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4)- 고려 흥왕사 興王寺 & 안화사 安和寺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흥왕사 (興王寺)- 비공식 한국역사상 최대사찰


고려 문종 10년(1056년)에 짓기 시작, 12년 만에 낙성된 대사찰이 흥왕사입니다.

흥왕사는 개경에 있는 사찰은 아니었으나 그 규모가 너무나 웅장하여 화제가 되었던 사찰입니다. 고려의 전성기였던 문종대에 국가의 재력을 집중하여 만들었던 문종의 원찰이고, 양주에 만들어졌습니다. (주: 제목을 비공식 한국역사 최대사찰이라고 한 이유는 화엄사/불국사등 원래 3000칸이 넘었다는 '설'이 있는 사찰들때문입니다. 흥왕사는 설이 아닌, 최근의 발굴로 실제로 하나의 궁궐같은 건축물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흥왕사는 놀랄만한 규모는, 사찰의 규모만  2,800이었고, 사찰에 딸리게 되는 원院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았다는 것으로 알수 있습니다 (참고로 미륵사-황룡사의 규모가 수백칸입니다). 원 중에서 가장 큰 원이었던 홍교원의 경우 전당과 낭무도 갖추고 있었고 160여칸 에 이르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흥왕사는 적어도 3000칸, 크게 잡아 3500칸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대규모 사찰이었던 셈입니다. (홍교원은 그저 흥왕사에 속하는 원이었을 뿐이지만 지금 현존하는 한국땅에 남아있는 어느 사찰보다도 더 규모가 컸습니다- 규모면으로는 상상이 안가는 수준입니다.)


우선 고려도경에 묘사된 흥왕사부분원문번역입니다: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다가 있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18∼1085)연간에 내린 협저불상 (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 또는 불경을 말함)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옹 고려숙종) 이 숭녕(崇寧 송 휘종 연호 1102∼1106)때의 사자(使者) 유규 (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읍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 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안에 있고, 보제(普濟)・도일(道日)・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안에 있는데 정족(鼎足)을 이루고 솟아 있다. 


흥왕사의 구조는 특이하게도 이탑이금당식 가람입니다. 거대한 8각목탑이 (석탑이 아닌 목탑이란 정보는 발굴자료에 명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운데 두개 자리한 구조이지요 (아래 구조도가 있습니다). '거대한 8각목탑'의 어감이 잘 안오신다면 고려후기 (1348년)에 만들어진 경천사지 10층석탑을 비교해보시면 약간은 감이 오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경천사지석탑은 8각석탑도 목탑도 아닙니다- 댓글로 도와주신덕에 월정사팔각9층석탑도 형태면으로 참조하시라고 덧붙입니다). 


혹은 후일 소개할 정릉사 8각목탑이나 청암리사지 대목탑의 약간 작은 버젼으로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목탑터에는 한 변이 5.69미터이고, 기단높이가 1.5미터인 8각형 기단터가 있고, 두 탑터의 중심거리는 63.5미터입니다. 같은 8각목탑인 청암리사지의 목탑터가 10.2-4 미터 (한변)이라 할때, 흥왕사의 두 목탑은 30미터급이었으리라 추정 (자료부족으로 대강하자면) 해 볼수 있겠습니다.


현재 중앙박물관의 얼굴이 된 경천사지 10층석탑- 대리석

형태참조- 월정사 8각9층석탑

흥왕사 구조도: 특이하게도 이탑이금당식 가람입니다

[출처] 가람배치의 시대변화 - 고려~조선


이 사찰이 만들어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열렸던 국가행사인 고려 팔관회는 고려사상 최대의 규모였다고 전해지니 흥왕사는 정말 여러모로 화려한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선종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징엄(澄嚴)이었습니다. 


팔관회에 관한 설명입니다: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12년(551년)에 처음 개설되어 이미 400여년의 전통을 이어온 불교축제였다. 당시 팔관회는 스님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예불과 범패, 불경 강설 등의 행사를 열어 부처님께 발복(發福)을 기원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확대됐다.

고려시대 팔관회의 의례절차와 내용은 <고려사> 예지(禮志)의 가례잡의(嘉禮雜儀)편의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음력 11월14일에 소회(小會)가 열리고, 다음날에 대회(大會)가 거행된다. 소회일에는 왕립사찰(王立寺刹)을 방문해 선조를 모신 진전(眞殿)을 참배했다.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했고, 그 후에 괘불을 걸고 법고춤, 나비춤, 바라춤, 범패, 삼회향놀이 등의 잔치가 벌어졌다.
 
