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여관- 고려 왕립여관 혜음원(惠陰院)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이번에 소개하는 사라진 대건축물은 그 성격이 이제껏 소개한 대형건물지들과는 다릅니다. 바로 고려시대 왕립숙박시설(대여관, 왕립호텔)로 전모를 서서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혜음원(惠陰院)입니다. 혜음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뉩니다. 즉 (), (), 행궁(行宮)의 세 모습을 갖춘 삼위일체형 건축물입니다. 특히 중요한 건물지인 것이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고려 전기'의 공공기관이라는 것에 의의가 큽니다. 

1999년 우리동네 뒷산에 뭔가 유적물이 있는 듯하다라는 한 대학생의 제보에 의해 행해진 조사에서 혜음원(惠陰院)이라고하는 암막새가 출토되면서 2002년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된 후 발굴이 시작되었고 2005년엔 사적 제 464호로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최초발굴이후 2001년 1차에서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로 파악했다가, 현재 8차발굴에서는 전체 약 700m-800m로 점점 규모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후 약 10여년에 걸쳐 2013년 현재까지 8차발굴을 통해 대략의 규모와 구조가 밝혀져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건축지입니다. 그 규모도 규모거니와, 고려국왕의 행차시 숙박을 하는 '행궁'을 겸해 국립호텔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계 역시 광대한 터에 궁궐 건축에서나 있는 좌우대칭의 건물 구조와 일반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방을 석축과 담장으로 폐쇄한 등이 눈에 띕니다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 박경식교수의 설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혜음원은 정궁에서나 볼 수 있는 내부 배수를 고려한 뛰어난 조경시설과 초석과 기단석에서 보이는 섬세한 가공기법등이 조선시대에 볼수 있는 행궁이나 숙박시설과는 또다른 미학적 차원을 전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곧 추정복원도가 만들어지리라 생각되는 2012년까지의 혜음원지 전경

1차 발굴때만의 성과로도 연못지와 배수로 등 27개의 유구와 금동여래상기와류자기류 등 많은 유물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건물 27개동이 8차인 현재는 훨씬 늘어났겠지요. 삼국-고려시대의 건축지를 살펴보면 항상 느끼곤 하는데 당시에 '연못'이라든가 '해자'라든가 조선후기의 한옥이나 성곽에서는 잘 볼수 없는 물에 관련된 미학적 요소를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합니다. 그래서 사실 몇년전 혜음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혹 '연못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나온 것을 알고 (그리고 한개가 아닌 건물사이사이의 다수) 매우 기분이 좋았었습니다. 

그리고 혜음지가 고려시대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확 오는 요소가 역시 '기단'구조입니다. 만월대나 진도왕궁터처럼 총 9단에 이르는 계단식 대지를 깎았다고 1차발굴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2차발굴에서 눈여겨 볼 성과는 혜음원의 원래 의의인 '숙박시설'로서의 모습인데 여행객들을 위한 세탁 목욕시설이 대규모로 나온 것입니다.

2 발굴에서 출토된 '경신년(庚申年)'이라는 명문 기와를 주목하고 있는데이는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기록과 비교할  혜음사.원이 세워지고 1140년(인종 18년)에 행궁이 축조됐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4차발굴에서는 기와류에서 기와류 중에는 글씨를 양각하거나 인장(도장)으로 찍어낸 것이 여러 출토되었는데, 명문 중에는 `惠蔭院'(혜음원)이라는 글씨를 양각한 것이 있고, "戊申年二月三十日惠蔭寺造近學…"이라고 새긴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4차발굴에서 큰성과는 혜음(惠蔭)이라는 고유 명사에 궁궐과 같은 건물을 뜻하는 () 사찰을 의미하는 ()자가 붙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이곳이 사찰과 궁궐을 겸한 곳이었음을 확인시켜준 성과였습니다.

2009년 채상식교수님의 선원사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보면 혜음원지의 '행궁'지 모습에 대해 자세한 모습을 알수 있는데, 당시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의 혜음원지 발굴과정에서 왕이 머물던 행궁(별원)에서 용두와 취두 및 잡상을 비롯한 다량의 귀목문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행궁(별원)은 건물의 배치나 구조가 궁궐 건축에 볼 수 있듯이 좌우대칭 구조를 하고 있으며, 院址의 경우 가장 뒤쪽 중심부에 있는 3-2와 3-3 건물지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래 지도의 건물지로 생각됩니다). 

이들 3-2와 3-3 건물지에서도 치미편을 비롯하여 용두편, 잡상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건물지의 전면에는 두 곳에서 마당이 노출되었는데 하나는 전이 깔려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최상급바닥재인 청석이 깔려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를 통해 볼 때 이들 건물지는 상당한 규모와 품격을 가지고 있는 건물지로 행궁지의 일부일 가능성을 비추고 있고, 고려중기 왕실의 적극적 관심 아래 창건되었기에 궁궐의 대행이었던 행궁(별원)이나 아니면 그에 비견되는 중심 건물에서만 등장하는 치미와 잡상을 비롯한 특수기와가 출토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화 선원사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2009).

