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8)- 신라 불국사 佛國寺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불국사가 왜 이 거대건축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라는 의문을 가질 분도 있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 문화재에 대해 잘 모른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그 유명한 불국사조차 말입니다). 불국사는 아마도 일본인들에게는 동대사나 청수사같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마음의 고향이자 사찰들의 아이콘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는 역시 '경주'라는 대표고도의 한가운데 위치한 사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겠지요. 그럼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문화유산이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금 길더라도 찬찬히 읽어주세요.

불국사의 창건시기에 관한 설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불국사 사적(事蹟)기록의 눌지왕(訥祗王, 417-458)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는 설이고, 두번째는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고, 또 하나는 삼국유사의 기록입니다. 두번째설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왕모(王母)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합니다. 이 해는 바로 이차돈(異次頓)이 불교전파로 순교한 이듬해가 됩니다.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고금창기에 전합니다. 이 사찰의 의미를 역력히 보여주는 사건이지요. 연
대상 마지막 설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공사를 시작해서, 23년간의 공사 끝에 혜공왕 10년(774년)에 완공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김대성은 중수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 의견들중 필자는 불국사고금창기의 6세기창건설이 맞고, 김대성이 중건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라통일 (676년)이전인 6세기에 창건된 절을 통일후 상징적인 의미에서 '불국'이라는 종교적인 (정신적) 통합이라는 의미에서 중창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통일신라의 '원찰'로 지었다는 설입니다 (필자생각일 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차돈의 순교 다음해가 창건년도라는 것도 매우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당대에 같이 건립한 '황룡사'가 걸립니다. 같은 6세기중엽에 창건했다는 말이 되는데, '황룡사'가 대규모 국가원찰로 먼저 만들어지고, 불국사는 중소규모로 건립된 후, 시대가 흘러 (약 200년) 불국사가 국가원찰로 다시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8세기에는 경주에 거대사찰이 적어도 네개 공존한 셈이 됩니다 (후일 소개할 7세기 건립의 사천왕사와 서서히 그 규모를 드러내고 있는 분황사까지).

어쨋든 이후 1312년까지 9차례에 걸친 대 공사로 계속 절의 규모가 커집니다. 이 역시 두가지 설이 있는데, 김대성 당시부터 대사찰이었다는 설이 있고, 이 여러번의 중수끝에 최대 2000칸의 규모로 커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선 창건당시라는 말은 '김대성'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위의 논리로 보자면 창건당시에는 중소규모였다가 김대성(8세기중반)에 국가원찰로서 거대사찰로 거듭난 것입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전하는 기록인데 매우 자세한 건물규모가 적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김대성시절 불국사가 이미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기록의 외관(글씨체, 크기등)이 각자 달라 후대에 건물이 늘어감에 따라 조금씩 첨가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임진왜란때까지 조금씩 증축되었다는 설이 맞게 됩니다). 이 자세한 기록에 대해서는 정확한 논문등을 더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다만, 임란때 불탄 불국사는 현재의 몇배가 되는 거대사찰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야 합니다. 

한가지 이 기록에서 짚고 넘어갈 점은 (기록의 신빙성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대웅전의 규모가 현존하는 대웅전 (즉, 조선영조때 재건한)과 정확히 칸수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저 기록에도 25칸, 현재의 대웅전도 정확히 25칸입니다.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과 단청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보물지정 불국사대웅전

가장 좋아하는 대웅전의 단청. 이러한 형태는 경복궁에서도 찾기 힘든데, 직접 보면 그 화려함에 정말 압도당합니다. 건물 곳곳에 숨겨진 괴이한 동물형상을 포함해 한국건축에서 이런 미를 쉬이 찾긴 힘들다고 직접 볼때마다 느낍니다. 

