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복사 5층목탑(전각)의 소실기록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고려시대 대찰이었던 광통보제사는 원래부터 그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건물들로 유명했습니다. 오늘은 필자가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정전에 해당하는 나한보전과 함께 보제사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보제사/연복사 5층목탑'의 시작과 끝에 대해 조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보제사 5층목탑의 기록
최초건립은 적어도 11세기이전, 이미 송나라 사신인 서긍의 고려도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중략"

이 기록이 1123년. 200척이면 최소한 61미터가 된다는 이야기이니 이미 이때 거대한 5층전각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광통 보제사'편에서 자세하게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연복사 5층목탑의 재건
그로부터 정확히 270년뒤인 조선의 첫번째 왕인 태조가 1393년 5층탑을 재건합니다. 아래의 실록기사입니다.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3월 28일(계유)
연복사(演福寺)의 5층 탑이 이루어졌으므로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베풀게 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자초(自超)의 선법(禪法) 강설(講說)을 들었다.

따라서 이 예전 포스팅(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광통 보제사편)에 등장하는 유호인의 기록은 바로 태조가 중수한 연복사 (이미 보제사가 아니죠) 5층탑을 묘사한 겁니다. 유호인의 기록에서 보이듯 재건한 목탑 역시 대단한 웅장함을 자랑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 연복사시절 건물만큼 웅장하게 지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제안, 이 두탑을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즉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건물은 '보제사 5층탑', 그리고 태조가 지은 건물은 '연복사 5층탑', 아주 간명하지요.

국내문화재의 경우 당시의 그림이 전혀 없으니 결국 일본이나 중국의 것을 참조할수 밖에 없습니다. 전혀 다르더라도 당대의 이웃국가 문화재들이니 말이지요. 이 그림은 원나라말기의 화가였던 조옹趙雍(1289 - 약 1360)이 그린 '야연도夜宴圖'에 등장하는 베이징의 한 사찰 복층전각모습입니다. 4층인지 5층인지 복잡해서 확실하지 않군요. 우리것은 더 심플하게 위로 뻗어 있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 조선초기의 건축들 (고려대의 영향이 그대로 전수되었을- 즉, 송/원나라의 영향도 있었을)의 형태에 대한 연구도 더 필요합니다. 물론 전각의 모습은 완연히 달랐겠지만, 시기상으로는 연복사를 재건할때와 수십년도 차이가 나지 않는 당대그림이죠 (하긴 그 전대인 송나라때 그림까지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있으니 3D로 완벽재현까지 가능 (중국 블로거포스팅 링크))

연복사 5층전각의 화려한 시절
연복사 5층목탑에 대한 기록들은 조선초중기에 더 존재합니다. 태조실록에 연복사 5층전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더 등장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단청의 색이나 건물의 색이 어떠했는지 유추가 가능합니다.

계유년(1393)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다.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半空에 번쩍인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모셨으며, 아래에는 毘盧遮那(비로자나)의 초상을 안치하니, 국가를 복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길이 만세에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4월에 文殊會를 열고 낙성식을 올렸다. 임금이 臣 권근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적으라고 하였다.

기록말미에 나오는 권근(1352~1409)이 지은 [양촌선생문집]에 역시 연복사와 5층탑에 대한 기록이 전합니다.
=====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唐寺이다. 방언에 唐과 大는 서로 비슷하므로, 또한 大寺라고도 한다. 건물이 가장커 천여 칸이나 되는데, 안에 못 세 군데와 우물 아홉 군데를 팠으며, 그 남쪽에 또한 5층탑을 세워 風水說에 맞추었다. 그 내용은 옛 문적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누린 5백 년 동안에 누차 전란을 겪었으니 이 절의 흥폐가 한 차례만이 아니므로, 이 탑의 파괴가 정확히 어느 때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 神武의 자품으로 하늘과 사람의 호응을 얻어 문득 大寶에 올라 민중과 社稷을 주관하시니, 지극한 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으로 만물을 키우시며, 여러 어진이들이 힘써 보필하니 治道가 밝고 융성하여, 온갖 폐단이 모두 개혁되고 갖가지 敎化가 모두 새로워져서...臣 권근이 그윽이 佛說을 듣건대, 탑을 세움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층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덕이 높고 낮음을 밝히는 것인데, 5층 이상의 것을 佛塔이라 한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功德報應의 설이 지극히 크고 넓으므로, 阿育王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존숭하여 믿어 절 세우기를 끊임없이 한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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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선 보제사시절 풍수설에 의거해 이 탑을 지었음을 밝히고 있어 의미가 더합니다. 또한 고려시대 건립된 최초의 5층건물이 언제 사라졌는지를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한가지 의문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또한 이 기록에서 한가지 살필 점은 '5층 이상의 것을 佛塔이라 한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그 형태가 전각형태의 건축물이든 진짜 목탑형태든 불전이 5층 이상이 되면 이름은 무조건 '불탑'이라고 명명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전각형태'임에도 이름이 계속해서 '목탑'으로 혼용되고 있는 이유를 엿볼수 있습니다.