고려정궁인 만월대(가칭)과 삼별초의 궁궐인 진도궁궐과 비슷한 계단식구조가 보입니다- 총 9단계

혜음원의 부전돌

발굴초기에는 (2000-2004) 파주시 단독자금으로 발굴을 진행하다가, 2005년 국비를 지원받게 되는데 당시 5차발굴이후 파주시가 정부로부터 필요규모의 지원을 받지 못해 (당시 약 50억원 중 5억원에 그친 지원) 발굴조사가 끊길 위기도 겪지만 꾸준한 건의끝에 현재까지 계속 조사를 시행할수 있었습니다. 당시 계획으로는 혜음원에 대한 정확한 규모와 구조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 및 유적정비 공사를 작년 2012년 완료하고,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시관 건립과 주차장 및 진입로 조성도 2013년 예정했는데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파주시는 적어도 2005년이후 광탄면 용미리 9만9천687㎡에 대한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지원금이 끊겨 고생한 것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항상 문화재청의 예산부족이 문제지요).
현재까지 혜음사, 행궁지, 혜음원 등 3곳으로 구분된 혜음원지 가운데 혜음사와 행궁지 2만3천여㎡에 대해 발굴조사를 진행한 상태다. 시는 혜음원지의 전체적인 유적 발굴을 위해서는 최소 2만7천여㎡에 대한 추가 발굴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 학예연구사는 "추가 발굴조사와 유적을 정비하는데 앞으로 최소 80억원이 더 투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한정된 예산을 유적 발굴의 시급성이나 훼손 정도를 감안해 배정하고 있다"며 "유적의 경우 발굴한 뒤 곧바로 정비해야 하는 사정은 알지만 부족한 예산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파악한 대강의 건물지도면을 보고 자세한 건물지
지도에서 한동 눈여겨 볼 건물이 있는데, 바로 소규모 건물인 4-4동입니다 (지도 가운데). 이 건물터는 남북 14m, 동서 8.4m) 정면 3, 측면 1칸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정방형 전돌을 촘촘히 깔고 는데, 이곳에서도 연못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연못이 보이시죠 현재까지 3개). 그리고 다른 건물과 매우 다른 구조를 가졌다고 되어 있으면서, 중심부에는 특이하게 十자형 (길이 30) 정방형 판석이 안치돼 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는 것도앞으로 숙제입니다.

현재 생각해 볼수 있는 이러한 건물사이의 연못구조는 좀 우습지만 경주의 라궁입니다- 
건물과 건물사이의 작은 연못구조 
또한 3-3 시설앞은 이런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혜음사의 지정학적 위치

간단하게 우선 지리를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혜음원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는 왜 저런 산속에 대여관을 지었을까 싶을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는 위치에 있습니다. 다만 당연히 이는 현재의 우리의 시각일 뿐, 당시에는 혜음원 앞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지도를 보면 호랑이가 출몰하던 혜음령을 넘어야 개경에서 남경(서울)로 갈수 있었습니다. 혜음령은 호환뿐 아니라 산적떼도 자주 출몰한 곳이라고 전합니다. 왕이나 귀족이 머물 곳이 없어선 곤란하겠지요. 혜음원과 행궁은 그런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사진출처 링크)

혜음사의 역사

혜음원의 사료기록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조선초 서거정 등이 편찬한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김부식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 (1144년)에 등장합니다. 고려 예종때  남경(서울)과 도읍인 개경(개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숙박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11세기말 고려 예종(재위1105-1122년)때인 1119년 건립계획이 시작됩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봉성현(峰城縣)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조그마한 절이 었었는데, 허물어진 지가 벌써 오래였으나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石寺洞)이라 불렀다. 동남방에 있는 모든 고울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들 이 길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깨가 서로 스치고, 말발굽이 서로 닿아서 항상 복잡하고 인적이 끊어질 사이가 없는데, 산 언덕이 깊숙하고 멀며,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어서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며, 안심하고 숨어 있을 곳으로 생각하여, 몰래 숨어서 옆으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친다. 이뿐 아니라, 간혹 불한당들이, 이 지역이 으슥하여 잠복하기가 쉽고 다니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여기에 와서 은신하면서 간악한 짓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경계 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선왕(先王)인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신 지 15년인 기해년 가을 8월에 측근의 신하인 소천(少千)이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남쪽지방에 갔다가 돌아왔다 (주: 15년만인 기해년이라고 했지만, 사실 기해년은 14년만입니다). 임금께서 “이번 길에 민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들은 것이 있느냐.” 물으시니, 곧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이를 딱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사람이 안심하게 할 수 있느냐.”하셨다. 아뢰기를, “전하께옵서 다행히 신의 말씀을 들어 주신다면 신에게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국가의 재정도 축내지 아니하고 민간의 노력도 동원 시키지 않고, 다만 중들을 모집하여 그 허물어진 집을 새로 건축하고 양민을 모아들여 그 옆에 가옥을 짓고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해가 절로 없어질 것이며, 통행자의 난관이 해소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는 “좋다. 네가 그것을 마련해 보라.” 하셨다. 이리하여 그는 공무를 띠고 묘향산(妙香山)에 가서 대중 가운데서 이르기를, “아무 곳에 큰 장애물이 있는데, 나라에서는 차마 토목 공사를 가지고 백성을 괴롭힐 수가 없다. 예날 스님들은 곤난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심을 발휘하였는데, 여기는 누가 나를 따라 저곳에 가서 일을 해보겠는가.” 하였더니, 절의 주지 혜관(惠觀)스님이 기꺼이 그를 따랐으며, 그 무리 중에 따라가려는 사람이 백 명이나 되었다. 혜관 스님은 늙어서 가지 못하고 부지런하며 진실하고 기술이 있는 사람으로, 증여(證如)등 16명을 선발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겨울 11월에 그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머물렀다. 임금께서 중 응제(應濟)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 보게 하고 제자인 민청(敏淸)을 부책임자로 삼았다. 연장을 버리고 목재와 기와를 모아들여 경자년 봄 2월에 착공하여 임인년 봄 2월이 되어서는 일을 모두 마쳤다. 절이 불당과 유숙하는 건물부터 주방,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소가 마련되었고, 또 생각하기를,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신다면 행여 한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실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 하여 드디어 따로 별원(別院)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시어 절 이름을 혜음사(惠陰寺)라 내리셨다. 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으니,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아니한가. 또한 양곡을 비축하여 놓고 그 이자를 받아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던 것이 지금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소천(少千)이 이것을 영원히 계속하려 하였더니 정성에 감동된 바 있어 희사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겼다.

