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7)- 통일신라-고려 굴산사 崛山寺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국내 최대규모의 굴산사 당간지주

신라 문성왕 13년(851년)에 창건된 굴산사(崛山寺)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수 있듯 유래가 확실한 거찰입니다. 崛山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있듯, 사굴산문(闍崛山門) 또는 사굴산파(闍崛山派) (도굴산문, 도굴산파라고도 불림)이라 칭해지는 통일신라말기-고려초의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의 '중심사찰'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굴산파'의 거점이라고 보면 됩니다. 

흔히 '달은 달이고 물은 물이로다'등의 선문답으로 잘 알려진 '선불교'의 9개파중 하나라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9산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9개의 불교철학종파라 보시면 됩니다 (이런 종파들의 서책들이 남아 있다면 좋을텐데 말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글로벌 세계대백과중))
구산선문의 종류와 위치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들의 지원하에 거찰로 번성후, 조선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정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범일국사는 이 사찰의 주지로 활동한 40년간 당시 무려 3명의 신라국왕에게 계속해서 국사자리를 권유받지만 모두 거절하고 선불교의 득도에만 힘씁니다. 

굴산사의 창건에는 여러 설화가 전해집니다. 예를 들어,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을 했다고 합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왜인지는 모릅니다) 이 사찰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또한 범일국사 본인의 탄생설화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우물물을 떠마시고 잉태를 해서, 국사를 낳고 마을 뒷산에 버렸더니 학이 날아와 돌봤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바로 이 우물

범일국사는 당대 호족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사후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되어 현재에도 강릉 단오제의 주신으로 떠받들고 있습니다. 당대의 굴산사는 강릉지역 전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거찰이었으며 전성기에는 스님들이 밥을 짓느라 쌀을 씻으면 그 물로 동해바다가 하얗게 물들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하고 있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현재 굴산사터
본 사찰은 1936년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됩니다. 그후 굴산사지 주변이 경제개발시대에 농경지로 변해버리면서, 사역의 정확한 범위를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계속 홍수가 발굴에 도움을 주는군요). 200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나, 2010년까지 조사는 지지부진, 2010년이 되서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주도로 본격적인 사역조사가 실시되죠. 2010~ 2019년까지 10개년 계획중 2011년까지 첫발굴을 실시합니다. 

당시 1차발굴 결과, 사역의 크기는 동-서 140m, 남-북 250m로 파악됩니다- 이때 알게된 사역은 북쪽의 석축시설, 서쪽의 학산, 동쪽과 남쪽은 각 끝단의 담장지로서 면적은 약 31,500㎡로 추정합니다. 이를 황룡사와 쉽게 비교해보면 황룡사가 동서 288, 남북 281미터, 담장안 터는 약 8만평방미터 (절터전체는 38만평방미터)입니다. 즉, 황룡사 주요건물터의 남북을 반으로 자른 크기가 됩니다.  굴산사의 토층은 3개층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1·2문화층은 유실되었으나 3문화층은 아직 남아있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승방지, 회랑지, 정원등도 모두 발굴되고 있습니다 (건물들의 규모가 궁금합니다).

물론 겨우 1차발굴로 나온 결과인데 아직도 굴산사의 규모는 짐작키 어렵습니다. 예컨대 굴산사지 승탑에서 약 1킬로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가 서있는 등 아직 발굴이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는 '당간지주'라는 유물의 성격상 검토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 5.4미터 (파묻힌 부분 제외)나 되는 국내최대크기의 지주로 보아 당대 당간의 높이는 최소 20미터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삼국-고려사찰의 '입구'역할을 하던 깃대라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당간지주의 위치와 현재 발굴지의 위치사이는 강력한 발굴 후보지라 생각합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또한  통일신라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들은 대부분 물을 끼고 있어서 당시 이 부근이 물과 관계가 있었는지 한번 검토해 볼만 합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당간지주'가 무엇이며, 산으로 들어가면서 규모가 축소된 조선시대의 (우리가 흔히 지금 생각하는) 사찰과 삼국-고려의 거찰들이 얼마나 성격이 다른지 검토해 보죠.

