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년 고려사찰 당간의 생생한 묘사 & 주몽숭배와 인식 (고려도경) 역사

1123년 지어진 서긍의 고려도경에 이전 글인 '통일신라 굴산사'를 다룰때 조금 깊이 다룬 당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있어, 관심을 가질만 합니다. 현재 우리로써는 조선중기이후 모두 사라진 당간의 원모습을 알 길이 막막한 상태이지요- 관련 포스팅 통일신라 굴산사 (현존 최고의 당간)

개경 흥국사편 (여수에 있는 또다른 고려 흥국사와 다른 사찰)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찾았습니다. 이 사찰은 전설의 한국최초의 사찰 '고구려 초문사'가 중수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래에 나오는 흥국사 대법당에 대해서는 후일 한번 알아볼 계획입니다. 흥국사의 고려시대 당간에 대한 묘사는 굵은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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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가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놓았다. 대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당간)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송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 있다.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의 총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1장을 주나라척으로 잡으면 3.03미터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10여장은 31미터 이상이 됩니다. 오히려 굴산사의 최소20미터설보다도 더 높은 당간이 세워진 것입니다.
현존 최고높이의 굴산사 당간지주 (이 위로 수십미터 대가 있고 기나 조각상이 걸립니다)

또한 위가 뾰족하다는 뜻은 현재 아래의 모습이 대부분인 당간지주의 끝부분이라기 보다 (별로 뾰족하지 않죠), 그위에 기를 세우기위한 수십미터짜리 나무나 그외의 재질로 만든 '대'가 존재하고 끝부분이 뾰족한 모습임을 유추할수 있게 합니다. 또한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로 된 대라기 보다, 대를 잇고 이어 만든 수십미터짜리 봉임을 짐작케 합니다 (물리학적으로도 그것이 더 타당합니다). 

즉,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황금으로 칠을 하고, 봉황의 머리로 끝부분을 장식하고 비단을 물고 있다는 구절은 필자가 이제껏 살펴본 삼국-고려시대의 사찰이 조선중기이후의 현전하는 사찰들과 완연히 다른 종류의 화려미와 장엄미를 보여주는 규모, 장식과 색감을 갖췄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서긍은 정궁 만월대의 건물단청이 붉은구리구슬과 화려한 단청으로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시 고려때의 한국최대사찰인 흥왕사를 묘사한 부분에서도 조선선비 성임의 시에 "붉은 기와, 그림 기둥"이라는 싯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백제 미륵사지에서 이미 붉은 기와와 청기와가 출토됨으로써 당대의 거찰들의 모습을 짐작케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을 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음은 여러 사료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92년 출토된 고려태조 왕건상도 지금은 발가벗고 청동상인 모습이나, 금도금이 떨어져나간 사실이 있습니다 (평양의 학자들이 도착하기전 인부들이 동상을 씻어내는 바람에 청동박편과 금도금파편이 모두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당간은 사찰의 입구에 세워두는 깃대/표식에 불과합니다. 물론 사찰의 얼굴로 중요한 심볼이기는 하나 당간이 이러한 모습이란 것은, 중금당과 대강당, 목탑등의 주요건물지가 어떠한 모습을 가졌는지 짐작케 해줍니다. 

글의 마지막부분에 '다른 사찰'들도 이러한 당간을 쉽게 만날수 있다는 구절은 이러한 화려한 장식이 당대 주요거찰들의 모습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격적인 사대가 아닌 정치적인 사대의 시절인 고려시대에 안화사의 송나라에 대한 구절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심어둔 것인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특히나 안화사는 송나라의 사찰들보다더 더 '도가적'인 절로 묘사되어 있어 서긍이 이 절을 마음에 들어할 것을 예상한 느낌마져 듭니다. 실제로 서긍이 가장 좋아한 절이 안화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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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역시 개경에 존재하던 동신사편에 고려당대의 '나무상'에 대한 묘사가 있어 문화유산적으로 그리고 고구려-고려의 정체성연구에 꽤나 중요한 부분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동신사(東神祠)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편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칸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동신사의 이름에서 보이다시피 '동방의 신'을 모신 사찰이란 뜻을 유추해 볼수 있는데, 이 사찰에서 모시던 신중 한분이 부여의 신인 '하신 (즉 하백)'의 딸, 유화를 묘사한 나무조각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주몽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라는 서긍의 판단은 당시 고려와 송나라에서의 고려의 정체성을 짐작케 해주는 구절입니다 (*즉 고구려와 고려의 국내외 인식론적 Consistency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 유화조각상이 어떤 모습인지 꽤나 궁금합니다.

사찰을 묘사한 부분들에서 이러한 문화사적 중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역사학의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천착해 볼만한 그리고, 활발한 재현/복원연구가 병행될 수 있고 되어야 할 기록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덧글

  • ㅇㅇ 2013/08/10 12:47 # 삭제

    정국안화사는 송나라측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건립된 불교사원이니

    충분히 저러한게 이해가 되죠. 오늘날로 치면 한중 우호의 상징.. 뭐 그런거니

    실제로 송나라 황제가 보내준 물건이 보관되기도 하고..

    그리고

    동신사는 아마도 동명성왕을 지칭하는게 아닐런지

    실제로 고려시대 국가적 제사에 주몽과 유화부인에 대한 제사도 있었죠

    그리고 나무든 뭐든 일종의 모양을 만들어 제사지내는건

    고려시대가 아니라 조선 중기임진왜란 직전까지

    유교서원에서도 있었던 일이죠. ( 불교나 토속조상신에 국한된 건 아니더군요 )

    서울 대성전 명륜당에도 유교대학자들 소상이 임란전까지는 존재했었다네요

  • 역사관심 2013/08/10 13:20 #

    네, 고려왕조에서 주몽과 유화부인에 대한 제사를 지낸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안화사가 송나라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사찰인지는 처음 알았군요. 정보 고맙습니다.
  • ㅇㅇ 2013/08/11 15:20 # 삭제

    안화사 처음 지어질때는 당연히 고려 정부측 지원하에 만들어진거지만

    고려 전성기 중창은 송나라 정부측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 역사관심 2013/08/11 15:45 #

    그렇군요. 서긍에게 어떤 느낌으로 보였을지 상상이 갑니다. ㅎ
  • 봉쥬르 2014/03/21 09:02 # 삭제

    영고와 천신제를 치루는 지역(소도)임을 의미하는 솟대와 의미가 비슷하네요

    솟대도 위에 새모양으로 만든 상을 높은 나무위에달아 올려놓은것을 보면요...

    신기하군요
  • 역사관심 2014/03/21 09:36 #

    생각지 못했는데 과연 그렇군요.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지 연구해 볼만 한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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