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란 무엇인가 중) 독서

매우 중요한 장(章). 역사에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설명부분으로, 사이비역사나 결정론에 대한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지는 부분. 변화된 폰트는 필자가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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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내가 바로 앞의 강연 끝무렵에 이야기했듯,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어떤 대답을 바라는 한, 그는 쉴 수가 없다. 위대한 역사가- 혹은 더 폭넓게 말해 위대한 사상가-란 새로운 것들에 관해서 또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1917년에 왜 러시아 혁명이 발생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오로지 하나의 원인만을 제시한 학생은 C학점을 받을 것이다. ...... 이 질문에 대하여 한 다스나 되는 원인들을 차례로 열거하고 나서 그만두는데 만족하는 학생은 B학점을 받을 것이다.  시험관들은 '많이는 알고 있으나 상상력이 부족하다.'라고 판정할 것이다.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신이 수집한 원인들의 목록을 앞에다 놓고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그들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어떤 범주의 원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또는 '최종적인 분석에 따라서' 궁극적인 원인, 즉 모든 원인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강박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구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어떤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곧 그가 이끌어내는 원인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다. (137쪽).

(* 카는 결정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원인들이 있고 그 원인들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카는 이러한 결정론은 '사회의 밖에 존재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으로 본다). ... 인간의 행위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 아이자이어 벌린 경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인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사회과학의 발전수준이 이러한 논의가 자연과학을 퇴행시켰을 때의 그 자연과학의 발전수준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43쪽).

이처럼 특수한 경우에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실제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다. 그러나 설령 여러분이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원인도 없다고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원인과 도덕적 책임은 서로 다른 범주이다.(145쪽).

이제 역사가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들도 때때로 과장된 말투에 빠져서 어떤 사건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그 뜻은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서 기대하도록 이끄는 여러 요인들의 결합이 엄청나게 강력했다는 뜻일 뿐이다. ...... 아마도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라고 썼어야 더 현명했을 것이다. ...... 한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는 '필연적인 (inevitable)' '불가피한 (unavoidable)' '도망할수 없는 (inescapable)' 등의 말이라든가 심지어 '어쩔 수 없는 (ineluctable)' 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고서도 살아갈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다 (146쪽).

...그런 말들 (위의 언급한)은 시인들이나 형이상학자들에게 남겨놓도록 하자. 필연성에 대한 이러한 비난의 동기를 찾아보자. 그 출처는 이름을 굳이 붙여보자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might-have-been)'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학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학파는 거의 전적으로 현대사 분야에 몰려있다. (주-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은 필연적이었는가"는 그럴듯한 진지한 토의로 들리고, "장미전쟁 (16세기)은 필연적이었는가"라는 공고문을 보면 사람들은 농담하는줄 안다고 비유). 역사가는 노르만인의 정복이나 미국 독립전쟁에 관해서 발행한 것은 사실상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또한 단지 무엇이 왜 발생했는지만을 설명하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인 듯이 서술한다; 그래도 그 역사가를 결정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147쪽). -- 반면 현대사에 대한 결정론적인 서술에는 서슴없는 비난이 쏟아진다 (*주).

... 그리고 누구든 언제든지 역사에서 '그랬을 지도 모를 것'들을 가지고 퀴즈놀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정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결정론자는 단지 이런 일들이 발생했으려면 그 원인들도 또한 달랐어야만 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문제는 오늘날 그 누구도 정말로 노르만인의 정복이나 미국 독립의 결과를 뒤집으려고 하거나 이러한 사건들에 반대하여 강력한 항의를 표시하려고 하지 않는데에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역사가가 그 사건들을 하나의 완결된 장(章)으로 취급할 경우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148쪽).
... 따라서 그들 (즉 결정론을 반대하는 특히 현실적인 이익 혹은 피해관계가 걸린 이들)은 역사책을 읽으면서, 발생했을지도 모를 기분 좋은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제멋대로 상상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또는 무엇이 발생했고  그들이 기분좋아할 소망스런 꿈은 왜 성취되지 못했는지를 담담히 설명해나가는 역사가에게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그것은 순전히 감정적이고 비역사적인 반응이다. (주- 그리고 카는 이러한 '감정적 상상자들'의 결정론에 대한 항의가 마치 앞문단에서 말한 결정론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의 운동으로 비쳐지는 것은 금물이라고 경고한다. 즉 이러한 것은 사이비비판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전후관계 (인과관계에서)가 그것과는 다른 전후관계에 의해서, 게다가 우리의 견해로 볼 때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전후관계에 의해서 언제라도 분쇄되거나 굴절되기 쉬울 때, 우리는 어떻게 역사에서 원인과 결과의 일관된 전후관계를 발견하고, 역사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151쪽).

