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동명왕의 기린굴 발견 (기사 그리고 구제궁 & 영명사에 대해) 역사뉴스비평

2011년 8월 11일자 뉴스에 이런 중요한 역사뉴스가 있었군요.
기사와 제가 알아본 영명사(永明寺)와 구제궁(九梯宮) 그리고 기린굴(麒麟窟)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위는 해동지도 (조선 영조때 제작)에 묘사된 영명사와 왼쪽에 추정위치가 동그라미로 묘사된 기린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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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학자들이 평양의 모란봉 청류벽 일대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고주몽)의 기린굴(麒麟窟)을 발견했다고 재일 <조선신보> 11일자 평양발 기사에서 보도했다.

신문은 “고구려가 427년 수도를 고조선의 옛 수도였던 평양에 옮겨온 이후 평양의 중심인 모란봉(금수산이라고도 불렀음)에 동명왕과 관계된 여러 가지 전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면서 “특히 동명왕이 타고 다녔다는 기린(麒麟)과 기린이 살던 굴에 대해 조선의 여러 역사책들에 기록되어있다”며 다음과 같이 기린굴 발굴의 신빙성을 더했다.
(주: 이 기린굴(麒麟窟)에 관해선 평양의 전승설화가 있습니다- 천손(天孫) 주몽이 이 동굴에서 기린을 길렀으며, 죽을 때에는 기린을 타고 조천석(朝天石)을 밟고 하늘로 올라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승하는데, 그 동굴과 조천석을 이번에 발견했다는 뉴스인 것이죠).
모란봉의 청류벽 일대에서 발견된 동명왕의 기린굴과 조천석. [사진-조선신보]

신문에 따르면, 고려의 역사서 ‘고려사’(지리지)의 서경(평양)항목에는 “을밀대는 금수산 꼭대기에 있다. 을밀대 아래에 층층으로 된 벼랑이 있는데 그 옆에 평양8경의 하나인 영명사가 있다. 그곳은 곧 동명왕의 구제궁으로서 그 안에는 기린굴이 있다. 남쪽에는 백은탄이 있는데 바위에서 조수가 오르내리는데 따라서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평양조에도 ‘영명사’라는 항목에서 “금수산 부벽루 서쪽에 기린굴이 있다”고 했다. 나아가, 고려 말의 학자 이색도 자기 시에서 영명사 가까이에 있던 기린굴에 대하여 노래하면서 “기린마는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동명왕)은 어디 가니 노니렀을고”라고 읊었다.
(주:
기사에 나오는 '영명사는' 서기 393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지었다는 평양 9사(寺) (혹은 9사찰)중의 하나입니다. 김시습이 금오신화, '취유부벽정기'에서 영명사를 언급했는데, 이 사찰이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혹은 영명사안에 구제궁이 따로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구제궁이란 뜻은 사다리 9개를 이은 것과 건물의 크기가 같다는 혹은 구천의 궁궐이란 뜻입니다.)
기린굴의 웃벼랑에 있는 ‘청류벽’이라고 새긴 글. [사진-조선신보]

신문은 “이번에 새로 발견된 동명왕의 기린굴은 모란봉의 영명사로부터 200m 거리에 위치한 모란봉 바위 쪽에 있다”면서 “거기에는 ‘기린굴’이라는 돋우새긴 글자가 있는 장방형의 바위가 놓여있고 그 뒤에 굴이 있었다. 굴은 무너져 형체가 약간 보일 뿐”이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신문은 “‘기린굴’ 바위는 잘 다듬은 장방형의 돌을 쪼아 만들었는데 글자의 마모상태가 오랜 것으로 보아 고려시기쯤에 만든 것으로 보아진다”고 추정했다.

이와 관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희승 소장(교수, 박사)은 “동명왕전설이 깃든 기린굴의 발견은 평양이 고조선, 고구려에 이어진 역사적인 도시, 수도였다는 또 하나의 증시물로 된다”고 밝혔다.
중략.
(주: 구제궁은 고려시대 숙종때 창화(시놀이)를 열었던 곳이고, 김부식도 영명사에서 시를 지은 기록이 있습니다. 즉, 영명사(구제궁)은 고구려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했죠. 6.25때 불타서 전소되었습니다).
원문링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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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사와 구제궁에 대해 써봅니다 (우선 간략한 소개):
영명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운 9개의 절 가운데 하나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고찰이다. 고려 초기 곽여(郭輿, 1058~ 1130)가 영명사를 소재로 시를 읊은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36본사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대찰이었다.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청일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영명사는 일제강점기에 재건되어 평양시와 평안남도를 관할하는 31본산이 되었다. 대동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한 영명사는 예로부터 ‘영명심승(永明尋僧)’이라 하여 평양팔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영명심승은 ‘해가 질 무렵에 스님들이 영명사를 찾아오는 모습’이란 뜻이다.

