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와 마음, 옳고 그름의 믿음, 기억의 재구축 (단순한 뇌, 복잡한 나- 이케가야 유지 중) 독서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가만이 할수 있는 '깊고도 쉬운 설명'.
얻는 것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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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라운 현상을 보았을 겁니다. 그래요, 분홍빛 반점이 다 사라지고 초록색만 돌고 있지요. ... 이때 여러분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다들 이해했을 겁니다. 분홍 뉴런이 활동을 멈추었어요. 그러자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겁니다. 없는 것이 되는 거죠. 즉, 외부에 분홍빛이 존재하느냐의 여부, 혹은 분홍빛이 광파로서 망막에 도달했느냐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뇌속의 분홍 담당 뉴런이 활동하는가의 여부가 '존재'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주: 일종의 내재주의).

철학에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궁리하고 있지만, 대뇌 생리학적으로 대답하자면 존재란 '존재를 감지하는 뇌 회로가 활동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버릴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나는 '사실(fact)'와 '진실(truth)'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뇌활동이아말로 사실, 즉 감각세계의 전부입니다. 실제 세계 즉 '진실'이 무엇인지 뇌는 알 수 없고, 또한 뇌로서는 알 필요도 없으며 '진실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은 '뇌'를 생각해 나가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되므로 잊지 말기 바랍니다.

2. 이것도 변화맹이죠. 아니 이것은 단순히 변한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취향에 맞는다고 선택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더 심각한 맹목성이죠. 이런 맹목성을 '선택맹'이라고 하는 겁니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왜 "왼쪽 여성을 택했는가"라고 물어보면 선택자는 흥미롭게도 자기 손에 들린 사진을 들여다보며 (원래 선택한 여성도 아닌) "이 미소가 좋아서야"라든가 "금발이 좋아서요"라고 답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자기가 택한 이상 '이 여자가 마음에 든다'고 스스로 믿으려고 하는 거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를 뒤늦게 만들어냅니다. 사후에 꾸며내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거짓말과는 다르다는겁니다. 어디까지나 '믿고'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스스로 그렇게 믿으면서 그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좌우위치에서 1은 조금 보여주고 2를 오래 보여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2를 선택하는 사람이 20퍼센트정도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 접촉 현상'이라고 해서 장기간 접할 수록 호감이 강해진다는 뇌의 성질을 보여줍니다. ... 물론 연애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연속극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속극 첫 방영때는 '저 주인공, 영 마음에 안드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해 나갈수록 점점 좋아집니다. 결국은 팬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 식으로 뇌에는 자꾸 접하다 보면 머지않아 좋아져 버린다는 성질이 있는 겁니다. 뇌도 의외로 단순하죠.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 다음 실험에서는 마치 그림 연극처럼 같은 위치에서 1을 먼저 보여주고 2를 보여줍니다. 이 경우 설령 2를 더 오래 보여줘도 1과 2의 선호도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겁니다. 좌우에 나란히 그림을 제시하면 피험자는 시선을 움직여야 합니다. 즉 스스로 적극적으로 시선을 움직여서 봐야 합니다. 능동적으로 보게 되는 거죠. 한편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교체하며 보여주면 내내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알아서 바뀝니다. 수동적이죠. 볼 마음이 없이도 보게 되는 것이죠. 즉, 시선을 움직이느냐, 가만히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시선이 움직임으로써 감정이 이끌려 나오는 겁니다. 가령 뇌의 입장에서 설명해 보자면 '내가 애써 시선을 움직여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만큼 매력적일 게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착오귀속'의 일종이라고 봐도 좋겠지요. 이는 자기 행동의 의미나 목적을 뇌가 지레짐작하여 잘못된 이유를 드는 것입니다.

