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기아/해태 타이거즈 엠블럼 발견 스포츠전통마

흔히 (저를 포함) 타이거즈의 최초 엠블럼을 이걸로 기억하고 있지요.
 그런데 기록을 찾아보니 아니었습니다. 아래는 1982년, 즉 프로야구 원년 1월 6일자 동아일보기사입니니다. 즉 프로야구 개막 약 3개월전의 기사죠.


1982.1.6(타이거즈심볼 최초기록)

여기보면 '성난호랑이' 마크를 심벌마크로 결정했다라는 짧은 기사와 함께 최초의 타이거즈 엠블럼이 실려 있습니다. 타이거즈 로고는 그대로지만 호랑이는 약간은 어설픈 모습이지요.
최초의 타이거즈 엠블렘

기본적인 구도는 비슷합니다만, HAITAI TIGERS라고 영문으로 되어있어, 현재 알려진 해태엠블럼의 '해태 타이거즈'한글과도 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영문글자체를 현재 기아 타이거즈 로고로 쓰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좋네요. 강해보이고. 

아래가 올해부터 쓰는 새로운 폰트인데 기아로 인수이후 최고로 마음에 듭니다만, 위의 글자체도 멋지네요.
참고로 이 최초의 호랑이 심벌은 동아일보외에 다른 신문에도 같은 날 실립니다. 다음은 경향일보 82년 1월 6일자.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해태타이거즈하면 떠오르는 그 엠블럼은 언제 채택된 걸까요? 위의 최초 심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다음은 같은 82년 1월 22일의 기사. 즉, 고작 18일후의 기사입니다.
1982.1.22일자 단신뉴스

기사를 보면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는 지난 1월초 만들었던 엠블렘 (상징, 심벌)을 22일 다시 만들어 발표' 라고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별것 아닐수도 있지만, '구단 역사상 최초'라는 상징성이 있는 녀석이니만큼 올드데이나 챔필 역사관에 전시하는 것도 좋을 듯 하군요.

이순신 자취찾아라 & 100년만의 선화공주발굴 (2017.9.21) 역사뉴스비평

흥미로운 발굴뉴스가 하루에 두 건이나.
첫 뉴스는 베스트댓글이 흥미롭네요. 하긴 명량대첩 420주년이라고 이름까지 붙이고 발굴을 하니... 제대로 거북선파편이라도 찾으려면 패전한 곳위주로 찾는 게 맞을 듯도 합니다. '전승지'발굴보다는...

"이순신 자취 찾아라"…명량 바닷속에서 5년째 유물 찾기


두 번째는 선화공주와 백제무왕릉 전격 검토. 작년 발굴결과 대왕릉에 모셔진 인골이 신라여성의 것으로 추정, 일제강점기 이후 제대로 다시 발굴한다고~.

100년 만에 선화공주 ‘전설’ 캔다



역대 아니메 오프닝 & 엔딩 Best 모음영상 애니메이션/만화 & OST

80년대~최근까지 아니메 오프닝-엔딩중 좋은 곡들을 모은 영상입니다. 극장판은 빼고 TV와 OVA작품만 있군요. 

거의 Japanimation전성기인 80-90년대 작품들로 굵직굵직한 작품도 많지만, 작품자체의 인기나 평에 관계없이 OST가 좋았던 작품들도 있습니다.

추억어린 곡들로 꽉 차있군요.

Best Anime Opening & Ending




The end of the British World and the redefinition of citizenship in Aotearoa New Zealand 독서

이번 주에 나온 뜨끈한 논문.

영국의 자치령이던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북섬)의 70년대 대영제국의 완전종말과 함께 찾아온 정체성찾기와 Citizenship에 대한 보고인듯. 현재도 영국연방소속이지만...

The end of the British World and the redefinition of citizenship in Aotearoa New Zealand, 1950s–1970s
Jatinder Mann, 2017, 9.
 
