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6)- 백제 보원사 普願寺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2008년 3차발굴때의 보원사지- 오른쪽의 파란임시건물을 보면 그 규모를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그 웅장함이 벌써 느껴지는 (광대할 보 普, 기원할 원願) 서산 가야산에 위치한 보원사는 최고 6세기 백제에서 건립된 (혹은 통일신라시대) 대사찰입니다. 이 대사찰은 '고란사'皐蘭寺'라고도 불리우고 (* 또하나의 유명한 백제말기 사찰인 낙화암의 부여 고란와 다릅니다), 임진왜란이후에는 강당사 '講堂寺'로 불리기도 합니다. 현재 보원사지곁에 매우 작은 규모의 또다른 고란사가 존재한다고 합니다만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창건연대와 정확한 규모가 나오지 않아 묻혀있던 곳이었습니다. 다만 전설처럼 이 부근에 총 99개의 절이 있었는데, 보원사가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서 타버렸고 그 자리에 보원사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원사에 최소 100개의 암자, 승려 1000명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근처에 70년대까지 보원마을이 있었으나 모두 이주, 산속에 홀로 버려진 터가 되었습니다.

2008년 3차발굴중때 나온 대형 방형 건물지 
(조선때로 추정, 기단별 21.8미터 폭. 참고로 황룡사 금당터가 51.7 x 28.7 (하층기단은 55 x 30.27)
백제때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관통하는 몇개의 국보, 보물등 일단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으로도 문화적가치가 큰 사찰입니다만, 이 포스팅에선 시리즈테마인 규모의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백제사찰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된 백제금동여래입상 (보원사지출토, 국보)

1987년 7월10일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까지 발굴된 지정면적만 10만 2886㎡로 3만 평이 넘는 거대한 크기입니다 (참고로 황룡사 전체면적이 38만 제곱평방미터입니다). 2006년 1차발굴부터 최근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어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11년부터 벌써 6차발굴조사 진행 중입니다 (5차발굴까지 겨우 반도 안되는 4만평방미터가 포함되었습니다). 5차발굴의 목표중 하나는 '천년사찰'로 불리울뿐 알길이 없는 절의 창건연대를 밝히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못밝혔지요. 문헌상에서 확인되는 보원사에 관한 최초 기록은 장흥 보림사(長興寶林寺)의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탑비에 나타나는데, 827년(흥덕왕 2)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기록은 904년(효공왕 8)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주로써 웅주가야협 보원사를 화엄 10찰(華嚴十刹)에 포함시키고 있어 역시 그 위세를 짐작케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입적하였고, 보원사 계단에서 경율 시험을 봤다는 1036년(정종 2) 기록이 전합니다. 수백이상의 승려규모로 볼때, 계단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것은 역시 규모를 유추케 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에 보원사, 일백암자 일천승려 전설을 뒷받침해주는부분이 나옵니다. 바로 법인국사 탄문의 탑비에 씌여져 있습니다. 입적 일년전인 974년 (즉 광종 25년), 탄문이 왕의 거처에서 물러나 보원사로 돌아오는데 그를 맞이하는 모습이 이러합니다: 즉, 보원사의 스님들이 부처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선악(음악까지) 갖추어 맞이했다. 이 때 번개가 구름처럼 날리고 바라가 우뢰와 같이 진동하였다. 이에 보원사 선교승 1000 여명이 그를 영접하여 절로 들어갔다. 또한, 탄문이 돌아갈 때 이를 아쉬워 한 광종은 섭섭히 여겨 절 남쪽의 땅 1,000 경과 노비 50명을 따로 하사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때까지 1경(頃)이 대략 1만 5447 제곱평방미터 (저 기록이 10세기이니 대략 맞겠지요). 즉, 무려 천오백만 제곱평방미터의 부지가 이미 존재하던 거찰에 다시 늘어난 것입니다 (1경의 크기는 시대마다 다른데 3천평에서 4천4백44평등 거대한 넓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말도 안되는 과장이긴 하겠지만, 이 구절로 인해 아마도 보원사부근 가야산일대가 모두 이 거찰에 속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과장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일천명의 승려라는 숫자는 어마한 숫자지요. 이러한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규모를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발굴위치보다 더 깊은 산속까지 건물지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절 남쪽의 땅'이란 구절이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사찰의 구조에서 남쪽이라면 포스팅 후반에 다시 소개할 서산마애삼존불상과 보원사의 중간, 즉 '오렌지색'부분이 될 것이고, 일반적인 방위에서 보자면 '노란색' 부분의 땅이 될 것 같습니다. 즉, 맨 첫사진 (포스팅 첫사진)의 뒷부분 혹은 앞 부분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금당급 건물은 아닐지라도 구전처럼 수많은 암자건물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이 항공사진과 지도를 비교해 보시면 대강의 느낌이 올 것 같습니다. 손톱만하게 5층석탑이 보이지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까지 사세가 꽤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만들어진 경판이 인근 고찰인 '개심사(開心寺)'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후 보원사의 법당은 2층 고각에 부도전과 나한전이 있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 드린 '노란색 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지도에서 보시면 보원사지 아랫쪽 즉 노란원에서 떨어진 곳에 '개심사'가 보입니다. 저 개심사가 있는 곳을 '상왕산' 즉 높은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부릅니다. 상왕산이란 이름자체가 불교적으로- 象王이란 이름은 '코끼리 왕'이란 뜻이지요 (추측창건시인 654년 의자왕 14년, 백제때는 개원사(開元寺)였고 1350년 중건할때 개심사 (開心)로 이름을 바꿉니다) . 개원사와 바로 가까운 지점까지 보원사가 사세를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보원사지 출토 치미
보원사지 출토 암막새들
현재 중앙박물관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보원사지 출토 철불 2개가 전해져 그 문화적 역량을 보여줍니다. 첫사진의 보원사지 철불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시대것으로 2미터 57센티에 달합니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철조여래좌상으로 1미터 50센티입니다. 
이 지역은 중국의 남조 양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에 길목 역할을 한 곳이라는 점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보원사지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로 보아서도 보원사가 이 무렵 (6세기무렵)에는 이미 창건되어 있었으리라는 점을 뒷받침하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보원사의 백제시대 화려함을 짐작케 해주는 유적은 바로 백제의 미소라 불리우는 근처에 있는 바로 이 유명한 삼존마애삼존불상 (국보)입니다. 보원사에서 약 1.2키로로 차로 5분, 도보로 3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고려시대에 최절정기를 맞았다고 하는 보원사가 백제 창건당시에도 대단한 사찰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위치가 이 삼존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1킬로위치에 있는데, 광종때 기록이 진실이라면, 이미 존재하던 삼존불상이 있던 장소가 거의 입구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상상도 가능합니다. 또는 창건당시인 백제때 이미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6, 7세기로 추정되는 이 마애삼존불상과 이 사찰의 창건기록이 일치한다면 이 가능성은 꽤 커집니다. 이 경우 제가 멋대로 추측해본 위 지도의 '오렌지 색' 영역에서 무언가 유구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래 항공사진은 2008년 3차조사때 구획사진입니다. 그 아래사진은 2010년때 5차발굴지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원사지 석조사진입니다. 약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승려들이 마시는 물을 저장한 용도로 추정합니다. 거대한 하나의 통돌을 그대로 파낸 것입니다. 규모가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며, 보원사지의 보물지정 5개중 하나로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유물중 하나입니다. 보통사찰의 석조는 5명에서 많게는 10여명이 먹는 규모가 평균입니다.
전경이 담긴 사진이 아니지만 그 규모를 보여줍니다 (멀리 보물인 5층석탑이 작게 보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약 10차발굴까지 계속 될 보원사지 발굴 (아직까지 확실히 나타난 규모에서중에서도 반도 못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보원사 6차발굴에서 문화적 가치나 역사적 가치가 많은 모습들이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덧글

