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4)- 연복사 5층전각 & 역사들 이야기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사편 5권, 논사류 [논사(論史)]에 한국의 역대 힘이 센 장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중 예전에 소개한 바 있는 개성의 연복사 (고려시대는 보제사) 5층목탑의 형태에 대한 대한 실마리를 주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효종(孝宗)이 볼모[質]가 되어 심양(瀋陽)에 들어갈 적에 팔장사(八壯士)를 선택, 그들이 효종을 모시고 들어갔다고 하나, 그들의 용력이 과연 어떠했는지는 모르겠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설림(說林)》에,
황계창(黃繼昌)이란 자는 송경(松京) 사람인데, 용력(勇力)이 뛰어나서 날아다닐 수 있었다. 연복사(演福寺) 5층(層) 전각(殿閣) 위의 감실[龕]에 금은자(金銀字)로 쓴 불경(佛經) 수백 본(本)이 있었는데, 황계창이 이를 훔쳐가지고 나가려 하자, 중들이 그 기색을 알고 앞을 다투어 올라가 그리 못하도록 붙잡고 막았으나, 계창은 그 경축(經軸)을 모두 챙겨서 허리춤에 어지러이 꽂고 또 두 손에도 각기 수십 축씩 움켜쥐고는, 5층에서 몸을 던져 날아 내려오는 것이 마치 나는 새와 같았으므로 중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였다. 

이 기록의 차천로라는 사람은 1556년~1615년, 선조때의 문신으로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개경의 송도삼절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가 쓴 [오산설림초고]는 현전하지 않지만 대동야승이나 시화총림등에 각각 전하는데, 아마도 '설림'은 이 책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황계창의 기록이 오주연문장전산고외의 다른 저서에서 현전하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차천로의 생몰연대와 연복사의 임진왜란때의 방화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시기이므로, 이 기록은 목탑/전각을 직접 보거나 당대의 기록을 옮겨담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차천로는 개성사람이므로 개성한복판에 있었던 연복사 목탑을 못봤을리가 없습니다.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광통 보제사편에서 5층목탑에서 기록과 탑의 높이를 유추해보니 탑의 형태가 아닌 '전각'에 가까울 것이란 생각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만, 이 기록에 '전각'이라는 글자가 등장하고 '감실'이 등장, 더군다나 그 감실에 불경이 수백본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탑의 한층의 모습이 이러함은 연복사 5층목탑이 목탑이 아닌 5층전각 (즉 5층건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60여미터였다는 기록과 5층이라는 높이를 생각할때 한층의 높이가 거의10미터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따라서 이 건물은 목탑이나 혹은 팔상전과 같은 느낌의 건물이 아닌, 나무못으로만 지은 20세기에 건축된 진전보탑사 3층목탑과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란 것입니다 (이 건물도 이름은 목탑이죠. 그럼에도 내부계단으로 3층까지 모두 오를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호인의 기록에서 '창문'이란 표현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한층한층이 있었을 거란 추측을 한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팁. 황룡사 9층목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올라갈수 있는' 구조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록입니다. 황계창이 전각에 올라가서 책들을 훔치려하자, 승려들이 앞다투어 역시 오층전각에 올라가서 막는 장면이 나오고 있지요.

보탑사 3층목탑 (42.7미터). 따라서 이 위로 비슷한 규모의 2층이 더 올라간 규모가 바로 연복사 5층목탑이 됩니다 (형태는 다르겠지만). 참고로 황룡사 목탑의 평균 층 높이가 6.71m 이고 보탑사는 평균 층 높이는 10.9m으로 연복사 5층목탑과 보탑사의 비례는 거의 같습니다.
그나저나 저기서 뛰어내린 황계창이란 장사는 진짜 날아다녔나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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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김에 발췌한 부분외의 우리나라의 역대 장사들에 대한 전문을 소개해 봅니다. 굵은체로 표기한 부분이 과장및 재미있는 부분.