ABSTRACT
In the 1950s, Aotearoa New Zealand very much identified itself as a British country and an integral part of a wider British World, which had the UK at its heart. However, by the 1970s, this British World had come to an end, as had Aotearoa New Zealand’s self-identification as a British nation. During this period, citizenship in Aotearoa New Zealand was redefined in a significant way from being an ethnic (British) based one to a more civic founded one – which was more inclusive of other ethnic groups and apparently Māori. This article will argue that this redefinition of citizenship took place primarily in the context of this major shift in national identity. After having established the context of the end of the British World in Aotearoa New Zealand (with a focus on the UK’s application for entry into the 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 and the British military withdrawal from ‘East of Suez’), it will explore the British Nationality and New Zealand Citizenship Act of 1959 and the Citizenship and Aliens Act of 1977 to illustrate the ways in which citizenship became more inclusive of other ethnic groups in the country. It will then study the Māori Affairs Amendment Act of 1967 and the subsequent Māori Affairs Amendment Act of 1974 to highlight the ways in which citizenship in Aotearoa New Zealand also attempted to incorporate Māori, but this proved highly problematic and at this stage, unresolved.

아주 최근의 이런 국가와 구성원의 정체성연구가 고대-중세 동아시아에 어떤 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도 하나의 흥미로운 논제인듯하다.

뉴질랜드의 숨겨진 역사 다큐


1945년 당시 뉴질랜드 숭어양식에 대한 짧은 다큐영상 



또다른 뿔달린 고려 쌍뿔(양각)야차, 그리고 강진사문안석조상의 뿔도깨비 역사전통마

2년전 [뿔달린 18-19 세기 양각도깨비/야차 (해외유출문화재)]라는 글을 통해 한국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도깨비처럼 생긴 (그러니까 바로 요즘 논쟁인 일본의 오니처럼 생긴) 조선시대 야차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럼 뿔달린 조선후기 야차-도깨비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마치 현재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도깨비와 그대로 닮아 있는 양각야차 (허리의 옷과 몽둥이같은 긴 막대까지)입니다.". 

오늘 글에서 필자는 [청구야담] 16세기 조선설화인 '동이설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그 우두머리로 나오는 '야차'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 이 텍스트가 꽤 중요해 보이는 발견을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의 배경설명을 우선 짧게 소개하자면, 우리에게 요즘 알려진 혹은 문화재청쪽에서 홍보중인 '나무방망이를 들고 털이 많고 순박한 이미지의 뿔없는 도깨비'는 일단 그 실체가 매우 희미합니다. 즉, 회화쪽에서는 한 점도 이런 생김새의 도깨비그림은 전하는 것이 없고, 또한 텍스트 사료에서도 '뿔이 없다'라는 구절 역시 없습니다 (뿔이 있다라는 가시정보가 묘사된 것도 드물지만,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 역시 전무합니다). 또한 '나무방망이를 들고', 혹은 '털이 많고'등의 정보 역시 전혀 없습니다 (털 묘사는 가끔 구비문학대계등의 20세기 이후 '구전민담'의 채록담에 등장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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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그 구체적 형상의 부재 혹은 자유로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도깨비 생김새는 조상들이 제대로 기술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도깨비'라는 개념자체가 워낙 광범위한 지라 (도깨비 불, 산도깨비, 인도깨비 등) 필자가 보기에는 '도깨비= 모든 이물/요물'에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해 온 감이 있습니다. 최근 일부 매체에서 홍보중인 '야차, 도깨비, 이매, 망량'등의 구분은 정말 최근의 분류, 구분일뿐 그 생김새나 성격에 대해 우리 조상들은 명확한 Definition을 규정한 적이 없다라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입니다.

특히 지괴류에 대한 조선중기 이후의 탄압으로 인해 '요괴류에 대한 회화'가 극히 드물어지면서, 중국이나 일본, 유럽등과 달리 구체적인 괴물류에 대한 형상묘사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민간 회화에 나오는 삼두매나 오두귀등 벽사기능의 부적 회화는 예외입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오니'는 불교의 '야차'의 모습에서 생김새를 인용, 발전해 간 것이고 '뇌공신' 역시 중국쪽의 새모양 뇌공신과 다른 북을 짊어진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회화등으로 많이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여러 매체에서 활발하게 쓰이는 원동력이 되어 왔지요.