고려사절요를 살펴보니 숙종뿐 아니라 예종때도 (1105-1122) 창화를 엽니다. 이장면이 바로 곽여의 창화장면입니다 (아래 숙종때도 그렇지만, 흥미로운 것은 '구제궁'을 영명사와 다른 장소로 묘사한 것입니다. 바로 사찰옆에 행궁이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
계유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할새 인하여 어제한 시 일절(절구)을 선시하였다. 병자에 관풍전에 행차하여 태조의 행재소를 순시하고 드디어 구제궁에 거동하였다가 늦게야 영명사 동열에 이어하여 제왕 및 곽여를 불러 주연을 비풀고 시를 창화하였다.
무인에 구제궁에 행차하였다. 요의 내원 포주 이성의 유민이 양마 수백을 몰고 내투하였다.
기묘에 용덕궁에 이어하였다. 요의 유민 남녀 이십여인이 내투하여 양 이백여구를 바쳤다.

숙종때 (1083-1094)의 창화장면입니다 (앞뒤의 개성 흥국사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도 그냥 둡니다. 개성궁궐 거리전역에 점등식...얼마나 장관이었을런지, 보고 싶군요):
무인에 연등도장을 흥국사에 설하고 또 궁성내외의 거리에 점등하였다. 동 10월 기묘 삭에 흥국사에 거동하였다. 계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내전해서 친히 초제하였다.
정해에 왕이 관풍정 (주: 관풍정은 일제강점기 파괴됩니다) 구제궁을 유람하고 드디어 영명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용선(龍船)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 이에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고려문신 이혼 (
1252(고종 39)∼1312(충선왕 4))이 쓴 서경 영명사라는 시조입니다.

西京永明寺[서경영명사]서경 영명사

- 李混[이혼]-


永明寺中僧不見[영명사중승불견]영명사 안에 스님은 보이지 않고

永明寺前江自流[영명사전강자류]영명사 앞으로 물만 홀로 흐르누나

山空孤塔立庭際[산공고탑립정제]빈 산에 외로운 탑 뜰 가에 서 있고

人斷小舟橫渡頭[인단소주횡도두]인적 없는 나루에는 작은 배가 비껴 있네

長天去鳥欲何向[장천거조욕하향]장천을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가

大野東風吹不休[대야동풍취불휴]동풍은 넓은 벌에서 쉼 없이 불어오네

往事微茫問無處[왕사미망문무처]아득한 지난 일 물을 곳이 없으니

淡煙斜日使人愁[담연사일사인수]엷은 연기 비낀 해에 시름만 겨워라


영명사를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 두장입니다 (윗작품은 유명한 평양감사 향연도의 일부중 나오는 영명사의 확대부분, 그리고 아랫그림은 아직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영명사가 곧 구제궁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시 이미 구제궁은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은 점은 왼편에 진짜 굴처럼 생긴 것이 두 지도 모두 묘사되어 있다는 것.
윗그림과 다르게 아래그림에서는 성곽의 높이나, 5층석탑의 크기가 굉장합니다.
고구려당시에는 대찰이었던 영명사는 청일전쟁때 한번 소실되고, 다시 작지만 재건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전소됩니다. 훗날 발굴을 해보면 전반적인 규모가 다시 재조명될수도 있을 여지가 있는 문화재같습니다.
기사- 청일전쟁당시의 영명사 추정사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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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구둥지 : 최자- 삼도부 중 서경(평양, 13세기초) 2011-10-01 03:58:29 #

    ... 고 그대로 존재하던, 평양의 대표명소였음을 알수 있는 중요한 정보인듯 합니다. 링크: 북한, 동명왕의 기린굴 발견 (기사 그리고 구제궁 &amp; 영명사에 대해)) 넓고도 높으며 칡 넝굴로 감싸 안은 듯한데. / 膠葛廣敞 밝고도 드높음이 다 ... more

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1/08/20 13:52 #

    호오!! 기린굴을 발견했다니!!!! 완전 신기하네요...흐음~
  • 역사관심 2011/08/20 14:22 #

    WA님> 북한측 뉴스이니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도 학자들의 양심을 믿고 본다면 큰 발견이라 생각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8/20 23:07 #

    뭐 조사 결과나 과정에 있어서 문제가 있겠지만...그게 발견된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북한이랑 통일이 되면 기린굴 같은건 나도 발굴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 역사관심 2011/08/21 06:21 #

    원래 관심이 있으셨군요. ^^
    말씀대로 발견된 것 정말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8/22 01:08 #

    네~평소에 관심이 많았었는데...기대됩니다.

    발굴보고서...당연히 발간 안 되겠지만, 조선고고연구에라도 실릴테니 한번 기대해 보렵니다. ㅋㅋ
  • sue 2012/03/31 16:29 # 삭제

    안녕하세요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창건하신 9사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용 영명사도 그 중 하나라고 보았어요. 그런데 정말 정보가 많이 없군요ㅜㅠ 그나마 여기서 조금이라도 알아가네요 감사합니당 ^_^
  • 역사관심 2012/03/31 16:47 #

    아무래도 북한정보는 인터넷보다는 전문서적을 찾아보시는게 빠를겁니다. 그나마 단행본도 많지 않겠지만, 서점에 가면 그래도 있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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