팔관회가 거행된 법왕사는 황성 안에 세워진 사찰로 팔관회 뿐 아니라 궁중연회와 재회(齋會) 등이 펼쳐진 무대공간이기도 했다. 지금의 국립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사찰이었다. 이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국사절의 연주와 경축 인사다. 송나라는 물론, 동여진, 서여진, 탐라국, 철리국(鐵利國,말갈), 불나국(弗奈國), 대식국(大食國) 등이 사신을 보내왔다. 또한 이들 국가의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따라서 팔관회는 국제적 문화교류행사이기도 했다.
 
팔관회는 음력 11월에 실시됐다. 한 번도 개최시기를 바꾸지 않았다. 중동(仲冬, 음력 11월)과 맹동(孟冬, 음력 10월)에 각각 개경과 서경에서 열린 범국가적이고 국제적인 겨울축제였다. 팔관회 의식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문종 때에는 팔관보(八關寶)가 설치됐다.
 
팔관회 당시 임금이 출궁하여 행사장에 이르기까지 이동하는 행렬과 구간은 지금의 연등행렬의 원형을 제공한다. 왕은 궁궐의 대관전(大觀殿)을 출발해 의봉문(위봉루)을 거쳐 법왕사에 이르는 거리를 이동했으며, 왕의 행렬 앞뒤로 다양한 장엄물이 수행했다.
 
<고려사> 권72 ‘팔관노부(八關鹵簿)에는 행렬대 구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예법에 따라 화려하게 장신한 의식용 기물인 깃발, 악기, 부채, 지팡이, 우산을 들고 왕이 탄 초오련을 호위했다. 또한 이때 행렬을 하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가물을 움직이면서 한바탕 신나는 축제를 연출했다. 초오련 행렬대의 팔관의위 3726명, 팔관노부 548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팔관회의 왕의 행차행렬이 대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http://www.ibulgyo.com/archive2007/201005/201005201274375740.asp)

(사진은 팔관회를 미니어쳐로 간략히 표현한 2010 세계 등축제의 작품)
(사진은 팔관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등축제 모습-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연등축제때는 도성전체가 이런 화려한 장관)

연등회에 대한 설명: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제19권에 실린 ‘丁巳年上元燈夕敎坊致語口號(정사년상원등석교방치어구호)’라는 글에는 연등회의 광경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침 상원등석을 맞아 성대한 풍악 의식을 베푸니 칠정육합(七政六合)의 생황은 그 소리가 천상의 풍악보다 우렁차고, 구광사조(九光四照)의 등불은 그 그림자가 별빛처럼 찬란하도다 … 봉등(鳳燈)이 불꽃을 토하여 은꽃처럼 빛이 나고, 보름달의 모습은 둥근 옥쟁반 같다. 10리의 향기로운 바람이 비단 옷에 스며들고, 구중(九重)의 춘색은 신선을 취하게 하도다.”
 
고려 중기 문인인 최자가 지은 <보한집> 권 상(上)에도 연등회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날 저녁이 되면 관청들은 각각 비단으로 아름답게 만든 언덕 모양의 장식대를 거리 이곳저곳에 설치하고 군대들도 길을 따라 화려한 비단을 길게 연결하여 놓는다. … 음악이 다투어 울려 나오고 수많은 등불들이 하늘에 이어져 대낮같이 밝다. … 궁전은 밤이 깊어 고요하고 별은 높이 떠 총총하니 요란한 풍악소리는 마치 공중에서 나는 듯하다.”
 
또한 <고려사> 권 40에는 공민왕 13년(1364년) 연등회를 앞둔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 막대에 내건 기(旗)를 만들어 온통 거리를 누비며 큰 소리로 외치고, 미포(米布)를 구하여 그 경비를 충당하는 풍속이 성행하였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했다.”

