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표다리 (2)- 신라 월정교와 일정교, 문천교, 그리고 남궁 (경주)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오늘은 신라의 대표교각 두개를 소개합니다.

바로 해처럼 아름다운 다리와 달처럼 아름다운 다리, 일정교(
日精橋)와 월정교(月精橋)입니다.월정교와 일정교는 신라의 궁성인 월성(반월성)에서 불국토인 남산으로 바로 연결되는 중요한 대교들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을 이룩한 뒤 100년쯤이 지난, 당시 17만 인구가 살았던 경주의 왕경 건설 사업의 마지막 단계의 작업으로 국제적 도시 경주의 위상을 높이고 태평성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 두다리를 놓았으리라 추측합니다.  우선, 삼국중 신라와 백제의 전통교각에 대한 개요를 발췌해 봅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이미 대동강 대교에서 언급했습니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여 초기에는 북의 고구려와 서의 백제의 제약으로 초기에는 직접 중국과의 교류를 갖지는 못했으나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비교적 순수하게 그들의 고유문화를 오래도록 보전하면서 소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발족하여 통일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다리에 관한 최초의 역사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보성이사금록에 『십이년 추팔월 신성 평양주대교 … 』 즉 AD 413으로 이 당시 평양주는 현재의 양주라는 설이 위치는 확실치 않고 어떠한 다리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대교 』라 한 것을 보면 당시 상당한 규모의 다리를 축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평양주대교』의 가설 이전에 이미 이 당시에 여러 형태와 규모의 다리가 널리 실생활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주: 이 평양주대교에 대한 삼국유사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성니사금조實聖尼師今條’에 “12년 추8월 신성 평양주 대교十二年 秋八月 新成 平壤州大橋”).

한편 주목되는 기록중의 하나는 삼국유사 권사 원효불기조에 문천교(일명 유교)의 다리 이름이 보이는데 이 문천교(유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연이 있다.
원효가 어느날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유교)를 지나다가 떨어져 옷을 적시자 관리가 요석궁에 데려가 옷을 말리도록 하였는 바, 궁에 홀로된 공주와 유숙하여 설총을 낳았다는 것이다. 원효의 출생이 진평왕 39년 (619)이므로 유교는 7C의 다리로 보인다. 이 다리의 유구로 보이는 목조로 된 기초부재가 월정교 하류 약 19m 지점에서 발견되어 여러가지로 주목을 끌고 있다 (주: 문천교에 대해서는 후일 알아볼 계획입니다).

백제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할거하던 고구려계통의 한 부족이 점차 반도의 서남부로 진출하여 4C초에 통일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백제는 반도의 서남부에 진출하고 해로를 통하여 중국남조 여러나라와 직접 교류하여 급속한 문화의 발전을 보았다. 백제는 도읍을 처음 한성(지금의 한강 주변)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하다가 문주왕 1년 (475) 수도를 웅진성 (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재기하였는데 이 시기인 웅진시대의 다리가설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498)에 『설웅진교』 즉 웅진교를 건설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위치와 규모는 알 수 없다 (주: 원문입니다. 동성왕조東城王條’에 ‘12년 (489년) 설 웅진교十二年 設 熊津橋’). 백제는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이도(AD 538)하여 국가부흥에 힘을 썼는데 백제는 부영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을 때 최성기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 백제는 일본에 여러분야의 선진문화를 전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다리 축조기술이 있다. 백제 토목기술자인 노자강이 일본에 건너가 다리가설 기술을 전한 것은 백제인의 다리 축조기술 정도를 가늠케 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백제 다리유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1980 - 현재)해 오고 있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다리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발굴에는 살펴보면 다리구조로는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미륵사지 강당지 중심축사상에서 북측 건물지(승방지)와 금동 건물지간의 연지를 건너가는 다리 통로로 교각은 4개소, 건물기단은 교대로 삼아 원형지대석 위에 원통형 초석과 같은 장주형 교각이 남아 있다. 다리는 교각 간 2.8m , 폭 2.8m , 총 길이 14m 에 이르는 회랑식 교량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 백제고분중 무령왕릉의 경우 남, 북벽 왜곡시켜 아치를 형성한 것은 당시 교량에서 아치교가설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원문출처: http://nexpop.culturecontent.com/menu01/menu010101.asp

위의 설명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월정교는 통일신라 전성기인 경덕왕 19년(760년)에 건설된 대규모 다입니다.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도 발견됩니다. 따라서 적어도 13세기이후까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같은해, 760년에 춘양교 (즉 일정교)도 중수됩니다.

두 다리의 위치입니다. 궁궐인 반월성을 중심으로 양쪽에 포진되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복원중인 신라 대표다리 월정교입니다 (일정교는 모형이 없어 설명과 사진만 덧붙입니다).
복원형태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중국식 누각이니, 위치변경이니
(벌써작년이군요- 작년에는 쓰는 나무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링크).어쨌든 최대한의 고증하에 복원하길 기대합니다.

