 디스코그래피중 가장 신디사이저를 많이 사용한 곡들이 돋보인다. '그런대로', '누구라도 그런지'등은 잊을 수 없는 곡들.

특히 이 '그런대로'가 나왔을 때, 당시 한국가요계에서는 보기 힘든 분위기의 묘한 도시적 감성을 건드리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이런 감성은 굳이 붙이자면 한국적 시티팝을 이끌어간 대표적 가수로 그를 (커리어 내내) 인식하게 만들었다. 김현철을 제외하면 이런 도시적 감성은 '정원영', (당시의) '윤상', 그리고 굳이 더 꼽자면 '빛과 소금'의 일부작품에서나 만날 수 있었고, 엄밀히 말해 지금도 사실 만나기 힘든 종류의 감성이다.

이 곡은 들으면 정말 90년대 점점 '새끈해지던' 대도시 서울의 느낌을 언제나 전해준다.

김현철- 그런대로 (1992년)


그런대로- 김현철

하늘은 문득 
하늘은 문득 주저 앉았네
하늘은 문득 주저 앉았네

그녀는 웃고 
그녀는 웃고 나는 울었네
그녀는 웃고 나는 울었네

그런대로 살아가고 그런대로 
그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고

2절
학교 앞 길은 
학교 앞 길은 비에 젖었네
학교 앞 길은 비에 젖었네

그녀는 안녕이라 말하네 
그녀는 안녕이라 말하네
그녀는 안녕이라 말하네

그런대로 살아가고 그런대로
그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고

간주
그런대로 그런대로 
내가 얼만큼 아픈지 몰라
내가 얼만큼 아픈지 몰라 

내가 얼만큼 너를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꾸만 안녕


1800년의 냉면과 돼지고기 테이크 아웃 (Take out), 그리고 냉면배달부의 역사 음식전통마

이건 돼지고기 수육을 테이크아웃형태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배달문화가 유명한 한국이지만 이 문화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최근, 멀리가도 80년대정도부터,의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일반화'가 된 것은 그럴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음식배달의 기원은 꽤 오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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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과 돼지고기

우리 생활사의 보고중 하나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임하필기]에는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측근 신하의 본보기

순묘(純廟)가 초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상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 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 일은 측근 시신(侍臣)이 자못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다.

이것은 순조(純祖, 1790~ 1834년)의 즉위년 즉 1800년 기록입니다. 붉은 색부분을 보면 군직에게 '국수 (면 麵)'을 사오라고 시킵니다. 즉, 엄밀히 말해 '배달'은 아니고, '테이크 아웃'입니다. 이 뜻이 뒤에 나오는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문맥상 '냉면'의 완제품을 테이크아웃해오라는 것인지, 혹은 국물을 따로 마련해두고 면만 사오도록 한다는 것인지는 명확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당시 최소 '면'만을 싸주는 이런 형태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또한 눈여겨 볼 것이 '돼지고기'부분. 즉, '돼지고기를 사 왔는데" 이걸 냉면에 넣어 먹기위해 사왔다는 장면입니다. 18세기중엽이라고 '생돼지고기'를 냉면에 넣어 먹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즉, 굽거나 삶거나 한 형태의 돼지고기를 사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위의 사진형태와 비슷). 다만, 돼지고기는 조선전반에 걸쳐 그다지 먹지 못하거나 안먹던 고기이므로 이 기록은 나름 흥미로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 황윤석(黃胤錫, 1729~1791년)의 [이재난고] (속칭 이재일기)에 나온다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768년 7월
과거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 

자 이 번역만을 본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배달'입니다. '냉면을 시켜 먹었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다만, 흔히 그렇듯 한문 원문을 보아야 그리고 앞뒤 문장을 보아야 정확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넷상으로 이재난고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포기하고 우선 소개합니다.
이재난고 (현재 전북대 이재연구소등에서 번역중인 50권의 저서로, 완역되지 않았기에 아직 제공되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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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갱 (북촌갱)의 자택배달 시스템

위의 냉면외에도 지금으로 보자면 '해장국' 혹은 일종의 '육개장' 비슷한 음식을 아침에 재상댁등 고위관직자의 저택으로 말 그대로 '배달'하는 시스템이 있었음이 1800년대 중반 기록에 등장합니다. 시기로 보자면 위의 냉면기록보다 약 50년~100년 후대이죠.

최영년(崔永年1856~1935년)의 [해동죽지]에는 이런 귀중한 기록이 전합니다.  

해동죽지(海東竹枝) 
중편(中編) 
음식명산(飮食名産)

廣州城內善調此羹造法 
광주성(현 남한산성) 내의 (가게들이) 효종갱을 잘 끓인다.
菘心爲主菽芽松栮標高牛肋陽骨海蔘全鰒和土醬終日煮熱
배추속대와 콩나물, 송이버섯과 표고버섯, 소갈비, 해삼, 전복을 토장에 섞어 종일 푹 곤다.