글에 등장하는 완공년인 '임인년'은 1122년입니다. 따라서, 1119년인 기해년에 건립계획이 시작되고, 착공은 경자년 즉 1120년2월에 시작, 만 2년만인 1122년에 1차적으로 숙박시설로서의 혜음원은 완공됩니다. 또 그 직후 딸린 절인 '혜음사'도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보이듯 이소천이 예종의 명을 받고 1119년 바로 착공하지는 못하고, 건립자금및 노동력등을 확보하는데 약 1년이 걸립니다. 묘향산의 혜관스님을 찾아가 승려 백여명과 경비를 지원받고, 1120년 착공하여 1122년에 완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혜음원 (일반숙박시설)과 혜음사외에 국왕을 위한 행궁은 아마도 그 후대인 인종때인 1140년, 추가로 건립한 것으로 파악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종이 만 41세가 되는 시점에 착공해서 그 2년후에 돌아가신 해에 완공, 예종 자신은 아마도 제대로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완공이 그해 2월, 붕어하신 것이 그해 4월). 

이 대여관이 언제 사라졌는지에 대한 추정도 가능한데, 발굴조사 결과 혜음원지 전지역에 걸쳐서 20cm두께의 목탄 섞인 소토층과 다량의 기와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3세기 몽고침입때 전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02년 비정되는 명종 지릉 출토 청자와 1237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희종 석릉 출토품과 비교해볼 때 기형과 문양 형태 및 유색 번조받침 형태 등이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으므로 혜음원지 출토 청자의 하한은 몽고침략기인 13세기 중반까지 볼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혜음원은 예종이 건립하고 바로 다음대인 인종 (1122-1146년)때 귀족사회의 내분과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 쇠락한 것으로 파악합니다.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의 난(1126),묘청의 난(1135) 등 내란이 지속되어 왕실이 추진하던 남경(서울)개발은 중지되고 남경으로 통하는 요지에 위치한 혜음원도 점차 쇠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혜음원이 여말까지 계속 쇠락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궁지를 언제 보수했는지도 조사결과 파악되고 있는데, 남쪽축대와 담장주변-명문기와 출토시기가 1140년,1200년, 1260년, 1320년으로 나오는데, 특히 1144년 작성된 혜음원신창기의 존재를 1140년의 대대적인 중수와 연관지을 수 있다고보고 있습니다.  정황상 1136년 묘청의 난 진압 후 1138년 궁궐의 전각과 궁문의이름을 바꾸고 궁궐도 보수, 1145년 삼국사기 편찬완료를 따져볼 때 1140년 중수당시에는 혜음원과 행궁 (이름이 뭔지 아직 파악안되고 있죠)은 안정기및 전성기로접어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명문기와

훼손된 구간을 추정해서  전체 규모가 동서 19.6 x 남북 13m 달했을 청석구역

이렇듯 대규모 건물들이 들어서던 전성기의 혜음원-행궁-사찰은 이미 언급했듯 13세기 몽골침입으로 한번 크게 쇠락한 이후, 조선시대 들면서 사찰과 행궁의 기능을 상실한 ''만이 명목만 유지하게 같습니다몽골방화 (아래 지도에 보이는) 재건된 건물인 1-2,4-1 유구에서 15세기로 편년되는 분청사기편이 발견됨으로써 화재 건물만 복원하여 축소 운영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건물터와 사료뿐 아니라, 유물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명확합니다. 조선시대 흔적이 확인은 되지만 극히 한정돼 있는 반면 12세기 고려시대 건물과 유물이 압도적입니다.


참고로 고려시대 '' (대형여관쯤으로 인식하시면 될듯 합니다) 의미를 예전 포스팅인 바로 이 혜음원과 같은 시기의 유호인의 송도기행 (13세기) 부분을 발췌해서 옮겨봅니다. 송도기행에 이런 구절이 나오죠.

절에는 매우 넓은 남루(南樓)가 있고 천마산이 바로 앞에 있으며, 두 개의 높은 절벽이 사이를 두고 솟아 참으로 절경이었다. 한참 있자니 삼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얼마 후 그만하여 말을 재촉해 저물녘 보통원(普通院)에 도착했다. 
(주: 보통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시대에 구제(救濟) 및 자선사업을 위해 설립되었던 불교의 절. 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064년(문종 18)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임진보통원(臨津普通院)에서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베풀었고, 1071년 12월에는 현덕궁(玄德宮)에서 반출한 500석의 쌀을 가지고 서보통원(西普通院)에서 영세민을 위하여 식사를 제공하였으며, 1101년(숙종 6)에는 임진현 보통원에서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에 걸쳐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기사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현 보통원은 임진강 부근에 세워진 것이고, 이와는 달리 서보통원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와 나란히 동보통원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그네나 영세민을 위하여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였던 보통원은 셋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학계에는 이 보통원이 임진강과 예성강의 동서에 있었고, 임진보통원이 동보통원이라는 두 개의 보통원설도 있다/ 주: 유호인이 도착한 보통원은 셋 혹은 둘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성강에 있었던 동 혹은 서보통원중 하나가 아닐까합니다 (다음구절의 파지동이 근처이며, 예성강이 송악산에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의 유스호스텔같은 시설로 이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몽골칩입이 끝난 직후의 왕인 공민왕 (1330-74)때의 기록에 (고려사 39권 공민왕 10년조) "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행 할 때 임진강을 건너 도솔원분수원사평원 등을 거쳐서 광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때 벌써 혜음원근방의 '분수원'이 그 역할을 대신함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혜음원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1파주 역원조와 고적조(古蹟條)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2(1481) 착수해서 만든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25(1530) 증보한 지리지입니다. 고적조에는" 혜음사"라는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혜음원, 혜음사, 행궁중 사찰인 혜음사가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파주 역원조에는 혜음원이 그대로 있어 ( 숙박시설) 기능은 유지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혜음원(惠陰院)- 주 남쪽 26리 지점에 있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 몰아 작은 시내 건너서 가니, 지는 해 옛 빗돌에 풀어 성하다. 산 마을 4월에 길손이 적어 깊은 숲에 꾀꼬리 제대로 운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옛 동산의 세 가닥 길을 차마 묵게 할 수 있겠는가? 필마(匹馬)로 어디 가나 또 석양이구나. 버들 빛은 바람이 푸름을 당기고, 송화(松花)는 빗물에 누렇게 붙는다. 나물 곁들인 오리다리, 시골 국이 좋고, 고깃 발에 술 걸러서 야미(野味) 향긋하다. 자모(慈母)를 영접하여 서울에 돌아오니, 이번 놀이는 풍경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 하였다.


