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설의 우산국 점령 기록-1500주년 기념. 역사

요즘 독도때문에 시끄러워서 찾아본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관심있던 우산국과 전설에 대한 기록을 마침 올해로 첫정벌후 1500주년이 되어 갈무리 해두었던 것을 정리해본 글입니다. 한국에 존재했던 다양한 소국들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신비롭고 매력적입니다.

우선 위나라의 기록부터 살펴보죠.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에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옥저의 사람인 기로가 말하기를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동안 표류해 동쪽의 섬에 도착했다-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7월이 되면 소녀를 선택해 바다에 빠뜨렸다라고 하지요. 소녀를 매해 7월에 빠뜨렸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어디 남미국가 이야기같아서 생소하죠). 이때가 고구려 동천왕 19년 즉, 246년입니다. 동천왕은 삼국지의 오나라 손권의 사신을 죽여버리고,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역공을 당해 환도산성을 함락당하기도 한 왕입니다.

그때부터 중간에 기록이 없다가, 한참 후인 약 400년후인 그리고 현재 2012년으로부터 딱 1500년전인, 지증왕 13년 (즉 512년)에 멸망까지는 아니지만 (고려때에도 우산국은 930년까지 계속 명맥을 이어갑니다), 한번 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우해왕'과 '이사부'의 이야기입니다. 그 전설을 한번 살펴보죠.

우산국 마지막 왕 '우해'는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리고 와서 왕후에 앉히고부터 나랏일을 살피지 않고, 사랑에만 탐닉합니다. 이때 시집오면서 풍미녀는 학 한마리와 열두명의 시녀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딸을 낳았는데 이름이 '별님'이었습니다 (특이한 이름이죠). 모녀에게만 사치를 퍼붓던 우해는 멀리 신라에까지 가서 노략질을 합니다. 신라의 백성들이 우산국을 토벌해 줄것을 여러번 호소했고, 결국 강릉군주(하슬라주) 이사부가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우해왕은 싸울 준비를 하는데, 그 위치가 천혜의 요새인 골계 (현재 울릉군 서면 남양리)였습니다. 그 해변가에 방책을 좌악 세웁니다. 바로 이곳에서 신라함대와 우산국 함대가 맞붙었는데, 육군위주의 신라군은 여기서 격전끝에 패합니다. 1차 해전은 우산국의 승리였지요. 돌아간 이사부는 신라왕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요청했고, 이듬해 다시 공격합니다. 이때 사신을 미리 보내 항복을 권유하지만 우해왕은 사신의 목을 베어 버립니다. 

여기서 1-2차 해전을 모두 치렀습니다. 바로 골계마을 해변가로 여기에 방책이 있었고, 목사자가 떠다닌거죠.
하슬라에서 다시 떠나기 전, 이사부는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나무로 만든 목사자'를 세웠는데, 그 사자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거북선의 전조인가요- 목사자입에서 불이 나오려면 안은 '쇠통'이 있어야 겠군요). 당시 우산국 군사에 대한 삼국사기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사부가 말하기를 우산인은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력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계략을 써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만들고 전선에 나눠 실었다.(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그리고 전 군선에서 화살을 한번에 쏘면서 진격해들어가니, 우산국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고 합니다. 짐승은 커녕 뱀조차 없던 섬나라 우산국백성에게 그 위력은 대단했겠지요. 결국 골계의 방책뒤로 모두 숨어 들었는데, 이때 이사부가 '당장 칼과 창을 거두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모조리 풀어 다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화살과 짐승에게 오그라든 우산국 군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고, 우해왕은 패전을 직감, 항복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산국의 전력은 어느정도였을까요? 그리고 국민총숫자도 항상 궁금합니다)

최근 복원한 목사자상
결국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에 항복, 조건으로 신라는 우해에게 왕의 칭호를 박탈하고, 우산국이라는 국호도 버리게 합니다. 울릉도는 강릉군수(하슬라군수)의 지배를 받고, 오징어등 해산물을 조공으로 해마다 바칠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만, 말씀드렸듯 잠시뿐, 다시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고려때까지 버팁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를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고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대로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고 합니다. 이어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는데, 그때 하늘에서 뇌성병력이 치면서 나무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됐습니다. 지금의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가 산이 된 전설 또한 전합니다 (차례로 사진을 소개하죠). 이 비파산은 왕비였던 풍미녀가 죽은뒤 이를 슬퍼하던 우해가 뒷산에 병풍을 치고 대마도에서 온 열두시녀에게 비파를 뜯게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멋진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투구봉 (투구바위)
이것이 사자바위
이것이 비파산입니다.
그렇다면 우산국의 도읍은 어디였을까요?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 보면 울릉도의 '현포마을'에 석장20여기와 석탑, 그리고 기와탑이 있는 사찰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이지역에 촌락 7개와 석물, 석탑, 그리고 선지, 나선장, 그리고 여러 유적지와 유물이 많다고 나와 이곳이 현재로써는 가장 강력한 도읍지 후보로 떠올라 있습니다.

여기가 현포마을- 바닷가에 도읍이라...터프하군요.
현포마을의 통일신라시대 고분군입니다 (이때면 우산국 부활시기인지 신라점령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관광지로 정리를 좀 하면 좋을 듯 하네요.
현포마을의 1900년대 초 희귀사진입니다. 너와집이 전통집이었죠.
실록에 나오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더 있겠지만, 일단 하나씩).
세종
지리지 / 강원도 / 삼척 도호부 / 울진현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주: 이부분은 우산국에 불교가 있었음을 보여주지요),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흥미로운 부분은 볼드체로 해두었습니다. 과장이지만 쥐가 고양이만하고 대나무가 기둥같으면 '거인국'이네요.