다시 이러한 연등회와 팔관회가 열렸던 흥왕사로 돌아가봅니다.흥왕사의 건축물로는 문종 24년에 건립된 3층짜리 대건물인 자씨전을 비롯, 8년뒤인 32년 조성된 은 427근과 금 144근을 들여 안이 은으로 된 금탑을 만들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석탑이 2년뒤인 3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고려사 권 9 <세가> '문종 37년 6월 정묘조'에는 '궁궐보다 더 사치스럽고, 사찰의 담장은 왕성과 비등하리만큼 높고, 또 황금으로 탑을 쌓아 모든 시설이 이와 맞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흥왕사의 또 하나의 가치는 바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요나라, 송나라, 일본의 불서들을 총정리해서 만든<속장경>에 있습니다. 선종 3년 후가 송에 다녀온 후 귀국하여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요․송․일본에서 수집해온 불경 및 경서 등 4,000여권을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후, 즉 의천이 귀국 후 국가의 지원아래 교장도감을 설치, 각국의 불서를 비롯하여 삼국과 통일신라 및 고려의 불서 (4,000여권)를 정리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드렸듯, 의천대사는 흥왕사의 제 1대 주지가 된 인물입니다.


2010년 12월 5일 (바로 불과 3개월전) 뉴스입니다: 


개성고려박물관 학술연구사들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사들과 함께 최근 개성시 상도리에서 고려시대 유적인 흥왕사터를 발굴했다고 평양방송이 5일 전했다. 평양방송은 흥왕사가 문종왕 때인 1067년 세워진 고려시대의 가장 큰 절이라며 터의 너비가 800m, 길이가 400m로 넓이가 32만㎡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대규모 주춧돌, 석탑자리, 전(塼.바닥에 깐 벽돌), 기와, 도자기 등이 나왔다고 전했다. (참고: 황룡사지 담장내가 288m, 남북 281m의 규모 (8만 1천- 이것도 엄청난 규모입니다. 그보다 두배인 미륵사지가 무려 16만 6천4백㎡입니다). 무엇보다 경복궁의 100프로 복원시 크기가 34만 평방미터입니다 (현재는 (1차복원 완료 1990-2010) 당연히 완전복원이 아닙니다). 사실이라면 한국최대의 건축물중 하나가 될 문화재입니다. 흥왕사자체가 워낙 정치와 관련이 깊던 사찰인지라, 문종 24년 (11세기)에 이곳에 성을 쌓았고, 흥왕사가 남쪽의 궁궐역할(離宮)을 하기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설이 맞다면 경복궁만한 크기가 어느정도 일리가 있어보입니다).


흥왕사에서 나온 유물중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흥왕사명 청동은입사 운룡문 향완(興王寺銘靑銅銀入絲雲龍文香椀)" (국보 214호, 1289년작)- 이 대사찰의 당대위상을 알수 있습니다.

확대 (부분)

참조링크: http://simjeon.kr/xe/?mid=seoul&page=6&document_srl=30563


아래 사진이 380미터 높이의 진봉산. (아래 지도에서 보이듯) 그 밑 남쪽 기슭에는 마을이 있고, 그 아래로 길이 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흥왕사 터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진이 인터넷으로 찾은 유일한 흥왕사터에 근접한 사진입니다).

흥왕사터의 위치 (30번) (앞서 소개한 개성의 대사찰 보제사는 태조10찰중 하나로 6번, 다음에 소개하는 안화사가 19번입니다)- 개성시내에서 떨어진 쪽에 있습니다. 태조 10찰은 앞으로 통일되면 큰 문화유산이 될 건축물들이라 봅니다.

흥왕사의 최후와 관련된 글중 부분을 발췌합니다:

흥왕사 역시 몽고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에 따른 참화를 피하지 못하. 전후복구와 원에 대한 과중한 공물 등으로 인하여 절의 복원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으나, 1273년 원 황제가 원나라 군사들의 사원 출입을 금지시키고 조정에서 사원을 수리하기 위해 사원조성별감을 설치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수리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때 흥왕사도 상당부분 복구하긴 하였으나 완연한 예전의 모습을 찾지는 못했다. 