또한 같은 사료의 파주 역원광탄원조에 부기된 권근의 記에 '광탄원이 양 서울의 사이에 있어서 행인들이 많이 머문다'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혜음원이 이미 그 주요기능을 많이 빼앗기고 있음을 추정케 합니다. 14세기 이후의 사료기록들은 혜음원의 기능이 약화되어 인근에 있었던 혜음원 이후 건립된 분수원이나 공탄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으리라 추측하는 것이지요- 즉 몽골의 대량파괴로 이미 그 기능을 소실, 여전히 중요한 요지인 파주에 다른 '원'들을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아마도) 동측 남북 배수로 우측 석유구 (빨래터설등 여러가지)

2012-2013년의 성과

작년 20121월 6차발굴을 맡았던 건축사무소의 보고서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까지 밝혀졌던 부분을 요약해보자면:

1. 행궁,사찰,원의3가지 용도가 복합됨

2. 행궁지역은 우측 상단으로 제일 뒤부분에 객사형식처럼 익사형 건물이 있음. 그리고 뒤편에는 화계가 설치되어 후원 역할을 -> 의문익사가 있는 건물-권위가 있는 - 뒤에 후원은 서로 맞지 않음

3. 물을 이용한 조경시설 -자연수 , 지하수 이용

4. 행궁지역의 가공석 크기와 사찰영역의 가공석 크기의 용척이 다름 -행궁쪽이 크고 사찰영역이 작음

5. 출토 도자기: 고려시대는 우수한 도자기 많이 출토, 조선시대는 양도 적고 질이 낮음

-> 고려시대는 왕실 등의 도움으로 융성했으나 조선시대에서는 국가의 도움이 없이 운영됨 

 

조사가 필요한 부분으로는 다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계단:6 발굴지부분의 대문의 크기와 행궁 진입부의 문의 크기 다름

-> 계단의 폭과 계단우석의 크기를 비교하여 중간의 계단 설치시 크기 추정 가능

2. 동선 파악 (- 왕의 동선 - 중간 괸리자 - 하급 관리자)

3. 건물의 용도 파악

- 왕의 영역 (행궁이죠)

- 사찰의 영역 (혜음사입니다)

- 원의 영역 (혜음원)

- 보조공간: 주방,식당,목욕,창고, 마굿간

4. 건물의 크기 검토 : 초석 크기, 칸의 크기, 가공석의  크기 용척 비교

5. 사례연구

1) 회암사지

2) 행궁- 남한산성,수원화성

3)

충주-미륵대원 (경상도의 통로)

천안-홍경원(전라도의 통로)

파주-혜음원(남경의 통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3년 6월의 소식들입니다. 2013 6 20일 뉴스 (원문링크)에 따르면, 왕립호텔격인 파주 혜음원(惠蔭院) 터가 왕궁 못지 않은 큰 규모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이번에 발굴된 지역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즉 행궁추정지), 행궁-원-사찰을 모두 포함한 것인지 명확하게 짚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만,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영일 원장은 “첫 발굴조사 이후 5차부터 이번 8차 조사에 이르기까지 혜음원 터 전체를 빙 두른 외곽 담장은 둘레 600m 안팎으로 확인됐다”며 “하지만 유실 구간을 합치면 기존 전체 담장은 700~800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인터뷰를 볼때는 '전체구역'을 말하는 듯 합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되면 위의 배치도에 보이는 형태 (사각형에 가까운)를 따져서 대강의 크기를 생각해 볼수 있는데, 최대 800미터 둘레라 할때는 약 4만 평방미터가 되고, 700미터라고 하면 3 600평방미터 정도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서울의 조선 5대궁중 작은 편인 덕수궁의 3 3000여평 ( 10 9천 평방미터)의 반이 조금 안되는 크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궁'을 예로 든 것이고, 다음 대인 조선의 행궁과의 비교가 더 적절할 텐데 조선의 대표적 행궁으로는 능행과 온천행시 사용한 화성행궁과 온양행궁, 전란시 피난이나 거처로 사용하였던 남한행궁(광주행궁이라고도 함-남한산성 소재), 북한행궁 (북한산성 소재), 강화행궁 (강화도), 그리고 임란때 사용한 의주행궁이 있습니다. 이중 가장 규모면에서 큰 것이 화성행궁입니다. 최대 전성기였던 1756년에 657칸의 건물지가 있었고 (현재 22채의 건물, 482칸 복원), 정확한 면적이 37,268 평방미터였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파악한 고려 혜음원의 규모는 조선시대의 최대 행궁인 화성행궁과 거의 비슷하다고 파악할수 있습니다.

혜음원의 가치는 규모만이 아니라, 건물지의 질에 있습니다. 8차발굴 보고에 따르면 (2013년) 혜음원 터 북쪽에서 전체 규모와 건축물 성격이 왕궁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담장바닥시설이 공식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혜음원 터 북쪽 외곽담장 바닥시설 72m 구간을 확인했는데, 이 담장은 혜음원 터에서 확인한 건물터 중 가장 북쪽에서 확인된 건물의안쪽 담장 뒷문에서부터 북쪽으로 28m가량 떨어진 곳에서 동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너비는 160~180, 현재 남은 높이는 10~60, 바닥을 다짐한 석축은 1~단 정도가 드러났다고 되어 있군요. 8차발굴의 전문가들은 이 담장이 북동쪽에서 뻗어내리는 능선 말단 기슭에 만들어진 사실도공식 확인했고, 또한 담장 안쪽과 바깥쪽에는1.6~4.2m 너비로 기와를 이용해 한두 차례 바닥을 다진 것도 밝혀냈습니다. 사실 이는 사료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혜음원지는 원, 사찰, 행궁의 3대 요소가 버무려진 곳이라 했는데, 이번에 발굴된 곳은 아마도 '행궁'이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궁금한 것은 1차발굴때 27개동의 건물지였는데 현재는 총 몇동의 건물지가 나왔으며, 단일건물들의 규모도 알고 싶고, 또한, 1차발굴때 총 9단의 계단구조가 발견되었는데 현재도 그대로인지 궁금합니다.