또한 유호인의 연복사 묘사외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유호인이 지은 [유송도록 遊松都錄]에 실린 조선초기 선비인 성현(成俔, 1439년∼1504년)의 시인 '‘登演福寺層閣’라는 시입니다. 아예 시 제목이 "연복사 전각을 오르며'입니다.

단청빛깔은 저녁놀에 휘황찬란 빛나고 金碧煌煌耀夕輝
오층 누각은 우뚝하게 솟았구나. 五層樓閣聳巍巍
사다리 돌아 오르니 하늘 꼭대기에 닿은듯 回梯若向天心上
종일 지저귀던 새들도 발 밑에서 날아다니네. 駭鳥常從脚底飛

흥미로운 것은 같은 유송도록외에도 '매계집'등 다른 선비들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도 네편이나 더 있다는 것입니다. 성현외에도 채수, 허침, 조위, 안침이 각각 연복사 전각을 오르며란 시를 지었습니다.  이중 조위의 시외에는 찾지못했는데 후일 국역판이 있다면 소개해 보겠습니다. 아래는 조위의 '매계집'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입니다 (*한시해석을 해보고 싶군요).
梵宮寥落廢興餘。快閣東西望眼虛。日暮齋鍾聞聚落。春來荒草沒庭除。風飄玉麈天花雨。塵積琅函貝葉書。貿貿居僧多市籍。定中誰是悟眞如.
유송도록

얼마전 포스팅했던 '연복사 5층전각과 역사들 이야기'에서 제 추정대로 [오주연문장전산고]기록을 통해, 이 건물이 이름처럼 '목탑'이 아닌 '전각'에 가까운 건물일 것임을 확인했다고 했는데 (그 층간높이를 생각할때) 이 기록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五層樓閣' 즉 오층누각이란 표현이 그것입니다. 또한 오를수 있는 구조임은 이제 확실해졌을 뿐 아니라, '사다리를 둘러 오르는 구조'임도 알수 있는데, 이 사다리가 내부에서 한층씩 오르는 구조일 가능성도 꽤 큽니다. 또한 '단청'이 화려했음이 앞서 본 태조실록기록처럼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고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전각'형태 기록부분을 다시 발췌합니다:

연복사(演福寺) 5층(層) 전각(殿閣) 위의 감실[龕]에 금은자(金銀字)로 쓴 불경(佛經) 수백 본(本)이 있었는데, 황계창이 이를 훔쳐가지고 나가려 하자, 중들이 그 기색을 알고 앞을 다투어 올라가 그리 못하도록 붙잡고 막았으나, 계창은 그 경축(經軸)을 모두 챙겨서 허리춤에 어지러이 꽂고 또 두 손에도 각기 수십 축씩 움켜쥐고는, 5층에서 몸을 던져 날아 내려오는 것이 마치 나는 새와 같았으므로 중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이보다 더 확실한 기록이 있으니 바로 남효은 (1454- 1492)이 쓴 [추강집]에 나오는 1485년 9월 12일의 기록입니다.
구정댁 아래에 호정(浩亭) 선생 하륜(河崙)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고, 남쪽의 고개 하나 뒤에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으니, 또한 모두 밭이 되었다. 구경을 모두 마치고 동네 어귀를 나와서 동쪽으로 연복사(演福寺)에 들어가 능인전(能仁殿)을 보았다. 큰 불상 세 개가 있고, 사면에 아라한 500개가 있었다. 또 능인전의 5층 꼭대기에 올라서 회령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창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과 기운이 활짝 펴졌다. 우리들이 내려와서 陽村 권근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이는 바로 우리 태조께서 연복사를 중창한 사적이다.