또한 왕실의 원찰로 지어진 그 성격상 정치적인 색깔을 많이 띄기도 하였다. 의천이 주지를 지낸 이후 왕실출신의 지주가 계속 역임하였으며, 개경 교외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그 자체로 정치활동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갔던 공민왕이 돌아와 궁전이 수축될 때까지 머물렀었고, ‘흥왕사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흥왕사의 난’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면 1361년(공민왕10년)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피난을 떠났다가,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김용, 최영 등이 물리친 후 개경으로 돌아와 흥왕사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은 왕지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이게한 후 다시 죄를 뒤집어씌워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야밤에 50여명을 이끌고 공민왕을 죽이려고 흥왕사로 쳐들어갔으나 왕과 얼굴이 비슷한 안도치가 대신 죽고 후에 최영 등이 토벌하여 평정되었다.
현재는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성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1070년 건축된 이 성은 길이가 약 4km정도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출처:http://mybox.happycampus.com/wenli/613973)



안화사 (安和寺, 개성 송악산 산중)

고려의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바친 친척과 부하의 명복을 빌기 위해 930년 8월에 세운 절입니다. 원래 창건당시에는 안화선원이라는 이름이 었으니, 1118년 예종때 크게 중창하고 안화사로 개칭합니다. 보제사가  도시 한 복판의 가장 웅장한 사찰이었다면, 이 안화사는 산중의 절경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찰이었습니다. 산 중에 위치했다고 현재 우리가 볼수 있는 조선의 사찰과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릅니다. 절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는 당시 왕이 머물던 제궁(齊宮)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안화사같은 경우 사실 고려의 분위기보다는 송나라의 분위기가 훨씬 많이 났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알 수 있는 이유는 서긍이 안화사를 가장 자세히 묘사해놨기 때문입니다.


안화사로 가는 길은 높은 소나무가 양쪽길에 서있는 삼엄하고 웅장한길이었고, 맑은 물이 옆으로 흘러내려 아름다움을 더했다고 합니다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편 언덕에는 두 개의 정자가 세워 져 있었습니다. 여울 무더기에 반쯤 잠겨있는데, 이 모습이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문각이라는 누각이 나오고 시냇물을 끼고 또 몇리를 들어가면 안화사의 문인 안화문이 등장합니다. 서긍은이 밖에도 안화사 내부의 모습에도 굉장히 공들여서 표현했는데, 읽다보면 서긍이 얼마나 심취해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도 그럴게 안화사의 현판은 당시의 송나라 태사였던 채경의 글씨이고, 신한문과 능인전의 현판은 송나라 휘종이 직접 쓴 글씨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겁니다.


게다가 서긍은 안화사에 대해서 다른 사찰과 다른 묘사를 해놓은 것이 눈에 띄는데 대강 이러합니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깨끗하고 달다.그 위에 정자를 세웠고
방문이 있는데 안화천이라 이름붙혔다.화훼, 죽목,괴석을 심어
감상과 휴식을 즐길 수 있으며 토목과 분식은 중국(송나라)의 제도를
따라했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워서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서긍 <고려도경>

(기본출처블로그: http://levi.tistory.com/233 -정보가첨)


현재도 예전의 주춧돌등이 웅장하게 남아있습니다. 다만 20세기들어 북한이 두번의 중수(30년, 89년)를 해서 건물들이 복원됩니다. 하지만, 예전의 신비로운 느낌은 거의 사라진 모습입니다.



참조: 흥왕사와 안화사에 대한 학구적 기록

興旺寺.(興王寺).

 前無後無한 大規模 寺刹이였으나 지금은 殘影뿐임. 進鳳面 興旺里 德物山 西麓에 있었으며 文宗시 着工하여 12年(1055年부터 1067年) 工役후 落成되었다. 規模는 2.800間. 初代 住持는 義天大師이며  大覺國師는 여기서 八萬大藏經刊行. 金塔을 建立하고 王宮으로 移轉하였다는 說이 있다. 지금도 넓은 區域에 土城遺蹟이 互存하며 境內에는 石壇礎石, 遺井遺佛이 남아있으며 흥왕사지 2800칸 建築群 흔적남아있다.


安和寺.

 松嶽山 中腹 紫霞洞에 있으며 高麗太祖13年에 創建한 高麗의 大寺刹.  安和寺 는 아름다운 建築美로 사람들을 恍惚하게 하였다..高麗 太祖가 三韓을 統合 할 때 後百濟의 甄萱 때문에 苦楚가 많았다. 太祖8년 甄萱을 攻略할 때 甄萱은 和를 請하여 外甥인 眞虎를 入質시켰다. 太祖도 堂弟 元尹(官名) 王信으로서 交質하는 등 한때 平和 工作을 하였으나 이 交質이 있은 후 여섰 달만에 甄萱의 質子 眞虎가 病死하여 太祖는  侍郞 弋(익)萱으로 하여금 屍身을 보냈다. 甄萱은 이것이 고의로 죽인 것이라 하여 太祖의 堂弟 王信을 죽이고 대거 개릴라를 보냈다.  太祖 10년에 甄萱이 王信의 屍身을 보내 오자  王信의 동생 王育으로 하여금 마지하게 한후 太祖는 王信의 死後 追福을 위해 13년 8월에 安和禪院을 創建하고 王信의 願堂을 삼았다. 이것이 安和寺의 創設 緣由이다. 睿宗 13년에 安和寺는 國家的 大刹로 重創하였다. 安和寺로 가는 溪谷 沿道는 風景이 볼만하다.