우선 당간지주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幢 :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입니다. 흥미롭게도 당간지주는 불교 국가중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것으로, 불교 도입 이전의 소도,장승 (蘇塗,長丞)사상에서 유래되어 사찰 건립과 동시에 입구 측에 건립되어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통 돌로 만들고, 철제· 금동제· 목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며, 그 이전에 조성된 예는 아직 발견된 바 없습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안쪽 면을 제외한 각 면에 종선문(縱線文)을 넣고, 주두(柱頭)도 원호(圓弧)를 이루었으며, 간대와 기단 등 각 부분을 갖춥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조선시대의 축소된 사찰들과 달리, 거대한 규모로 '평지에' 조성된 삼국-고려의 사찰들에 당간을 만들고 깃발을 달던 이유가, 바로 도시 한복판이나 평지에서 한눈에 건축군을 알아 볼수 있도록 대중에게 알리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저층 위주의 건물뿐이던 당시 도읍지에서 수십미터 이상이나 되는 높은 당간과 대사찰들의 대목탑들은 그 존재자체가 도읍지의 궁성과 함께 랜드마크적인 존재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를 거치면서 선종이 들어오고, 구릉지가람으로 이행되면서,차차 고려말을 거치면서 산속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높은 당간에 깃발이 펄럭이던 시각적인 압도미는 사라져 버린것이죠.

비유하는 그림을 찾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이건 미국의 벌판에 있는 아파트 입구 포렴입니다. 대강 이런 느낌과 위치, 그리고 기능을 한 것이 당간입니다. 이런 것이 20미터 짜리가 서있었다고 상상해보시길 (그리고 뒤로 대사찰이 서있는 것)
따라서, 당간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대개 작고 낮아집니다. 지주에 목조의 당간을 세웠는데, 그나마 지금은 당시 중창한 여러 사찰에 그 흔적만 남아 있고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당간이란 인식이 사라진거죠). 당대에도 중국이나 일본사찰에선 별로 유행하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중세국가들의 대사찰들의 특징이었던 당간. 많이 볼수 없어 아쉬운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분은 '신성한 장소'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당간지주는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 앞에 있는 ‘도리이(鳥居)’와도 특히 관련이 있는 건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오렌지 색, 즉 현재파악된 사역부분을 정리한 그림입니다. 아직도 몇차례 발굴을 더 해야 정확한 사찰의 규모와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나-다 중간의 지역이나, 위의 첫지도의 1)번과 2)당간지주를 잇는 현재 '논밭'지역을 발굴하면 무엇인가 중앙건물지가 나올것 같습니다.
이제 자세한 발굴결과를 살펴봅니다. 필자생각에 굴산사는 다른 사찰들보다도 더욱 나말여초의 '문화사적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사찰입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죠.

1차 발굴조사끝에 매우 흥미로운 시설들 (즉 조선사찰과 다른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사찰만의 특징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2012년 12월중순자 발굴자료에 따르면, 승려 선방지 등 7개 건물지와 배수로가 발굴되었습니다.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굴산사지 발굴조사에서 총 7개의 건물지와 담장지, 계단, 보도시설과 배수로, 다리(石橋), 디딜방아 시설 등 다양한 유구가 나왔습니다. 이중 보도시설은 넓적한 냇돌을 촘촘하게 깔아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보도 시설덕분에 굴산사지 동쪽에 사찰구역과 별도로 중요한 건물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보도자료를 보면:
남쪽 경계로 추정되는 동서 방향의 석축담장이 배수로와 연결된 채 길게 노출됐으며 이곳에서 굴산사터 중심부로 통하는 약 4m 너비의 문지(門址) 2기도 확인됐다. 특히 서쪽 문지를 통해 내부로 연결되는 곳에서 확인된 일종의 보도 시설은 굴산사지 동편에 사찰 중심 구역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중요한 건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즉, 가-나 구역과 다 구역을 잇는 보도가 있었다는 뜻 같습니다.

