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에 묘사된 고려시대 술집깃발입니다.
전통술집에서 복원해서 쓰면 멋질듯 하군요.
문유 門帷
문유의 제도는 푸른 비단 세 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거기에 가로 나무를 꿴다. 모양은 술집의 깃발과 같다. 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는데 쓰는 제구이다.(주: 특이하게도 위에다 가로로 나무틀을 걸고 아래로 깃발을 내려 거는 형식이로군요. 제대로 만들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힐막 纈幕 (즉 염색장막이란 뜻입니다)
힐막은 옛 제도는 아니다. 선유(先儒, 옛선비)들의 말로는, 비단을 이어서 물들여 도안을 만든 것을 ‘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고려의 습속은,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 깁(주:명주실로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이고 도안의 빛깔은 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 그 도안의 위는 화주(火珠, 즉 불구슬모양)이고 사방 끝에 보망(寶網, 보물처럼 화려한 망)을 드리웠고, 아래는 연대화좌(蓮臺花座)가 있는대 불가에서 말하는 부도(浮屠)형상과 같다. 그것은 그래도 귀인이 쓰는 것은 아니고 강가의 정자나 객관(客館)의 속관(屬官) 자리에 설치한다.(주: 위의 깃발모양새와 이 힐막의 재질과 무늬가 합해지면 훌륭한 고려시대 주점입구 포렴/기가 세워집니다).
위의 모양이 객관이나 술집에 쓰이던 기나 포렴일것이고, 아래의 고급관사나 호텔급 포렴은 더 화려합니다. 중화주의 선비긴 했어도, 상세한 설명을 남겨준 서긍에게 고마움이 생기는군요.
수막 繡幕
수막의 장식은 오색이 뒤섞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을 위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여기에도 원앙새․나는 난새․꽃떨기 등의 문양(紋樣)이 있는데 홍색과 황색이 강하고, 그 바탕은 본래 무늬 있는 붉은 깁이다. 오직 순천관 (호텔급 고려관사죠)의 조전(詔殿)․정청․정사와 부사의 자리 및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에만 설치한다.
수도 繡圖
수도는 붉은 바탕에 초록색 단을 둘렀고 오색이 뒤섞여 있으며, 산꽃과 노는 짐승의 정교함이 수막을 능가한다. 화죽․영모(翎毛 조류를 말한다)․과실 따위도 있는데 각기 다 생기가 있다. 이 나라의 습속으로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그림 하나씩을 걸어서 사이를 띄우는데, 그것이 대청 속 복판을 차지하게는 하지 않는다.한번 고려시대 술집 깃발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은데, 시간이 여의치 않군요...
예컨대 일본의 전통술집의 이런 등이나 깃발처럼 우리도 활발하게 이런 부분을 살려보면 합니다. 이런 깃발이나 포렴만 전통을 살려 달아도, 벌써 거리 분위기나 음식점 정체성이 확 달라집니다.

이런 간판들말고...


고려시대 거리모습. 이 그림에서는 저런 차양모양의 깃발은 보이지 않습니다.