*링크기사- 팔관회은 불교의례에 국한된 행사가 아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383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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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松下吹笙 2011/04/16 08:54 #

    경천사지 석탑은 평면이 팔각형 탑이 아니라... 亞자형 탑입니다. 라마계 평면이지요. 그리고 팔가형 탑의 규모를 보고싶으면, 월정사지 팔각구층석탑을 추천합니다.
    링크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34028&docid=120972&dir_id=1003020108
  • 역사관심 2011/04/16 14:09 #

    松下吹笙 님> 감사합니다. 경천사지석탑이 팔각이 아닌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다만, 당시 석탑으로 규모면에서 흥왕사에 존재했을 거대석탑에 버금가는 것이 현존하는것은 그나마 이것인지라 올려보았습니다 (일단 발굴결과 규모면에서 규모가 장대한 석탑지라 들었습니다). 월정사지석탑에 대한 정보 잘 보았습니다. 형태면에서 참조하도록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라면사리 2011/04/19 16:41 #

    사라진 거대건축물이 많은데 남아있었더라면 어느정도 관광사업에 도움이 되었을텐데...
  • 역사관심 2011/04/19 23:24 #

    라면사리님> 많은 고증과 그에 따른 복원이 도움이 되겠지요 (복원된 문화재는 세월이 흐르면 또 후손에겐 세계문화재가 되는것이고).
    그리고, 저런 연등회등 무형문화재도 못살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당장 단오부터...
  • Warfare Archaeology 2011/04/27 11:13 #

    흥왕사에 대한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정말 어마어마하네요~휴우~
  • 역사관심 2011/04/27 13:05 #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 터를 직접 보고 싶어죽겠습니다.
  • 평론가. 2012/01/29 11:24 # 삭제

    팔각목탑지 아닌가요? 제가 가진 책에는 거대한 팔각목탑2개를 추저하고 있습니다.
    흥왕사는 송나라 상국사를 모방한 절로..실제로 약간 비슷하죠.
  • 역사관심 2012/01/30 03:49 #

    앗 그렇습니까. 제가 가진 정보는 석탑이라고 되어 있어서 그래도 썼는데 알아보고 수정해야 하면 하겠습니다. 귀한 정보 고맙습니다.
  • 평론가 2012/01/31 11:59 # 삭제

    제가 가진 한국 건축사에는 팔각목탑으로 보더군요..실제로도 석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크기때문에..
  • 평론가. 2012/02/06 14:32 # 삭제

    목탑이 맞습니다. 대한 건축사협회에서 발행한 한국의 전통건축에 의하면..정확한 발굴조사 자료가 기재되어 있는데 팔각목탑지로 봅니다.
  • 역사관심 2012/02/07 08:08 #

    그렇군요. 오히려 목탑이면 더 운치가 있을 듯합니다. 거대한 규모란 부분도 더 설명이 될테구요. 제가 직접 쓴 부분은 '목탑'으로 수정하겠습니다만, 인용한 부분은 석탑으로 일단 그대로 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손님1 2012/02/24 10:57 # 삭제

    혹시 고려도경의 원문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해석본 말고요.
  • 역사관심 2012/02/24 12:21 #

    예전에 원문을 받아보던 링크가 있었는데 404가 뜨는군요. 후일 알게 되면 댓글로 달겠습니다.
  • 손님1 2012/02/27 20:13 # 삭제

    원문을 볼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를 발견했습니다.
    http://db.itkc.or.kr
    포스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 역사관심 2012/02/28 00:15 #

    아 고맙습니다! 예전에 들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한님 2015/11/02 12:46 # 삭제

    경천사지십층석탑 꼭대기의 보주는 누가 훔쳐갔는지 의문임 과거 박물관에 있을 당시에는 분명 존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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