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인-송도기행 중반(15세기 개성묘사) 역사

서울에서 개성까지 하루만에 도착해서 고려의 옛 궁궐터를 둘러본 후, 숙소로 가는 장면입니다. 궁궐등 건축에 관한 기록은 중반부에는 적지만, 풍부한 설화와 인물들이 나오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많습니다. 현대에도 잘 살려볼수 있는 문화컨텐츠도 많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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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동(淸凉洞)에 도착하니 벌서 한낮이 되어 더운 안개가 푹푹 찌고 무더운 바람이 숨
을 막는다. 잠시 우거진 숲 속에서 앉아 숨을 돌리면서 보니 실낱같이 흘러 겨우 양치질이
나 할 물줄기가 숲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얼마 후 신도사(辛都事)가 뒤따라 왔기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주: 말을 타고 개성시내를 계속 다녔음을 보여줍니다) 회현(檜峴)을 넘어 북으로 접어들자 고개 하나가 나오는데 그 앞은 깎아 세운 절벽이다.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
고 올라갔다 (주: 힘든 길은 양반도 가죽/비단/종이신발이 아닌 짚신을 신었음을 보여줍니다). 저 멀리 아득하게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의 검푸른 봉우리가 반공에 우뚝 솟아 마치 용이나 범 같기도 하며 창칼의 날 같기도 한데 종횡으로 이어졌다 떨어졌다 하는 기이한 모습을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주: 성거산에 바로 박연폭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유명한 대흥산성이 있습니다)
바로 성거산의 태종대입니다 (18세기 강세황의 송도기행도중)

이것이 고려 대흥산성입니다- 이 산성내에 박연폭포가 있죠.

대흥동(大興洞)에 들자 마침 황혼이어서 엷은 땅거미가 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가자
니 산봉우리 둘이 마치 옷깃을 여미듯 합하여 관문 형상을 이루었고, 뚝 끊어진 비탈길이
만 길 낭떠러지를 이루었다. 그 위에 용추(龍湫)란 폭포가 있으니 이것이 박연폭포다.

돌에 만 가마니는 들어갈 큰 함지만한 구덩이가 패였다. 시냇물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고여
넘실거리는데 밑이 보이지 않는다. 빙빙 돌면서 기세를 올리면 잠깐 사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켜 물방울과 물거품을 뿜고 우레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반공에 매달린 절벽을 지나
고담(姑潭)으로 떨어지면서 만 필의 베 폭이 되어 숲과 골짜기에 흩어지고, 소리가 지축
(地軸)을 흔들며 은하수가 꺾여 당에 꽂히는 듯 놀라고 무서워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아마 이곳을 이야기하는 것같습니다. 바로 '박연'이라 불리는 부분인데, 폭포 위쪽에 직경 8m의 박연(朴淵)은 큰 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못의 중앙에 반쯤 얼굴을 내민 엎드린 거북처럼 생긴 돌 하나가 있는데 서너 사람은 실히
앉을 만하다. 문종(文宗)이 한 번은 이 바위에 앉았더니 갑자기 풍랑이 일면서 용이 나와
바위를 흔들어대므로 이영간(李靈幹)이 글을 써 물에 던져 용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
다. (주: 이미 조선초기에 이영간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상하게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이군요. 문화컨텐츠측면이 꼭 아니더라도. 이영간이란 인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영간은 고려시대의 비주 '추성주'의 창시자로 알려있습니다. 이 도술가 소개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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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간
(李靈幹) (11세기 초)
고려 문종대의 인물로 원율현 출신입니다. 1796년 담양부사 이석희가 ‘추성지’에 (담양풍물소개) ‘연동사 스님들이 절 주변에서 자라는 갈근, 두충, 오미자 등 갖가지 약초와 보리, 쌀을 원료로 술을 빚어 곡차로 마셨다’라고 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를 지낸 이영간의 증언을 적고 있습니다- 이 글에는 술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해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로 불렸다고 적혀있습니다. 이영간이 금성산성의 연동사에서 공부할 때 스님이 술을 빚어 두면 술이 익자 꼭 훔쳐 마시는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영간을 의심하여 매질을 여러 번 했는데 억울했던 이영간은 진범을 잡기 위해 술독을 옆에 잠복합니다. 잠복중 그는 늙은 살쾡이가 와서 술독을 열고 추성주를 마시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를 잡아 죽이려 하니 삵이 사람말을 하는데, "그대가 만약 나를 놓아주면 내가 평생 이용할 기묘한 술수를 주겠소."라고 했습니다. 이에 이영간은 삵을 놓아줍니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책 한 권을 던져 주기에 이영간이 그 책을 져왔는데, 그 책이 바로 온갖 비술이 적혀있는 비서였습니다.이 책으로 이영간은 비술가가 됩니다.