도깨비라는 개념은 그에 비해 워낙 (다시 말하지만) 광범위한지라 형상보다는 그 행동이나 교훈적 맥락이 강조된 담론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근대화를 겪으면서 '어린이 동화'등 조선시대 텍스트와는 다른 '회화가 강조된' (가시적 형상이 필요한) 텍스트가 많이 출간되면서 우리의 도깨비도 '가시적 개념화'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의 오니를 가져다 차용,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 모습 (뿔달리고 방망이를 들고 무서운 형상의)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21세기 들어 꽤 자주 보이는 도깨비 담론이자 홍보입니다. 그리고 필자는 바로 이 지점을 몇 차례 비판해 왔습니다. 그간의 비판이 여러 우리 문헌사료에 전하는 '뿔달린 요괴류'에 대한 소개와 귀와면등의 분석이었다면 오늘은 잠깐 소개하고 지나친 '야차'와 도깨비간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 발견한 고려 양각도깨비/야차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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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에 나오는 우두머리 도깨비, 야차 뿔도깨비

우선 예전에 쓴 글인 [한국 도깨비는 뿔과 방망이가 없었을까?]에서 최초로 소개한 16세기 배경의 '동이설화'에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한국 도깨비 연구에 매우 중요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일부 중요부분을 다시 발췌 소개해 봅니다.

청구야담 중

참 이상도 하다." 잔뜩 망설이는 즈음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니, 광희문(光熙⾨) 밖에 들불 야화(野⽕) 수십 자루가 환하였으며, 또 영도교 아래에도 들불 수십 자루가 환하게 비치었다. 양편의 들불이 서로 호응하여 꺼졌다 밝아졌다 하면서 동쪽으로 내달으며 변화무쌍하더니,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이 일제히 몰려드는 것이었다. 동이는 몸을 감추고 엎드려서 그 하는 양을 엿보았다. 기기괴괴한 형상의 무리 40여 귓것 귀(⻤)들이 둘러싸고 앉았는데, 그 중 상석에 앉은 귓것은 머리에 뿔(⾓)이 하나 돋쳤고, 붉은 털에 푸른 몸뚱이를 한 '야차(夜叉)'라 하는 물건이었다.

야차가 '적각(⾚脚, 붉은 다리 도깨비)'을 부르자 김첨지가 나와 염동이를 불러다 소개했다. 살쾡이 고기를 좋아하며, 이를 포식한 귓것들은 동이에게 자신들을 동이의 집 구석진 곳에서 대접해주면 이익이 있을 것이라 했다. 동이가 승낙하자 그것들은 비밀로 하자고 하고는 닭 울음이 들리자 취해 비틀거리며 흩어졌다. 동이가 집으로 돌아와 술과 고기를 준비하자 매달 삼경쯤 귓것들이 귀한 물건들을 뜰에 쌓았는데, 10년이 지나자 동이는 광장한 부자가 되었다. 

동이는 이제 그것들을 떼어내고자 하여, 적각에게 '횡재하면 상서롭지 못하다'는 핑계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논했다. 적각은 눈물을 흘리며, '주육을 장만해 대접하다가 모두 취한 틈에 커다란 전복에다 두더지를 잘 삶아 내놓으면, 그 자리에서 녹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동이가 그대로 했더니 귓것들은 중얼거리며 구슬피 탄식하다가 모두 죽었다. 그러자 빗자루며 뼈다귀들이 자리 위에 낭자했다.

한 가닥 맑은 바람에 등불이 까막까막할 뿐이었다. 대개 도깨비 따위가 침울하고 더러운 기운으로서 물건에 붙어 형체를 이룬 것이었다. 동이는 그것을 모아 태워버렸다. 얼마 후 적각이 찾아와 이제 작별이라며 천 냥을 주고 사라져 그 후로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 이후로 세상에서 부자를 말할 때 염동이를 일컫게 되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소비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이 설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도깨비류'의 우두머리로 '야차'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일본 오니가 차용한 그 야차말이지요).