월정교
월정교는 언급했듯 신라의 궁궐인 반월성 남쪽을 끼고 도는 두개의 대규모 다리중 하나로 (두다리는 약 700m거리),그 규모가 길이 63m, 너비 13m, 높이 6m 규모로 대단합니다. 언급했듯 삼국사기 경덕왕 19년조(760)에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정교(月淨橋)는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름도 바뀌어 월정교(月精橋)로 표기되기 시작했습니다.현재 누각을 올리는 쪽으로 진행중인데, 이는 발굴조사 당시 교각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교각 상판이 누각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樓橋)였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출토된 기와의 양이 얼마인가에 따라 고증의 문제가 있을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누교로 결정난 것으로 보입니다.

월정교의 남아있는 교각의 기초석의 크기는 길이가 13m, 폭은 2.80m의 엄청난 규모이고 모두 네 개입니다. 또 교대와 교각 기초석으로 높이를 측정해보니 6m이고 교대의 폭은 13m가 넘어 교각  기초석의 폭과 같다고 합니다. 교대의 폭이 13m인 것은 교량의 폭이 13m임을 말하는데 이는 왕복 4차선으로 차가 달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듯 이는 한강의 광진교와 같은 규모입니다.

(정보출처: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49793)
광진교
월정교 유적과 복원현장 (현재 70%이상이 이미 진행되었습니다- 각계의 의견수렴이 제대로 되고 있길 바랍니다)
이렇게 보니 꽤 장관입니다. 누각을 올리는 쪽으로 수렴되었다면 제발 단청고증은 이번만큼은 제대로 하길 바랍니다.
2011년 6월에 직접 복원현장을 답사하신 블로거의 포스팅입니다 (일본 복원 교각들과의 비교도 있군요)
링크


월정교 교대
다음으로 일정교 (춘양교)를 살펴 봅니다. 사실 월정교의 규모와 복원으로 유명세를 덜타고 있으나, 월정교보다 더 고증에 충실한 복원이 가능하고, 또한 풍부한 컨텐츠를 담고 있는 것이 이 고대교각입니다.
 
일정교
일정교는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기록에 따르면 역시 같은 신라 경덕왕 19년에 축조됩니다 (790년이죠). 당시 춘양교(春陽橋)로 명명됐으나 훗날 일정교로 개칭됐으며 16세기 초반 이전 다리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즉 약, 800년이상 버틴 대단한 다리입니다. 춘양교는 고려시대에 일정교(日淨橋)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뒤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효불효교, 칠성교 등으로도 불려 졌으며 조선조에 이르러 모두 일정교(日精橋)로 표기되었습니다.즉, 필자의 추측이지만 종합해보면, 신라대에는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고려대에 오면서 월정교(月淨橋)와 일정교(日淨橋)로 1차통일, 그리고 고려중기에 다시월정교(月精橋)와 일정교(日精橋)로 2차통일을 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본인이 ‘경주 왕경지도’를 제작하면서 ‘7형제가 야밤에 내를 건너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홀어머니가 안쓰러워 다리를 놓았다’는 경주 지역 설화를 따 ‘효불효교(일명 칠성교)’로 명명한 뒤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족으로 포스팅 맨 아래 일정교에 얽힌 설화를 첨부합니다- 개인적으로 조금 의아한것은 이 설화가 오히려 '문천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효불효교의 칠성교가 일정교라는 추측은 아직 가설일 뿐입니다.).

발굴팀의 조사 결과, 길이 55㎙, 너비 13㎙이상으로 앞서 발굴ㆍ복원된 월정교(길이 63미터, 너비 12미터)보다 길이는 짧지만 다리 폭은 더 넓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교각은 3개로, 월정교와 마찬가지로 물의 거센 흐름을 견디게 하기 위해 양 끝을 유선형으로 쌓았습니다. 특히 가운데 교각의 석재 5개가 차례대로 쓰러진 채 남아있는 등 교각 부재 630여점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이지요- 아래 사진에 일부가 있습니다).

일정교 유적유구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양쪽 축대만 복원해놓은 월정교와 달리 다리의 상당 부분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리 상판은 교각 사이 간격이 14㎙에 달해 돌보다는 나무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 원형을 밝힐 부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정교의 동쪽 교대(橋臺)의 석축이 월성 방향으로 100미터 가량 이어진 사실도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연구소 심영섭 학예연구실장은 “이 정도 규모로 축대를 쌓은 것으로 보아 남천 동편에 궁궐 등 매우 중요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2002년 2월, 일정교 실측조사 보고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과 최근 2006년에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유물이 나옵니다. 사실 2000년에 나온 이 유물을 2년뒤 실측조사가 뒷받침해주는 형국이 된 것이지요.

