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개인적 도덕, 공통감각, 패러다임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중) 독서

이제 반 읽었다. 윤리학 책이지만 역사철학, 미학등에도 관계된 구절이 나와 인용해 둔다. 여러모로 후일 연구에 매우 중요한 구절들이기도 할 듯.

82쪽.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년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성숙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집단 (국가)으로서는 항상 미성년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나 노파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적 도덕에 비하면 훨씬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래 국가와 국가 사이란 겉치렛말이 아무리 요란해도 덕의심(德義心)은 그다지 없습니다. 사기 치고, 속임수를 쓰고, 교묘하게 속이는 등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표준으로 삼거나 국가를 한 무리로 보는 이상 상당히 저급한 도덕에 만족하고 그것에 개의치 않아야만 하는데, 개인주의의 기초에서 생각하면 그것이 대단히 높아지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국가가 평온할 때에는 역시 덕의심이 높은 개인주의에 중점을 두는 편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개인주의).

86쪽.
예술의 가치주관이 완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서로 싸운다 하더라도 일정한 평가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예술 체험에서 오는 일정한 '공통감각'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에서 보편성을 주는 것은 그러한 '공통감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공통감각은 역사적이고 지역적이다. 또한 그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이 공통감각에 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고립되지만, 결국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그것이 공통감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취미판단은 다수의 주관에 의한 판단이며, 그것을 초월한 선천적인 보편성은 없다 (아포리에리). 단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규정된 공통감각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수의 주관사이의 대화와 합의에 근거한다. 아렌트는 그것을 민주적 정치의 원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거기에서는 개개의 주관을 넘어선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토의에 의한 '공공적 합의'에 의해 얻어지는 잠정적인 진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89쪽.
토마스 쿤은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을 만드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어떤 패러다임이 지배적일 때에는 그것에 유리한 증거가 얼마든지 발견된다. ... ...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칸트가 말한 '공통감각'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물론 과학과 예술, 혹은 윤리는 다르다. 그러나 그 분명한 차이때문에 거기에 동일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타자라는 문제다. 

예컨대 우리는 '만요슈'(8세기 일본고시가집)을 읽을 때 근대 낭만주의 문학에 익숙해진 관념으로 읽는다. 그러나 나라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요슈'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닌가? 먼저 고대인들의 '패러다임'을 알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고대인이 우리 마음대로 감정이입이 될 수 없는 '타자'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자및 애호가들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만요슈'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일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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