조금 더 객관적인 그의 출생기록은 1047~1082의 사람으로 추정하면서, 어떤 기록에는 생몰연대 미상으로 나오지만 대체적으로 고려 문종대의 신비로운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후백제시대의 호족 출신의 가계를 잇는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지방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집안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고려 문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참지정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며 젊어서부터 비술에 능통하여 조정에 있을 때 기이한 일들을 많이 해낸 것으로 여러 문집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요). 특히 그는 사람으로서 용을 제압하는 설화의 최초 주인공이기도 한데 (바로 박연폭포 일화죠) ,그와 관련된 설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담양도호부 소년암에 있는 전설이 대표적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고려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연동사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영간이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혼자 나가서 서쪽 산꼭대기에 거닐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더랍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린 아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장기 한판 두자는 것이었다. 장기의 수에 빠져 정신이 팔려있는 그의 뒤에서 이상한 하품 소리가 들려오자 뒤를 돌아보니 큰 범이 바위 위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깜짝 놀랬지만 소년은 걱정 말라면서 어서 장기나 두라고 영간에게 말합니다.이에 영간이 조용히 장기를 그만두고 돌아와 스님에게 그 일을 모두 말하였고, 스님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다시 그 자리에 와서 보니 동자와 호랑이는 간 곳이 없고 다만 바위 위에 장기판이 있고 바위 아래는 호랑이 발자취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 바위를 소년암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장마비를 겪으면서도 이끼가 끼지 않고 그 자리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그가 조정에서 한 일 중에는 이상한 일이 많았는데, 그가 담양출신인 것을 밝히고 있는 남효온의 <담양향교실상기>(≪추강선생문집≫4)에도 그가 재술(材術)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문집의 활약을 보면 그가 보통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분을 근거로 여러 컨텐츠가 개발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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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는 천마ㆍ성거 두 산 사이에 있는데, 형상이 돌독(石甕) 같으며, 들여다보면 새까맣다. 반석이 있어 한가운데 나왔는데, 섬바위라 한다. 물이 절벽으로 달려 흘러 성낸 폭포가 내려오는 것이 열 길은 되어 완연히 흰 무지개가 공중에 비치는 듯하고, 나는 눈이 돌다리에 뿌리는 듯하다. 뇌성이 달리고 번개가 부딪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전설에 옛날 박 진사라는 사람이 피리를 못 위에서 부니 용녀가 감동하여 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하였다 한다.


이규보의 시에, "용랑이 피리에 감동하여 선생에게 시집가니, 백년을 함께 즐겨 정도 흐뭇하리."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으로 떨어져 죽어서 그만 고모담이라고 이름하였다. 못 위에 신사가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매양 영험이 있다. 고려조의 문종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놀다가 도암 위에 올라갔는데, 문득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돌이 흔들리니 문종이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이영간이 호종하였다가 글을 지어, 용의 죄목을 들어 책망하며 못에 던지니 용이 곧 그 등을 들어내므로 매를 때리니 못물이 다 붉어졌다 한다.