또한 아직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가지나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 대건물로는 대웅전보다 더 큰 규모의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 ·천불전(千佛殿, 25칸) 등이 있고, 이 두 건물만큼 크지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 시왕전(十王殿, 5칸), 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 문수전(文殊殿, 5칸) ,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 서당(4칸), 동별실(5칸), 서별실(5칸), 크기가 기록되지 않은 청풍료(淸風寮), 명월료(明月寮), 객실, 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누·각·문·고·욕실 등이 그 중에 기록이 전합니다. 이 건축물들은 불국사 고도 라는 지도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데, 불국사 중심이 아닌 북쪽 계곡에서 이중 몇몇 건물들이 표기되어 있어 사역자체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도(옛지도)'를 근거로 하루빨리 문화재청에서 발굴을 시행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블로그의 카테고리 주제에 집중해 보지요. 우선 전성기 불국사의 2천칸이라는 규모는 현재 불국사의 약 8 배정도가 되는 규모입니다. 건물수도 거의 비례합니다 (현재 10여동의 건물이니, 80여종의 건물이라면 칸수와 정확히 8배로 일치합니다). 대웅전의 기록을 참조로 말해보자면, 고려 흥왕사나, 6세기창건설을 가정하고 같은 시기 만들어진 거대한 규모의 단일건물들을 가진 황룡사나 백제의 미륵사에 비해 한동 한동의 건물크기는 작은 편이 됩니다 (하지만, 2,800칸이라는 흥왕사의 경우 거대건물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반면, 불국사는 중소규모의 건축물이 매우 자잔하게 많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의 규모가 현재의 크기니까 말이지요. 

이 사실로 유추해 보아도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불국사는 창건될때부터 그 목표가 명확했던 흥왕사, 황룡사, 미륵사등과는 성격이 다른 사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통의 사찰로 지어졌다가, 그 역할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증대, 그와 맞물려 수십동의 건물이 아기자기하게 계속 증축된 대사찰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당장 10여동에 불과한 현재의 불국사를 방문해 보아도, '몸으로 느낄수' 있습니다. 황룡사지에서 느끼는 단순미+거대미학과 완연히 다른 아기자기하고,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느낌을 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성기때 불국사를 방문한다면 정말로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곤 합니다. 

현재의 불국사 (건물과 조형물의 대부분이 국보, 보물입니다)

이렇듯 전성기를 누리던 불국사는 선조 26년인 1593년, 임진왜란으로 2,000여 칸의 목조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버립니다. 그로부터 19년뒤인 1612년 해안 스님에 의해 일부 복구가 되었고, 조선 영조때인 1765년에 현재의 대웅전이 다시 재건됩니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선말에는 관리부족으로 거의 폐사지가 됩니다 (아래 사진).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과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20세기초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7년동안(1918년~1925년)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한 적이 있으나 이를 계기로 다보탑의 석물과 사리함 등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그 동안에도 여러 건물이 소실되었습니다. 특히,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 당시,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 중요한 복구를 하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조선말기 모습

재미로 69년 제대로 관리를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사진도 있습니다. 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예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당시 우리 어머님뻘되시는 여고생들의 여행단체사진입니다.

현재의 불국사의 형태미나 규모는 사실 아쉬운 점이 큽니다- 이는 70년대초의 고증능력과 복원기술의 한계이기도 하겠지요. 우선, 앞서 살펴본 전성기시대의 건물지에 대한 철저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불국사의 정확한 범위는 아직도 미궁입니다. 8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것만 전설처럼 알고 있을뿐, 아직도 철저한 발굴은 그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현재도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뿐 아니라, 형태미적인 부분에서도 앞서말한 통일신라~조선중기까지의 모습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래의 불국사는 금당에서 내려다보면 화려한 다보탑 뒤의 단순한 경루와 단아한 석가탑이 교차하고 그뒤로 다시 화려한 종루(수미범종각)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경루와 화려한 범종각은 아직도 복원이 안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 '발굴'자체가 완료되지 않았기때문에 전성기 불국사의 양식을 전체적으로 알 길이 없고, 따라서 조선중기 이후의 불국사 구조를 단면적으로 따를수 밖에 없는 한계도 이유가 됩니다.