동이는 몸을 감추고 엎드려서 그 하는 양을 엿보았다. 기기괴괴한 형상의 무리 40여 귓것 귀(⻤)들이 둘러싸고 앉았는데, 그 중 상석에 앉은 귓것은 머리에 뿔(⾓)이 하나 돋쳤고, 붉은 털에 푸른 몸뚱이를 한 '야차(夜叉)'라 하는 물건이었다.
고려시대 양각야차 모습

그런데 흔히 우리 지괴류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야차와 도깨비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야차는 불교에 나오는 것이고 도깨비는 우리 민담에 나오는 순박한 존재다'라는 식의 주장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당장 올해인 2017년 2월에 나오는 이런 기사를 보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도깨비와 야차, 이매, 망량이 다른 존재라는 건지, 같다는 건지, 도깨비는 순박한데 불교의 도깨비는 야차니 무섭다는 건지... (이 글은 정진희라는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의 글입니다).

야차-불교의 도깨비
풍요 가져다주는 심술궂지만 순박한 신
정진희 2017.02.07  
   
우리나라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깨비는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그렇다고 서양 동화에 나오는 요정은 더더욱 아닌 뭐라 꼭 집어 설명하기 곤란한 전설에 나오는 잡신 가운데 하나였다. 터무니없고 까닭 없는 일을 도깨비장난이라 하는 걸 보면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는 허무맹랑한 캐릭터에, 불로 혹은 빗자루로 변하는 걸 보면 둔갑술도 꽤 하셨나 보다. 세상이 변하면서 우리네 삶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던 도깨비가 요즈음 핫한 드라마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죽음으로 인도하는 무서운 저승사자도 친근감마저 느끼게 되니 참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하고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의 힘은 대단하다.

설화서 야차로 비유되는 도깨비, 숲에 살며 초자연적인 힘 갖춰
불교에 흡수돼 불법수문장 변모, 모든 세계 두루해 인간 변신도

우리나라 도깨비는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다. 무섭고 심술궂지만 순박하고 인간에게 속을 만큼 착하다. 중국에서는 어떤 짐승이나 사물이 오래되면 정령으로 변하고 그 정령이 도깨비로 된다고 하며 일본 도깨비 ‘오니’는 뿔이 달리고 가시가 박힌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주: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선에도 쇠몽둥이기록도 있고 뿔 기록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뿔 달린 도깨비로 생각하는 이미지는 실은 일본의 오니에 가깝다. 우리나라 설화에서도 청년이 밤새 씨름한 도깨비는 날이 밝자 피 묻은 빗자루로 변했다 하니 중국과 도깨비의 개념이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매우 단편적인 시도입니다. 위의 동이설화 역시 빗자루로 변하지만 '야차'를 두목도깨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박기용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대장경’에 전하는 도깨비 관련 설화는 총 195화에 달하고 있다. ‘불설미증유인연경(佛說未曾有因緣經)’에서 도깨비는 ‘지옥의 죄를 마치고 아귀로 태어나 이매(魅), 망량(魑魅) 따위의 도깨비로 돌아다니기 8000겁을 지나서 아귀의 죄를 마치고는 6축(畜)의 몸을 받았습니다’라 하여 생물이 오래된 정령이거나 아귀의 일종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에서 하늘과 땅의 정령들과 수명이 다하여 죽은 신선이 다시 살아나서 도깨비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설화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주로 야차(藥叉, yaksa)로 비유되는데 원래 야차는 숲이나 나무에 사는 정령으로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힘을 갖추고 있다. 야차는 자비심 많은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공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신이 되기도 한다. 불교로 흡수된 야차는 악신에서 부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고 지키는 수문장으로 변화한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 의하면 12신장이 주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교대로 감시한다. 12신장은 12야차대장이라고도 부르는데 ‘약사경’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에 대하여 법문을 설하실 때 그 소식을 들은 12야차대장들이 그 설법회에 참석하여 큰 감화를 받고 ‘약사유리광여래의 명호로 공경, 공양하는 모든 사람을 옹위하여 일체의 고난에 벗어나게 하고 바라는 소원을 이루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이에 의거하여 야차12신장은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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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일부 주장과 달리 2017년 현재, 한국문화진흥원에서 제공하는 문화컨텐츠닷컴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야차는 인도의 『베다(Veda)』에 나오는 신적 존재이다. 야차란 명칭은 산스크리트어 야크샤(Yaksa)의 음역으로 약차(藥叉)라고도 쓴다. 약차(藥叉), 열차(悅叉)라고도 한다. 야차란 본래 놀라게 한다는 뜻인데 거기에 민첩, 용맹, 교활, 비밀 등의 뜻이 보태졌다. 볼 수 없고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두려워하게 되는 귀신과 같은 성격을 가졌는데, 공양(供養)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보(財寶)나 아이를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후에는 귀신(鬼神: 羅刹)의 하나로 여겨졌고, 불교에서는 불교를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다. 
인도의 신화시대에는 북방 산악지대에 사는 쿠베라(Kubera, 財寶神)의 권속으로서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었지만, 불교에 들어와서는 8부중의 하나가 되어 나찰 등과 함께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 되었다. 위덕, 포악, 귀인, 사제귀 등으로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차 역시 다른 8부중들처럼 특정한 고유 명사는 아니고, 비사문천의 권속인 귀신을 총칭하는 말이다. 불법 수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북방의 수호 또는 재보를 지키는 성격도 아울러 갖고 있다.