그 옆에 다섯 길쯤 되는 큰 바위가 마치 기름덩이를 자른 듯 흰데 이곳에 유람왔던 사람들
이 거기에다 이름을 써 놓았다. 나도 지난 을유년 겨울에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이름을 써
놓았었다. 벌써 2년 전 일이어서 비바람에 거의 지워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먹물
이 생생하다.

이게 바로 고모담옆의 바위 글씨입니다. 이건 유명한 황진이의 글씨입니다 (초서죠 무려).

옆으로 몇 걸음 가면 용왕당(龍王堂)이다. 날씨가 가물 때 이곳에 와 비를 빌면 영검이 있
다고 한다. 다시 백여 보 가면 양쪽 기슭에 돌부처가 하나씩 있는데 세상에서 ''부득박박
(夫得朴朴)''이라 한다. (주: 삼국유사의 유명한 부득과 박박의 불교설화죠. 세개의 설화링크입니다)
http://osj1952.com.ne.kr/interpretation/samgugusa/dl/083.htm (삼국유사)
달달박박(怛怛朴朴)과 관은보살(觀音菩薩)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여기서부터는 경내가 아주 한적한데 늙고 비틀린 나무와 경(梗)·남나무 등이 빽빽하게 들
어차 가이없으며 계곡에는 한결같이 큰 바위가 널려 마치 성낸 범이 웅크리고 코와 입을
으르릉거리며 서로 물어뜯는 형상이다. 얼마 가니 못 하나가 나오는데 바위가 마치 거북
처럼 생겼다 해서 귀담(龜潭)이라 부른다고 한다.

시내를 따라 몇 구비를 돌아 외나무 다리를 건너자 관음굴(觀音窟)이란 절 (주: 관음사와 관음굴은 각각 따로 있습니다)이 나온다. 이는 바로 우리 태조가 세자였을적 원찰(願刹)인데 목은(牧隱) 이 색(李穡)의 기문(記文)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다 (주: 지금도 있을까요). 절 뒤 비탈에 지붕처럼 내민 곳이 있어 그 아래에다 돌부처 여남은 개를 안치해 두었으나 칠이 벗겨져 면목을 거의 분
별할 수가 없다. 바위틈으로 가느다란 샘물이 흘러나와 맑고 시원한 게 중국 중냉천(中冷泉)에 비할 만하다.
지금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관음사과 관음굴

관음굴안에 고려시대의 조각인 관음보살상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석양에 이내가 끼어 산골이 어둑어둑하자 우리 일행은 법당에 들어 둘러앉아 창을 열었
다. 겹겹이 싸인 멀고 가까운 봉우리들이 앉아 있는 자리 밑에 와 닿는 듯하다. 삼경이 되
니 구름과 안개에 싸인 산봉우리들이 제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어 마치 가슴을 폈다 오므
렸다 하는 시늉인데 옆에서는 늙은 중의 코고는 소리가 우레 소리를 낸다. 각자 백고탕
어 사발씩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망망한 조물주와 더불어 즐겼다 (주: 백고탕이 지금도 남아있는 인삼을 넣은 일종의 보양제인 고려'백호탕'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지은 걸로 보아 혹 고려술의 이름일지도..).

동쪽으로 보이는 토점은 울창한 골짜기가 수십 리는 뻗쳤는데 깨끗하고 조용한 게 더욱
기이하다. 그곳을 지나면 오관산(五冠山)과 성거산(聖居山)으로 간다.
(하루 묶었습니다. 즉, 3일째 밤이죠 개성에 도착해서. 29일이 4일째입니다)

