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현상학 강해중 [몸자신의 공간성과 몸자신의 운동] 발췌 독서

계속 정리. 이 장은 직접적으로 앞으로의 관심주제의 논점에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줄 부분이라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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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믈로-퐁티: [... 내 몸의 공간성은 상황의 공간성이지 위치의 공간성이 아니다. 만약 내가 사무용 책상을 두 손으로 짚고서 그 앞에 서있다면, ... 나의 모든 자세는 나의 두 손이 짚고 있는 책상위의 지점에 의거해서 해독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세계의 통일성은 매 순간 드러나는 개개의 지각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각되는 세계는 항상 전체적으로 하나의 세계로 지각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로 지각된다는 것은 예컨대 북을 치면 북소리를 내는 북과 북소리가 일치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것을 말합니다. ... 이러한 지각세게의 동일성 내지 통일성은 지성적으로 따져보니까 그렇다고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선술어적으로 몸 자체에 의해 명증하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139쪽).

[나는 절대적인 앎에 의해 파이프가 어디 있는가를 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내 손과 내 몸이 어디 있는가를 안다. ... 내 몸에 적용되는 '여기'라는 말은 다른 위치들과의 관계나 외부의 좌표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위치를 지시하지 않는다. 내 몸의 '여기'는 최초의 좌표가 설립되는 곳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몸이 어떤 대상에 닻을 내리는 곳이고, 몸이 그의 과업에 직면하여 맞이하는 상황이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몸 공간과 외적인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외적인 공간은 모양-바탕이라는 게슈탈트적인 구조를 띄고 나타나는데 여기에 그 전제로서 몸틀을 갖춘 몸 자신이 이쪽에 마치 비-존재의 지대인 양 도사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몸 자신의 행동에서 개개부분의 취는 서로의 객관적인 관계에 의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앎'에 의해 순식간에 알려진다는 것. 그리고 '위치에 대한 이야기. 몸 공간은 몸자신에 의해 설립되는 것으로서 외적인 공간에서 나타나는 모든 모양들의 지평이 된다는 것 등입니다 (143쪽 의역).

그 결론으로 메를로-퐁티는 환자 슈나이더는 바로 그 자신의 몸이고, 그 자신의 몸은 친숙한 세계에 대한 역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추상적인 운동은 객관적인 공간에서 객관적으로 표상되면서 판단 정립적인 의식에 의해 구축되는 것으로, 현상의 질서속에서 이뤄지는 구체적인 운동과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입니다 (주: 마치 구체성의 상실로 인한 개념화의 유령현상). ...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행동이 먼저이고 인지가 나중임을 (슈나이더 경우는)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152쪽).

정상인에게서는 지각과 운동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된 체계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운동의 바탕이 운동 바깥의 지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쪽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운동의 바탕은 주어진 세계이고, 추상적인 운동의 바탕은 구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5쪽).

(가장 중요한 핵심)- 흔히 반성철학에서 몸과 세계의 근원이라 여기는 반성적인 주체 또는 정신적인 주체가 알고보면 거꾸로 몸자신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의 근본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6쪽).

즉, 낱낱의 사실들을 끌어모은 뒤 어느것이 어느 것의 일방적인 원인이고 결과인가를 따지는 방식의 사유로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 그가 제시하는 이러한 실존론적인 분석 내지는 사유는 귀납적이고 인과적인 사유를 배제할 뿐 아니라 지성적인 분석의 사유도 배제합니다.

(후설의) 노에시스의 기능이란 의식이 무슨 실체인양 이 기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바로 이러한 기능 그 자체임을 (메를로-퐁티가) 덧붙임으로써 후설의 현상학이 종래의 지성주의와 다른 길을 취하고 있음을 나름대로 역설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의식이 있자마자, 아니 의식이 있기 위해서는, 의식이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 되는데 필요한 어떤 사물이 있어야 한다. 즉 지향적인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의식이 이 대상을 향해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 자신을 '비현실화'하고 대상속으로 뛰어드는 한에서이고, 의식이 전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지시성 속에 있는 한에서이고, 의식이 순수한 의미화 작용인 한에서이다].
(158-166쪽).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입니다. 즉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환자 슈나이더가 사실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지성적인 개념 분석을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인 개념 분석에 매달리기 때문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지성적인 개념 분석은 할 수 없어도 쉽게 유비적인 사태를 이해한다는 것인데요 (주: 마치 미국의 한인들 식당과 정체성같은 문제다-거꾸로 프랑스.일식.중식당의 주인들도 역으로 포함된다. 또한 동양사상적으로는 노자의 사고와 상통한다- 언어가 있는 곳에 앎은 없음을 강조하는). 보통 사람들은 눈과 귀의 유비를 봄과 들음이라는 일상적인 생활을 기반으로 해서 단번에 이해하는 반면, 슈나이더는 눈과 귀가 다같이 감각기관에 속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난 뒤라야 유비를 이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지성주의적인 주장, 즉 '범주적인 개념'들을 통해 지성적으로 사태를 종합하여 통일시키고 사태에 대한 의미를 일구어 낸 후에야 주어진 사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그야말로 무색케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봄과 들음이 동일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동일한 종류의 수단임을 체득하고 있기때문에 눈과 귀의 유비성을 설혹 개념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단번에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주: 그야말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해주는 부분).

핵심은 무엇일까요? 세계는 우리가 의식을 기반으로 정립함으로써 이윽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서 우리의 삶과 함께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미 의미화된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미'라는 수식어는 세계가 반성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구성되고 정립되어 몸의 차원 혹은 존재의 차원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세계가 몸의 차원 혹은 존재의 차원에서 성립되어 의식의 차원을 치고 올라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의식에 의한 세계의 정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다 (주: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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