현재 우리들이 야차라고 할 때는 보통 악귀(惡鬼)라는 의미로 쓴다. 염마졸(閻魔卒)이나 민간에서는 두억시니라고도 한다. 불경 속에 나오는 용모가 추하고 사람을 해하는 악독한 귀신(鬼神) 야차들도 깨우침을 얻고 선한 일을 하여 신들의 수하가 되는 자들도 많다. 그 대표적 존재가 금강야차이며 12지신도 12야차장군이었다고 한다.

동양문화사에 있어서 어떤 문제이든 간에 불교(佛敎) 이전의 것이냐 불교 이후의 것이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로 불교가 끼친 영향력이 강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서 도깨비문화에 있어서도 불교 이전의 도깨비냐 불교 이후의 도깨비냐는 문제가 중요시 된다. 불교 이전의 세계에서 중국은 도깨비를 귀신(鬼神)이라고 했고, 한국은 도깨비라고 불렀고, 일본은 오니라고 불렀다. 가장 전형적인 도깨비로서 뇌공(雷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중국 사람들은 뇌신(雷神)이라고 불렀고, 한국 사람들은 벼락장군이라고 불렀고, 일본사람들은 가미나리사마라고 불렀다. 여기서 일본말 표현이 가장 깊은 관심을 끄는데 가미(神), 나리(嗚), 사마(님)는 보림, 신울림(신?)하는 님이라는 뜻이 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용신인면(龍身人面)의 괴물상으로 나타나 있지만 결국 삼국이 다 뇌공(雷公)을 신(神)으로 모셨다는 점은 삼국의 뇌신신앙(雷神信仰)만 살펴보아도 확실하다. 신으로만 믿고 있던 도깨비가 불교전래의 뒤를 따라서 불교전통의 야차(夜叉)나 나찰(羅刹)같은 흉물로 급변하고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는 악마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런데 동양전통의 특이한 도깨비신상이 야차나 나찰의 흉측한 모습으로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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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원래 야차는 불교에 나오는 하위신개념이자 포악했지만 나중에는 불교에 들어와서는 비사문천의 권속이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동아시아 삼국에 들어와서 중국에선 귀신, 일본에선 오니, 한국에서는 도깨비로 불렸다는 것이라고 버젓히 소개되고 있지요. 이에 대해서는 또 다시 여러 담론과 논쟁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도깨비나 야차는 개념자체가 한국사회에서 전혀 그 순서부터 정리되거나 동의된 바가 없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이 주장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야차와 도깨비'에 대해서 일부 매체나 전문가가 이야기하듯 (혹은 도깨비와 귀면와) 무 자르듯 '두 개념은 다른 존재'라고 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도깨비'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현재 (현재 돌아다니는 어떤 정의도 필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설명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도깨비는 광의의 모든 한국의 이물/괴물류'라고 정의내리고 그 하위개념으로 야차, 두억시니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필자의 나름대로의 결론입니다 (이 경우 '동이설화'도 자연스레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고유의 도깨비개념과 불교의 야차개념등의 혼합도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그런데, 이런 필자의 개념을 더 확실하게 굳혀주는 '석조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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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사문안석조상