또한 필자가 서두에서 언급했듯 굴산사의 규모는 현재 발굴된 지역이 중심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문화재청측에서도 이렇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연구소는 “이번에 발굴된 건물지는 당초 사찰의 중심인 금당·법당지 등으로 추정했으나 승려들의 생활·참선 공간인 승방(僧房)·선방(禪房) 등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영역을 더욱 넓혀 발굴조사를 한뒤 다시 그 밑의 선대층까지 발굴하는 방법으로 오는 2019년까지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즉, 이번 발굴로 드러난 지역들이 금당-법당등이 아닌 부속시설일 가능성이  큰것이죠. 더군다나 포스팅 후반부의 명기와에서 출토된 '중수'에 대한 확실한 증거덕분에 고려시대 (12세기)에 사찰을 중창했을 것이고, 건물을 중창할때 대형 초석 밑에 선대의 석열이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연구소측에 다르면 "선대의 퇴적이 이뤄진 후에 건물을 중창하면서 대형 초석이 얹혀진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연차 발굴이 계속될 경우 창건대 유구 확인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고 있어 기대가 큽니다. 보고에 따르면 이 초석은 한쪽 단면이 1m20㎝에 달하는 방형의 화강재 대형 초석 이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방형 초석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고 위와 옆, 밑바닥까지 매우 정밀하게 표면을 다듬은 흔치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몽고침입당시 건물지가 불탄 흔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부속건물지가 이정도라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강당-법당-금당등의 규모가 궁금해집니다.

가 구역아니면 나 구역 즉, 발굴지 중심부입니다
1호 방형초석건물지는 1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북쪽의 정면 6칸, 측면 4칸의 대형 건물지를 중심으로 동서에 긴 행랑지가 보이죠. 전체적으로 내부에 (아마도 고려시대 영향)  ‘□’자형 중앙정원(中庭)을 갖추었습니다. 매우 운치가 있었을것 같습니다 (특히 아래 차를 마시는 다실의 존재는 이곳에 연지(蓮池, 연꽃을 심은 연못지)가 확인되면서 운치를 더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석교' (다리) 유적도 발견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연못과 다실을 (물론 차를 만드는 다실은 건물외각에 위치했습니다만) 갖춘 중앙정원이 있는 사찰을 본 적이 있던가요.

나말여초의 정원문화(구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다시 강조하면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정원이 있는 시설은 '금당' '강당' '불상'등이 있는 중앙건물터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와 같은 건물지의 배치와 내부 온돌시설들로 볼 때 이번 조사로 드러난 모든 구역은 굴산사의 승려들이 생활했던 승방지(僧房址)와 참선 등을 위한 선방지(禪房址), 기타 문화생활을 위한 부속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합니다.

방치되어 있지만 같은 고려시대의 사찰 청평사에 남은 작은 정원유적. 굴산사의 이 건물지에 이러한 연지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혹 모르지요 차를 마시며 연못을 향하는 방이 존재했을지도...

건축군을 보호하는 모습
앞서 잠깐 언급했듯 발굴시설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다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사료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려시대의 사찰과 차문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보여주는 증거유적이 될수 있습니다. (고려의 차문화- 포스팅 글)
링크건 포스팅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고려시대의 사찰에서는 조선과 다르게 다도를 즐기는 다방이 성행합니다.
두가지 예만 간단히 들자면:
전남 강진 월남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진각국사 혜심의 시를 보시죠.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 밤(久坐成勞永夜中)
차 끓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煮茶備感惠無窮)
한 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一盃卷却昏雲盡)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徹骨淸寒萬慮空)
-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 -

현재 복원중인 뇌원차를 만드신 고려의 센노리큐, 의천국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북쪽동산에서 새로 말린 차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에서 선물했네    東林贈進僧
한가히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預知閑煮日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泉脈冷高永

고려시대 승려들이 이러한 시를 짓고 만들었을 지 모르는 굴산사의 '다실유적'입니다. 
다실
아래사진은 함실입니다. 함실은 조리목적의 부엌이 아니라, 순전히 온돌시설을 위한 난방전용 공간입니다. 특이하게도 대형 건물지 내에 긴 장대석으로 만든 아궁이가 세 갈래의 고래로 연결- 각각의 방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시설은 강원지역의 전통적인 난방시설인 대형 코클(벽난로의 일종)의 하부구조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이 승방들에는 온돌과 코클의 2가지 난방기능이 활용된 아주 흥미로운 발굴인 것입니다. 가장 추운지역중 하나인 강릉지역의 난방문화에 대한 큰 암시를보여주는 발굴입니다. 

