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선박 (1)- 조선시대 6-7층급 윤선(輪船) (1550년 기록외, 실록)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조선시대 선박에 대한 예전에 모아둔 정보를 한번 정리해 봅니다. 16세기중반, 명종 5년의 실록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선박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 배안이 7층이나 되는 거대한 선박에 대한 정보입니다.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2월 25일(경신) 첫번째 기사.

조강에서 상진이 윤선을 제작하여 양곡을 수송할 것에 대해 아뢰다.

상이 조참(朝參)을 받고 조강에 나아가니, 영경연사
상진이 아뢰었다. "전에 안현(安玹)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대학연의보유(大學衍義補遺)》를 보고 윤선(輪船)의 제도를 살펴 깊이 연구하여 당시에 병사(兵使)로 있던 김순고(金舜皐)로 하여금 윤선을 제작하게 하여 배안을 6∼ 7층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만일 이 윤선을 많이 제작하여 배를 잘 다루는 사공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운행하게 한다면 양곡을 수송하는 일이 실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양(諸葛亮)위(魏)나라를 칠 때 목우유마(木牛流馬) 를 가지고 군량을 운반하였으니, 이것은 임기응변으로 적을 제압하는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배를 제작하는 방법을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에 의하고 그것으로 양곡을 수송하게 한다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주: 創造輪船, 構層六七-- 번역본외에도 원문을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6-7층짜리 윤선을 만든것이라 되어 있습니다).

윤선이라 함은 역시 '바퀴/수레 선박'이라는 뜻인데, 전대인 당나라때부터 건조되었으며 송대에는 이미 활발히 운용된 바 있습니다.
이 기록에선 안현이라는 경상도 관찰사가 건조했습니다. 송대 윤선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8개의 노와 안쪽에 바퀴를 돌려서 동력을 얻는 식입니다). 역시 꽤나 층이 높은 배임을 볼수 있지요. 송나라가 960년~1279년이며 명종때 기록은 이미 1550년이니, 거의 300-500년의 시차가 존재합니다. 조선시대 중기에도 우리가 흔히 아는 판옥선외에 이런 대형선박이 (기술력으로만 보자면) 쉽게 건조되었음을 유추해볼수 있습니다. 이 모형은 선내가 3-4층정도로 보이는군요.
송나라 윤선
명종때 윤선건조에 대한 상소는 또 있습니다. 명종이 직접 건조명령을 내렸고. 따라서 건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이 구절에서의 윤선이란 개념은 일정한 '배의 종류'라기 보다 '배의 설계법' (즉 동력을 얻는 방식-바퀴운용)을 뜻할때도 사용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윤선제도'. 즉, 맹선이라는 종류의 배에 윤선제도라는 방법을 입히는 것이죠.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10월 22일(임오)
중략. “함경도에 조운(漕運)한 일은 전에도 있었습니다. 경상도 연해의 각 고을로 하여금 중국의 윤선 제도(輪船制度)에 의하여 맹선(猛船)(주: 맹선은 판옥선의 전 버젼으로 임란초기까지 쓰였지만 내구성이 약해 고깃배로 쓰이게 됩니다- 30, 60, 80명급이 존재했습니다- 작은 예로 태종때 (1413년)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충청도 죽산(竹山)중맹선(中猛船) 1척이 바람을 만나서 당진포(唐津浦)에서 침몰하였는데, 익사한 자가 24명이었다")을 많이 만들어 옮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흉년든 해를 기다려서 하려면 일이 촉박하게 될 것이니 지금부터 매년 곡식을 옮기라는 것으로 승전을 받들게 하소서. 중국에는 오랑캐가 침구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평안도 여러 고을의 성지(城池)와 기계(器械)를 정제(整齊)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중에서 3∼4곳의 성(城)은 더욱 튼튼하지 못합니다. 한꺼번에 모두 수선할 수는 없으나 의주(義州)의 내성(內城)은 퇴락한 지 오래되었으니 곧바로 수축하게 하소서. 또 강변은 의순관(義順館)에서 인산(麟山)까지 토성(土城)을 쌓아야 되는데, 해마다 조금씩 쌓으라는 것으로 승전을 받들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주: 성곽부분도 흥미로운데 후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완성된 윤선을 국왕(명종)이 검토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만약 윗부분과 관련된 선박이면, 1553년 즉 3년만에 제조를 끝낸것이지요 (물론 그렇진 않을수도 있습니다- 매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명종 15권,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9월 3일(병오) 1번째기사
상이
망원정(望遠亭)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새로 제조한 윤선(輪船)을 시험한 다음 심연원윤개에게 전교하기를, “종친(宗親)과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려고 하니, 지금의 풍경으로 제목을 정하라.” 하니, 즉시 ‘망원정에 머무르다[駐蹕望遠亭]’라는 제목의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짓도록 아뢰었다.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 등 6명이 입격하였는데, 차등 있게 상사(賞賜)하였다. 해거름에 서교(西郊)에서 관가(觀稼)하고 유시(酉時)에 환궁하였다.

