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의 운동과 문화재복원 독서

철학라이더 (2012, 조광제)를 읽다가 또 다시 문화재 특히 복원 혹은 중수, 재건과 관련된 개념적 고찰이 가능한 부분을 만나다. 정리해본다.
===================

본성의 운동 편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운동이 생겨난다는 것은 사물의 외부에서 그 사물이 운동하게 되는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의 본성에 다른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본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를 고려하는 경우 만약 하나의 단순 사물이 다른 단순 사물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그 하나의 단순 사물이 하나의 본성만을 지니고 있다고 할 지라도 그 본성은 다른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른 측면의 본성과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되면 엄격하게 말해 단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 단순 사물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플라톤이 말한 각각의 이데아는 오로지 하나의 본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 사물의 본성은 두 측면으로 나뉜다. 자신을 유지하려는 측면과 다른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측면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심지어 본성 자체가 그 본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럴 때 본성 자체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다. 본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본성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고 플라톤은 이 생각을 철저히 준수한 셈이다. 이중적인 본성이란 실은 서로 적대적인 두 본성을 지닌것이고, 이는 사물 외부에 원인을 둔 것처럼 보이는 운동 역시 결국 사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수밖에 없음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단순 사물을 단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 것으로 보는 한, 단순사물은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즉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운동하지 않는 일자'이다). 중략.  만약 플라톤의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로서는 '하나의 사물'을 운동의 주체로 볼 것이 아니라 '본성'을 운동하는 주체로 보아야 한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사물이 운동할 때 본성자체가 운동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본성 자체가 본래부터 운동하는 것이라면 일체의 자립적인 본질은 있을 수 없게 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들이 송두리째 제거된다. 현존하는 사물들이 성립하는 그 바탕에서 보아 동일성보다 차이가 근원적이라고 하는 것은 암암리에 본성 자체의 운동을 전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성의 운동은 맨 먼저 동일성보다 차이를 분비해 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단순 사물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복합 사물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황만이 남게 된다. 본성이 운동하는 상황이 가장 근원적인 상황일 것이고 사물이 운동하는 상황은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물이라는 것은 이미 일종의 상황이다. 이때 상황은 근원적으로는 흐름의 임의적인 단위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의 사물이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 동일적인 자성을 지닐 수 없고 항상 대타적인 관계에 의거해서만 그런 자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성과 대타성 간의 상호교환적인 관계를 근원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서 생각하면 주체도 하나의 상황이고, 의식도 하나의 상황이고, 자아마저도 하나의 상황이고 사회나 국가도 하나의 상황이다. 심지어 낱말들이나 개념들 역시 하나의 특수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 규모나 성격이 다를 뿐이다. 상황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고 흐름과 떨림으로 성립한다. 일체의 사물들이나 개념들마저 상황으로 보게 되면 현존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역동적인 것들로 파악하게 된다. 중략.

================
여기서 언급되는 사물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이 아닌, 단순사물-복합사물, 그리고 개념, 관념, 그리고 집단, 개체등에 모두 포괄적으로 대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라는 '사물'의 성격 역시 이러한 '자기동일적인 자성'만을 지닐수 없는 대타적인 관계 (그시대의 상황과 공간적인 상황)에 따른 역동적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사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현존하는 모든것은 '혼자 자립해서 일자로 존재'하며 영원히 원질을 유지하는 것은 없다-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측면을 파고들면, 중수/중창/재건에 가까운 복원도 시대에 맞게 최대한 해내는 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형복구...라는 명제만을 따져서 문화재를 복원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사실상 어리석은 논의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성격의 문화재 복원/복구문화를 어떻게 하면 천민자본주의에서 건져내어,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살려내느냐..하는 건설적인 토의가 더 필요한 시점에 왔다고 본다 (얼마전 황룡사 9층목탑복원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보고, 그 이유에 대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야말로 반대를 위한 반대).

이는 비단 유형의 건축이나 문화재뿐아닌, '한국미'라는 개념에도 적용된다. 한국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규정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계속 고대-중세의 한국미도 발굴해내고, 변증법적인 노력을 계속 해갈때, 통시적시점에서의 공시적 한국미가 과연 무엇인지 (즉 현상황에서의 한국미), 깨닫게 될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강우방선생의 한국미학적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지금까지의 한국 미술사는 한국미술 가운데 불변의 것, 한국 고유의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한국미술의 특성이라 규정하려고 애써왔다. 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저변에 깔린 어떤 본질적인 것을 캐내어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리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강우방의 주장은 "생성 변화하는 미술의 세계는 외래의 영향과 우리 고유의 것과의 대응에 의하여 형성되어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히려 역동적으로 생성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미술의 특질을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국미의 특색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 미술에 숨겨진 미적 진리를 부단한 노력으로 찾아내야 하고, 또 앞으로 형성해가야 하는 가변적인 성질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 역사밸리에 안맞는 글일수 있으나 일단 나눠본다.




2014 대표이글루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