다음은 19세기 말의 '독도'관련 부분입니다. 송죽도 (송도와 죽도)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그전에는 우산도이란 명칭(이건 울릉도의 예전명칭인 우산국과는 관련이 없는듯합니다만 한자는 똑같죠 - 
于山)과 무릉도란 명칭을 혼용해서 독도와 연결짓기도 했습니다- 독도의 역대 명칭에 대해 정리해 놓은 정보를 한번 보고 싶군요.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4월 7일(임술) 1번째기사
검찰사 이규원을 소견하다

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울릉도(鬱陵島)에는 근래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때나 왕래하면서 제멋대로 편리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죽도(松竹島)와 우산도(芋山島)는 울릉도의 곁에 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또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가려 차임(差任)한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라. 그리고 앞으로 읍(邑)을 세울 생각이니, 반드시 지도와 함께 별단(別單)에 자세히 적어 보고하라.”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芋山)이란 바로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國都) 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里)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檀香)과 간죽(簡竹)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산도라고도 하고 송죽도라고도 하는데 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있다. 그리고 또 혹은 송도·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 형세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 영장(三陟營將)과 월송 만호(越松萬戶)가 돌려가면서 수검(搜檢)하던 곳인데 거의 다 소홀히 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저 외부만 살펴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었다.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펴보라.”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깊이 들어가서 검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송도와 죽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송죽도 밖에 따로 송도와 죽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 여기 나오는 '죽도'와 일본이 주장하는 죽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혹시 그전에 가서 수검한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그전에 가서 수검한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나 대체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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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전한 전설과 조금 다른 전설도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사자를 물에 버리는 장면이 다른 뉘앙스죠). 여기서는 우산국사람들이 속은것을 분해하지요.

울릉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더욱더 극적으로 이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신라군의 배에는 덮어씌운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사자였다. 입에서 불이 두어 길씩 튀어나왔다. 우산국 군사는 사기가 죽었다. 투항의 표시로 큰 깃발을 투구바위에 올렸다. 나팔바위에서는 항복 나팔을 불었다. 이리하여 이사부는 우해왕의 항복을 받았다.(중략) 이사부는 사자 한 마리를 바닷가에 던졌다. 알고 보니 나무로 만든 사자였다.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의 꾀에 속아 항복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울릉도의 전설·민담')
이때 이사부가 두고간 사자가 울릉도 남양항에 있는 사자바위의 화석이 됐다는 전설이다. 사자바위 외에도 울릉도에는 투구바위·나팔바위 등 이사부 전설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진 지형지물이 있다.
올해(2012년) 2월의 이 기사는 우산국정벌 1500년을 기념하는 기사인데 다음의 구절이 재미있었습니다.

우산국 정벌은 150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우산국이 한반도의 판도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넓은 해양 영토를 갖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사부 정벌 이전 울릉도는 물론 동해 연안까지 왜구가 빈번히 출몰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이 먼저 울릉도와 독도를 장악했을 경우와 대비해보면 이사부의 정벌이 갖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사부학회장인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이사부 장군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에 편입시킨 동해 수호와 해양 개척의 선구자였다”고 말했다.

중략
삼척시는 우산국 정복 1500년을 맞는 올해 이사부 선양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주: 전문기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사부가 정복장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일생의 역량이 대단했기 때문이군요. 오히려 우산국정벌이라는 측면하나로만 알려진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그 '미실'의 시아버지가 이사부였습니다. 이차돈의 아버지 혹은 삼촌이기도 하고 거칠부가 '국사'(사서)를 편찬하게 만든것도 그라고... ). 삼국사기를 찾아보니 이사부가 직접 국사프로젝트를 건의한것이 맞군요. "이찬(伊瑗) 이사부(異斯夫)가 아뢰기를, "국사(國史)란 군신(君臣)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포폄(褒貶)을 만대(萬代)에 보이는 것이니 역사를 꾸미어 두지 아니하면 후세에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 하니, 왕이 그러이 여기어 대아찬(大阿瑗)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꾸미게 하였다."

울릉군과 삼척시는 2009년 자매결연을 맺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1500년의 세월이 지난 뒤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울릉도 주민들은 우산국의 후예가 아니다. 조선 태종 때부터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刷還)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왜구의 약탈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또 육지 주민들이 군역(軍役)을 피해 울릉도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고종 때까지 유지됐다. 지금 울릉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1882년 재개척 정책에 따라 이주해 간 육지 주민들의 후손이다. 따라서 울릉도 주민들이 우산국 1500주년을 맞는 감회는 미묘하다. 울릉군청의 한 관계자는 “우산국의 입장에서 보면 올해는 망국 1500년이 되는 해인데, 울릉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념사업을 펼칠 상황은 아니다”면서 “그러나 이사부의 정벌이 독도 영유권 문제 등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삼척시가 주도하는 기념 행사에 협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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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피정복자인 입장인 울릉시에서 적극적으로 기념사업을 상황이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묘하게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오키나와나 홋카이도민들의 반응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만, 울릉시가 이런 면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새롭습니다). 그런데 저런 고대 소국에서도 '사서'라는 걸 적고 있었을까요? 우해왕이니 풍미녀니 하는 상세한 전설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분명 존재할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외에도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했지만 대표격으로 우산국(그리고 탐라국)은 항상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독도는 부록으로 말이지요. 우산국 도읍으로 추정되는 현포군에 대한 제대로 된 발굴이나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귀중한 유적이 나올것 같은 분위기죠. 저렇게 내버려둔 고분군도 아쉽습니다.

이런 목사자상, 울릉도의 상징으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요? 귀여운 인형도 만들고... 
사진은 역사스페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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