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후백제궁터의 전설- 문경 궁터마을 & 전우치 궁궐 (태인리 궁기부락) 역사

1.

'궁터마을'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얼마전 북한산의 중흥사 근처에 백제의 궁터가 있다는 실록의 기록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다음의 포스팅은 원래 궁궐에 관심이 많은지라 예전부터 한번 다루어보고 싶던 흥미로운 '궁터마을'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선 문경문화원의 정보를 보시죠.

궁터마을이 있는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宮基里)는 본래 문경현 가서면의 지역이었다. 궁기(宮基)는 우리말로 ‘궁터’라는 뜻. 궁기리는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있는 조항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후백제의 왕 견훤이 이 곳에 궁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전해지는데서 유래한다. 이터골, 옛터골, 궁터 등으로 불리며 임진왜란 당시 충북 괴산에서 경주 이씨 일파가 이 곳으로 피난해 생활 터전을 잡은 것이 마을 형성의 시초로 전해진다.

당초 문경현에는 궁기리라는 동명이 없고 고모리(古毛里)가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모리와 마암리(馬岩里) 일부를 병합해 궁기리로 개편하고 농암면에 편입됐다. 마암리는 말바우(馬岩)라는 바위에서 유래된 것으로 역시 견훤의 일화가 담겨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견훤산성에서 바라보니 냇가 근처에 오색구름이 자욱하게 끼더니 말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울고 있었다. 이를 보고 견훤이 ‘하늘이 나의 뜻을 알아보고 보낸 용마(龍馬)로구나’라고 생각하고 올라타니 비호같이 달렸다. 견훤이 기뻐서 용마를 보고 “네 걸음이 빠른가, 내 화살이 빠른가 보자”고 하며 연천 쪽으로 화살을 쏘고 달려가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아, 견훤이 크게 노하며 “이것이 무슨 용마냐”하고 칼을 빼어 말의 목을 치자 화살이 그제야 날아와 땅에 꽂힌 것을 보고선 자기의 경솔함을 후회하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주: 역시 흥미로운 설화죠)

궁터마을의 위치입니다.

이외에도 궁터마을에 대한 본격적인 정보가 문경문화원 향토사료에 실려있습니다. 아래에 소개된 이 지역의 명칭을 살펴보면 모두 '궁'이란 단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4. 궁기리(宮基里)
문경현 가서면(加西面)의 지역이다. 문경현지에는 궁기리(宮基里)의 동명은 없고 고모리(古毛里)만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고모리(古毛里)와 마암리(馬岩里) 일부를 병합하여 궁기리(宮基里)라 하고 농암면에 편입되었다. 후백제왕 견훤이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궁터(宮基)라 한다. 남쪽은 연천, 동쪽은 가은완장, 북은 충북 청천과 접한다.

이터골·옛터골(古基)·궁터(宮基)
상궁마을 북쪽 1㎞에 있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시조였던 견훤이 이곳에서 많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 본궁(本宮)을 설치하였다 하여 고기라 하고 그 후 속칭 이터골 또는 옛터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부락은 경북과 충북을 경계로 한 험준한 조항산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충북 괴산에서 경주이씨 일족이 피난하여 터전을 잡고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웃땀·상궁(上宮)·상궁기(上宮基)
연천2리 말바위 마을에서 서쪽 골 안으로 3㎞를 진입하면 골이 갈라지는 곳에 중궁마을이 있고, 중궁마을에서 북쪽 골로 800m를 올라간 곳에 상궁마을이 있다. 고기(古基)에서는 남쪽으로 1㎞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기(古基)를 비롯하여 이 일대에 견훤이 궁궐도 짓고 군병도 훈련하던 곳이라 하여 궁기(宮基)라 명명하게 되었는데 이곳 3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하였다 하여 웃땀, 상궁, 상궁기라고 불렀다 한다. 이(李), 신(申), 임(林)씨 등 몇 가구가 살고 있다.

중땀·중궁(中宮)·중궁기(中宮基)
상궁기에서 남동쪽으로 8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셋 궁기 마을 중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땀, 중궁, 중궁기라 부른다.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줄고 있다.

새터·아랫땀·하궁·하궁기(下宮基)
중궁기에서 동쪽으로 7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3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아래에 있다 하여 아랫땀, 하궁, 하궁기라 부르다가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불당곡(佛堂谷)·절골·절터골
상궁기 마을에서 북쪽 골을 200m를 올라가서 동쪽으로 난 불당골을 500m를 더 올라간 지점 조항산 자연봉 중턱 폭포가 있는 계곡에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가 조그마하게 지은 절이 조선 중엽까지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어 이 계곡을 불당곡이라 하고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 하며, 7 8가구의 화전민이 생활하다 현재는 황폐화된 곳으로 가끔 기왓장과 주춧돌이 발견되어 옛 자취를 희미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고모리(古毛里, 姑母里, 古母里)
연천2리 말바위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난 계곡을 2.5㎞ 올라간 곳에 있다. ‘고모재’는 북서쪽 4㎞에 있다. 마을 이름은 고모재의 의미를 따서 붙여졌다고 한다. 문경현지에는 궁기리(宮基里) 전체를 고모리(古毛里)라 기록하고 있다.