200년 후대인 숙종때 (1700년)도 윤선은 등장합니다. 다만, 기록으로 보아 '소규모 윤선'이었음을 알수 있으며, 6-7층급과 함께 이런 소규모 윤선도 운용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숙종 34권, 26년(1700 경진 / 청 강희(康熙) 39년) 7월 25일(병진) 첫번째기사
이세백이 강변에 관리 파견·김구가 수차와 윤선에 대하여 건의하다

중략...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보다 먼저 강화(江華) 사람 권탁(權倬)이 상소하여 수차(水車)와 윤선(輪船)의 제도를 올렸으므로, 본부(本府)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견양(見樣)대로 만들어 낼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것을 만들어 올리니, 호조 판서 김구(金構)가 수차는 물을 잘 퍼올려서 실로 가뭄에 대비하는 좋은 기구이므로,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어 시험삼아 쓰도록 할 것을 청하고, 윤선은 비록 작지마는 매우 빨라서 편의에 따라 기계(奇計)를 쓰기에 좋으므로 통영(統營), 또는 전라도 수영(水營)에 내려 보내서 그대로 조작하되, 제도를 조금 크게 만들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선에 대한 기록은 무려 고종때까지 등장합니다. 19세기말인 1894년기록이 마지막으로, 윤선의 조선후기 모델은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상상도 해볼수 있습니다.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4월 15일(신유) 첫번째기사
내무부에서 강화영의 군사 4초를 더 차출하여 해영의 병방에 내려 보낼 것을 아뢰다

내무부(內務府)에서 아뢰기를,
“초토사(招討使)가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형편에 따라서 알맞게 처리하겠지만 조심하지 않아 잘못되면 안 됩니다. 심영(沁營)의 병정(兵丁) 4초(哨)를 더 차출하여 보내고 해영(該營)의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윤선(輪船)을 타고 내려가게 하여 민심을 진무시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주: 윤선제작에 관한 건은 거의 전부 윤허하는것도 흥미롭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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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위키백과의 조선시대 윤선에 대한 설명입니다.
윤선(輪船)은 조선 명종(明宗) 5년(1550년) 2월에 건조되었다. 중국에서 8세기 이전에 나타난 윤선은 발로 밟아서 수차(水車)를 돌려 움직이는 동력선(動力船)이다. 서구에서는 1543년에 비로소 실용되었던 패들 휠 보트(paddle wheel boat)가 한국에서는 명종 8년(1553년) 9월에 진수되어 시험되었다. 그것은 안현(安玹)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대학연의 보유(大學衍義補遺)>의 윤선제(輪船制)를 연구하고 김순고(金舜皐)에게 설계와 건조를 맡겼던 것이다. 진수, 시험항해에 성공하자 안현은 그것을 조운(漕運)에 사용하도록 청하였다. 윤선은 그 후 [[조선 순조|](純祖) 때에도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인 전라우수사 이민수(李民秀)에 의하여 좌우 각 2륜(輪)이 있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장정(壯丁) 1명이 1륜을 밟도록 하여 모두 4명이 밟으면 매우 빨랐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윤선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거의 다 군사적/경제적목적으로 실용화된 듯한데, 어떤 의미로 이런 마지막문장을 넣은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중화'란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오류가 있는데 1553년에 안현의 연구로 첫 윤선을 제작한것이 아니라, 이미 안현이 1550년이전에 7층짜리 윤선을 제작한 바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박만 해도, 아직 복원되거나 모형으로나마 제작되지 않은 것들이 꽤 되는 느낌입니다. 적어도 검색으로는 모형도 찾을수 없습니다 (해양박물관정도에 가보면 있으려나요). 사실, 윤선이라는 단어는 근대화시기까지도 사용됩니다만, 현대 한국인들의 개념에선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볼수가 없으니 머리에서 사라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백범일지 (김구)의 일부:
상제님께서 물 위를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나룻배까지 가시거늘 무당이 넋을 잃고 바라보며 '사람이 어찌 물을 신발 삼아 올 것이며, 그러고도 버선 하나 안 젖을 것인가.' 하며 아무 말도 못 하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다들 눈 감아라." 하시고 장만한 음식을 조화로써 윤선으로 옮기시니 윤선 안의 사람들이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서 올리거늘 상제님께서 양껏 드신 뒤에 "호연이 갖다 줘야겠다." 하시며 남은 음식을 손수건에 싸서 주머니에 넣으시니라.