29일, 신 도사는 몸이 아파 먼저 돌아갔다. 운거사(雲居寺)와 길상사(吉祥寺) 구경할 것
을 의논하는데 (주: 억불시대인 조선시대에도 사찰방문이 여행의 주요 테마중 하나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시대의 이미 소멸하거나 활동하지 않는 사찰도 관광하는 것으로 이당시 이미 사찰방문이 종교적행사라기보다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의미있는 장소였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늘이 캄캄해지며 비가 내릴 듯하여 가지 못하고 지름길로 해서 어제 왔
던 길을 찾았다.
회현에 당도하자 염씨(廉氏) 노인이 말 앞에 와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두어 마장 올라가면 정자사(淨慈寺)라는 절이 있는데, 천한 제가 변변치 못한 주
식을 준비하여 일행을 위로하고자 이렇게 청합니다." 하여 모두 응락하고 염 노인을 앞세워 따랐다.
(주: 위의 세 사찰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절에는 매우 넓은 남루(南樓)가 있고 천마산이 바로 앞에 있으며, 두 개의 높은 절벽이 사
이를 두고 솟아 참으로 절경이었다. 한참 있자니 삼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얼마 후 그
만하여 말을 재촉해 저물녘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했다.
(주: 보통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시대에 구제(救濟) 및 자선사업을 위해 설립되었던 불교의 절. 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064년(문종 18)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임진보통원(臨津普通院)에서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베풀었고, 1071년 12월에는 현덕궁(玄德宮)에서 반출한 500석의 쌀을 가지고 서보통원(西普通院)에서 영세민을 위하여 식사를 제공하였으며, 1101년(숙종 6)에는 임진현 보통원에서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에 걸쳐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기사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현 보통원은 임진강 부근에 세워진 것이고, 이와는 달리 서보통원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와 나란히 동보통원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그네나 영세민을 위하여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였던 보통원은 셋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학계에는 이 보통원이 임진강과 예성강의 동서에 있었고, 임진보통원이 동보통원이라는 두 개의 보통원설도 있다/ 유호인이 도착한 보통원은 셋 혹은 둘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성강에 있었던 동 혹은 서보통원중 하나가 아닐까합니다 (다음구절의 파지동이 근처이며, 예성강이 송악산에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의 유스호스텔같은 시설로 이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원에서 서쪽으로 돌아 파지동(巴只洞)으로 들어가 고려 왕들의 능이 있는 곳을 물으
니 마을 노파가 가까운 잔등 하나를 가리키며 거기라고 한다. 과연 그곳을 보니 구릉 하나
가 숲 속에 가리웠는데 옆에 서 있는 한 자쯤 되는 비석에 ''고려시조 현릉(顯陵)''이라고 씌
어 있다. 풀이 덮인 상석(床石)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제수를 올린 흔적이 있다.
(주: 놀라운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고려왕릉 북한 관리부족, 2009년 기사. 통일되면 다 보수제대로 해야합니다)

다만 고려시조의 현릉은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외의 능은 관리가 안되는듯)- 아래가 고려시조 왕건의 현릉과 바로 이곳에서 출토된 북한국보 고려시조 왕건의 완벽한 조각입니다. 바로 이곳이 묘사된 것입니다.
능을 지키던 자 몇 명이 오더니,
"저희들은 이곳에 오래 살았습니다. 명절 때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정하게 장만하여 올려
야지 그렇지 않으면 음침한 황혼이나 비 오는 밤이면 꼭꼭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왕이 행
차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런 후에는 사람들이 병을 앓게 되어 열에 하나도 낫지 않습니
다." 한다 (주: 꽤나 무서운 이야기로군요. 당시 파묻혀있었을 저 태조왕건 조각상이 화를 낸것일수도...).

아, 후삼국이 정립하여 우리나라가 어지러울 때 왕건이 용이나 봉새 같은 자질로 동쪽에
자리잡고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니 공이 그보다 클 수 없으며, 백성들이 지금
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다. (주: 삼한일통의 조선초의식을 확연히 볼수 있는 귀중한 구절입니다)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여서 비록 영웅호걸이라도 면치 못한다. 그래서 하
루아침에 운이 나가면 무궁한 계획이 지는 해보다 짧은 법이다. 그런 영웅의 혼이 어찌 산
귀신이나 숲 속의 도깨비처럼 구차스럽게 너희들의 음식을 구하여 화복을 내리겠는가?
(주: 비록 구왕조긴 하지만, 고려태조 왕건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문화컨텐츠측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산귀신'과 '숲 도깨비'라는 구절입니다. 이런 귀신들이 민초의 음식을 탐냈음도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조선초에 이런 존재들에 대한 생각을 엿볼수 있어 좋았습니다.)

