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의 15세기말 명나라인, 왜인에 대한 이야기. 역사

별 큰 기록은 아니지만, 쉴때 읽다가 꽤나 흥미로운 사건인지라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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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61권,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1월 14일(을유)
최부를 인견하고 표류할 때의 일 등을 묻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갓 최부(崔溥)를 인견(引見)하고, 표류(漂流)할 때의 일을 물으니, 최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신년24091) 정월에 제주(濟州)에 있었는데, 아비의 상보(喪報)를 듣고 황급(遑急)하게 바다를 건너가다가 밤에 초란도(草蘭島)에서 정박(定泊)하던 중 홀연히 북풍이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표류하였는데, 중국(中國) 영파부(寧波府) 지경에 이르러서 2척의 배를 만났습니다. 신 등이 목이 몹시 말라서 손으로 입을 가리켰더니, 뱃사람들이 신의 뜻을 알아듣고 물 2통(桶)을 주었습니다. 밤 2경에 그 배의 20여 명의 사람이 창(槍)과 칼을 들고 신의 배로 돌입하여 옷가지와 양식을 겁탈(刼奪)하고, 또 닻[矴]과 노(櫓)를 빼앗아 바닷속에 던지고는 신의 배를 끌어다가 대양(大洋) 속에 놓아 버렸습니다 (주: 대단하군요...). 무릇 5일 동안을 바다 위에 떠있다가, 마침 동풍을 만나서 다시 표류하여 우두(牛頭)의 외양(外洋)에 이르니, 홀연 6척의 선박이 함께 신의 배를 포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배에서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朝鮮國) 사람으로,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를 순찰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표류해 왔는데, 여기가 어느 나라 지경인지도 모른다.’고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기갈(飢渴)이 너무 심하여 밥을 지으려 한다.’고 사양하였고, 그 사람들도 마침 비를 만나서 모두 선창(船窓)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신 등이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비를 무릅쓰고 도망쳐 두 고개를 넘어 한 마을의 신사(神社)로 들어갔더니 (주: 한번 속지 두번속냐- 뒷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믿었으면 참수형;;), 남녀가 몰려와서 보기도 하고, 혹은 장국[米漿]·차[茶]·술 등을 가지고 와서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주: 착한 중국인서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은 칼을 찬 자가 많았으며, 징과 북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고 격돌하며 에워싸 몰다가 보내곤 하였는데, 마을마다 이와 같았습니다. 다시 50여 리(里)를 갔더니, 관인(官人) 허청(許淸)이란 자가 와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나는 조선국 사람인데 풍파를 만나서 표류하여 왔다.’고 하였더니, 신 등에게 술과 밥을 먹이고는 군리(軍吏)를 시켜서 신 등을 빨리 몰아가게 하였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가 절이 있었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자 허청이 신 등을 여기에 묵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된다고 하자, 허청이 신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문사(文士)라면 시(詩)을 지어 보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즉시 절구(絶句)를 써서 보였는데도 역시 숙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 하룻밤 묶어가기 정말 힘들군요). 