夕天以線裹缸擔送于京城時宰家時値曉鐘
밤에 이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로 보내 새벽종이 울릴 때면 재상집에 이른다.
羹缸猶溫爛酒啜羹甘澹香膩 
국 항아리가 아직 따뜻하고 속풀이에 더없이 좋다.
名擅一世或目之以北村羹 
한때 이름을 날렸으며, 어떠한 사람은 이를 북촌갱이라고도 한다.


새벽曉 종鍾국羹, 즉 새벽종이 울릴때 먹는 '국'. 이것은 말 그대로 집으로 배달하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입니다. 다만, 일부 고위층에게만 허용되던 시스템 같습니다. 무려 소갈비, 표고, 해삼, 전복이 다 들어간 따뜻한 해장국물을 '속풀이 용'으로 새벽에 보내주는 시스템.

[해동죽지]는 최영년 당대의 기록을 담은 것 뿐 아니라, 그 전대부터 내려오던 정보를 취합해서 정리한 것이므로 더 오래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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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초~30년대 배달시스템, 그리고 장난전화질

'신문'이 나오는 20세기 이후 최초의 '배달광고'는 1906년의 대규모 한식당이었던 '명월관'의 광고입니다. 바로 아래.

1906년 명월관 광고 (만세보)

바로 같은 해인 1906년에 창간된 [만세보]에 실렸던 것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월관 광고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시면 가까운 곳,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는 현재의 배달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지요. 먼곳,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관광, 회갑연등의 잔치요리를 배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위는 간략한 버젼이고 실제광고는 더 깁니다 (아래사진).

명월관은 현재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 있던 대규모 식당으로 다음의 사진이 아마도 위의 광고시절일 겁니다.
명월관 (일제강점기)

30년대 사진도 있는데 벽돌식 건축물로 탈바꿈했던 것 같습니다..
1930년대 명월관

사진으로 확인되는 오래된 배달시스템은 1930년대에 찍힌 '사정옥'이라는 식당의 냉면배달부들입니다. 현재로 치면 당연히 '오토바이'에 해당하는 '자전거'를 갖춘 모습이 벌써 발견되고 있지요.
이런 배달부들을 가리키는 고유어도 있었습니다. '중머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의 시스템이 지금 못지 않았음은 1933년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떤 사건의 기획기사인데 이 중 '골목모퉁이 냉면집에서 냉면 두 그릇 (많지도 않죠 지금처럼 소량도 가능)을 주문, 정희라는 여성의 집으로 배달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1933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마지막으로 이런 배달시스템을 악용, 할 일 없는 일부 인간들이 하는 '장난전화질'이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다음은 1938년 기사.
1938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 글을 보면 대량으로 냉면을 주문하고 가져가면 주문한 사람은 사라지는 짓이 자주 발생, '키네마 활동사진관'이라고 하는 사진관에서 황금면옥이라는 냉면식당에 25그릇을 주문한 거짓주문 사건이 나옵니다.

이에 '동면옥'의 주인인 김기봉씨가 기어이 집요한 추적을 단행, 이런 장난을 한 '임택석'이라는 소년을 잡아내는 장면.

우리에겐 배달의 역사도, 배달 장난전화질의 역사도 꽤 깁니다 (...)


스윙 아웃 시스터- The Kaleidoscope affair (Kaleidoscope World, 1989) 음악

스윙아웃시스터는 주로 빌보드에 진입했던 "Breakout"등의 곡으로만 알려진 감이 있는데, 이들의 진면목은 이런 앨범의 숨겨진 수작들에서 볼 수 있다.
소피스티 팝하면 역시 이런 이미지 (1980년대 사진 by Francois Baudot and Jean Demachy)

이 곡은 이들의 2번째 앨범인 [Kaleidoscope World]에 수록된 곡으로, 연주곡인데 이 곡의 분위기야 말로 당대를 풍미한 소피스티 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소피스티 팝하면 왠지 라운지음악정도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스윙아웃시스터의 곡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클래식한 영화적 상상력을 북돋우는 느낌마져 주곤 한다. 특히 2001년에 발매된 이들의 통산 7집인 명반 [Somewhere deep in the night]는 이런 분위기의 끝판왕.

지금도 이들의 음악을 듣는 건, 80년대 그 상업적 물결속에서 등장한 잠깐 유행했던 이 장르의 타밴드들과 달리 이런 곡들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며, 또한 지금도 소피스티팝의 대부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앨범제목과 Kaleidoscope이란 것은 한국어로는 '만화경' 즉 들여다보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거나 여러개로 보이는 기구를 말하는데,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이미 등장.
19세기 만화경

Swing Out Sister- The Kaleidoscope affair (1989년)



고려 쌈밥기록의 가장 오랜 기록은 14세기일까? (한국의 쌈밥 역사) 음식전통마

최근 TVN의 인기프로인 알쓸신잡에 한국인의 '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죠.

음식박사인 황교익씨가 이렇게 운을 띄우고,
바로 18세기의 이덕무 기록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 1793년)는 18세기 중엽의 인물입니다. 그럼 쌈문화가 조선후기나 되서야 기록을 찾을 수 있느냐. 사실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통 잘 알려진 것은 '고려시대'부터 쌈을 먹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언론을 찾아보면 가장 오래된 기록을 14세기중반 원대의 인물인 양윤부 (楊允孚, 1354년 전후출생) 의 기록을 처음으로 들곤 합니다. 