북쪽 골짜기에 능 두어 개가 더 있어 백여 보 사이를 두고 서로 보이는데 그곳 사람들이
충정왕(忠定王)과 충혜왕(忠惠王)의 능이라 하나 확인할 비석이나 표지가 없다.
(주: 현재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만, 2009년 우리측 기사에 한서대 장경희 교수가 30대 충정왕의 왕릉을 확인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능중 충혜왕에 관한 정보는 개성공단에 포함될 여지가 있어 훼손위험이 있다는 짧은 글정도만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봉동리의 영릉으로 불리는 것이 충혜왕릉이라고 합니다. 충혜왕은 엄청난 색골이어서 원나라에서 불려갑니다;)

날씨가 음산한데다가 어두워져서 여행에 지친 몸이 떨려서 견디기가 어려워 보통원 누각
에 큰 사발로 술 몇 잔씩을 마셨더니 한결 낫다 (주: 흥미로운 것은 사찰내에서 '술'을 마실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포스팅 앞쪽에 나오는 전설의 비주 '추성주'를 담그는것도 영동사의 스님이었죠) . 복령사(福靈寺)로 들어갔다. 경내가 조용
하고 깊숙하여 마음에 들며 전에 십육나한(十六羅漢) 소상이 있어, 만듦새가 아주 정교한
데 천태산(天台山)에서 단식하고 있는 형상을 본떴다 (주: 보고 싶군요).

동쪽으로 한 언덕을 지나자 무덤이 떼지어 있다. 금잔디에 지는 해가 비추고 솔개들이 나
직히 떠서 맴도는데 촌로가 궁녀(宮女)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주: 고려 궁녀들의 무덤군이라..현재 발굴이 되어있을까 궁금합니다).

그 말을 들을 신종호가,
"어찌 청춘의 젊은 넋들이 제비가 되어 미앙궁(未央宮)으로 날아들 때가 없는가? "
하였다 (주: 왜 자꾸 중국쪽 이야기를 하십니까 선생님...^^ 당시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반농담으로. 하긴 지금 뉴욕이나 맨하탄에 빗대 표현하는 것과 비슷할수도.. 있어보일라나요).

광명사(廣明寺)에 당도하니 경력(經歷) 선생이 미리 사람을 보내 위로하는 잔치 음식을
장만케 하고 또 교생(校生) 수십 명이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와 위로해 준다.
(주: 참으로 사찰이 많이 나옵니다. 광명사는 매우 태조왕건이 만든 유명한 사찰로써 후일에 포스팅을 생각하고 있을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습니다.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개성부’ 편에 ‘광명사는 연경궁(延慶宮) 북쪽 송악산 기슭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고려 태조가 옛 집을 내어 절로 한 것이라’고 하며 목종(穆宗)의 진영(眞影)이 있다.’ 하고 있습니다).

만월대 바로 왼편으로 광명사가 보입니다.

늙은 중 하나가 나와 맞으며,
"어제 왕림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나 마침 외출 중이어서 뵙지 못했습니다. 듣자니 여러분
께서 이번 유람은 오로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이라 하나, 저에게 그림 한 폭이 있으니 구
경하시기 바랍니다. "
하고는 좌석에다 펴놓는데 복식과 색깔이 모두 제왕의 차림이다 (주: 이 그림이 남아있으면 얼마나 귀중할까요. 바로 고려목종의 당대 초상화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되어 삭아서 비단올이 손을 대면 부스러진다. 권축(卷軸) 부분을 한참 들여다 보니
작은 글씨로 목종(穆宗)이란 두 자가 씌어 있어 온 좌중이 깜짝 놀랐. 목종은 나약한 자
질로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억제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역적이 틈을 타서 일
어나 쫓겨가면서 옷을 팔아 밥을 짓고 말 한 필을 청하여 타고 적성(赤城)으로 쫓겨갔다
가 돌아오지 못했으니, 전(傳)에, 왕을 불쌍하게 여겼다."
한 것이 목종을 두고 이른 말이라 하겠다.
(이제 4일째 밤이 지나갑니다. 4월 29일에서 바로 5월 1일이 되는 건, 뭔가 음력과 관련이 있을터인데, 제 지식으론 모르겠습니다. 5일째 아침입니다).