또한 전성기의 불국사에는 좌경루와 우경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복원된 형태는 다보탑쪽이 좌경루, 석가탑 쪽에 범영루(우경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경루를 수미범종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우경루 1612년, 1688년에 중건하고, 1708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다시 1973년의 복원때 중건됩니다. 현재의 배치는 이런 모습이죠. 
자하문 좌우의 좌경루와 범영루(우경루)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통일신라~조선중기의 종루(수미범종각)와 우경루(범영루)는 완전히 다른 건물이며, 서쪽의 극락전 쪽에 우경루가 있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청운교와 백운교 바로 밑에는 구품연지(9단계로 구분된 연꽃연못)라는 큰 연못이 있었습니다 ( 그 규모에 대해 설이 다를 뿐 이미 사실로 확정되고 있습니다). 이 연못은 단순한 조경이 아닌 불국을 상징하는 불국사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였습니다. 왜냐하면 9품연지는 그 의미가 극락정토에 태어난 사람이 그 선근(善根)이나 이승에서 쌓은 공덕, 성격, 행위에 따라 태어나서 받는 과보는 아홉 가지(九品) 단계로 나뉘고, 이 평생에 지은 업에 따라 아홉 가지의 차등이 있는 연대(蓮臺)에 앉게 되는데 이때의 연지(蓮池)는 연꽃을 키우는 연못으로 불교에서는 연화세계(蓮華世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사찰과 연꽃(수련)은 어떤 관계일까).

그러나 1970년대의 복원 과정에서 필자가 보기에는 기술력의 한계및 발굴연구부족으로 연못복원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불국사 고금창기에 이미구품연지라는 말이 등장하고, 무려 18세기말 (거의 19세기초)인 1798년 영조3년에 "연못의 연꽃을 뒤집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영조때 까지는 연못이 실제로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불국사에서 가장 시급하게 연구하고 복원해야 하는 곳이 바로 이 구품연지라 생각합니다. 이 호수와 다름없는 규모의 연지는 첫째, 임란이전 발굴을 우선해야하는 원래의 불국사모습에서도 자유로운, 조선후기 영조 3년때까지도 존재하고, 일제시대에도 흔적이 존재했던 현재의 불국사의 양식미나 그 존재의의에도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0년대 복원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의해 누락되었다고 현재에도 그대로 이 불완전한 모습을 끌고 가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연지의 규모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전성기당시의 연지모습을 유추한 것으로 2012년 2월 한양대에서 열린 " ‘한국건축문화재, 복원과 창조의 경계"에서 소개된 복원그림입니다 (역시 80여동의 위치조차 파악을 못하는 지라, 건물동의 갯수는 현재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현재까지 파악하고 있는 연지의 규모를 보여주고 있는 도면입니다 (출처링크). 작은 규모의 연지는 1973년 복원당시 발굴한 규모입니다- 이 보고서에도 원래의 연지규모는 파악하지 못한것으로 적고 있다고 알려집니다.
이 모습을 전성기불국사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가 많은데 엄밀히 말해 틀린 설명입니다- 여기에 건물수가 8배가 많았습니다. 이 모습은 임란후 영조때까지의 모습에 가까울텐데 드문드문 건물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렇게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겠지요. 사실 초등학교때 역사선생님께서 경주설화에 불국사를 방문하는 객들이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이러한 설은 아래 설명하겠지만 일제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설화를 직접 찾아봐야겠지만 그렇다면 이 연지의 모습이 비슷하게 옳바른 상상도가 됩니다.

특히 조선중기 시인 김시습(1434~93)이 불국사를 보고 남긴 시를 보면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돌 만들어 만든 계단, 작은 연못 누르듯 높고 낮은 누각들 잔잔히 아롱지네".

또한 현진건의 1929년 기행기를 보면 일제시대 당시 불국사의 옛모습을 설명하는 안내원의 말이 나옵니다. 발췌해 보지요: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 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귀인이 이 절을 찾을 때엔 저 편 못가에 내려 그림배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步喬)를 타고 이 돌 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단다. 너른 못에 연꽃이 말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엔 으리으리한 누각(樓閣)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을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활동 사진에서 본 물의 도시 베니스의 달빗긴 바닷가에 그림배를 저어 가는 청춘 남녀의 광경을 선하게 나타난다.