우리나라의 뛰어난 용맹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7)

창해 역사(滄海力士)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용맹을 가진 사람을 든다면 의당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제일로 쳐야 할 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장량(張良)이 동쪽으로 와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보고 역사(力士)를 빌려, 박랑사(博浪沙) 안에 잠복(潛伏)해 있다가 진 시황(秦始皇)을 저격하게 하였으나, 잘못 부거(副車)를 맞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해 진 시황의 명으로 10일 동안이나 온 천하를 수색하였으나 끝내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뛰어난 용맹이 아니겠는가. 창해(滄海)는 곧 예국(穢國) 왕회해(王會解)에 의하면 “예인(穢人)은 곧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마치 원숭이처럼 생긴 데다 서서 다니고 소리는 마치 소아(小兒)의 소리와 같다.” 한 주(注)에 “예(穢)는 곧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別種)이다.” 하였고,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신라(新羅) 북쪽 경계의 명주(溟州)가 옛날의 예국(穢國)이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지금의 강릉부(江陵府) 동쪽에 예국(穢國) 당시에 쌓았던 고성(古城)의 유지(遺址)가 있다.” 하였다. 인데, 세상에서는 일컫기를, 창해 역사는 금천(黔川) 사람이라고 한다.
-->> 예전에 읽었던 고우영선생의 '초한지'의 첫부분 창해역사가 장량과 함께 진시황을 시해하려다가, 수레를 잘못 알고 철퇴로 부수었다가 벌집이 되는 장면이 있어 항상 그 출처가 궁금했는데,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고우영선생책에서도 창해가 신라사람으로 나옵니다. 하위위키에서도 <사기>에 대한 기록만 실었을 뿐, 여기 나오는 출처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지요 (하위엔키링크).

계여강(桂汝杠)
계여강(桂汝杠)이란 사람은 성천(成川) 사람인데, 《성천지(成川志)》에 이르기를,
“계여강은 어려서부터 사나운 데다 뛰어난 용력이 있어 마을에서 그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제거할 속셈으로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함께 모여 술과 안주를 갖춘 다음 강 언덕에 모이기로 약속하고는 이내 모였는데, 계여강 역시 그곳에 왔다. 이윽고 술이 거나해지자 뭇 소년(少年)들이 계여강을 천척(千尺)이나 되는 언덕 아래로 떠밀었으므로 여강은 강물로 떨어져 버렸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서로 술잔을 주고 받으면서 마을 안의 악물(惡物)을 제거하게 된 것을 서로 축하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여강이 길이가 한 길쯤 되는 선어(鱔魚)를 손에 들고 여유 만만하게 강물에서 나오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때 여강의 나이는 17세였고, 장군(將軍) 김응하(金應河)가 금한(金汗 금 나라 임금)을 정벌할 때 여강이 스스로 김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적(敵)을 많이 죽이고 심하(深河)에서 죽었는데 그때 그는 20세였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자손이 없으므로 조정(朝廷)으로부터 포증(褒贈)도 받지 못하였다.