이로써 연복사 5층목탑은 목탑이 아닌 '전각'임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층목탑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능인전'이라는 전각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뒤에 소개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도 '능인전'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에서는 능인전과 5층전각이 독립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더 조사해봐야 할 것은 이 추강집 기록에서 굵은체 문장의 '능인전'이라는 단어를 '오층전각'이나 '오층탑'대신 실수로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인데, 그 이유는 유호인의 [송도기행]에 등장하듯 능인전은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옛 '나한보전' (고려궁궐보다 웅장하고 화려했다는)을 재건한 정전이고, 5층목탑은 또다른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고려도경에서 이 '정전'인 나한보전에 세개의 큰 불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남효은의 기록에서도 능인전에 세개의 불상이, 그리고 15세기 유호인의 송도기행에서도 능인전에는 세개의 불상이 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조: 이 기록입니다 "동쪽 능인전(能仁殿)에는 세 대사의 소상이 있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본래 화산(華山)에 있던 것을 신 돈(辛旽)이 권력을 부릴 때 배로 실어다가 이곳에 안치했다 한다")

또한 유호인의 '창문'기록외에 처음으로 '창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본다'라는 구체적인 구절이 등장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각층의 창문이 '여닫이 창' 형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층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음이 명확해지는 기록입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사진은 보탑사 3층목탑)

그런데 태조가 중창한 1393년이후 약 100년에서 150년사이에 5층전각이 한번 중창을 했을 가능성을 보이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래의 기록입니다:

연복사(演福寺)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이 기록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등장하는 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바탕으로 증보한 것임을 생각해서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481년 기록이라고 해도, 태조중건이후 약 100년사이에 일어난 일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무너진 전각을 성중의 '부자상인'이 사비를 털어 새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 구절 바로 뒤에 권근이 태조의 명을 받아 쓴 그 '시말'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의 중요성은 역시 그 자세한 형태에 있다고 할텐데요- 바로 건물의 상부와 중간, 그리고 하부에 어떠한 감실과 불상, 그리고 책들이 있었는지 자세히 써 두었다는 점입니다.

중략. 5층을 다시 세워 공사를 마쳤는데, 지으면서 농민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네. 높다랗고 우뚝하여 저 송악산과 맞섰는데, 빛나는 구름과 노을, 단청이 눈부시네. 위에는 불사리 모시니 그 신령함이 빛나고, 중간에는 대장경 간직하니 모두 일만 축이네, 아래는 비로자나불 모시니 엄한 꾸밈 있구나. 공덕이 제일 승하니 너무도 풍요롭고 유익한데, 거룩한 임금 일만 년에 종사를 받드네. 큰 복록 천년 억년 이어가니, 뭇 생민들 고루고루 복리 은택 입으리. 신을 명해 가사 지어 돌에 새기라 하니 신의 가사 거칠고 졸렬하여 읽을 수 없다. 다만 원하건대, 이 탑 넘어지지 않고 나라와 함께 굳건하여 무궁토록 전하옵소서.’ 하였다.” (중간층의 '대장경'을 탈취해서 달아나는 황계창의 모습이 앞서 살펴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등장하죠).


연복사 5층전각의 전소
이렇게 조선초중기를 거치며 개성의 명물로 계속 명맥을 이어가던 연복사 5층전각이 언제 사라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있었는데, 이번에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조선 중기의 문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지은 [오산설림초고 (五山說林草藁)]에 실린 아래의 기록입니다.