중요한것은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물론 20세기초의 전설같은 이야기였지만). 또한 불국사 고금창기 자체에도 연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기록에 따르면, 창건당시 '청운', '백운' 두 석교와 서쪽의 '연화' '칠보' 두 석교사이에도 연못을 팠다고 씌여 있습니다. 이 기록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범영루(우경루)아래에 뚫려 있는 U자형 수로입니다. 옛모습은 이 수로에서 계속 물이 흘러나와 정면의 경우 청운교, 백운교를 잇는 물길이 열리고 실용적인 배가 아닌 장식의 의미가 강한 화선이 그 사이를 다녔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아래의 발굴지 (작은 연지)는 전체가 아닌, 그저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불국사 정면전체를 감싸는 긴 연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봅니다. 


현재까지 파악한 (73년 보고서근거) 동서로 39.5m, 남북으로 25.5m, 깊이 2~3m의 타원형 구조의 연지. 땅을 깊게 파고 길이 0.7~1m에 달하는 거대한 암석으로 범영루 밑의 석축과 같은 방법으로 경계면을 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 파악한 규모의 연지의 물공급은 지도의 범영루(우경루)와 자하문사이에서 발견된 수구(물받이통)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려왔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9품연지라는 말에 이미 아홉개의 연못이라는 뜻이 있는 만큼 이러한 연지가 8개 더 위의 그림처럼 불국사를 둘러싸고 있거나,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9개의 단계가 연속적이라는 의미에서 둘러싼 형태가 더 와닿습니다.

불국사 연못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설화는 아마 아사녀 설화 (영지(影池))일 것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이 영지라는 연못이 9품연지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두해가 흘렀다. 남편 일이 하루빨리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 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천리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면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되지 않은 곳에 연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공사가 끝나는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그림자없는 탑)'이라 하였다.

당시 연지를 다녔을 배로는 실용적인 배가 아닌 화선(画船)류가 다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항상 그렇듯) 한국쪽 검색으로는 비슷한 배그림이나 조각을 찾을수 없어, 중국쪽 화선 사진을 첨부합니다. 마침 연지(연꽃호수)를 다니는 모습이군요.

불국사는 여러 의미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건축유산입니다. 크게 세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말기-통일신라-고려시대에서 조선초중기까지를 관통했던 고도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정신적인 상징적 산물입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세가지의 불국을 추구하는데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 마지막으로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입니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해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둘째, 문화유산의 복원이 시급한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건축유산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불국사는 통일신라 때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닌, 고려를 관통하고, 조선을 관통하고, 임란후 차차 복구되다, 73년 6월 3년 반동안 중건된  (더군다나 당시에는 삼국시대 자료가 지금보다 훨씬 빈약) 조선건축 양식을 토대로 건축된 여러 양식이 쌓인 유산입니다 (관련기사-원형과 다른 불국사…우리시대 창조적 복원의 산물). 2012년에 열린 한양대 복원전시 특별전에 수록된 70년대 초 불국사 수리복원 총책임자였던 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신라 목조건축의 실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복원팀은 남아 있던 석단과 석교 등을 제외하고는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까지의 목조건축 양식을 혼합해 불국사를 재건하기로 결정합니다. 관련기사에서도 언급했듯 (필자도 동의) 건축문화재 복원이 단순히 과거의 것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창조도 창조지만, 어떠한 건축유산의 '통시적 복원개념'도 이제는 들여다 봐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원성만을 따져 원형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식의 흑백논리는 지양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처절한 문화재 손실국가의 경우, 특정문화재가 존재했던 통시적 시대를 두루 살펴보고, 가장 의미가 있고 고증할 자원이 가능할 경우 그 시점을 잡아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컨대 월정교 복원의 단청이 단순히 조선초기 것인가, 삼국의 것인가를 가지고 엉터리다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경주나 부여, 서울의 도시의 전체복원 (중수, 중건이라 해도 마찬가지)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는 어느 공시적 시점에 시간성이 정지한 채로 머무는 미니어쳐가 아닙니다. 경주도 서울도 천년이상을 여러 왕조를 거치며 존재한 고도들입니다. 물론 경주의 경우, '신라-통일신라'시대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될수 있는한 신라당대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옳지만, 이웃국가의 당대문화재를 참조해도 답이 없는 경우에는, 그 후대의 기록을 참조해서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노력도 결코 잘못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월정교는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건축유산이란 것입니다. 쉽게 비교할수 있는 일본의 교토의 모습 역시 시대별 문화재가 켜켜히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교토의 100여년전 복원한 건축유산들 역시 시원성만을 고집한 모습들이 아닙니다. 오늘 소개한 불국사만 해도, 73년 복원한지 40년이 되기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바 있습니다. 복원문화는 한국에서 매우 치열하고 엄밀하게,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중요문화재복원을 지자체에 맡겨선 곤란합니다. 우리시대에는 복원문화재로 머물겠지만, 시일이 흘러 후대에는 얼마든지 다시 'Authentic한 문화재'가 될 가능성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주도 공원의 미니어쳐(추정)