전남 강진군 작천면에 가면 퇴동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 퇴동마을의 마을회관옆에 높이 1미터 22센티의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현재 많이 마모되어 가고 있는 이 비각에는 매우 흥미로운 도깨비-야차에 대한 단서가 될 조각이 새겨져 있지요.

우선 2004년의 지역지인 [강진신문]의 탐방기사중 일부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문화재]작천 사문안 석조상
민간신앙에 불교와 유교문화가 복합된 석조상
2004.9.

불교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문안 석조상은 높이 122㎝, 폭 50㎝, 두께 28㎝, 대좌지름 155㎝로 석상은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상후하박형으로 자연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작천면 갈동리 퇴동마을에 위치해 있는 석상은 155㎝의 둥그런 받침돌위에 윗면에는 8판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석상 앞면과 좌?우면에 13개의 상들이 새겨져 있다.

석상의 전체의 상들을 볼때 귀면(귀신의 얼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얼굴들과 눈, 볼, 입, 코등을 강하게 부각시킨 형상이 귀면을 연상시킨다. 왼쪽에 서있는 모양으로 만든 입상의 다리들이 상당히 야위어 도깨비 다리 모습을 연상시키며 왼손으로 물건을 잡아 어깨에 걸친듯한 형상도 방망이를 든 도깨비를 연상시킨다. 

왼쪽의 비스듬한 곳에 앉아 있는 형상은 승려의 모습에 가깝다. 석상의 수많은 귀면들은 액을 막아주고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기능으로 추측된다. 석조상을 만든 사람이 사문안구역을 관장하던 사찰이었던지 사문안 구역의 일반인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문화요소의 측면에서 볼때 민간 신앙적인 요소들과 불교적 요소들이 복합된 유형물로서 두 문화의 유교와 불교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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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보면 이 작은 비각에 도깨비 형상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직접 비각을 볼까요.
강진 사문안석조상

위의 사진을 보면 정면에 차례로 세 가지 모습의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금 가까이 가볼까요.
이 중 왼쪽의 두 형상이 바로 도깨비입니다. 더 왼쪽은 뿔이 없고, 가운데 것은 양각(쌍뿔)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에 나오는 맨 오른쪽의 형상은 '불교적 형상'으로 수행자 혹은 불상입니다.
다른 사진입니다. 가운데 형상과 맨 왼쪽은 분명 '불교적'색채가 덜 합니다. 즉, 당대 민간신앙의 도깨비나 이매류의 모습을 형상화한 한국에서는 매우 드문 소중한 작품이 됩니다. 가운데 도깨비는 분명 양각(쌍뿔)도깨비입니다. 또한 구부린 손은 방망이류를 들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바지 역시 오니의 호랑이거죽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동화집에서 볼 수 있는 바지처럼 보이지요.