이운징(李雲徵)
《만오만필(晩悟漫筆)》은 곧 용인현(龍仁縣)에 사는 정모(鄭某) 혹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라고도 한다. 가 찬(撰)한 것이다. 거기에 이르기를, “천고(千古)에 뛰어난 용력을 가진 사람을 든다면 감사(監司) 이운징(李雲徵)을 제일로 칠 수 있다. 그가 젊었을 때 감사 권흠(權歆)ㆍ사인(士人) 정모(丁某)와 함께 삼각산(三角山) 백운봉(白雲峯) (봉(峯)은 대(臺)의 오기)에 놀러 갔는데, 권흠이 맨 앞에 서고 정모가 가운데 서고 이운징이 맨 뒤에 서서 석벽(石壁)을 안고 올라가다가 정모가 그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는 그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이때 권흠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돌아보지도 못한 채, 벼락치는 소리와 같은 돌 부딪히는 소리만을 들으면서 가까스로 대(臺)에 올라가니, 정모와 이운징은 벌써 올라와 앉아 있었다. 하도 괴이하여 내력을 물으니, 이운징이 말하기를 ‘이 친구(정모)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가기에 나도 함께 떨어져 허공에서 이 친구를 붙잡아가지고 힘을 떨쳐 뛰어올라왔소.’ 하므로 다시 ‘그 돌 부딪히는 소리는 어디서 났소?’ 하자 ‘허공에서 용력(勇力)을 낼 수가 없기에 먼저 돌을 쳐서 용력을 냈던 것이오.’ 하였다. 그가 일찍이 탄식하기를 ‘내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더라면 왜노(倭奴) 한 놈인들 어찌 제 나라로 돌아가게 놓아 두었겠느냐.’ 하므로, 어떤 사람이 ‘수많은 탄환(彈丸)이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하자 그가 ‘사람이 사뭇 용력을 떨치면 탄환 따위는 반드시 몸에 접근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만다.’ 하였다. 이는 권흠의 손자인 시옹(尸翁)이 자기 가정(家庭)에서 익히 들어왔던 말을 나에게 이렇게 말해 준 것이다.”하였다. --> 거의 슈퍼히어로 수준이죠...

서경덕(徐敬德)
《설림》에 또 이르기를,
“화엄사(華嚴寺)의 승당(僧堂)은 탁 트였으면서 깊숙하고 위는 매우 좁으면서 길쭉하고 옆 길이는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한데, 겨울에는 불을 지피고 고승(高僧)만이 거처하였다. 여기는 본시 어떤 죄수(罪囚)가 전곡을 보시(布施), 고승 1백 8명을 선택하여 참선(參禪)을 하도록 하고 매일같이 음식을 갖추어 공양하기를 수년(數年) 동안 계속해 오던 곳인데, 송경(松京)의 선비들이 그들을 파계(破戒)시키기 위하여 수백 명이 모여 서화담(徐花潭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호), 황계창(黃繼昌)을 선두로 삼고 제각기 의기(意氣)를 분발하여 갔는데, 중들이 그 기색을 미리 알고 음식을 거창하게 차려 놓고는 4~5백 명의 중들이 모두 가사(架娑) 차림으로 매우 공손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화담 선생(花潭先生)은 아랑곳없이 그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중 한 사람의 이마를 손으로 치니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자 여러 중들이 큰 종을 두들기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나와 서로 다투어 덤벼들므로, 화담선생이 몸을 공중으로 날려 중들의 어깨와 목을 밟고는 나는 듯이 오가면서 차니, 중들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어 격렬한 싸움이 벌어져 제생(諸生)들은 모두 분산되어 대(臺) 앞의 월대(月臺 전각 앞에 있는 섬돌)로 도망쳐 있었다. 이 대는 곧 탄금대(彈琴臺)인데, 6~7척(尺)쯤 되는 섬돌이 있고 그 밑에는 미나리못[芹池]이 있었다. 날이 저물자 화담 선생은 그 대 밑으로 투하(投下)하여 미나리못 가운데 숨어 있다가 밤이 깊어서 중들이 모두 잠잠해진 뒤에야 서서히 돌아왔다. 이날 황계창이 가장 먼저 뛰어 달아났고 중들에게 얻어맞은 제생(諸生)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중들은 높은 데서 계속 돌을 굴려내렸으나, 화담 선생이 전후(殿後 맨 마지막)가 되었으므로 그를 따른 제생들은 한 사람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 절에 백인안거법(百人安居法)이 폐지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화담 선생의 뛰어난 용력이 도리어 황계창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 소림사같은 전투승려들과의 한판승부같은 모습. 대종을 들고 나와 치면서 싸웠다라...아스트랄합니다. 앞서 연복사 5층전각 (60여미터)에서 날아내려온 황계창보다도 더 센 분이 화담선생...;