5월 1일, 일찍 출발하여 은비현을 거쳐 병부교(兵部橋)를 지났다 (주: 병부교는 황진이를 잉태한 다리입니다. 조선 중종때 어머니 진현금이 병부교다리아래에서 물을 먹다가 감응, 황진을 잉태하고 낳고나자 사흘동안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고 합니다. 또한 재밌는 기록으로 태종실록 1년(1401) 5월 10일에 여우가 병부교(兵部橋)에 들어왔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잡았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송악산 남쪽 기슭을 타고 가면서 광명사 동쪽 골짜기를 굽어보니 산봉우리는 첩첩 쌓이고 놀은 아스라하게 끼어 중국에서 경치가 좋다는 안탕산이나 적성(赤城)에 오른 것 같다 (주: 생뚱맞은 생각이지만, 조선내내 중국과의 비교만 하지 일본은 안중에도 없는 것도 참 새삼스럽습니다).

백여 구비를 돌아 꼭대기에 오르니 수목이 빙 둘러 한 구역을 이루었고, 집 네 채가 있는
데 바위에다 서까래를 걸쳐 지었다. 놀고 있는 닭과 개가 쓸쓸하게 보인다. 남쪽과 북쪽 봉
우리에 사당 하나씩이 있으니 북쪽 것은 대왕당(大王堂)으로 신상(神像) 여섯 개가 모두
높다란 관을 쓰고 큰 홀(笏)을 가졌으며, 남쪽 성모당(聖母堂)에도 역시 신상 여섯 개가
있는데 여관(女冠)을 쓰고 연지분을 발랐다
이것이 바로 도교의 성모당 신상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홀'을 들고 높다란 관을 쓰고 있는 성모상입니다 (연지는 바르지 않았군요)

절지기가 문 아래에서 신의(神衣)를 햇볕에 말리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신은 속인이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한바탕 꾸짖고는 문을 열게 하였다. (주: 유교가 국교이긴 했지만 이러한 '도교'의 전통이 고려를 지나서도 조선초까지 계속 이어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부분도 분명 우리의 문화의 한부분입니다. 연구해볼만 하지요).

실내가 정결하고 붉은 휘장으로 상을 둘렀는데 향불을 피워 놓았으니, 옛날부터 전해오
는 팔선궁(八仙宮)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역시 도교입니다).

오늘은 날이 개어 하늘이 맑아 사방이 딱 트였다. 바다는 물항아리처럼 보이고 세 산은 마
치 늘어놓은 사발 같다. 저쪽 세상을 내려다보니 하루살이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 자못
소강절(邵康節) 선생이 낙양(洛陽)에서 옛일을 회상하던 느낌이 든다.

서로 권하면서 술을 10여 잔씩 마신 후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니 티끌 세상을 하직하고 맑
은 이슬을 받아 마시면서 대붕(大鵬)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주: 역시 도교적 표현입니다. 도교가 조선초기의 일상에도 완전히 스며들어 있음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저녁 무렵 청계사(淸溪寺)로 내려갔다. 시냇가 너럭바위에 앉아 물장난을 하면서 손발을
깨끗이 씻고는 다시 몇 고개 넘어 동쪽으로 가니 집터 하나가 나오는데 바로 노국공주(魯
國公主)의 영전(影殿) 터다. 그 당시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어 홀어미는 베의 씨줄이 모
자란 것을 근심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일을 걱정하였는데 공민왕은 노국공주 하나를 위
해 우리 백성을 10여 년 동안이나 괴롭혀 이 영전을 지었으니, 여자에게 빠진 자의 경계
가 될 만하다 (주: 이 청계사는 의왕시의 동명의 절과 다릅니다. 의왕시의 청계사역시 고려와 밀접한 절로. 고려시대 문신인 조인규(趙仁規)가 창건한 것이며 청계산 정상에는 고려시대 말 충신인 조윤이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는 망경대가 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청계사와도 별개입니다).