고려 왕씨는 부처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다. 도성 내에 이름난 절이 3백 개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연복사(演福寺)가 가장 커 5층 불전이 높이 하늘에 치솟아, 영광(靈光)이 우뚝 홀로 있는 것 같았다. 이건(李楗) 공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사위를 맞이하기 위하여 비둘기를 잡게 하였더니, 관인이 횃불을 들고 올라가 잡다가, 불똥이 떨어져 불이 일어나 타버렸다. 계해년에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귀부(龜趺 비석의 대(臺)와 비석이 지금도 옛터 가운데 있다.

이때가 계해년이니 1563년(명종 18년)의 일입니다. 보통 한국의 거대건축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대강 전화 (임진왜란, 병자호란, 몽골-고려전쟁등)에 의해 사라졌다라는 대강의 기록만이 남는데 반해, 이 연복사 5층전각의 경우 정말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놀랐습니다. 즉, 조선중기의 왕족이던 '이건'(1505년 ~ 1571년,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5대손)이 자신의 사위를 맞이한다고 탑에 있던 비둘기를 잡게하다가, 횃불로 훌렁 태워버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사료에서 참으로 드물게도 문화재가 '전소되는 장면'을 '목격'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밤에 불길이 치솟았다'라는 말로 미루어, 다음날 사위가 온다고 급하게 무리하게 밤에 비둘기를 잡게 한 것임을 유추해 볼수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래서인지) 이건은 바로 이해 1563년 동생 이량의 몰락으로 권세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당합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귀부와 비석은 일제시대까지도 현전하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바로 작년 재발견됩니다. 
발견된 연복사탑중창비 (1394년)

작년 (2013)년 3월에 뜻깊게도 '태조'가 중건한 연복사 오층탑의 기록이 전하는 '연복사탑중창비'(윗사진)이 110년만에 시민의 눈썰미로 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은바 있습니다 (신문기사링크):

두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던 보제사와 연복사의 5층탑 (혹은 5층전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생생한 소실기록을 통해 마치 당시 60여미터의 거대전각이 한밤중에 불길에 휩싸이던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듯한 기분마져 들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개성의 한복판에 랜드마크로 우뚝 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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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1/27 15:00 # 삭제

    일본과 달리 한국이나 중국의 목탑은 내부에 계단이 있는 전각 형식으로 되었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일본 목탑이 백제양식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같은 백제양식이라도 통층구조인 호류사 목탑과 전각 형식의 황룡사 목탑은
    구조가 다르군요. 하긴 한국의 조선중기 목탑인 법주사 목탑도 통층 구조이긴 하지만..
    근데 현재 일본 목탑중 내부에 계단 있는 전각형식 목탑이 있나요?
    중국같은 경우 목탑이나 목탑비스무리한 전탑은 거의 대부분 전각형식이던데요..
  • 역사관심 2014/01/28 05:04 #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계단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형식같아요. 사실 백제 목탑은 일본처럼 내부통층형이 많았다는 설이 많구요. 신라목탑들과 고구려의 팔각탑들은 거의 내부가 이어진 전각형식으로 보고 있지요- 고려목탑도 그럴테지요 (물론 백제계가 만든 황룡사목탑이 있긴 합니다. 아직까지 미륵사 9층목탑의 경우 사료부족으로 전각형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황룡사목탑을 근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경우 만복사 5층목탑이외에도 5층전각과 2층전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목탑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신라대에 만들어진 화엄사 장육전 (현재는 2층짜리 각황전-통구조)도 3층 전각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는 이번 백제 '능사 5층목탑 (통층형)'은 맞는 복원이겠지요.

    일본에 전각식 내부가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찾아보고 싶네요). 다만, 조선중기의 법주사의 경우 백제와 일본의 네트워크가 깨지면서 곧은 목재가 많이 수입되지 않아, 전각형 목탑이 사라졌다는 설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도 있습니다. 하긴 고찰이긴 하나, 1823년의 '귀신사중수기'에 원래 2층이라고 기록된 귀신사 법당도 중층(전각)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송광사 법당도 신라대에 만들어졌을때는 원래는 2층이었구요.