코클에 대해 잠시 짚어드리면 강원지역의 화전민들의 대표적인 등화구로서, 방의 한쪽에 1미터정도의 단을 설치하고 위로는 굴뚝을 뚫어 관솔불을 피워 조명을 담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열로 난방을 겸하도록 한 난방시설입니다. 이중 난방이라는 이번 발굴은 한국의 난방문화 연구에 커다란 도움이 될만한 부분입니다. 이외에도 다리(石橋), 디딜방아 시설등 정말 이 건물지를 아기자기하게 꾸며주는 시설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대형건물터내 함실 (일종의 아궁이인데 부뚜막이 없는 구조를 함실이라 합니다)
강원지역 코클- 서양으로 치면 패치카입니다. 얼어붙는 영동지역의 전통문화로 계속 승계하면 좋을 멋진 문화라 생각.

이러한 역사적 전통문화 유적지외에도 사료적인 가치가 있는 명문기와도 발견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오대산 금산사 명 기와와 금산사 명 기와입니다. 특히 금산사 명 기와가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동안 삼국유사 제 3권 제4대오만신진조에 전하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결성되었다는 오대산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위치하는 5개사찰에서 결성되었다는 오대산 5대 신앙결사가 그간 증거를 찾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전하다가, 2011년 이 발굴과 함께 실재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지요. 금산사는 5개 결사사찰중에서도 남방의 남대(南臺)에 있다고 전해지는 결사체입니다.  문화재청 측에서는 여건이 허락할 때 금산사에 대한 조사도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발굴은 오대산 신앙결사의 실체가 고고학적 유물로는 최초로 확인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천경삼년(天慶三年)’ 명 기와와 ‘屈山寺(굴산사)’라는 글씨가 있는 다량의 고려시대 기와도 고려토기들과 함께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천경이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1111년부터 1120년까지 사용한 연호로, '천경삼년'은 1113년을 가리키는 연대임으로 동일한 명문와가 인근의 양양 진전사(襄陽 陳田寺)에서 보고된 바 있어 굴산사와 진전사가 1113년도 동일시기에 중수되었음을 (즉, 9세기에 창건된 후 12세기에 적어도 한번 중수)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가 됩니다. 또 이 명문와를 통해 고려와 요나라 간에 활발한 교류 관계가 있었던 것을 내포합니다. 사실 시대로 따지면 1113년은 현종 3년으로 이때 고려와 요나라는 3차 고려-거란(요)전쟁을 치르던 시기입니다. 유명한 귀주대첩이 6년후인 1019년이니 한창 사이가 안 좋을 시기입니다.

명문기와들
천경삼년 명문기와
여러가지 신라, 고려시대 문양이 새겨진 기와파편

신라-고려의 거대사찰 굴산사는 비단 그 드러나지 않은 거대한 규모뿐 아니라, 영동지역 불교철학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여말선초의 풍부한 문화사적 보고로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찰입니다. 풍부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의 거찰, 굴산사가 다시금 영동지역 선종의 중심사찰로서 언젠가는 유서깊은 강릉단오제의 무대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굴산사지에서 시행된 2012년 12월 13일 1차발굴조사 발표 (지도 손에 들고 있는 분..고생하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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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같은 강릉에 있는 조선저택 선교장의 활래정 (다실)과 연지(연꽃이 가득찬 연못이죠). 시대가 다르고 건축이 다르지만, 이 발굴지의 정원 일부분은 이런 분위기를 연출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필자의 희망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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