  • K I T V S 2013/02/08 23:45 #

    생각해보면 정말.. 삼국시대의 사찰들은 오늘날까지 온전했다면 유럽의 거대한 성당들 못지 않는 거대함으로 경이로운 장관을 보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3/02/09 00:11 #

    그랬을 것 같습니다. 당대 일본의 동대사나 천수사만 비교해보면 얼추 느낌이 오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의 문화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조각상들이나 불상, 그림들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율을 안겨 주었을 것 같구요. 너무 전란이 많았어요...흑.

    그리고, 사족으로 보원사터에 대해서는 사진상으로 보아, 남쪽땅일대가 건물지가 들어설수 있는 지금보다 평평한 땅이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곤 합니다.
  • 零丁洋 2013/02/09 09:24 #

    이것 보면 우리 문화재도 그저 아기자기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규모로 보아 당시 사람의 의식이 재법 스케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의식만이 아닐 수도 있겠죠.
  • 역사관심 2013/02/09 09:45 #

    반갑습니다. 제가 항시 이야기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현재의 한국미는 조선시대의 담백미에 의존하고 있는데, 삼국-고려를 관통하는 여러 흐름을 종합하는 새로운 한국적 미를 창출해보고 싶고,그러해야 '한국적'이란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rip 2013/02/19 06:32 # 삭제

    석조의 정확한 용도는 알지 못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국사에 저런 규모의 석조가 있는데, 문제는 돌 뚜껑이 있다는 것이죠.

    물 받아놓기 위한 것이라면, 열고 닫는게 너무도 힘든 돌뚜껑을 할 리가 없죠.
  • 역사관심 2013/02/19 10:19 #

    음...자료만 찾아보고 올린 것인데 일단 수조로 알려져 있더군요. 불국사의 비슷한 예가 있고 뚜껑이 있었다면 한번 생각해볼만 한 일같군요 (물론 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뚜껑은 필요하겠지만, 말씀처럼 '돌'로 (만약 돌뚜껑이 두껍다면) 할 필요에 대해서는 말이지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