2015년 조선일보 기사

위의 기사는 2015년의 것, 이런 식이지요. 과연 14세기 중반의 저 기록이 처음일까요?

이덕무와 비슷한 연대의 문인 이삼환(1729~1813년)의 저서인 [수미산방장]의 기록을 보면 다음의 구절이 나옵니다.

少眉山房藏
田園雜詠

畦菜
胡瓜生子蒜生孫。蘿葍蔓菁葉幷根。生菜和平包飯冷。文獻通考。高麗人以生菜包飯食之。
露葵甘滑作羹溫。靑舒野韭千條嫰。紅嚲番椒百朶繁。物物登盤香美具。山翁不慣食鷄豚。

文獻通考 문헌통고에 따르면 
高麗人以生菜包飯食之 고려인은 생나물로 평평하게 펴서 찬밥을 싸먹는다.

즉, 쌈의 역사가 최소 고려시대까지 올라감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이 기록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위의 조선일보 글과 일치하지요. 

그런데, 이 부분은 이삼환이 지은 것이 아니라, 문헌통고(文獻通考)라는 책을 인용했다고 나옵니다. 이 책은 무엇일까요? [문헌통고]는 송말(宋末) 원초(元初)에 살던 마단림(馬端臨, 1254~?년)이라는 사람이 중국 고대(古代)로부터 송나라 (정확히는 남송의 영종(寧宗, 1194~1224년)대) 까지의 제도를 정리하여 348권으로 엮은 것입니다.

내용은 기본적으로 송대의 기록인 [통전]을 따르면서, 현재는 전하지 않는 [송조국사(宋朝國史)]나 [송회요(宋會要)] 등 여러 사료를 널리 참고하여 보충하였기 때문에 통전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송나라 제도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입니다.

13세기의 인물인 마단림이 남송의 영종대 (1194~1224년)까지의 기록을 옮겨 정리한 것이므로 최소 이 고려쌈밥의 기록은 12세기~13세기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이 기록이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孚)가 14세기 후반에 쓴 [난경잡영(灤京雜詠)]에 나오는 '고려 생채 맛을 다시 말하네(更說高麗生菜美)'의 주석인 '고려 사람들은 생채(生菜)로 밥을 싸 먹는다(高麗人以生菜裹飯食之)'구절이 최초로 설명하는데 이는 틀린 것입니다. 

양윤부는 이 부분을 본문이 아닌 주석으로 (바로 위 조선후기 문헌인 [수미산방장]처럼) 썼습니다. 즉, 이전 문헌인 [문헌통고]를 인용했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따라서 '고려쌈'에 대한 첫 기록은 최소 한세기전인 13세기 길게는 12세기 (남송 영종대)까지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덕무와 비슷한 시대인 18세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다산시문집]에도 쌈밥에 대한 기록이 두어번 등장합니다. 개인취향이겠지만 안에 넣는 내용물까지 등장하는 구절은 다음.

다산시문집
장기 농가(長鬐農歌) 중

萵葉團包麥飯呑 상추잎에 보리밥을 둥글게 (경단처럼) 싸서 삼키고는 
合同椒醬與葱根 고추장에 파뿌리를 곁들여서 먹는다 

마치 요즘 충무김밥처럼 먹는군요.
=====
중국내 한국식당 해바라기의 쌈

마지막으로, 쌈문화를 위키에서 찾아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고려시대까지 기원이 올라가며, 의외로 쌈의 첫 시식자는 여성이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쌈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이 당시의 쌈은 고급 음식으로 취급받았다. 쌈이 하나의 취식법으로서 정리가 되고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퍼진것은 조선시대."

위키백과의 정보를 다 믿을 수는 없고, 또한 중국측 기록이 정확히 어느 저서인지를 밝히지 않아 모르겠지만, 고려대까지 중국인들이 야채쌈을 먹었다하더라도 확실히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야채 쌈문화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계사년 하 만력 21년, 선조 26년(1593년)
7월 4일 

왜적 수천 명이 악양(岳陽)의 촌락을 분탕질하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하고 포(砲)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뒤의 적이 잇달아 이르러서 산을 수색하여 죽이며 약탈하고 산음(山陰)의 적이 그 수효가 심히 많았는데 함양으로 가서 사근역(沙斤驛) 마을을 분탕질하고 돌아왔다.
○ 명 나라 장수 부총병(副總兵)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가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서 낙상지 등의 유부(留府) 관가(管家)를 문초하여 진주를 미처 구원하지 못한 죄를 책하였다. 명 나라 군사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숫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을 쓰며 생채(生菜)를 먹지 않고 닭을 가장 즐겨 먹어 피도 버리지 아니하였다. 중략

명나라 군사들이 생야채를 먹지 않는다는 기록이 1593년 나오고 있지요. 몽골제국시기(원대)에는 천만채라고 해서 고려의 상추가 질이 좋아 들여와 먹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확실히 고려대까지는 대륙에서도 일부 쌈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만, 최근 한국의 쌈문화가 다시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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