일본의 무라카미 수군박물관처럼 (물론 무라카미박물관은 '무라카미 씨'의 전통수군을 다룬 곳입니다. 일본전체의 수군이 아니죠), 전통함선이라든가 전통무기류에 관한 박물관이 (국립이면 좋을듯) 있으면 좋겠습니다. 백제군사박물관이란 곳은 있지만, 내용이 영 부실하고 따로 노는 느낌이라 통합된 통시적 한국역사 군사류박물관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가장 근접한 전쟁기념관은 일부 유물전시를 빼고는 한국전쟁 위주로 꾸며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고려시대 선박모형도 전시가능하겠지요 (여몽연합군 일본침공 함대침몰 당대(?) 일본측그림 그리고 전함발견뉴스 (2011.10)


무라카미 수군박물관 홈피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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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포스팅을 하고 검색을 하다보니 예전에 초록불님이 (직접주제는 아니었지만) 관련 부분을 올리신 적이 있군요.
http://orumi.egloos.com/4243839


덧글

  • 검은하늘 2012/04/17 05:33 #

    ....그럼 한강에 떠다니는 오리배의 원형이 윤선이란 겁니까-_-?(반은 농담..)
  • 역사관심 2012/04/17 06:13 #

    ㅎㅎㅎ 그럴지도 모르지요. 오리배는 사실 '해골선'의 후예라고 봅니다 (후에 포스팅할 계획).
    윤선은 고대그리스에서도 활발히 쓰일만큼 세계적인 스타일이긴 합니다.
  • 초록불 2012/04/17 10:42 #

    잘 보았습니다...^^
  • 역사관심 2012/04/17 12:14 #

    감사합니다! ^^
  • KITUS 2012/04/17 14:58 #

    제목을 보고... '우홋! 우리나라도 중국에서 쓰던 층높은 거대 선박을 만들었었다니!'하다가..
    곡식을 싣는 수송함이라는 것을 보고 조금은 아쉬워했습니다^^ 전 송나라 윤선의 생김새를
    보곤... 서양의 전얄함과 비슷하게 생겼다해서 조선의 거대 윤선은 저거보다 더 컸지 않았나
    하는 기대를 했었거든요... 흠 근데 명종이후로는 대부분 소형 바퀴선박이 대부분이었네요.
    뭐 작더라도 '바퀴'로 이동하는 선박이라 생각되니 너무 신기해보입니다^^
  • 역사관심 2012/04/17 15:45 #

    사실 수송함이 있었다면, 군용 선박도 충분히 그 규모로 만들었을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수송함을 개조하는 것도 흔했으니까요. 조선초기 기록에도 80-100명이상급인 대형맹선이 많았습니다. ^^ 다만 느려서 원정을 다니지 않은 조선수군에게 그닥 쓸모가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후기에 가면 판옥선들도 꽤 큰 규모가 많죠.

    윤선은 대부분 상업아니면 군용으로 쓰인듯 합니다. 6층급 군용윤선이라...저도 보고 싶군요 ^^
  • 역사관심 2012/04/17 15:54 #

    사족으로 이런 기록과 비교해보면, 조선의 군함들의 규모도 얼추 상상해볼수 있겠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로 항해할 때 3척의 선박에 120명의 승조원이 탔고,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에는 4척의 선박에 170명이, 1519년 마젤란의 항해에는 5척에 265명이 승선했던 규모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지요.