3. ... 안구의 렌즈는 딱 하나밖에 없으므로 망막에는 거꾸로 된 상이 비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애초에 늘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보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아까 말한 '거꾸로 안경'을 쓴다는 말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갖춘 '거꾸로 안경(안구의 렌즈)'를 교정해서 있는 그대로의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해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자 이젠 이해할수 있지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의 '올바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결국 뇌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의 기준 같은 것은 애초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방금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세계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늘 묘한 버릇을 가진 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오랫동안 그 왜곡된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서이 당연한 세계가 되었으며, 그러므로 이것이 나에게 '올바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의 '기억'이 올.바.름.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 즉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올바르다' '그르다'의 절대적 기준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얼룩말이라는 동물이 있죠. 그 동물은 어떤 무늬를 가지고 있죠? 하얀 바탕에 까만 줄무늬일까요, 아니면 검은 바탕에 하얀 줄무늬일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바탕에 까만 줄무늬'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주민에게 물어보면 '검은 바탕에 흰무늬'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뜻밖이죠. 하지만 그 이유는 짐작이 됩니다. 피부색이죠. 그들에게 바탕색은 검은색이며 하얀색은 장식을 위한 색이죠. 황인종이나 백인종하고는 다릅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기준을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고 착각해버리면 '차별'을 낳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자기가 느끼는 세계를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버릇에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요, 겸손해져야지요.

4. '올바름'의 신념은 결국은 기억에서 생겨납니다. 접근하기 쉬운 기억으로부터 더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파리처럼 '파'로 시작하는 단어와 구라파처럼 '파'로 끝나는 단어, 어느쪽이 많을까요? 
-- 파로 시작하는 단어.
왜 그렇다고 생각하죠?
-- 많이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상상하기 쉬운것, 즉 떠올리기 수운 것은 바로 그 이유로 '올바른 것'이라고 인식하기가 쉬워요. 실제로 '파'가 맨처음에 오는 단어가 많은지 세번째 음절에 '파'가 오는 단어가 많은지는 사전을 뒤져보기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실험도 있어요. 예를 들면 '나는 자주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자신이 과거에 적극적으로 행동한 사례를 여섯 가지만 꼽아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다음 '당신은 자주적인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사례를 꼽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는 자주적이다'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해당하는 기억에 접근한 다음이라면 자기는 그런 유형이라고 믿는 겁니다. 즉, 자기 내부의 '올바름'이 변화합니다.  흥미롭게도 열두가지를 꼽아보게 하면 '나는 그다지 자주적이지 않다'라고 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열두개나 꼽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죠. 즉 '올바름'은 기억의 접근 용이성에 따라 변합니다. 혹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도 변해버리는 아주 위태로운 관념이라는 거죠.

5. 기억이라고 하면 뇌 속에 보관된 문서가 컴퓨터 데이터처럼 고스란히 보관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아주 모호하고 유연한 방법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례처럼 기억이 환기될 때 내용이 바뀌는 일도 흔합니다. 즉 정보는 정확하게 보관되고 정확하게 끄집어내진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재구축된다는 거죠. 특히 끄집어내지는 (연상이나 환기) 과정에서 재구축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찝어내는 행위에 의해 기억의 내용은 재조립되어 새로운 것이 됩니다. 그것이 다시 보관되고, 그리고 다음에 떠올릴 때 다시 재구축됩니다. 

기억은 태어나고 변하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변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해 나가면서 점차 변해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았다'는 감각이 얼마나 못미더운지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6.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물론 기억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고차적으로 파생되는 이른바 '마음의 양상'이라고 해도 좋은 내용입니다. 일련의 실험을 돌이켜 보면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뇌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자신이 취한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의 근거를 설명하잖아요. 그렇다면 마음의 요소는 뇌 속에 있다기보다 몸에 있을 것도 같아요. 물론 "마음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뇌에 있다"라고 대답해도 좋겠지만,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는다면 뇌만이 아니고 몸에서도 오고 주변 환경에서도 온다고 해야 할 겁니다. ... 아베론의 야생아는 발견된 직후 사춘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이성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성적 흥분을 느껴도 자기 욕구의 목적을 그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발작을 일으킬 뿐. 즉 '자신을 알'수 있는 능력은 학습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 전용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침 태어난 환경이 인간적인, 즉 인공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될수 있었다는 측면도 있다는 겁니다. ... 예를 들어 아기가 웃음을 지으면 엄마가 웃는 얼굴로 화답해주겠죠. 그렇게 반응해주는 부모를 보고 다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런 감정의 통로를 만들어가면서 똑같은 '웃는 얼굴'이라도 많은 종류의 웃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익혀 나갑니다. 그렇게 획득한 절묘한 웃음을 신체로 표현하고, 또 그 표현하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감정의 레퍼토리를 더욱 늘려 나갑니다. 이렇게 인간은 감정을 풍부히 해나갑니다. '풍부한 감정'은 인간사회가 키워낸 것입니다. 그것은 야생아들이 비교적 밋밋한 단조로운 감정이나 표정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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