여주남한강변의 금은모래공원의 불국사 미니어쳐

마지막으로, 2014년 (내년) 보물지정문화재인 대웅전이 해체-수리에 들어갑니다. 영조 41년 (1756)때 중건된 대웅전은 248년만에 중창하게 되는 것이지요. 현재의 대웅전은 신라시대 당대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하부의 초석과 가구식 기단위에 조선식 건물이 들어선 형태입니다. 18세기 불전으로는 유일무이하게 내부공간 구성을 가진 건물이기도 합니다. 현재 대웅전이 해체복원될 경우,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마루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보출처 링크). 바로 저번주 (2013년 7월 19일)에 해체된 석가탑에서 4-5세기경의 작은 불상도 발견되었지요 (관련뉴스 링크).

여력이 된다면, 문화재청측에서 해체복원과 함께, 9품연지의 발굴과 1단계복원, 그리고 원래의 우경루도 복원을 추진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불국사에 관한 여러 기록을 근거로 80여동의 전성기건축지들을 차례차례 찾아내고 중창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시대의 모습을 켜켜히 간직하면서도 아직 그 본 모습인 대사찰로서의 규모미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는 한국의 상징적인 사찰 불국사. 이제부터라도 그 전성기의 모습을 우리에게 서서히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
사족: 불국사 1910년대 실측도등 
http://blog.daum.net/gbs0203/98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0660.html


사족2: 불국사 창건에 대한 또다른 이설도 있습니다.
http://www.nrich.go.kr/kr/board/freeboard/content.jsp?id=2599
http://mirror.enha.kr/wiki/%EB%B6%88%EA%B5%AD%EC%82%AC

정보관련 사이트:
http://uriculture.com/s_menu.html?menu_mcat=100120&menu_cat=100003&img_num=sub3
http://simjeon.kr/xe/?mid=temple&page=5&document_srl=10767
http://www.unesco.or.kr/heritage/wh/korwh_buldetail.asp
http://blog.daum.net/khs31390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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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솔까역사 2013/07/26 12:32 #

    불국사 전면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런 연지가 있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겠군요.
  • 역사관심 2013/07/26 13:26 #

    그렇습니다.
  • 零丁洋 2013/07/26 12:59 #

    보존과 복원 사이에 선택이 필요해 보입니다. 만약 파르테논 신전이나 콜롯세움의 망가진 부분을 보수에 완벽하게 복원하다면 우습지 않을까요?
  • 역사관심 2013/07/26 16:15 #

    네, 다만 현재 한국의 복원문화는 거의 흑백논리 (원형을 알수 없으니 안된다, 아니다 돈이 되니 한다)로 점철되는 감이 없지 않아, 복원철학자체를 정립할 시점이 된듯 합니다.

    보존과 복원의 선택에도 무조건 터만 지킨다, 무조건 복원한다가 아닌,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선택이 되야함을 물론이구요. 다만, 예전에 긴 포스팅을 올렸듯, 기본적으로 개인적으로는 할수 있는 복원이나 중건은 하는 쪽으로 원론적인 한 표를 던집니다. 그 이유는 기초적인 부분이지만 몇번 올린바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의 정체성문제에서 철학적인 논고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부분은 아주 후일에나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콜롯세움의 무너진 부분의 유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국사의 없어진 부분이나 전소된 황룡사와는 다른 경우지요). 망가진 부분 자체가 하나의 역사성을 띠게 된 가치있는 모습이 된 것이니까요. 우리나라의 경우 해체복원중인 미륵사 서탑의 이번 결정 (탑건립당시 완전한 모습이 아닌 무너진대로 존재하던 형태로 다시 복구한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 홍차도둑 2013/07/26 17:47 #

    두분께/파르테논 신전은 현재 복원중입니다. 20세기초에 했던 복원의 문제점(주변의 아무 대리석이나 사용해서 대강대강 복구+대리석 조각들을 고정시킬 때 쓴 쇠 거멀못이 녹슬어서 되려 더 파손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거멀못 교체)을 최신 기술로 재보수하면서 세운 계획이 "파르테논 신전의 모든 역사를 보여주겠다" 는 부분입니다.