    더 공부를 해봐야 명확해질 주제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1/28 05:04 #

    아, 또 하나 결정적인 조선전기의 고층전각이 있지요. 5층전각, 흥천사 사리각입니다.^^
    http://luckcrow.egloos.com/2342317
  • ㅇㅇ 2014/01/30 00:27 # 삭제

    황룡사 목탑을 근거로 추정한다면 층루형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나요?
  • 역사관심 2014/01/30 03:50 #

    네 황룡사 목탑은 층루형 (내부전각형)이지요. 그래서 미륵사 목탑도 층루형으로 대강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외의 백제계 목탑들은 일본처럼 통구조였다는 설이 많더군요.
  • 진냥 2014/01/27 17:42 #

    이번에 일본을 갔다왔는데 온통 절이라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수백 년 동안 무사히 보존된 사찰은 그다지 많지 않다더라고요.
    어떤 과정으로, 어느 정도나 복원되었는지는 저로선 알 수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고적 복원에 예산을 아끼지 않고 문화유산으로 이어나가는 일본의 방침은 다소 부러운 바가 있었습니다.
    연복사 탑의 장대한 모습도, 어떤 형태로나마 현대의 우리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게 되네요.
  • 역사관심 2014/01/28 13:26 #

    네 맞습니다. 사실 일본 교토도 도로계획을 제외하면 천년전 헤이안시대 모습은 거의 남아 있는게 없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대에 거의 만든 도시라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있는 헤이안대 건물들은 거의다 17-18세기이후 복원한 건축들입니다. 그외의 고건물들은 거의다 에도시대 것들이지요. 즉, 복원문화재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복원을 제대로 하면 그 건축역시 수세기후, 빠르면 100년안에도 문화재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멀리 볼것도 없이 경주 불국사만 해도 그렇지요).

    또다른 면으로 근현대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건축물들도 얼마든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문화재'가 될 수 있겠지요. 현대건축도 그렇지만, 자주 언급한 '보탑사 3층목탑'의 경우 워낙에 전통방식으로 쇠못하나 쓰지 않고 전통목탑을 구현해냈기때문에 (거의 황룡사 목탑을 1/3으로 재현한 것과 다름없는) 앞으로 시간의 세례를 받으면 문화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연복사 탑의 경우, 그 모습이 꽤나 상세하게 남아있는 셈이고 (비교적), 고대문화재들과 달리, 중창한 5층전각의 경우 상대적으로 시대가 가까워서 당대 주위국가들의 문화재와 충분히 상호비교연구가 가능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언젠가 다시 볼수 있으면 좋겠네요 ^^
    (고적복원, 관리, 문화재 파악등, 제대로 인력이 투입되고 관리가 되려면 예전에 한번 언급했듯 현재 문화재청의 일년예산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결국 '돈'이 없으면 문화강국이 될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죠...현재 문화재청 일년예산은 정부예산의 0.1프로가 조금 안됩니다. 퍼센트가 아닌 수치로 보자면 일본보다 확실하게 쳐지는 금액이죠).
  • ㅇㅇ 2014/01/28 10:53 # 삭제

    일본에 옛날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는건 마냥 부러워하거나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하냐고
    부러워할 대상이 솔직히 아니죠. 외국의 침략문제도 생각해봐야되고
    조선시대에 조선이전시대를 바라보는 태도도 고려해봐야 되는거죠
    그리고 조선시대 경제상태도 고려해봐야 되는거구요

    이와 관련된 얘기를 하나더 하자면 조선 후기 상황만 보고서
    한국 근대 이전 역사엔 변변한 숙박시설이나 식당시설이 없었고
    사극에 나오는 초가집 주막에서 국밥에 동동주나 마시는게 다인것처럼
    그리고 그냥 남의 집에서 노숙하는 정도.. 그정도로 한국역사 판단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그리고 그런 기준으로 역사 외연확장을 하는 사람들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무슨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도 아니고,,

    분명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 까지만 해도
    주요 도시에 단순한 주막 형태가 아니라 중국에 널리보이는
    숙박시설이나 식당시설이 보편적으로 존재했는데
    (이건 중국측 기록에도 나오는거)
    이걸 왜 깡그리 무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시대는 커녕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전반적 사회 풍경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게 현재 한국 현실인듯.. 안타깝습니다
  • 역사관심 2014/01/28 13:29 #