...그리고 제 2차대전 이후에는 지난 40년동안의 독일민족의 재앙의 원인을 황제의 허영, 힌덴부르크의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선출, 히틀러의 편집광적인 성격등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 탓으로 돌렸다- 이는 조국의 불행에 짓눌린 한 위대한 역사가의 정신적 파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사에서의 운이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들은 역사적 사건의 봉우리가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집단이나 민족에게서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성적이란 모두 운수 나름이라는 생각은 열등반에 배치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유행하기 마련이다. (153쪽).

.... 이 우연의 침투에 맞서 역사의 법칙을 수호하려고 했던 최초의 인물은 분명히 몽테스키외였다. 그는 로마인들의 위대함과 몰락에 관해서 쓴 저작에서 '만일 어떤 전투의 우연한 결과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원인이 한 국가를 멸망시켰다면, 단 한번의 전투로 이 국가를 몰락시킨 어떤 일반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154쪽).

어떤 일을 불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원인을 탐구해야할 귀찮은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특히 즐겨쓰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지적인 활동력이 저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155쪽).

이미 앞에서 우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에서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비역사적 사실의 구별은 엄격한 것도 아니고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실도 일단 그것의 적절성과 중요성이 밝혀지면 역사적 사실의 지위로, 말하자면 승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원인에 대한 역사가의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역사가와 그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바야지드의 관절통, 원숭이가 알렉산드로스 국왕을 물어죽인것, 레닌의 이른 사망- 이런 사건들은 역사의 경로를 바꾸게 한 우연들이었다. 다른 한편, 그 사건들이 우연적인 것인 한, 그것들은 역사의 어떤 합리적인 해석이나 중요한 원인에 대한 역사가의 등급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칼 포퍼교수와 벌린 교수는 역사과정에서 중요성을 찾아내고 그것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역사가의 시도는 '경험 전체'를 하나의 균형잡힌 질서로 격하시키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며, 역사에서의 우연의 존재때문에 그런식의 모든 시도는 애당초 실패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정신을 가진 역사가라면 감히 '경험 전체'를 망라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역사분야 또는 역사적 측면에서조차 겨우 사실들의 근소한 부분만을 망라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모델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경험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가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부분들을 추려내어, 그것으로부터 연구의 지침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157쪽).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다시 한번 톨콧 파슨스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 (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처럼,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다. 그밖의 다른 인과적 전후관계들은 우연적인 것으로서 배제되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원인과 결과사이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후관계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역사가에게 아무 수용이 없다; 그것은 합리적인 해석에 적합하지 않으며 과거나 현재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160쪽).
....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헤겔의 격언, 즉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 (what is rational is real, and what is real is rational)' 이라는 격언을 되새겨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 우리는 합리적인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별한다. 합리적인 원인은 다른나라, 다른시기, 다른조건에서도 언젠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 유익한 일반적인 원인이 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그 목적에 기여한다.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될수 없다; 그것은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교훈도 어떠한 결론도 주지 못한다. (163쪽).

우리가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데에 열쇠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이렇듯 어떤 목적이 고려되고 있는가 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필연적으로 '가치'를 포함한다. ... 마이네케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는 가치와의 연관없이는 불가능하며......인과관계의 연구의 이면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항상 가치의 추구가 들어간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안토니우스가 반했다는 따위의, 그 이중적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들 모두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163쪽).

나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과거와 현재'라는 진부한 관용구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상상적인 (주: 현재란 것은 없다) 분할선으로서 일종의 관념적인 실재에 불과하다. ...... 과거와 미래는 동일한 시간대의 일부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설명되리라고 생각한다. ...... 역사는 전통의 계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기록은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보존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거는 '역사적 사유란 항상 목적론적이다' 라고 말한다.

... 훌륭한 역사가라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래를 뼛속깊이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제기한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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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의 역사의 사실과 원인관계의 인식과정은 마치 훗설의 현상학에서의 그것을 보는 듯하다.
세계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 (즉 지향성의 과정을 거친 의미를 가진 세계만이)이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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