이징석(李澄石)ㆍ이징옥(李澄玉)
또 이르기를,
“이징석(李澄石)ㆍ이징옥(李澄玉)은 양산(梁山) 사람인데, 징석은 징옥의 형(兄)으로 다같이 뛰어난 용력(勇力)이 있었다. 징옥은 맨손으로 맹호(猛虎)를 때려잡았고, 18세에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어 번호(藩胡)들에게 위엄을 떨쳤는데, 세조반정(世祖反正) 이후 조정에서 까닭없이 그를 소환하자, 그는 자기 후임으로 그곳에 온 사람을 베어 죽이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가면 대금황제(大金皇帝)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고는 그날로 거사(擧事)하였는데, 회령 판관(會寧判官)이 징옥의 숙소(宿所) 조정판(藻井版) 위에 장사(壯士)를 잠복시켜 놓았다가,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장검(長劍)을 갖고 뛰어내려가 그를 내리치게 하였다. 이리하여 징옥의 오른팔이 떨어졌는데, 징옥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장사가 들고 있는 장검을 빼앗아 들고 장사를 베어 죽이고 나서 벌거벗은 몸으로 나는 듯이 뛰어나가 왼손으로 수십 명을 쳐죽이고는 마침내 난전(亂箭)에 맞아 죽었다. 이때 그는 24세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징옥의 용력과 재기(才氣)는 항우(項羽)에 뒤지지 않는다 하겠다. 지금 《설림》을 대략 초(鈔)하여 번거로운 것은 제거하고 요점만 간추려서 이렇게 소개한다.
--> 오른팔이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수십명을 베어죽였다...라...

이런 분들의 이야기가 아직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이번 기회에 한번 소개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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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ㄴㅇㄹ 2014/01/12 14:13 # 삭제

    잘봤습니다.^^
  • 역사관심 2014/01/12 14:36 #

    고맙습니다.
  • 고리아이 2014/01/12 21:40 #

    오랜 만에 들러 인사를 드립니다영^_^))
  • 역사관심 2014/01/13 00:34 #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ㅇㅇ 2014/01/13 10:52 # 삭제

    구한말에도 저런 소위 장사에 대한 야사(?)는 정말 많더군요

    당시 청나라사람이나 일본사람들도 그 용력에 감탄한 경우가 참 많은것 같습니다

    용력뿐만 아니라 검술에 있어서도 굉장히 뛰어난 인재가 많았던듯,,

    불과 100년전 일이죠.

  • 역사관심 2014/01/13 13:40 #

    이 이야기 외에도 몇가지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한번 모아보고 싶어지는군요. ^^
  • Franken 2014/01/13 20:53 # 삭제

    장사가 많기보다는 변변한 오락거리 및 화재가 변변찮던 전근대 시절이니 두고두고 화젯거리로 삼았고 결국 책에 남게 되니 책 위주로 그 시절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후세의 시각으론 장사가 많아보이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겠죠
  • ㅇㅇ 2014/01/13 21:59 # 삭제

    어그로 글 이네요
  • ㅎㅎ 2014/01/14 04:52 # 삭제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알을 깨고 나와 왕이 되고 돌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니기도 했죠
  • Franken 2014/01/14 10:39 # 삭제

    어그로글이라니 글쓴 사람도 좀 베려합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한국인이 특별히 장사 유전자 타고 난 것도 아닌데 말이죠

    ㅎㅎ//옛날 이야기야 전세계가 다 그렇지요
  • 동글기자 2014/01/13 10:56 # 삭제

    잘 보고 갑니다. 어린이 동화로 만들면 '대박'칠 수 있는 아이템일듯도 합니다.^^
    문화사적으로는 패전 내지 암울한 시기의 '보상심리' 차원에서 연구도 가능할 거 같군요.^^
  • 역사관심 2014/01/13 13:41 #

    그러게 말입니다. 동화로 만들만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일듯 하네요 ㅎㅎ.
    분명 어디선가 누군가가 연구하고 있을것 같은 느낌이 확 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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