    파르테논신전은 고대 그리스 신전의 형태를 지나 기독교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이슬람의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지라 그 역사를 전부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 부분도 복원.공개할 예정입니다.(이거 잘 하면 캔터베리 성당 되는거죠...)

    무리한 완벽한 전면 복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건물의 '전체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면을 볼 땐 어떻게 복원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파르테논 신전과 콜로세움의 망가진 부분을 전면 재 보수를 하기엔...돈이 모자른답니다. 워낙에 거대한 건물이라 말이죠...-_-; 그 석재 비용이 예산이 엄청나다더군요.
    그나마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는 주변 성벽에 관련 석재들이 중간중간 끼어져 있어서 그거 찾아서 복원하고 성벽은 다른 돌로 땜빵한다고는 하는데...

    2004년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못간게 조금 아쉽네요. 그게 1997년인가부터 했던 프로젝트라서 2004년이었으면 어느정도라도 진행되었을터인지라...직접 확인할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3/07/26 23:40 #

    홍차도둑님> 아 새로운 정보 감사합니다! 저는 파르테논도 콜롯세움처럼 자연적인 혹은 무언가 역사적인 풍화작용의 모습인줄로만 알고 있었군요. 그리고 말씀처럼 현재의 사회적 종교적 당위성이 충분하다면 전면복원, 즉 중수의 개념이 들어가도 무방하겠지요. 어느 시대건 그런일은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

    정보 고맙습니다~.
  • 8비트 소년 2013/07/26 15:04 # 삭제

    저 여고생들 모습은 그 자체로도 좀 장관이긴 하네요.

    불국사를 책에서 처음 볼때부터 계단에 '교'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연못이 있었던 것이로군요.
  • 역사관심 2013/07/26 15:16 #

    어머님들께서 앉아계셨던 거죠^^
  • kamu 2013/07/26 20:42 #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재밋게 잘 읽고 가요^^
  • 역사관심 2013/07/26 23:23 #

    고맙습니다 ^^
  • ㅇㅇ 2013/07/28 13:32 # 삭제

    이런거 보면 합천 해인사는 창건이후 몽고침략 일본침략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잘도 피해갔네요.. 특히 팔만대장경 아직까지 남아있는거 보면 ㅎㄷㄷ

    임진왜란때 전국의 불교사찰이란 사찰은 대부분 불탔는데 해인사 지켜낸거 참

    신통방통합니다

    (얘기 들으니 합천지역 의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지켜냈다던데..

    그 지역 의병은 천하무적인가보네요,, 분명 다른 지역 의병들도

    사찰 지켜내는데 앞장 섰을텐데..하긴 식민지 시절에도

    팔만대장경 경판이 너무 많아서 일본인들이 이걸 다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 자체를

    못했다고 하네요 뭐 몇장 훔쳐갔을수는 있겠지만서도.. )

    근데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지세가 원래 불에 약해서 인지 전쟁과 관련없이

    창건이후 꾸준히 주요 건물들 화재로 사라지고 중건하고를 반복했더군요 ㅠㅜ

    근데 조선초 만들어진 대장경 경판전 목조건물은 다른 건물 다 타도 살아남았다는게 신기

  • 역사관심 2013/07/28 13:49 #

    그러게 말이죠. 해인사가 몽고침입을 어떻게 피해갔는지는 찾아봐야 알겠지만, 예전에 한국전쟁의 포격을 피한 일화는 역.스에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
    http://www.dailymotion.com/video/xt1lhm_%EC%97%AD%EC%82%AC%EC%8A%A4%ED%8E%98%EC%85%9C-%ED%8F%AC%ED%99%94-%EC%86%8D%EC%97%90%EC%84%9C-%EB%AC%B8%ED%99%94%EC%9E%AC%EB%A5%BC-%EC%A7%80%ED%82%A8-%EC%82%AC%EB%9E%8C%EB%93%A4_school

