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칠갑옷은 고구려산 가능성 (이 뜻) 역사

공산성 출토 황칠갑옷은 당나라 장수 것 확인 --> 제목을 이런 식으로 뽑으면 오해의 소지가 크다.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11026031635578&p=seoul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1018021001&spage=1
(참조링크 출처: water4life.egloos.com/224746)

이도학교수의 기사중 주장이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갑옷 비늘의 ‘정관’(貞觀)은 중국 연호로, 백제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6~7세기 백제에서는 연호 자체를 사용한 일이 없다.”며 “갑옷에서 ‘李○銀’과 같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인명도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당나라군이 공산성 출토 갑옷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했다.


갑옷에 새겨진 ‘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은 645년 4월 21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지금의 랴오닝성 심양 부근에 있는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인 1만명을 생포했다 (주: 이때가 역시 4월이다. 25일이라고 되있지만 3-4일정도의 차이는 흔하다). 이때 당 태종의 군대가 확보한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같은 해 6월 안시성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고구려군 15만명의 병력을 격파하고 나서 확보한 전리품 가운데는 ‘명광개’ 1만벌이 있었다 (주: 이건 예전 필자의 포스팅에서 확인한바 있다. 이 찰갑에 나온 645년과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인지라 흥미로워했는데, 현재느낌으로는 시기상 이 교수의 말이 옳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교수는 고구려군도 명광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나라군이 개모성을 함락하고서 확보한 전리품 가운데 명광개가 포함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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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고구려에서 만든 제품을 당나라 군사가 전리품으로 뺏었다가, 백제에서 잃어버리고 갔다는 뜻이다. 언론에서 제목을 '황칠 갑옷은 당나라 장수것' 이라고 뽑는 게 자극적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뽑은 느낌이 난다. 포스팅 제목처럼 뽑는 게 옳지 않을까.

예컨대, 필자가 미국산 아이폰에 이름을 적어두고, 일본 놀러가서 잃어버렸다고 하자. 1000년뒤에 일본학자들이 그걸 발굴했는데 그 아이폰의 생산지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이건 한국인소유품'이라고 제목을 적은거나 진배없다. 물론, 당나라군의 고구려-백제 침공루트의 확인등 중요하지만, 이 문화재에 대한 메인 주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면, 고구려산 '명광개'로 아직 확증이 전혀 없는 이 문화재가 명광개라는 논지에 힘을 싣을수도 있게 된다.

괜히 엄한 전문가 잡지 말고 제목 신중하게 뽑길 바란다 (오히려 백제가 당대에 당나라 연호를 썼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저분의 논지 하나일뿐고 아직은.

1. 지금 중요한건, 찰갑에 써넣는 기록이 생산시기인지 획득시기인지 하는 점등이 아닐런지.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이들 문자 자료 중에서도 서기 645년에 해당하는 '정관 19년'이라는 비늘 조각에 대해 이현숙 학예사는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오른쪽 가슴 위 정도가 아닌가 한다"면서 "이렇게 되면 남한테 잘 보이는 데다가 글자를 새겨넣은 셈이 된다"고 말했다." 라는 인터뷰가 다인데, 전리품이라 새겨넣은 것인지, 아니면 생산자가 넣은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다.

전자의 경우 고구려산이 거의 확실해질 것이고, 후자의 경우 우선 고구려가 당나라연호를 당시 썼는지의 여부파악이 중요해지고, 혹은 당나라산일 경우가 된다. 만약 당나라 산일경우 두가지 상황을 생각해볼수 있다. 1) 4월 21일에 만든 반짝거리는 새 갑옷을, (아마도 나흘뒤인 고구려 개모성공략과 두달뒤인 안시성방어때 참전해서 입고) 백제땅에 버리고/흘리고 간것이 된것이거나 (혹은 죽어서- 하지만 인골이 같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혹은 2) 갑옷의 주인이 645년 고구려원정때는 아예 참가하지 않고 661년에 참가했을 가능성이다 (그럼 거의 갑찰이 16년이나 지난 후이다. 갑찰의 상태로 볼때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그런데 후자가정의 1)번경우, 당나라에서 개모성까지 겨우 4일밖에 안걸리는 거리인지 파악해 보는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또한 기록에 보면 당태종의 출정시기는 2월이다. 과연 두달지난 4월에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출정했을까 싶기도 하다.


참고로 거리파악 (개모성 위치가 보인다)
2. 또 한가지 학계에서 확실히 파악해야 하는 부분은 당나라군대가 645년이후 백제땅에서 언제 언제 주둔했었는가 (혹은 퇴각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645년 4월 1일에 획득했거나, 혹은 만들어진 이 갑찰이 어느시기에 백제땅에 버려지게 되었는지도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사족으로 여전히 '백제'산일 경우가 있다:
645년 5월 요동성 공략때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 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으로 보인다. 다만 누구에게 갑옷을 바쳤느냐인데 고구려에게 바친 경우, 백제에서 4월에 만든 갑찰을, 바로 다음달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가 당나라에게 빼앗겼거나, 바로 다음달인 6월 안시성싸움에서 빼았겼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어진다. 이 경우 삼국사기에 나오는 안시성싸움의 전리품 1만개 명광개중 하나가 이 물건일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경우가 성립되려면 4월 1일자라는 것이 '생산일'이 되어야 하며, 당나라 장수가 고구려장수에게서 빼앗은 갑찰의 생산일과 연호와 이름을 적어넣는 경우가 된다.
갑찰의 기록으로만 보면 더 개연성있는 추론은 백제가 당나라에게 갑옷을 바치는 형식이다. 이 경우 마치 주문제작처럼 구입자가 입을 기록을 (당나라형식으로) 기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받은 후 물건주인이 적어 넣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 4월 과 5월이라는 시간차가 난다).

금방 생각해봐도 여러 가능성이 혼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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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제비실 2021/02/11 15:58 #

    공산성 연못지에서 발견된 황칠 갑옷이 백제에서 제조되었다 해도 문제는 왜 연못에 버려졌는가가 문제이지요 갑옷생산자와 배달소유자가 갑작스런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연못에 버릴 이유가 없지요 당의 연호가 새겨진 갑옷을 연못에 버린 것을 현실적으로 추론하면 당시 여제동맹을 맺은 백제에서 당나라에게 바칠 갑옷을 제조한다는 현실적으로 희박한 일이기에 당나라에 바칠 갑옷이 백제 조정에 반역으로 거슬려서 갑옷 제조자가 자국 조정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연못에 버렸을 가능성이 있지요
  • 역사관심 2021/02/12 09:32 #

    그런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겠네요. 어디서 문헌기록이 탁 튀어나와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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