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된 것의 의미화, 연상, 그리고 지각과 기억의 관계 (몸의 세계, 세계의 몸 2004 中) 독서

애초에 읽었어야 할 책을 이제사 공부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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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세계, 세계의 몸 (조광제, 2004) 중.

철학사가인 렘프레히트가 경험주의의 대가인 흄에 대해 말하는 대목:
인상은 그것을 모사하고 있는 그 어느 관념보다도 원초적이요, 이에 앞선다. 그리고 한 관념은 그것에 선행하는 한 인상의 모사로서, 언제나 그 의미와 타당성을 인상으로부터 얻는다. 인상은 마음에 주어지는 것이요,,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이 완전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의미에서는 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념은 아주 공상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모사하는 인상을 발견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신뢰할 수가 있다. 인상이나 관념은 양자가 다 어떤 때는 단순하고 어떤 때는 복잡하다고 흄은 부언하였다. 복합 인상 complex impression (가령 파리 시에 대한 어떤 사람의 인상같은 것)은 동시에 지각된 여러 인상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그룹을 이룬 것이다.

우리의 지각들이 외부성이나 지속되는 존재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관념이나 인상과는 종적으로 다른 어떤 것의 관념을 품거나 형성하는 인상들 이외엔 그 어떤 것도 정말 현존하는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 중).

... 그러나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이러한 '순수 인상'이 도대체 지각될 수도 없고 발견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메를로 퐁티의 말입니다. '순수인상' 내지는 '단순인상'이란 것은 지성적으로 논리를 활용해 존재하리라고 혹은 존재해야 한다고 추정한 것인데, 그런 지성주의에 따른 지각 규정을 메를로 퐁티가 거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물론 현상학적인 태도와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성적인 사유에 의해 추정하거나 요청하기 전에, 현상학의 구호인 '사태 자체에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주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후설 현상학의 교훈을 그대로 이어받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흔히 흄의 인식론적 입장을 일컬어 '현상론 phenomenalism 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사물의 객관적 지속성이나 존재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성격상 정신 내적인 인상들만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객관적인 지속성이나 존재성이란 사람들이 인상들에 대해 이성의 힘을 발휘에 뭔가를 덧붙인 결과이고 그러한 결과를 습관적으로 믿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지요. ... 이는 칸트가 경험적 사물의 지속성과 존재성이 감각 자료와 선험적 통각의 힘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경험주의의 대가 흄의 인상 개념은 철저히 요소주의에 따른 것입니다. 즉 전체가 먼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히 부분적인 요소들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들이 모여서 이윽고 전체를 구성한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에서 경험주의가 내세우는 것이 '연상'입니다. 연상은 하나의 인상과 다른 인상을 결함하는 정신적인 상상력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럴 경우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은 전체가 아니라 지극히 부분적인 요소들일 뿐이지요. (메를로 퐁티는 이와 반대의 입장).

...메를로 퐁티는 게슈탈트 지각론을 원용하여 바탕과 모양의 전체적인 관계가 지각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떤 바탕색위의 붉음은 단적으로 내적인 붉음이라는 감각적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고 '얼룩'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직접 주어진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전통적으로 감각, 예컨대 붉음은 흄의 말처럼 정신에 새겨져 정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져왔습니다. 말하자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져온 것이지요. 이러다보니 주관적인 감각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각적인 인식은 모두 다 근본적으로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선험성 개념으로 이어짐).

예컨대 칸트의 선험철학에 의하면, 지각을 통해 바깥에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저 사물대상 일반은 주관에 의해 마치 바깥에 있는 것인양 외재화된 것입니다. 공간자체가 감성의 형식이라고 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메를로 퐁티는 전통적으로 주관 내적이라 여겨져온 감각, 예컨대 바탕위의 어떤 붉음이란 처음부터 나의 시선, 즉 나의 지각 작용과 혼동되지 않고 그러부터 분리되어 있는 지향적인 대상으로서 나의 시선, 즉 나의 지각 작용에 의해 겨냥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향적 대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일정한 의미를 갖고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러니까 '연상'이라는 주관의 작용이 있기 전에 이미 감각은 지향적인 의미를 갖추고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각된 것의 의미화는 연상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연상이 이루어지려면 현전하는 모양에 대한 요강 synopsis이 선결되어야 하고, 지난 경험들을 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지각된 것의 의미화는 바로 이러한 모든 연상 속에 전제되어 있다. 

...(즉) 경험주의자들이 말하는 순수 인상들 간의 연상이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흔히 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띄고서 지각되는 것들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지각은 상기(기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지각과 기억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베르그손은 기억이 없이는 지각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에 대해) 메를로 퐁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각함은 기억함을 수반하면서 그 기억들에 의해 완성되는 다양한 인상들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지각함은 소여들의 질서잡힌 무리에서 내재적인 의미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내재적인 의미가 없이는 그 어떤 기억의 부름도 불가능하다. 상기한다는 것은 의식의 시선 앞에 즉자적으로 존립하는 과거의 그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상기한다는 것은 과거의 지평속으로 빠져들어가 거기에 끼어져 있는 조망의 관점들 (le persepctives emboitees)을 차근차근 전개하는 것이다. 이때 그러한 전개작업은 과거의 지평이 개괄하고 있는 경험들이 각기 나름의 시점에서 다시 체험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루어진다. 지각함은 상기함이 아니다.

...감각들과 기억들이 결함되어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오히려 상기하는 데 있어서 지각이 먼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이 근원적으로 '지평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각되는 것은 제 스스로 과거의 지평을 끌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 즉 상기는 지각의 지평성을 토대로 이루어지며 사실 우리는 지각되는 것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상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감각과 기억이 결합되어 의미 담지적인 시각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도 상기도 이미 의미 담지적인 것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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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와닿고 공감되는 부분들로, 지각의 의미화와 지각과 기억의 관계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관점은 내 생각과 (경험상) 일치한다. 지각perception과 기억memory의 이분법은 불가하다는 쪽에 한표를 던진다. 그리고 그 의미는 (특히 '실체'와 '관념'의 전후관계를 포함) 여러모로 크다.

(*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은 파악하는 한 '절대성'을 띄는 것인데 기억이 시간의 양태라고 생각한다면 기억에 대한 그의 관점을 엿볼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미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 (얼마전 서울대에서 이 관점을 적절하게 비판해낸바 있다)에서 엿볼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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