수락암(水落巖)을 지나자 물이 굽은 턱을 부딪고 흐르는데 고려 전성기에 여기서 비단을
씻었다고 한다 (주: 역시 흥미로운 기록). 왕륜사(王輪寺)를 지나 북으로 1백 보쯤 가면 자하동(紫霞洞)인데 시중(侍中) 채홍철(蔡洪哲)이 살던 집터다. (주: 채홍철은 13세기때 문인으로, 자하동에 살면서 '자하동'이라는 노래를 지었고, 또한 유명한 '이상곡'의 원작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가 지은 여러 시와 악곡이 전합니다. 왕륜사는 고려태조 10사찰의 하나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습니다. 이때는 현존했군요. 다만 송도기행의 주인공 유호인과 같이 동행했던 '성현'의 시조중 바로 '왕륜사'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이미 폐사직전임을 보여주는 시로 아래 소개합니다. 다만 누각이 있었고 대황금부처상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王輪寺(왕륜사) - 成俔(성현) [虛白堂詩文集(허백당시문집)]

傑閣荒涼不見僧(걸각황량불견승) / 큰 누각은 낡았는데 중은 보이지 않고
黃金大士獨崚嶒(황금대사독릉증) / 황금의 큰 부처만 혼자 앉아 있네.
塵埋禪榻風爲箒(진매선탑풍위추) / 먼지가 선탑(禪榻)에 쌓이면 바람이 비질하고
夜暗窓攏月作燈(야암창롱월작등) / 밤에는 창이 어두우니 달이 등불 노릇하네.
野叟耕田穿古砌(야수경전천고체) / 늙은 농부 밭 갈다가 옛 섬돌 일으키고
行人問路轉高陵(행인문로전고릉) / 행인은 길을 물어 높은 언덕 지나가네.
巉岩一片溪頭石(참암일편계두석) / 깎아 세운 한 조각 시냇가의 돌은
萬古無言閱廢興(만고무언열폐흥) / 말없이 만고의 흥망을 지켜보네.

저물녘 건성사(乾聖寺)에 당도했다. 신이화(辛夷花)는 벌써 지고 작약 두어 포기가 보슬
비를 맞으며 피어 있기에 술을 들면서 감상한 후 자리를 파했다. (주: 사찰이 하나의 숙박시설의 역할을 했음을 기행기 내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잠을 청합니다. 6일째 밤으로, 다음날이 일주일째입니다)
목련의 일종인 순백미의 신이화(辛夷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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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사는 송악산남쪽에 있던 절입니다. 따라서, 유호인일행이 아직도 개성언저리를 떠나지 못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주일째가 되는 기행기 후반부에는 배를 타고, 벽란도를 지나, 풍류를 즐기며 (조선초기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수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멋진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유호인-송도기행 전반부(15세기 개성궁궐들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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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松下吹笙 2011/10/11 23:08 #

    도교신상 -> 포대화상 아닙니까? 포대화상은 승려인데욤
  • 역사관심 2011/10/12 02:12 #

    포대화상 맞네요;; 불상이라고 설명이 되어있었습니다. 삭제하고 더 적절한 사진으로 교체합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동글기자 2011/10/12 12:52 # 삭제

    오랫만에 블로그 잘 살펴보고 갑니다.사진 곁들여 주시니 훨씬 실감나고 재미있네요.^^
  • 역사관심 2011/10/12 14:52 #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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