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근거 (인식적 비합리성- 김기현 中) 독서

학문의 탐구뿐 아니라 인식-믿음의 관계토대를 성찰하게 해주는 논고. 첫인상은 당연한 이야기를 풀어쓴 느낌인데, 이것이 학계에서 오히려 급진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시 꼼꼼히 읽어봐야 알것 같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한다.
=============
우리는 일정한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와 관련된 증거를 수집한다. 증거들이 수집되면 이에 비추어 어떤 명제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려하기도 하고, 또는 일정한 명제에 대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인식적 탐구는 이렇듯 여러 단계에 거쳐 일어나는 작업이며, 매 단계마다 우리는 관련된 인식적 행위가 적절한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 인식론은 이러한 과정의 마 지막 단계에만 주로 관심을 가졌으며, 인식적 합리성의 문제도 마지막 단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인식적 합리성의 문제란 어떤 명제를 믿는 것이 인식적으로 합리적인가의 문제와 다름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대한 답은 주어진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그 명제가 참일 개연성이 높은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고 믿음뿐 아니라 인식적 탐구 자체도 인식적 합리성에 따른 평가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실천적 합리성에 대한 잘 알려진 기대효용 이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초래하는 유용성이 더 높은 행위가 선택가능한 범위에 있을 때, 결과적 유용성이 더 낮은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비합리적이다. 필자는 이러한 실천적 합리성의 구조로부터의 유비를 통하여, 결과적인 인식적 가치(진리의 양)가 더 높은 탐구가 선택가능한 범위에 있을 때, 그 보다 낮은 인식적 가치를 초래하는 탐구를 행하는 것은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반론으로부터 위 주장을 옹호하였다.

앞서의 논문에서 필자가 전개한 논의는 믿음에 국한되었던 인식적합리성 평가의 외연을 탐구에까지 확장시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탐구에도 인식적 합리성 논의가 적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을 뿐, 탐구의 합리성과 그 결과적인 믿음의 합리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침묵하였다. 필자는 이제 여기서 더 나아가 양자를 연결시키는 한 논제를 제시하고 이를 옹호하고자 한다. 그 논제는 다음과 같다:
S의 믿음 p가 I라는 탐구의 결과일 때, 믿음 p는 탐구 I가 인식적으로 합리적일 경우에만 인식적으로 합리적일 수 있다. (믿음 p를 산출한 탐구 I의 인식적 합리성이 믿음 p의 인식적 합리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를 대우(contraposition)로 표현하면,
S의 믿음 p가 I라는 탐구의 결과일 때, 탐구 I가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면, 믿음 p도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다. (탐구 I의 인식적 비합리성은 믿음 p의 인식적 비합리성을 위한 충분조건이다.)

위에서 나타나는 직관적 설득력은 다시 탐구의 지속 또는 중단과 관련된 인식적 의무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한 인식적 탐구가 비합리적인 이유는 더 훌륭한 인식적 결과를 낳는 다른 탐구가 선택 가능한 범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탐구란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임을 주목하자.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탐구가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라 함은 다른 더 생산적인 대안적 탐구가 있으므로 그 덜 생산적인 탐구에 종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한다. 즉, 그 탐구를 중단하고 더 생산적인 대안적인 탐구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다시 앞서의 탐구를 지속하는 것이 비합리적임을 함축한다. 탐구를 지속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면, 그 탐구를 지속하여 일정한 믿음을 구성하는 것 역시 비합리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앞 절에서 주장한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비합리성 이행의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원리상 만약 한 탐구가 비합리적이라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믿음도 비합리적이다. ... 이 절에서부터는 (이 원리에 대한 대표적) 반론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반론이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위 원리를 논증적으로 옹호하고자 한다.

위의 비합리성 이행 원리에 대한 첫째 반론은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은 순수하게 진리연관성의 함수라는 전통적 견해 자체로부터 출발한다. 이 반론에 따르면, 한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은 현재 주어진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그 믿음이 얼마나 참일 개연성이 높은가에 의존할 뿐, 그런 증거 수집을 시작하게 한 탐구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그 배경은 어떠한지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전적으로 증거에 비춘 진리연관성의 문제로 파악하는 이러한 견해는 매우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어,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라고 부를 수 있다.비록 내가 실제로 수행한 탐구보다도 훨씬 우월한 진리를 산출할 탐구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행한 탐구의 결과 나의 믿음을 지지할 충분하고도 훌륭한 증거가 수집되었다면, 그 거에 비추어 나의 믿음은 인식적으로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해 필자는 한 탐구에 대하여 인식적 합리성의 평가가 행하여질 수 있으며, 이 평가는 인식 주관에게 주어진 선택 가능한 인식적 탐구들 사이의 비교 평가에 의존한다는 것을 앞서의 논문에서 제시한 바 있다. 또한 필자는 위와 같이 결정된 탐구의 인식적 합리성 여부가 그 결과로 형성되는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앞 절에서 주장하였다. 이 두 논증을 결합될 때 구성되는 당연한 귀결은 비록 한 믿음이 탐구의 결과 증거에 의하여 훌륭히 뒷받침된다 할지라도, 그 탐구 자체가 인식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 한 결과적으로 산출된 믿음이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이행원리에 대한 둘째 반론은 바로 이행원리를 부정하는 적극적 논거를 제시한다. 이 반론은 우선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과 그에 선행하는 탐구의 과정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그 추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 사건 또는 과정이 다른 사건 또는 과정을 야기하게 될 경우, 이들의 관계는 단지 인과관계일 뿐이다. 평가적 성질은 그런 인과관계를 따라 이행하지 않는 것같다. 한 과정이 비록 결함투성이인 다른 과정에 의하여 야기되었다할지라도, 그 과정 자체는 결함 없이 완벽하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도처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포식자는 자신의 먹이를 선택함에 있어 실수를 할 수 있다. 같은 노력으로 노루를 쉽게 잡을 수 있음에도 토끼를 사냥감으로 선택한다면, 이는 사냥감선택에 있어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포식자가 토끼를 잡는과정 자체는 아무런 결함 없이 완벽할 수 있다.