바로 여기가 배수로를 낀 북측담장입니다 (사진출처-연합뉴스)

 담장지의 일부 확대사진

8차발굴단은 저 넓은 담장 전구간의 기저부에서 기와를 (이런 기와자체도 왕궁에서 쓰는 고급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이용한 보강시설을 찾아냈고, 또한 배수시설도 밝혀냈습니다. 담장을 따라서 배수로가 좍 나있다는 사실은 이 건물지의 질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앞서 소개한 6차발굴의 앞으로의 과제중 '왕의 동선'과 '왕의 영역'이 아마도 이 북측담장지에서 발굴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아직 모르겠는 것은 이번 발굴지가 앞에 소개한 '전체지도'에 속한 구역인지, 아니면 지도의 더 윗부분인지 하는 점입니다. 이건 보고서를 봐야 알 것 같군요.

2010년 경의 혜음원지전경


마지막으로 하나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한국 문화사의 한 부분을 새로 써야할 중요한 발견이 최근 (2010년) 혜음사지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14세기 후반 문익점의 목화수입설을 반박하는 전대의 유물이 나온 것입니다. 즉, 고려말인 14세기 후반 문익점(1329~1398)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2010년 8월 19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에 따르면, 2008출토된 12세기 칠기굽접시 파편들을 분석한결과 나무 바탕에 직물을 입힌 뒤 옻칠을 한 목심저피칠기(木心苧被漆器)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처음 출토된 고려시대 목심저피칠기였습니다. 여기 칠기에 부착된 직물은 면섬유와마섬유로 밝혀졌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면직물 보급시기인 공민왕 때(1367)보다 훨씬 앞선 년대의 것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인데, 이미 문헌으로도 공민왕 이전에 면직물을 사용했다는 사료가 있습니다.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발견이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발굴된 목심저피칠기입니다

중요한 유적지인 혜음원지에 대한 국가의 발굴지원과 정비지원이 끊이지 않고 제대로 되길 바랍니다- 엉뚱한 곳에 쓸돈을 막고 이런 곳에 지원을 아끼면 안됩니다. 그리고, 전모가 드러나서 건물지들의 모습을 미니어처로라도 보는 날이 하루빨리 오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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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미야자키의 아카데미수상작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전통여관'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헤이안시대, 에도시대와 근대를 버무려 만든 듯한 그 상상의 여관. 물론 롤모델인 도고여관이 지금도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도 오래된 저런 숙박시설의 모습이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일본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이러한 분위기처럼,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삼국시대- 조선시대 문화가 피상적인 사료로서의 혹은 문화적 상식수준의 텍스트가 아닌,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 수 있고 감성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날이 어서 오면 좋겠군요.

 

혜음원이 그 첫발을 내딛어주길. 즉 그저 유적지로서가 아니라 문화컨텐츠의 큰 자원으로 활용되는 날이 오리라 기대합니다.

센과 치히로중 대목욕탕 및 여관

전통 대목욕탕의 청소모습


예를 들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인데, 숙박시설로서의 혜음원의 상징깃발은 고려도경에서 서긍이 묘사한 깃발과 유사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1122년에 이미 행궁을 제외한 대여관으로서의 혜음원은 그 발을 내딛습니다. 그런데 서긍이 묘사한 시점은 바로 1123, 즉 혜음원이 만들어지고 딱 1년뒤에 고려에 와서, 숙박시설의 깃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필자가 약 2년전에 포스팅했던 다음 글 (고려시대 깃발-http://luckcrow.egloos.com/2199996)에서 발췌합니다.


문유 門帷 

문유의 제도는 푸른 비단 세 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거기에 가로 나무를 꿴다. 모양은 술집의 깃발과 같다.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는데 쓰는 제구이다.

(: 특이하게도위에다 가로로 나무틀을 걸고 아래로 깃발을 내려 거는 형식이로군요. 제대로 만들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자주 쓰는 포렴형식이라 봐도 무방할 듯).


힐막 纈幕 (즉 염색장막이란 뜻입니다)

힐막은 옛 제도는 아니다. 선유(先儒, 옛선비)들의 말로는, 비단을 이어서물들여 도안을 만든 것을 ‘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고려의 습속은,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 깁(:명주실로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이고 도안의 빛깔은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 그 도안의 위는 화주(火珠, 즉 불구슬모양)이고 사방 끝에 보망(寶網, 보물처럼 화려한 망)을 드리웠고,아래는 연대화좌(蓮臺花座)가 있는대 불가에서 말하는 부도(浮屠)형상과같다. 그것은 그래도 귀인이 쓰는 것은 아니고 강가의 정자나 객관(客館)의 속관(屬官) 자리에 설치한다 (: 위의 깃발모양새와이 힐막의 재질과 무늬가 합해지면 훌륭한 고려시대 주점입구 포렴/기가 세워집니다).

위의 모양이 객관이나 술집에 쓰이던 기나 포렴일것이고, 아래의 고급관사나 호텔급 포렴은 더 화려합니다. 바로 이 '수막'이 혜음원급 시설에 쓰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수막 繡幕

수막의 장식은 오색이 뒤섞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을 위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여기에도 원앙새나는 난새꽃떨기 등의 문양(紋樣)이 있는데 홍색과 황색이 강하고,그 바탕은 본래 무늬 있는 붉은 깁이다. 오직 순천관 (호텔급 고려관사죠)의 조전(詔殿)정청정사와 부사의 자리 및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에만 설치한다.