뿔이 잘 안보이신다면 요즘 마모된 사진보다 더 이전의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이 비각이 현재의 보호누각안에 들어서기 이전 즉 방치되어 있던 시절의 사진입니다 (어렵게 구했네요).
예전 사문안석조상 사진

확대해 봅니다. 흉측한 인상과 우뚝 솟은 양쪽 뿔, 그리고 무언가를 들고 있는 손이 잘 보입니다.
이 사문안석조상에 대해 가장 자세한 설명을 이미 '한국문화유산답사회'란 곳에서 책으로 내 놓은바가 있었습니다. 다음의 묘사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앞 부분의 두 입상 가운데 조금 위에 새겨진 것은 뿔이 나고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눈은 치켜 올라갔다. 뽀족한 송곳니가 입가에 보인다. 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었고 왼손은 옆으로 내렸는데 손가락이 네개뿐이다. 상의는 벗은 듯하고 배부분의 U자 무늬는 옷주름이라기보다 배 근육을 표현한 듯 보인다. 주름이 많이진 헐렁한 바지를 입고 버선처럼 코가 나온 신을 신었으며 왼쪽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입상도 윗도리를 벗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모습인데 허리띠를 둘렀다. 오른손을 가슴에 왼손을 허리께에 두고 있으며 역시 같은 신발을 신었다. 

이들의 모습은 불교적인 분위기보다는 도깨비에 가깝다. 얼굴, 방망이등이 도깨비이며 다리의 모습도 왼쪽다리가 약하다는 통념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옆부분에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아예 왼쪽다리를 구부려서 오른쪽 다리에 붙인 모습의 입상도 있다.

그러나 다른 상들에서는 조금씩 불교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특히 좌상은 불상이나 수행자처럼 보인다. 또 앞부분 위쪽에는 가릉빈가를 표현한 듯한 새의 모습도 있다. 대좌에 연잎무늬가 새겨진 것과 더불어 볼때, 이 입석상은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도깨비 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사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

마지막으로 이 석조상에 대한 '문화재청'측 자료를 보지요.
사실 이 석조상은 이미 여러 책에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아래는 e-book에 나오는 한 구절. 이미 '뿔이 있는 도깨비'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문맥상 아주 최근의 글이지요.
이미 강진의 박물관에는 이 모습을 형상화한 모형까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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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뿔달린 도깨비의 형상이란 점도 중요하지만,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것은 이 비각에 두 이질적 존재, 즉 민간신앙의 도깨비와 불교적 존재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부분입니다.

문화요소의 측면에서 볼때 민간 신앙적인 요소들과 불교적 요소들이 복합된 유형물로서 두 문화의 유교와 불교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물로 판단된다

아직 본 작품은 조선시대의 것으로만 추정될 뿐 정확한 시대를 알려주는 연구는 아직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불교'와 '민간신앙'의 합쳐짐이라는 측면은 즉, 일본도깨비인 오니가 그 형상을 야차에서 따온 것과 매우 흡사한 맥락을 보여줍니다. 

불교에서 야차의 모습은 이미 몇번 소개했듯 뿔달린 형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18-19세기 조선민화에 나오는 양각 도깨비(야차)

불교쪽뿐만 아니라 왕실기록이나 위에 보이는 민화등 민간에서도 이미 뿔달린 존재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다음은 중종실록에 나오는 1515년 중종의 꿈이야기 중 일부.

又夢見, 또 꿈에 보길
廢主率兩角鬼, 폐주가 양각귀 (쌍뿔귀신/도깨비)를 거느리고 와서
問中宮所在, 중궁이 어딘지 물었다.

1515년, 궁중내의 곡식, 노비등을 관리하는 직책인 내수사의 여비 (여자종)중 '억천'이란 여자가 요사스러운 이야기를 많이 하고 다니는데, 굵은체의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고 문초끝에 자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폐주'란 바로 전대임금인 '연산군'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꾼 꿈에 이 연산군이 "뿔이 둘 달린" 귀신을 이끌고 와서 사람을 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것이죠. 이 역시 16세기초 당대 요괴 혹은 도깨비류의 생김새에 대한 당대 조선인들의 하나의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외에도 '다섯갈래 뿔'이 달린 요괴아이가 등장하는 등, "뿔 난" 귀신/요괴/도깨비 류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인식은 분명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의 민화는 당사주해상명부도에 나오는 양각 도깨비모습입니다.