고개· 봉· 골· 대· 등
고모재(古毛峴, 古毛嶺)· 웅성(熊城)· 웅현(熊峴)
고모재 마을 북서쪽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로 가는 대간 위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가 백제와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죄를 지은 사람도 이 고개만 넘으면 잡지를 못하여 지금도 무슨 일을 하다가 잘못하면 “고모재‘ 넘어갔다고 한다. 고모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로, 곰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여 곰재라 하였다고도 하며, 또 다른 전설에는 고모와 부모가 없는 질녀가 고개 밑에서 단란하게 살았는데, 질녀가 우연히 병을 얻어 죽게 되자 고모는 이를 슬퍼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고모재 상봉(上峯)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몇 날을 지내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고모의 애처러운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재의 이름을 고모재라 하였다 한다.

이외에도 이 지역에는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명이 산재해 있습니다.

도둑골
젓밧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미륵골
상궁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미륵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절골
중궁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큰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오래된 기와가 출토되었다 한다 (어떤 사찰일까요).
쟁이바우골· 쟁이밧골
원효대 남쪽에 있는 바위를 쟁이(키)처럼 생겼다고 쟁이바우라 하며, 그 밑에 있는 골짜기를 쟁이밧골(재이바우골)이라 한다.
이상대· 의상대(義湘臺)
중궁기 서남쪽 조항산의 중턱에 있으며, 의상대사가 머물렀다고 한다.
원효대(元曉臺)
상궁기 남쪽에 있는 대(臺)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머물렀다고 한다.
원문- 문경문화원 항토사료 20집중

이상과 같이 문경의 궁터마을에는 후백제의 궁궐을 비롯, 여러 사찰과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제 검색실력이 짧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발굴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혹 궁터마을에 대한 연구결과나 발굴소식을 아시는 분은 나누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궁터마을 홈페이지를 가보아도 유적지 사진은 전혀 없습니다 (링크- 궁터마을 소개관). 다만, 궁터마을이 2000년대 들어 '자연학습체험마을'로 소개될 뿐이로군요.
중흥사 유적지와 더불어 꽤나 흥미로운 (궁궐에 관한) 지역이며, 전통문화 지역으로 잘 살려볼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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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궁터마을이란 곳은 문경시외에도 태인리에 존재합니다. 이곳은 다름아닌 '전우치 설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태인리 궁기부락'이란 곳입니다. 궁기마을의 전경입니다 (사진). 산아래의 마을이 궁기부락이고, 그 앞쪽 평야는 일제시대 전까지는 바다였던 곳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금도 광양 태금면 태인도 궁기리(宮基里)에는 궁(宮)터 자리가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500년 전 전 우치가 도술을 부려 이곳에 궁궐(宮闕)을 지었다. 어느 날 충청도 어느 고을을 지나가는데 이 고을 수령이 얼마나 탐학(貪虐)이 심했던지 그는 이곳 백성을 구하려 마음먹었다.

전우치는 이곳 궁기마을에 와서, 도술(道術)로 궁궐을 짓고 섬진강을 한강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왕명(王命)을 빌어 섬진강을 끼고 있는 남원, 곡성, 순창, 구례, 하동 등지에 명하여 조곡(租穀)을 한강으로 가져 올 것을 명하니 순식간에 양곡(糧穀) 수만 석이 모이더란다. 전우치가 이 양곡으로 충청도 백성을 살리고자 충청도로 떠나 간 후…궁궐은 간곳이 없고 궁궐터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궁터마을로 불렀으니, 지금 광양시 태금면 태인리 궁기(宮基)부락이 바로 그 곳이다.

원문출처- 전우치 재조명 (담양신문)

이 기록은 약 500년 된 관헌기록에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는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실록을 뒤져봐도 (한자로), 궁기리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두지역은 철저히 수백년간 잊혀진 장소인듯 합니다. 하다 못해 유적지 사진도 없습니다. 언젠가 두지역이 다시 재조명 받아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트로이 신화의 발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2009 년 전우치 (영화중)



덧글

  • 행인1 2012/04/09 08:48 #

    좀 찾아보면 용마전설은 견흰말고도 여러 사람 버전이 있더군요.
  • 역사관심 2012/04/09 09:39 #

    그렇군요. 언제 링크도 한번 주시면 잘 읽겠습니다 ^^
  • 동글기자 2012/04/10 15:14 # 삭제

    매일 눈팅만 하다가 흔적 남겨봅니다. 기대를 뛰어넘는 멋진 유적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에 전기가~ ^^
  • 역사관심 2012/04/10 16:10 #

    그러게나 말입니다~. 풍납토성급이 나온걸 보고도 아직까지 잡음이 많은 걸 보면 답답하긴 하지만 말이지요 ^^;

    만약 저런 곳에서 멋진 유적지가 나온다면 정말 멋질것 같습니다. 진도유적지 급은 나오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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