위의 반론은 일종의 유비 논증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유비 논증은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유비가 나의 논증에 적용되지 않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탐구와 그 결과 산출되는 믿음 사이의 관계는 약속을 하는 행위와 약속을 지키는 행위 사이의 관계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자가 먹이를 선택하는 행위와 포식자를 포획하는 행위는 각자의 의도와 행동을 독립적으로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가 먹이를선택하는 과정이 완성된 후에도, 포식자가 먹이를 어떻게 포획할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탐구와 그 결과로 생겨나는 인식적 태도사이의 관계는 그와 달리 양자가 독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인식적태도는 탐구와 독립적인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탐구라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탐구의 결과로 인식 주체는 믿음, 부인, 또는 판단중지와 같은 인식적 태도에 도달한다. 한 탐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최종 단계의 인식적 태도를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P라는 명제의 진리값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고 하자. 이제 관련된 증거를 수집한 후에 이 사람이 p 명제에 대한 아무런인식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에 대하여 우리는 무어라고 할 것인가? 이 경우에 우리는 탐구는 완결되었지만, p에 대한 인식적 태도가 구성되지 않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탐구가 아직 p에 관련된 인식적 태도를 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탐구가 완결되지 않았다고 할 것인가? 후자의 대답이 직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나는 p라는 명제에 대한 탐구를 완결하였지만, 그에 대한 어떤 인식적 태도(믿거나, 부정하거나, 판단을 중지하거나)도 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 믿음이 선행하는 탐구로부터 구분된다는 것이 이행성 원리를 반대하는 비판자의 주된 근거인데, 이 근거가 희박하므로 유비 논증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이행 원리에 대한 비판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한 믿음이 어떤 탐구를 거쳐 발생하였는가가 그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이러한 종류의 견해는 흔히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 발생적 견해또는 통시적 견해로 분류된다. 이는 이 견해가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공시적 견해와 대비됨을 의미한다.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 공시적 견해는 전통적 인식론의 주류를 이루는 입장으로, 이에 따르면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은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의 현재의 마음 상태의 함수이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현재 이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과 무관하다.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공시적 견해를 옹호한다는 것이 탐구에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증거를 수집하는데에 관여된 행위들 중에서는 인식적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비난할 만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서, 그에 대하여 불리한 증거만을 부당하게 수집하는 형사가 있다고 하자. 비록 결과적으로 얻어진 증거가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을만한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있을지라도, 이경우에 증거를수집하는 과정에 무언가 개탄할 만큼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 과거의 증거를 수집함에 있어서의 결함이 현재 그가 갖고 있는 믿음 자체의 합리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증거를 수집함에 있어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으므로 현재의 믿음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믿음이 과거의 인식적으로 비판받을 행위의 결과이므로 현재 적절한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됨에도 불구하고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펠드만은 전통적 증거주의가 전자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명백히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거주의는 통시적 합리성에 대한 견해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증거주의는 어떤 순간에서든 인식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에 갖고 있는 증거를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정 시간에 걸쳐 어떤 탐구를 수행할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증거주의로 대표되는 통시적 견해는 한 믿음과 관련된 현재 시점에서의 증거적 상황이 그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위한 한 필요조건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위하여 필요한 조건의 모든 것임을 주장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탐구의 비합리성이 믿음의 비합리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믿음의 합리성 조차도 통시적인 영향권 하에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이 글의 논지가 갖는 논증적 상황을 반대편에서 설명해보자. 이 글의 주장은 진리와 연관된 어떤 공시적 증거적 상황이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위한 필요조건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나의 증거 상황과 관련된 어떤 조건이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논증은 이런 필요조건이 충분조건으로 강화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탐구가 인식적 합리성을 갖는가가 결과적인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에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인식적 합리성을 선행하는 탐구의 성격과 연결시키는 것은 명백히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 통시적 접근으로 공시적 견해와 화합할 수 없다.
-인식적 비합리성의 이행 (2009, 김기현) 






2014 대표이글루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