    여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간담이 서늘)
    * 1표차로 살아난 해인사 팔만대장경 *
    1951년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900여명의 북한패전병과 빨치산들이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에서 철수할 때,해인사를 불태우고 갈것인가 아니면 놔두고 갈 것인가에서 찬반이 팽팽하여 결국은 비밀투표를 하게 되었는데,불태우는것을 반대하는 쪽의 표가 1표 많아서 천만다행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임란때부터는 여기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http://kid.i80000.com/html/making/sub_making_3.html
  • 부산촌놈 2013/07/28 22:34 #

    잘 읽었습니다.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김대성이 경덕왕 때에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공을 보았다는 설이 널리 알려진 터라 다른 것들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읽고 보니 그도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불국사의 경우는 구품연지에 제일 관심이 많은데, 사실 불국사 앞마당의 단단한 터자리에 불과 수백년 전만 하여도 못이 있었다는 게 얼른 믿어지지 않는 게 사실이에요.

    무슨 이유에서 못을 도로 묻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구품연지가 다시 발굴된다면 그 안에서 우리가 접하지 못한 유물들이 나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또 발굴을 통해 불국사 복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듯하고 말입니다.
  • 역사관심 2013/07/29 03:51 #

    창건연대에 관해 사실 고금창기라는 강력한 사료가 있는데도 굳이 김대성 연대를 고집하는 이유를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구품연지...저 역시 가장 먼저 더 치밀한 발굴을 통해 복원을 시도할 첫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에도 썼듯 다른 건물지보다도 훨씬 최근까지 존재했던, 그리고 불국사라는 사찰의 '존재 의의'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지요.

    시험 잘 보시길 바랍니다~ ^^
  • ㅇㅇ 2013/07/29 22:10 # 삭제

    재밌는건 구품연지 자리는 나무는 물론 잡초같은 것도 자라지 않는다죠..

    지금은 흙으로 묻혀있지만 꼭 복원되었으면 하네요

    분명 조선중후기까지도 있었던 것인데..

    만약 물길이 끊긴 거라면 다른쪽에서 끌어와도 괜찮을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대웅전도 그렇고 불국사 주요전각들 임란전에는

    대부분 중층이었을 것 같지 않나요

    실제로 조선전기 조선시대 건축된 목조건물들도

    상당수가 2층 아니면 중층 인것 같던데..

    아마도 임진 병자 양란 이후 갑작스런 대규모 목조건물 건축 및

    전국단위의 전체온돌 발달로 목조 수요 폭증 및 돈문제로

    조선후기 목조건물들은 대부분 단층을 띄게 된것 같습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조선후기 목조건물들 특히 사찰건물들 보면

    좋은 목재 수급이라던지 관련 분야 장인 수요 부족때문인지

    뭔가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들 보면 고려시대 까지는 느티나무가 많이 쓰이고

    조선전기 이후는 소나무가 주로 쓰였다던데

    건물 규모가 많이 줄어든 건

    이부분 영향도 크다고 하네요

    고려시대 대형 건축물들 보면 나무 자재로 느티나무가 많이 쓰였다고하는 글을

    본 기억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말 조선초 되면

    느티나무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 연유로 소나무가 대체제로 많이 쓰였다는 글도

    본 기억 있네요

    조선후기에도 온돌등의 이유로 산림 훼손이 컸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잩은 전쟁등으로 목조건축물 피해가 많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새로 건물들 중건했을텐데

    예를들어 고려 중후기 몽골침략 이후 다시 건물들 중건하면서

    그때도 산림훼손이 막심했을꺼라 예상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에서 요즘처럼 나무 심기에 열중했다고 하던데

    그건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나 그 전시대에도 그러했다는 것 같더라구요

    특히 조선이전시대는 목조건축물들 규모도 어마어마 했잖아요

    그리고 또하나

    조선후기에 임란 병자 양란 피해복구가 제대로 안된건

    목재 부족도 그렇지만 말 그대로 경제문제도 많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국가나 민간이나 돈이 많이 부족했던 건 사실인것 같아요