조선민화 해상명부도중 양각도깨비류

조선 당사쥬의 양각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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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오니와 도깨비

필자의 추론입니다만, 우리 선조들에게는 이미 이렇듯 '뿔달린 귀매류'에 대한 이런 인식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즉, 불교의 전래이후 (그렇게 따지면 삼국시대까지 올라가지만) 어느 시점과 한반도의 어느 장소에서 '야차가 도깨비형상과 섞이거나' '야차의 형상을 도깨비화'하는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나오는 사문안석조상이나 18-19세기의 저 민화가 그걸 보여주고 있지요.

그럼 현재 도깨비의 정형으로 보이는 호랑이가죽까지 입은 누가봐도 오니처럼 보이는 형상은 언제 정립되었을까요? (그래서 이런 반작용을 현재 가져오고 있을까요?). 필자의 추론으로는 이렇듯 '뿔달린 귀매류'에 대한 인식이 일부 존재하던 조선인들에게 또/혹은 도깨비의 '형상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지배적이던 당시 사회에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적 존재인 불교의 '야차'를 기본으로 그들의 '오니 형상'을 이미 에도시대에 활발히 정립시킨 일본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그대로 거부감없이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야차'나 '뿔달린 괴수류'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하던 조선사회에 형상에 대한 집착이 덜하던 도깨비담론을 일본의 오니가 유입되면서 그 모습이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호랑이가죽까지 입은 정형적인 오니의 모습은 지양하고 없애는 것에 찬성하지만, 엄연히 우리의 소중한 문화이자 오니보다 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졌다 볼 수 있는 도깨비중 '뿔 도깨비'의 모습에 가까운 우리의 야차까지 일본문화로 오해, 배제하는 우를 범해선 곤란합니다.

야차는 야차고 도깨비는 도깨비다라는 식의 현재의 근거없는 담론에도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당장 저 석조상의 모습은 이런 식의 담론에 반기를 들고 있는 훌륭한 가시적 사료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삼국-고려-조선시대의 '야차'들의 모습은 우리의 도깨비들중 선조들에게 '뿔 도깨비'류의 인식을 제공해주었을 수 있습니다. 현재처럼 아무런 관심도 이용도 없는 모습 (종교화로 치부)은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려시대 아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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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고려불화의 양각야차 (양각도깨비) 모습들

오늘은 해외에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그 모습이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쌍뿔야차/도깨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들은 2007년 간행된 강소연선생의 [읽어버린 우리 문화유산]에 나오는 해외의 고려회화중 일부입니다.

일본의 오니와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와 관계없이 이 모습들은 우리 선조들에게도 그랬고 우리에게도 역시 소중한 자산입니다. 현재 '가시적 회화류'의 절대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사회의 지괴류담론에서 이런 모습들을 등한시한다면, 그리고 이 야차들과 도깨비류에 대한 접점연구를 게을리하는 것은 감히 말씀드리건데 직무태만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처음 그림의 오른쪽을 보면 쌍뿔의 야차가 보입니다. 범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몽둥이를 허리에 찼으며 화려한 문양의 아랫도리를 입고 있습니다.
다음은 더 무섭습니다. 뿔은 더 날카롭고 인상은 더 험상궂습니다. 허리에는 호랑이 가죽류를 걸치고 있습니다.
다음 역시 쌍뿔입니다. 고문기계를 돌리는 모습.
모든 야차가 뿔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밧줄을 당기는 세 놈중 위의 두 놈은 뿔이 없고, 아래는 짧은 뿔이 달려 있습니다.
아래 두 녀석은 뿔의 존재가 불분명한 놈들. 하지만 험상궂네요.
아래녀석은 날카로운 뿔이 양 옆으로 투구처럼 솟아 있습니다.
다음 두 사진은 없는 녀석들.
결론

몇 번이나 말씀드렸듯 모든 문화연구는 귀납적 접근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는 이렇다' '**는 ***와 달라야 한다'라는 선언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이제는 우리 문화사연구에서 조금씩 사라져 주길 기대합니다. 그때 비로소 열린 눈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그리고 보이는 그대로 보는 눈이 열리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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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그때 이런 녀석도 눈에 들어오겠지요...(고려불화의 이질적 요괴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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