수도 繡圖

수도는 붉은 바탕에 초록색 단을 둘렀고 오색이 뒤섞여 있으며, 산꽃과 노는 짐승의 정교함이 수막을 능가한다. 화죽영모(翎毛 조류를 말한다)과실 따위도 있는데 각기 다 생기가 있다. 이 나라의 습속으로는, 장막을10여 폭 칠 때마다 그림 하나씩을 걸어서 사이를 띄우는데, 그것이 대청 속 복판을차지하게는 하지 않는다.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 살려낼 자료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대한국에서도 이러한 깃발을 제작해서 여러 전통술집에서부터 차근차근 그 모습을 쓰면 되는 겁니다 (자료를 찾고 싶어도 온통 일본식포렴뿐 그 '실체'를 재현된 그림으로라도 볼 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합니다). 


* 글 내용중 일부는 '깜찍한 얼음여왕'님의 건의에 따라 일부 업데이트했습니다 (201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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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들 일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bby&logNo=100102072428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6/h2013061920515284330.htm

http://moa2004.blog.me/8014946381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394354

http://younghwan12.tistory.com/2630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0654

http://ggholic.tistory.com/6462

http://blog.daum.net/robustus/16887441

http://pann.news.nate.com/info/25024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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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구둥지 : 80명이 들어가는 고려 酒家 (술집) 2015-03-22 12:46:38 #

    ... 악사들이 연주를 했나봅니다 (지금으로 치면 신라호텔 정원에서 4중주단이 연주하는 느낌이랄까요). 이 외의 유명한 국립호텔로는 동시대의 그 유명한 1119년 건립된 '혜음원'이 있습니다. 사진은 고려시대 남아있는 정말 몇안되는 건축인 국보 '강릉 객사문'입니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14세기말, 고려시대 극후반에 속하 ... more

덧글

  • 零丁洋 2013/08/01 12:06 #

    가히 7성급 호텔이군요.^^
  • 역사관심 2013/08/01 12:46 #

    ^^ 그렇습니다.
  • ㅇㅇ 2013/08/01 18:52 # 삭제

    통상 한국역사에서 저렇게 끝에 원 자가 붙으면 숙박기능을 포함한 불교사찰이라고들 하는데..

    원래 사찰이름 뒤에 사 자가 아닌 원 자가 붙은건 다 그렇습니까?

    보통 일본과 중국도 사 자 말고 원 자인 불교사찰이 여전히 현재까지 많이 남아있던데

    그럼 거기도 숙박기능을 포함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고려시대까지는 뒤에 원 자가 붙은 불교사찰이 많다가

    조선시대오면 원 자가 사라지고 사 자만 남은 경우가 많더군요

    더불어 그런 불교사찰들은 거의 대부분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있음

    ...

    또하나 파주 혜음원 포스팅을 보니 갑자기

    충남 대전 상대동 아파트 신축단지에서 몇년전 발견된

    학교 운동장 2개 규모의 고려시대 대규모 건물지는 요즘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그건 아예 기록도 없다던데

    학계에서는 지방귀족장원이다 행정관청이다 행궁이다 말이 많더군요

    얼마전 강화도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강화행궁 건물지도 그렇고..

    참 규모들이 대단한듯 ㄷㄷ

  • 역사관심 2013/08/02 08:17 #

    사실 원은 사찰과는 어떨때는 합해지고 어떨때는 분리된 개념으로 보는게 옳을 듯 합니다. 삼국시대에도 사찰들이 숙박을 겸해도 그것이 '원'이라는 별도의 개념으로 운용을 한 예도, 아닌 경우 (황룡사등)도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또한 고려시대에도 엄연히 '사'와 '원'이 따로 존재하는데, 유호인의 개성기행문을 보면 어떤 날은 '**사'에서 묶고, 어떤 날은 '보통원'에서 묵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찰에서 묵을때도 '원'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요. 따로지만, 자연스레 사찰과 원이 등장하고 또한 자연스레 거기서 머무는 모습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이 일정규모로 독립적으로 역할을 할 경우 사찰에 '원'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봅니다.

    저도 명확히 알고 싶은 것 중 하나인데,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즉, '원'이 별도로 운용되는 경우 사찰에 '원'이 끝에 붙는 경우와, 여전히'사'가 붙는 경우는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혜음원의 경우는 특이한 것이 명문으로 혜음사-혜음원이 같은 건물지에 공존했다고 씌여 있으니 독특한 예라 하겠습니다. 또 모르죠 다 이런 식으로 운용되었는데 기록이 없을뿐인지도. 예컨대 고려 최대사찰 흥왕사의 경우도 수많은 '원'이 사찰내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짧게나마 원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드리자면:
    원은 고려시대에 주요 도로상에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여관으로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원이 사찰에 부속되어, 승려들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과 사찰이 동일시 되기도 했으며, 일반 사찰도 원의 역할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원은 선원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 주택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고 하며, 사찰 중에서도 원의 기능이 강했던 남한강변에 있는 여러 사찰들과 주요 교통로 있었던 서산 보원사 같은 사찰들은 원의 기능을 하면서 가졌던 경제력이 없어지면서 폐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전기에 원은 각도의 관찰사가 지역을 순찰할 때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여행자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는 고위층 양반의 경우는 각지역의 대저택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고, 일반인들은 주막을 이용함에 따라서 그 기능이 쇠락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 고려시대의 역참제 지속 : 전국에 537개의 역
    -<원>이 아닌 새로운 숙박시설인 <관> : 공무여행자, 관리를 위해 지방관위에 설치
    - 하급숙박시설로서의 <원> : 점차 제한되어 점(주막)이 발달

    이런 식으로 '원'자체의 개념이 (사찰과 독립된 개념으로) 점차 사라진듯 합니다.
    ======
    말씀하신 고려시대 건물지는 제가 또하나 준비중인 고려대저택이 있는데 그것인지 나중에 확인해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3/08/02 03:36 #