    그에 비해 고려말 조선초를 보면

    몽고 침략 이후 원나라에서 고려로 대규모 교초가 유입되었을때

    그 돈이 단순히 권문세족 부 축적에만 쓰인게 아니고

    대대적인 건축 중수라던가 고려불화조성등 다양하게 쓰인게

    어느정도는 사실인것 같네요

    조선초 명나라에서 조선에 말 수만필 요구하면서 댓가 치른것도 그렇고

    조선전기에 명나라쪽에서 조선으로 많은 자금 유입된것도

    고려말과 비슷하게 아니 고려말보다 조금더 공정성(?)을 띄고

    사용되기도 한것 같습니다

    근데 조선후기에는 그런것도 없고 목재도 부족하고

    .. 조선후기 상업발달이니 뭐니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 고려후기나 조선전기보다 국가나 민간의 자본 부족 현상은 컸을꺼라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민국만 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피해 막심했는데도

    부족하나마 일본청구권 조금하고 월남전때 송금된 돈 그리고 중동 특수등으로

    국내 흘러들어온 자본이 경제부흥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온게 사실이죠



  • 역사관심 2013/07/30 11:50 #

    올려주신 의견에 동감합니다. .여말선초때도 그렇고 삼국통일시점때도 그렇고, 역시 건국에는 대규모 랜드마크가 지어지곤 했지요. 특히 중층건물과 연지복원등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ㅁㅍㅇㅁ 2013/08/07 14:05 # 삭제

    보니까 불국사의 면적이 40만제곱미터가 넘어가던데 그렇다면 흥왕사보다 규모가 큰건가요?
  • 역사관심 2013/08/07 16:05 #

    정확한 넓이는 찾아보지 못했는데 40만 평방미터 기록의 출처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흥왕사보다는 아마 못할 것입니다. 황룡사가 담장안만 약 9만평방미터가 되는데 (미륵사는 이보다 더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황룡사 역시 담장밖까지 사역을 치면 훨씬 넓어집니다)- 확실한 규모는 지금 쓰고 있는 PC가 아닌 컴에 있어서;), 흥왕사의 규모는 북한측 실측기록을 아직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2012년 뉴스에 32만평방미터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흥왕사안에 '원'(즉 여객시설과 여러 건물을 갖춘 공간)이 다수 존재했다는 설 하나만으로도 이 절은 규모가 다릅니다. 한 국가의 '정궁'규모란 거죠. 경복궁이 100프로 복원했을때 34만평방미터입니다 (현재규모는 40%-50%구요).

    따라서, 제 생각에는 어디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불국사 40만평방미터라는 이야기는 약간 사실여부가 의심스럽습니다(경복궁보다 크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불국사의 전성기 터에 대한 실측이 1979년 현재규모의 사역외에 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즉, 제대로 조사해본 적이 없습니다. 추측컨대, 아마도 불국사에 대한 고지도에 북쪽 계곡까지 건물이 있는 것을 보고 대강 어림짐작으로 그쪽까지 포함 크게 잡아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사실, 불국사와 흥왕사나 황룡사-미륵사는 단순비교가 어려운 것이 같은 대사찰이라도 숲을 근거로 여기저기 건물을 세웠을 불국사와 완전히 평지에 대건물들을 세운 세 절과는 많이 형태가 다르니까요- 아기자기한 맛은 불국사가 훨씬 더 했을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같은 '칸'이라고 해도, 흥왕사의 '칸'이 더 클 가능성 (즉, 대규모 건물이 많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불국사는 현재까지 80여동 2000칸으로 잡고 있고 (전성기규모), 흥왕사는 3000-최대 3500칸까지도 잡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 생각에 흥왕사규모보다 더 큰 사찰은 아마 동아시아전역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 듯 하군요 (북한측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다만, 흥왕사는 그 사찰의 정치적색깔때문에 후기에는 '궁'의 역할을 했으리란 추측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 한님 2015/09/21 16:54 # 삭제

    불국사는 만다라의 배치도에 따라 완성된 점과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반대라는 점을 들어서 불교가 아닌 민교사찰일 가능성을 있다고 들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5/09/22 23:15 #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자료가 있으시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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