    ㅎㅎ 그런 점에서 바로 활발하게 옛기록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현대한국사회에서 구현해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이 블로그운영의 가장 큰 철학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ㅇㅇ 2014/01/30 00:28 # 삭제

    조선 전기보다는 후기가 경제적으로나 상업의 발달 정도로 보나 좀 더 낫습니다.
    식당이나 상점, 숙박시설도 전기보다 후기에 많고요.
  • 역사관심 2014/01/30 04:47 #

    넵, 아무래도 상업의 발달은 당연히 후기가 활발했지요. 그 '현실감'있는 모습들이 사실 싯구에도 많이 남아있는데, 활용하는 모습이 너무 아직 형편없습니다.
  • ㅇㅇ 2014/01/30 11:44 # 삭제


    조선 전기보다 조선 후기가 경제적 상업적으로 낫다는 건

    그간의 통설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잘봐야 조선 후기는 어설프게 전쟁의 피해를 복구한 정도로 밖엔 쳐줄수가 없네요)

    의도적으로 조선 후기 유교일원론 사회를 과대포장하기 위한 학문적 왜곡으로 밖엔 안보여요

    아니면 역사는 무조건 진보하는 거다라는 주장을 위해 억지부리는 걸로 밖엔 안보임

    개중엔 조선 후기 비판은 식민사관이다란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던데

    자기들이 필요할때만 식민사관 거론하는건 말그대로 이율배반이죠

    조선유교체제에 주식이나 도박이라도 왕창 걸어놓으셨나

    왤케 거기에 목매다는지,, 그냥 개천절 폐지하고 이황 이율곡 송시열 생일을

    새로운 개천절로 삼는건 어때요?
  • 역사관심 2014/01/30 12:55 #

    사실 그쪽은 제 관심분야는 아닌지라 통설만 듣고 있는 편입니다_ 역사는 한방향으로 진일보한다라는 건 옛날의 단편적사고죠. 이미 철학계에선 깨지고 있구요.^^ 그런데 o o님이 두분이라 좀 많이 혼동되는군요. ㅎㅎ 두분의 성향도 많이 다르신듯 하고.
  • ㄹㄹ 2014/01/30 19:25 # 삭제

    조선 후기가 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낫다는 것은 말 그대로 FACT 이고 그것은 '수치(數値)'로써 기록으로써 유구,유물, 문화로써 드러나는 겁니다.
  • Nocchii 2014/02/27 16:38 #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한국의 대형건축물 포스팅 3 시간 정신없이 읽었네요 블로그 너무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연복사탑중창비가 용산 역 내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시민이 찾아냈다는 것도 놀랍네요 전생에 연복사 주지스님 정도 되지 않으셨는지

    p.s 블로그 링크하기 가 되지 않는데 막아놓으셨는지요? 링크 하고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14/02/27 17:24 #

    Nocchii님 반갑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링크허용상태에 대해 전혀 신경도 못쓰고 있었는데 링크공개라는게 허용여부기능인줄 몰랐어요. ㅜㅜ 공개로 돌렸으니 되면 좋겠습니다. 결과를 알려주시면 기능파악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Nocchii 2014/02/27 17:27 #

    감사합니다 지금 해 보니 이글루스 내 에서 링크는 되는군요 잽싸게 링크 했구요

    한 가지 더 희망하자면 RSS 링크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외부 RSS 설정에서 막아 두신 것 같은데 한 RSS 리더 같은 것으로 새 글이 올라올 때 마다 쉽게 읽을 수 있었음 좋겠어요 ^^
  • 역사관심 2014/02/27 17:33 #

    Rss 도 일부공개로 돌렸습니다. 기능에 대한 설명들이 없어서 애매한 건 비공개로 해뒀었네요 ㅎㅎ. 뻘글도 많으니 패스하실건 패스해주시길:)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 Nocchii 2014/02/27 18:19 #

    감사합니다 ^^
    한국의 대형 건축물 말고도 읽을 만 한 포스팅이 많은 것 같네요 잘 읽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4/02/28 00:09 #

    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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