또 몰려서 한 큰 고개를 넘어 밤 2경(更)에 한 냇물위에 이르니, 피곤하여 걸을 수가 없었고, 따르는 자도 모두 엎어져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허청이 신의 손을 잡고 일으키니, 신은 발이 부르터서 촌보(寸步)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 관인이 군병을 거느리고 왔는데, 군대의 위엄이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이들이〉 신 등을 몰아 3, 4리쯤 가니, 성(城)이 있었고, 성 가운데에 안성사(安性寺)란 절이 있었는데, 신 등을 여기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 관인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도저소 천호(桃渚所千戶)다. 왜인(倭人)이 지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군병을 거느리고 왔는데, 허청의 보고로 인해 너희 무리를 몰고 온 것이다. 그러나 진위(眞僞)를 모르기 때문에 내일 마땅히 도저소로 가서 신문(訊問)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주: 즉 왜인일까봐 감시하러 데려옴). 다음날 신 등을 몰고 20여 리를 갔는데, 한 성(城)에 이르자 숙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처음 도착하여 머물던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 구역인데, 채(寨)를 지키던 관원이 너희들을 왜인(倭人)이라고 속이고 그 머리를 바쳐 공로를 도모하려고 했기 때문에 왜선(倭船) 14척(隻)이 변경을 침범했다고 거짓 보고하고는, 장차 군병을 거느리고 가서 체포하여 목을 베려던 참이었는데, 너희들이 배를 버리고 마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계책을 뜻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파총관(把摠官)이 장차 신문(訊問)할 것이니, 너희들은 알도록 하고, 말에 착오가 있게 되면, 일이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 (주: 처음부터 개죽음 당할뻔 했군요...왜인이라고 속여 죽이고 공로를 가져가려한 중국인;;).’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천호(千戶) 등 7, 8인이 신을 국문하기를, ‘너희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였다는데, 지금 다만 한 척만 있으니, 그 나머지 13척은 어디에 있느냐?’ (주: 아니라는데 대놓고 왜인취급) 고 하기에, 신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인과는 말이 다르고 의복의 제도도 다를 것이니, 이를 가지고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왜인으로 도적질을 잘하는 자가 가끔 조선 사람의 복장을 하기도 한 적이 있었으니, 너희들이 왜인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느냐?’ (주: 왜구놈들이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해적질까지 했군요) 고 하기에, 신이 인신(印信)과 마패(馬牌)를 내 보였는데, 그 마패에 중국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믿어 주었습니다. 신이 여기에서 교자(轎子)를 타고 10여 일간의 노정(路程)을 지나 다시 배를 타고 드디어 중국 서울에 이르니, 황제(皇帝)께서 옷 1벌[襲]을 하사하고, 아울러 고의(袴衣)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로 광녕(廣寧)으로 돌아가니, 대인(大人)이 옷 1벌을 주면서 말하기를, ‘전하(殿下)를 위하여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또 그 백성들의 가옥과 성곽(城郭), 남녀의 의복을 물었다. 최부가 말하기를,

“대강(大江, 양자강)24092) 으로부터 남쪽 소(蘇)·항(杭), 소주와 항주) 사이는 거대한 가옥들이 담을 이어서 즐비하게 있었는데, 대강으로부터 북쪽은 서울에 이르도록 인민의 생활이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고 간혹 초가집도 있었습니다 (주: 당시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은 번화, 강북은 약세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관부(官府)의 성(城)은 역시 모두 높이 쌓았고, 성문의 누각(樓閣)은 혹 2층, 3층이 되는 것도 있었으며, 문밖에 다 옹성(擁城)이 있었고, 옹성 밖에 또 분장(粉墻)이 있어서, 무릇 3중(重)이나 되었습니다. 남녀의 의복은, 강남(江南)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큰 검정색 유의(襦衣)와 고의(袴衣)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모두 옷깃을 외로 여미고 있었으며, 영파부(寧波府) 이남의 부인(婦人)의 수식(首飾)은 둥글면서 길었고, 영파부 이북은 둥글고 뾰족하였습니다.”(주: 당시 양자강 강북, 강남패션이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하니, 명하여 최부에게 유의(襦衣) 및 가죽신을 내리고 말하기를,
“최부가 사지(死地)를 밟아 헤치고 다니면서도 능히 나라를 빛냈기 때문에 주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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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집 떠나 표류당해 몇번을 죽을뻔하고 무진장 고생했군요. 왜구들땜에 당시 명나라에서도 무진장 골머리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덧글

  • 비도승우 2015/05/16 19:41 # 삭제

    명종때 사화동 의 예처럼 실제 조선인이 왜구로 변장하는예도있었고 실제 조선인왜구도 꽤있었습니다. 단순왜구의 변장교란만으로보기에는 실례들이있죠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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