    이보다 약 30년전인, 세조 36권, 11년(1465) 기록에 이런 부분을 보면 간접비교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람규모로만 따져보았을 떄지, 항해능력, 속도등과는 아무 관련없습니다.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최한경(崔漢卿)에게 유시하기를,
    “도내(道內)의 만호(萬戶) 2인으로 하여금 제포(諸浦)의 대선(大船) 2척에 기군(騎軍) 각각 80인을, 중선(中船) 4척에 기군(騎軍) 각각 50인을, 소선(小船) 6척에 기군 각각 30인을 거느리게 함과 아울러, 수전(水戰)할 기구[具]를 가지고 이달 26일에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서 정박(渟泊)하게 하라.” 즉, 대선에는 한척에 80명이 탔다는 것이죠.

    참고로 중기의 판옥선에는 한척당 125명 그리고 140명이 탔다는 기록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기록입니다.
    선조 86권, 30년
    경상 감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에, “금년 3월 10일 성첩(成帖)하여 당일 도착한 고성(固城)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장수의 치보(馳報)에 ‘본현(本縣)의 판옥선(板屋船)에 사수(射手)·격군(格軍) 등 하솔(下率) 1백 40여 명을 싣고 현령이 직접 거느리고서 바다로 나아가 3월 9일 조라포(助羅浦) 경계 고다포(古多浦)에서 왜적과 접전할 때 전선(全船)이 패전하고 현령도 전사하였으므로 시체를 싣고 당일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 KITUS 2012/04/17 16:23 #

    사실 따지고 보면 판옥선도 1700년대 후반의 거대 전열함이나 베네치아의
    갈레아스 전함, 정화의 거대탐험함(?)과 비교할 땐 작지만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쓰는 탐험선보단 훨씬 큰 중~대형전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1800년 대 이후의 함정 말고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후반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했던 함선은 그 크기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집니다..
  • 역사관심 2012/04/17 23:38 #

    고려때 전함들은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배 규모만 보면 얼추 유추가 될터인데, 삼국건...역시 사료부족이겠죠. 그래도 궁금해집니다...
  • KITUS 2012/04/17 14:59 #

    여전히 우리 이미지 속에... 판옥선과 거북선을 빼면 조선의 선박은 작은 나룻배,
    돛단배, 아니면 작은 뗏목 수준이 대부분이라 어서 여러 종류의 선박들이 발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2/04/17 15:08 #

    감사합니다. 앞으로 기회있을때마다 조선시대 초-중기 배들도 소개해보겠습니다.
  • 강희대제 2012/04/17 16:07 #

    바퀴추진이 실제로 존재했군요.. 으음..
  • 역사관심 2012/04/17 23:37 #

    네 강희대제님. 실물을 한번 보고 싶다는...
  • 강희대제 2012/04/18 16:50 #

    디씨에 찾아보면 제 실물사진 버젓히 돌아다닙니다..
  • 역사관심 2012/04/18 23:29 #

    찾아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 검은하늘 2012/04/17 23:58 #

    나중에 기어 나오는 기범선(옆구리에 큰 바퀴)은 여기에 증기기관 붙인거죠?
  • 역사관심 2012/04/18 02:02 #

    19세기에 나오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윤선은 실록에서는 '화륜선'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불 화자). 검은하늘님 말씀대로일겁니다.

    그나저나 이순신 장군 후손이 만드셨다는 군사네명이 좌우에 두개씩 페달돌리는 윤선은 진짜 한번 타보고 싶군요 ㅎㅎ. 피는 못속이는 군요...
  • Warfare Archaeology 2012/05/01 09:46 #

    호오~우리나라에도 저런게 있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 감사감사~~
  • 역사관심 2012/05/01 09:56 #

    고맙습니다~ 항상 환영입니다 ^^
  • 평론가 2012/08/07 17:29 # 삭제

    가끔씩 회화에서 나온 거대선박이 저런거였군요...뻥이 아니였군..
  • 역사관심 2012/08/12 12:53 #

    그렇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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