참고로 (재미삼아) 한국의 전통주점의 변천사--
이러한 부분도 잘 이용할수 있는 형태는 잘 살려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 성종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숙종 7년(1102)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주: 제가 고려도경에서 오늘 찾아낸 부분이 있으니 잘못된 정보같습니다)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번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다. 주막(酒幕)의 막(幕)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酒)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다.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헌주가 |
한말의 헌주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를 하며 소매도 하였다. 또 부업으로 탁주와 백주를 약간 만들기도 하는데 6~7칸의 공간에 2석들이 큰독 50~60개를 갖추고 있었다. 헌주가의 술값은 선금이나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정기간에 한번씩 계산하였다. |
병주가 |
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소매하는 집으로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손님이 술생각이 나면 중노비에게 돈을 주어 근처 병주가에서 사다가 마시는 것이다. 병주가에서는 소주, 약주, 백주주등은 헌주가 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다 |
소주가 |
소주가는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고, 서울이남에서도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이북이 그 규모가 커서 큰독 70~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유명한 서울 공덕리에 50∼60호와 합해서 줄잡아 100호 정도가 연간 2,500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
목로술집 |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고급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 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목로 술집은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서울 장안에는 당주동, 청진동, 모전다리(무교동), 이문안(종로2가), 동관 대궐 앞(종로4가), 구리개(을지로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다.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곁들여 파는데 술값만 받는다.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목로'라고 하고, 이것을 놓아 술자리를 마련한 목로 술집은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솥을 걸어 놓고,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떠서 끓는 물에 중탕을 해서 손님 잔에 부어 주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 동문 밖의 '흥코집', 동관 동문 안에 '동양루'라는 목로 술집, 신설동의 '형제집' 등이 꽤 유명한 편에 속했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6.25전쟁 전까지 성행하였다. |
내외주점 |
한국 몰락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內外)주점을 들 수 있다. 술집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 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 하는 마님소리가 들린다. 내외술집은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만을 내민다고 '팔뚝집' 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외술집도 나중에 색주가로 전락하여 그 풍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
이동술집 |
서울의 풍물로 광주리 소주방 또는 공덕리 소주방이라는 이동 술방이 있었다. 주종은 소주로, 오지병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터나 성안에 드는 길목에 펴놓고 술을 판다. 향학열이 남달랐던 황해도 신계, 곡산, 안악 등지에서 자녀나 남편을 출세시키고자 어머니와 아내가 길거리로 나선 것이다. |
급속도로 발전한 민속주는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일제 시대를 거쳐 서양 술들의 유입으로 더욱 다양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가정에서 자가 양조였고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나 1909년 주세법이 발효되어 생산량에 따라 과세하는 간접세가 생긴 후 5차에 걸친 주세령의 개정으로 1934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완전히 없어졌다.
천업으로 여겨왔던 주조업에 양반 계급이 다투어 종사하게 됨에 따라 주조업자가 비대해지고 술의 품질이 주세를 위하여 규격화 되어감에 따라 명주가 사라지고 심한 주세에 백성들의 원성 높아졌으며, 밀주의 성행과 일제의 단속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전통주는 차츰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풍류가 깃든 조상의 술 빚기도 없어졌다 (요즈음 여러 전통주와 가양주가 전문가와 전통주회사들에 의해 활발하게 복원중입니다. 벌써 수백종이 복원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다루어보죠).
개화기를 거치고, 이른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무슨 음식점'이란 상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술손님이나 밥손님을 맞아 들이다가 찾아오는 손님측에서 자연히 그 집의 모양이나 위치, 혹은 음식점 주인의 별명을 붙여서 부르게 되고, 그러다가 음식점은 자연스럽게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회나무집, 오동나무집, 이문안 설렁탕집, 잠바위 설렁탕집, 백목다리 장국밥집, 황포추탕집, 형제추탕집 등 이런 식으로 음식점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원문링크: http://blog.daum.net/cyb661/8485486
만약 위의 전통주점들을 되살린다면 가장 적합한 곳중 한곳으로 생각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피맛골로 불리는 곳입니다. 아래 포스팅의 글을 발췌해보면 "서울 종로에는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 작은 골목이 있는데, 이 길을 피맛길이라 한다. 도로 확장으로 남쪽의 피맛길은 거의 없어졌지만 북쪽의 피맛길은 지금도 이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는 이러한 전통의 골목을 어떻게 외국처럼 살려나가느냐는 것이겠지요. 현재의 모습은 개인적으로는 가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목의 역사성과 골목구조가 잘만 살린다면 서울시의 명물 전통거리로 탈바꿈할만 한 장소같습니다.


덧글
http://pds14.egloos.com/pds/200902/07/67/a0110167_498d41c5d2769.jpg
수막은 이거랑 비슷할거 같고(우리나라 오색깃발양식하고도 비슷하군요.)
http://www.wikiwand.com/ko/%EC%97%90%EB%A7%88%ED%82%A4%EB%AA%A8%EB%85%B8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6/Genji_emaki_azumaya.jpg/700px-Genji_emaki_azumaya.jpg
http://fog.ccsf.edu/~jcarpent/images/Japanese%20Pictorial%20Art/Heian01.jpg
문유라는게 이렇게 아녀자들을 가리는 용도로 썼던 천막이 아닐까합니다. 실제로 안압지에서도 고리같은게 많이 발견되는데 연관성이 클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