바로 '남궁'이라는 구절이 적힌 기와편이 나온것입니다. 2000년에 남궁지인이라고 찍힌 기와가 일정교 남쪽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문헌에는 기록이 없지만 현재 경주박물관 자리에 ‘남궁’이라는 궁궐이 있었을 것이라는 학계의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료로 주목되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 12월 '똑같이 남궁지인' 이라는 인장이 찍힌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출토가 됩니다. 이 위치가 일정교남쪽 (즉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자리)와 동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면서 남궁지에 대한 학설은 혼란에 빠집니다.  조사단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의 기와는 8세기경, 그리고 2006년 기와 (동촌동기와)는 9세기초 유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kinhj4801/13142166)


이것이 2006년 동촌동에서 나온 남궁기와입니다.

밑의 지도에 아랫쪽이 2000년발굴지, 윗쪽이 2006년 발굴지입니다. 02년 남궁기와발굴지는 바로 월성 아래 (즉, 일정교를 건너자마자)에 있습니다. 심영섭 학예연구실장의 언급대로, 이곳에 100미터가량 일정교유적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일정교에서 주욱 벽돌길같은 것으로 남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상상해봅니다.
다시 일정교 이야기로 돌아가서, 일정교는 월정교와 비교하면 교각이 하나 적고 길이가 조금 작을 뿐 형태와 규모는 물론 교대, 날개벽, 석축의 돌못 사용방법, 퇴물림식 축조방법, 석재의 재질과 색깔까지도 거의 비슷합니다. 두 다리모두, 교각 기초석은 센 물살을 견딜 수 있게 주형(舟型)으로 쌓았고 교각주위에서 일어나는 물살의 소용돌이를 이길 수 있게 기초석 밑을 막돌로 다져 넣었습니다. 교대에는 돌못을 박아 석축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포스팅앞쪽에 언급했듯 이 다리가 있기 전에 남천에는 ‘유교’ (즉 문천교입니다)라는 단 하나의 다리만 있었습니다- 7세기였죠.

일정교 서편교대
일정교의 수많은 유구를 비롯, 여러 모습들입니다.
일정교 교대유구
이번 포스팅을 통해 '남궁'에 대한 뉴스를 접할수 있어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궁궐은 문헌에만 등장하고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과, 이렇듯 유물로 출토되고 문헌에는 등장치 않은 것등, 합치면 정말 많은 궁궐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월정교와 일정교의 명칭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고 문천교에 대해 조금 더 친숙해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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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본문에 언급한 사족입니다. 일정교에 얽힌 설화입니다.
효불효교(孝不孝橋)설화

<동국여지승람〉 권21에 경주 문천(蚊川) 위에 놓인 다리에 얽힌 내력으로 전한다. 신라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다.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했다. 어느 날 아들들은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하고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교라고 불렀다. 구전하는 이야기에는 이 다리를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칠성교(七星橋)라고 부르며, 자식 없는 여인이나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의 교각(橋脚)에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고 또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인이 이 돌에 빌면 상대방에게 그 뜻이 전해진다는 전설도 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효행설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효도에 관한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밤이면 찬물에 발을 담그며 몸서리치는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아준 아들들의 행위는 분명히 어머니를 향한 효도이지만 죽은 아버지에게는 불효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리가 자식이 없는 여인에게 수태를 가능하게 하고, 젖이 잘 나게 하는 등의 풍요를 가져오는 영험이 있다고 믿는 민중의 마음에는 어머니의 본능적 욕구를 윤리와 도덕률로 매도하지 않은 진실이 숨어 있다 (주: 많은 삼국시대 설화가 그렇듯, 역시 사회분위기가 자유분방함이 느껴집니다. '효'라는 타이틀이 이 설화에 붙은 것이 일제시대이니, 유교적 사상으로 이 설화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여겨집니다).(출처: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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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부산촌놈 2011/12/15 00:54 #

    크으... 스토리텔링... 제가 최근에 학교 음악시간에 '노트르담 드 빠리'라는 뮤지컬을 보여줘서 봤는데 거기 아주 삘이 꽂혀서 인터넷에 마구 검색해본 겁니다 ㅋㅋ.

    아시죠? 노트르담의 꼽추로 더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말입니다.

    어떤 블로그에 설명을 해놓은 것을 보니까, 처음에 시테 섬의 노트르담 성당은 퇴폐해서 도시계획가들이 그걸 허물어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가 이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하여 소설을 쓴 뒤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몰렸고, 이를 복원,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나중에는 결국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면 살만 더 붙이면 되겠지만 이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예술인들의 우리의 유구한 문화를 소재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과 이를 예술로 승화하여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죽은 전통 문화 살리기에 대한 요구를 하도록 이끌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되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 역사관심 2011/12/15 02:38 #

    맞습니다. 전통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제인가 올린 '스누피'만 해도 미국의 전통이 되가고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피너츠는 말이죠). 천민자본주의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잘 그리고 소중하게 '이야기'를 덧붙이고 만들어가느냐는 모든 전통문화에 핵심중 하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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