    제가 원자료로 저장해둔 포스팅주제가 oo님이 언급하신 대전 고려대저택 맞습니다. 다음 포스팅으로 올려보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 프랑켄 2013/08/01 22:48 #

    고려 시대 건축물 유적을 보면 건축규모 및 면적 자체가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하고 건물의 배치 및 조경이 조선보다 훨 나은 듯.... 저렇게 연못과 연못 사이에 건물이 있으면 정말 운치가 있겠는데 말이죠. 조선을 기점으로 이건 거대 건축의 맥이 끊겨서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습니다. 그놈의 승유억불만 아니었어도 일본 교토 못지 않게 서울에도 사찰이 많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3/08/02 01:59 #

    한국의 건축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삼국, 고려, 조선전기, 임란이후 후기의 대강의 연대기별로 건축물의 규모와 화려한 미는 점차 줄어든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듭니다. 특히 랜드마크적인 건축물들의 경우와 귀족층의 저택들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현재 한옥의 주류인 조선후기 한옥과 현전하는 사찰들, 그리고 경복궁의 경우 조선후기의 건축양식만 보여주는 지라, 통시적인 틀을 빨리 갖추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제 개인 블로그역시 그러한 작업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건축의 양식미 (정원의 모습, 연못의 모습등)도 현재 우리가 보는 흔한 한옥과 한국식 정원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중국왕조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고대-중세 양식미를 정립해 나가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한 일은 랜드마크적 건축물들의 활발한 복원문화와 함께 학계에서 병립해서 진행되어야 할것이고, 일반대중들을 위한 서적이라든가 도록이라든가도 활발해져서, 대중매체에서도 활용되는 일이 생겨나야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아직 '통시적인 한국미 (건축, 의복, 음식)'가 무엇인지 정서적으로 인지적으로 모르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복원문화와 관련학문에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거든요. ^^
  • ㅇㅇ 2013/08/02 15:03 # 삭제

    맞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얘기인데

    최근 전통불교사찰 중창불사하는 것들 보면

    국적불명 시대불명 인 경우가 너무 많더군요

    돈이 모자른 것도 아닌데 왜들 그러는지..

    차라리 조선후기 양식으로 할려면 다하던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막 현대서양식도 짬뽕되고 ...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이건 사태를 나라에서도 조계종에서도 누구하나 관리감독하는 곳이 없습니다

    참 안타까워요 이게 뭐하는 짓인지

    그런거 보면 지방유교서원 건축도 마찬가지인듯

    요즘 불교사원도 그렇지만 유교서원이나 당우보면

    일제강점기부터 60~70년대까지 유행하던 일본식+서양식 조경의 잡탕이

    아직까지 이어져오는 경우가 너무 많더라구요

    요즘 EBS에서 방송중인 하늘에서 본 한반도라는 프로그램 보면

    진짜 문화재 보존 상태가 어떤지 여실히 느낄수 있습니다

    예전엔 돈도 없고 문화재연구도 허접해서 그렇다치더라도

    왜 2013년까지 그모냥 그꼴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서울 명륜동 성균관과 대성전은 그래도 전통조경 많이 복원했던데

    지방서원이나 사당은 여전히 엉망..ㅠㅜ

    ...제발 좀

    통시적인 한국미 정립이 아직 필요하다면

    문화재 복원이나 보존할때 최소한 조선후기 모습이라도

    제대로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 역사관심 2013/08/02 15:43 #

    동감합니다. 예전에 올린 글이 있었는데, 문화재복원에 관한 연구가 많이 모자란 것이 아쉽습니다. 알라딘등의 대형서점을 뒤져봐도 제대로 된 복원문화나 복원연구 전문서적이 거의 전무합니다 (유명무실한 2-3권). 요즘 그나마 논문들은 나오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듯하긴 한데, 적어도 그동안이라도 지금 지자체위주의 복원중 중요유적 복원은 중앙 (문화재청)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이라는 곳이 한국의 특성상 위상이 더 높아져야 하고, 예산과 전문인력이 적어도 지금의 두배급은 되야 한다고 절실히 생각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황상 중국 일본보다도 더욱 복원과 보존 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고 관련학문 (철학포함)이 살아나야 하는 곳이 한국입니다.
  • ㅁㄻㄹ 2013/08/05 20:58 # 삭제

    고려 최우 무신정권때 최우가 근처 집들 헐어버리고 지었다는

    격구장에 관해서 써주실수있나요? 기록상으론 3만명의 승려가 밥먹으면서

    격구경기 관람하고 갔었다는데 지금까지 남아있었으면 완전 동양의 콜로세움일텐데

    아쉽네요.
  • 역사관심 2013/08/07 03:31 #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일단 기준이 어느정도 유구와 연구성과나 뉴스등이 존재하는 유적지위주인지라 검토해보고 쓰겠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 고려불화빠돌이 2013/10/20 00:15 # 삭제

    문화콘텐츠닷컴에 고려 별궁에 관한 복원영상이 있는데 혜음원 참고한거 같네요...다만 망새에 치미랑 추녀마루에 잡상도 없고 단청도 안칠해진게 조금 아쉬워도 이정도면 훌륭하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3/10/20 01:50 #

    한번 가서 봐야겠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 깜찍한 얼음여왕 2014/04/19 10:49 #

    안녕하세요 저는 전통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혜음원에 대해 공부중이라 이렇게 돌다가 까마구둥지에 놀러오게 되었습니다. 전통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역사관심님과 같은분이 매우 반갑게 느껴지고 정말 좋습니다.

    혜음원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는데 감히 몇가지 것들을 지적하고 갑니다.


    ● '11세기말 고려 예종(1079-1122년)때인 1109년 건립계획이 시작됩니다.'

    -> 먼저 고려 예종은 재위기간이 1105~1122년으로써 위 본문에 기재하신 1079~1122년은 예종의 일생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재위기간을 써주시는게 더욱 좋지 않을까.. 이건 제 견해입니다 ㅎㅎ

    -> 하지만 1109년 건립계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명백히 틀린 말입니다. 혜음사 신창기에 보면
    【선왕(先王)인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신 지 15년인 기해년 가을 8월에】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예종이 즉위한 1105년부터 15년이 지난 1119년으로 보여집니다. (혜음사 신창기에 따르면 예종 즉위년인1105년부터 15년이 자났다고 되어있는데, 1105년+15년은 1120년으로 기해년이 아니라 경자년이죠. 실제로 기해년은 1119년이기에 김부식이 예종 즉위년을 실수했다고 봅니다.)
    즉 1109년에 계획하여 10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1119년 8월에 명을 받아 1120년 2월까지 6개월이라는 공사 준비기간 으로 봐야됩니다. (공사완공은 1122년)

    ● '무신년(戊申年)'이라는 명문 기와를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 기록과 비교할 때 혜음사.원이 세워지고 6년 뒤인 1128년에 행궁이 축조됐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 명문기와에서 무신년이 확인되어 1128년에 행궁이 준공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액으로 구획된 명문기와의 전문은 【 庚申年四月三十日惠陰寺造近學明 】으로써 무신년이 아닌 경신년으로써 이에 해당하는 년으로는 1080년, 1140년, 1200년으로 볼 수 있는데 혜음사 신창기가 1144년에 쓰여진것을 감안하면 인종 18년 경신년으로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 '계단시설'

    -> 계단시설이라고 말씀하신것은 동측 남북 배수로 가운데 부분의 4-3연지 우측 석유구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발굴 초기당시 빨래터가 아니냐는 설과 이런저런설이 많은데 4-3연지의 입수구가 남북수로에만 의한것이 아닌 동편에서도 들어온점으로 추정되는바(석유구 바로 옆 암거배수구가 확인됨) 계단시설로 보는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역사관심 2014/04/16 12:06 #

    안녕하세요. 얼음여왕님. 정말 반가워요.
    말씀하신 부분은 꼭 검토해서 반영할 부분은 하겠습니다. 소중한 정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 역사관심 2014/04/18 02:32 #

    얼음공주님> 말씀에 따라 수정본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정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가지 정보를 더 주실 수 있다면, 완공년을 왜 1122년이 아닌 1120년으로 써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6개월내로 이러한 시설을 만드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사실 진도의 용장성경우만 봐도 10개월만에 그런 규모의 건물을 지은 고려니.. 무엇보다 1122년 임인년이라는 정보가 확실해서. 아무튼 확실한 정보를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정보에 따라 두가지 설 모두를 기입할 경우도 생기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 깜찍한 얼음여왕 2014/04/19 10:52 #

    앗.. 제 댓글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했군요..

    1120년 2월에 완공 했다는 것이 아니라

    '1119년 8월에 예종에게 보고 후, 1120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122년에 완공 한 것'으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건 말씀하신 10년이나 걸린 공사 준비기간이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봐야 맞지 않을까.. 였습니다.
  • 깜찍한 얼음여왕 2014/04/19 10:57 #

    덧붙이자면 혜음원지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견해는 이렇습니다.

    혜음원지 주 출입구(5차 발굴조사보고서에서 발견된 11-1번 건물지)로부터 3-3건물지 까지 일직선 축선의 영역은 1122년에 완공되어 사찰로 사용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그 후(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누각으로 추정되는 7-2번 건물지부터 행궁의 핵심권역이라 추정되어지는 1-2건물지 축선의 영역들이 끼어들어와 사찰영역이 전체의 행궁영역으로 바뀌지 않았나.. 전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오른쪽 축선이 끼어들어 왔다는 부분은 여러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측 측선 남단부에서 문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말할필요도 없구요.)

    1. 청석 깔린 4-2 마당지의 동쪽부분이 2m 가량넓은점(발굴조사 보고서에도 밝히고 있죠)


    2. 9-1번 건물지의 확장

    동쪽의 두칸이 확장 되어 문지를 기준으로 동쪽이 두칸 더 긴것으로 원래 추정 건물지는 좌우 대칭이 맞았으나 9-2 건물지의 사용적인 측면에 의해 두칸이 추가 건립된 듯 합니다.


    3. 7-2 건물지와 7-1건물지의 병합입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7-1 건물지의 우측에서 세번째 칸에서 발견된 유구는 계단시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계단은 7-2번 추정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7-2번 건물지로 가기위해 정면 네칸 측면 한칸의 건물지(아마도 익랑일 듯 합니다.)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7-1번 건물지로만 놓고 봤을 때 문지를 기준으로 좌우 세칸의 대칭되는 건물지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행궁지로 확장시 7-1번 건물지의 동쪽 건물지를 한칸 늘려 축선 남단에 위치하게 된 누각으로 오르는 회랑으로 변화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기존은 사찰영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나, 행궁지 영역을 추가하면서 전체가 행궁으로 바뀌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 깜찍한 얼음여왕 2014/04/19 10:45 #

    혜음원지로 검색하다 까마구둥지에 놀러왔으나 정말 유익한 둥지 같습니다. 까마귀가 유익한 것들을 둥지에 저장해둔다던데 이곳도 마찬가지군요! 정말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고 해박하신 것 같아 정말 멋집니다.

    자주자주 놀러오도록 하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4/04/19 15:11 #

    감사드립니다 :)
    위의 내용은 다시 읽어볼게요. 방문 정말 감사드립니다 ~
  • ㅇㅇ 2014/07/31 15:03 # 삭제

    아무래도 고려시대의 두 서울을 잇는 곳이다 보니 상당히 중요한 시설들이 들어선 것 같네요. 그리고 또 그것이 비교적 온전하게 발굴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 역사관심 2014/07/31 15:15 #

    발굴이 꽤 많이 진행되었는데, 언젠가 추정 건물미니어처라도 보고 싶은 유적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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