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연못(蓮池)과 두 탑의 위치에 대한 생각 역사

현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이렇게 서 있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냥 세워진 장식이 아니라, 법화경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되었습니다. 다보탑의 의미는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법할 때 장엄한 칠보탑이 솟더니 그 탑 속의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에게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즉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법화경 설법을 찬양했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보여래가 보살시절에 "누군가 법화경을 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곳에 많은 보배로 장엄된 탑을 신통원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그 일을 찬양하리라."라고 예측했다는 것이죠. 이 두탑은 또한 후세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경덕왕 10년 (751년) 김대성의 발원으로 불국사가 중건될 때 함께 축조된 것입니다.

석가탑의 위치

그런데 항상 궁금하던 것이 '도대체 왜 석가탑은 '무영탑'으로 불리우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근거는 '아사달 아사녀 전설'에 나옵니다. 또한 영지와 연지는 어디일까 하는 점입니다. 다음의 내용이 유명한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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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백제 사비성에는 이름 난 석공 아사달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사녀를 아내로 맞이한지 얼마 안되어 신라의 불국사의 석탑을 만들러 신라로 떠나게 된다. 석가탑을 창건할 때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던 것이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두 해가 훌쩍 넘겨 고향을 떠난 3년 동안 석탑을 만드는 일에만 마음과 몸을 바쳤고, 석탑도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아사달이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사녀는 아사달을 찾아 신라로 떠나게 된다. 남편 일이 하루빨리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기다리지 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천리 길을 오직 남편을 보기 위해 온 아사녀는 날마다 불국사 앞에서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연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라고 귀뜸을 해줬다.
 
그 이튿날 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리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 가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괴로움과 혼란 속에서 아사달이 새긴 아사녀의 모습은 점차 자비로운 미소를 담고 있는 부처상이 되어 갔다. 아사녀와 부처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 불상이 완성되는 날 아사달도 영지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는 설도 있고,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바 없다고 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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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지'(影池, 그림자 연못)는 현재도 그 이름 그대로 불리우며 아사녀의 연못 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생각해 둬야 할 포인트는 영지(影池)라는 이름이 아사녀전설로 생겨났을 것이란 점입니다. 즉, 영지라는 이름의 연못이 원래 존재하고 아사녀가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아사녀가 몸을 던진 후 이 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약간 혼란스럽게 현재 두개의 연못에 영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는 불국사의 일주문 안에 있는 못(아래사진)입니다. 위치는 아래지도처럼 불국사 바로 앞에 있습니다- 이 사진에 나오는 영지는 마치 삼국시대 그대로의 정원연못입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곳입니다. 
동그라미가 (추정) 영지입니다. 이 위치는 사실 위의 설화내용에 조금더 부합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연못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물론 설화의 내용을 문자그대로 그대로 꼭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달리 또다른 영지가 있는데, 이곳은 팻말에도 영지라고 안내가 있고, 아사녀전설과 아사달이 만들었다는 불상까지 존재하는 훨씬 더 큰 규모의 경주시 괘릉리에 있는 영지입니다. 아래사진.
이 영지는 아주 큰 규모이며 불국사에서 약 4-5킬로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아래 지도의 동그라미가 위의 영지고 아래 오각형이 괘릉리의 영지입니다.

그런데 이 영지가 과연 정말 아사녀 전설, 즉 석가탑에 나오는 영지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어 왔습니다.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하는 논문이나 책의 내용을 찾기는 힘듭니다. 다만, 원래 이 위치였나에 대한 의문만을 제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즉, 설화의 스님이 말한 내용을 '현실적'으로 해석하느냐, 설화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래 석가탑 (무영탑)의 위치가 달라질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스님이 '비추지도 않을 석가탑'을 저렇게 4킬로나 떨어진 못에서 비출것이라고 한 것인지, 혹은 '완성된다면 실제로 탑신등이 못에 비출' 석가탑을 기다리라고 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조선후기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야사를 모아 쓴 [청성잡기]에도 이러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동도(東都 경주(慶州))의 일곱 가지 괴이한 일
동도의 옥피리는 문경새재를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고, 안압지(雁鴨池)의 부초는 연못의 수위에 따라 오르내리면서 항상 가라앉지 않고, 백률사(柏栗寺)의 순송(笋松)은 가지를 잘라내도 움이 트며, 매월당(梅月堂)의 북향화(北向花)는 해를 등지고 피며, 기림사(祇林寺)의 감천(甘泉)은 또 오색 작약은 옮겨 심으면 제 빛깔이 나지 않으며, 불국사(佛國寺)의 무영탑(無影塔)은 그것만 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으니, 이것이 동도의 일곱 가지 괴이한 일이다.

즉, '괴이한 일'이라면 '실제로 비춰야 할 탑'의 모습 (경내의 못에 당연히 비추어야 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비추지 않으니 괴이한 것이지, 수백미터나 혹은 4킬로나 떨어진 못에 비추지 않는 것은 설화적으로 '안타까울 망정' 당연한 일입니다. 글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만 못에 비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눈에 띱니다. 즉, 다른 경내모습은 비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요.

다보탑의 위치

그런데 얼마전 추사 김정희(1786~1856) 의 [완당전집]을 읽다가 석가탑과 같이 서있는 다보탑에 대해 이러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이 시입니다.

완당전집 10권- 불국사 연못에 대해
초의의 불국사시 뒤에 쓰다[題草衣佛國寺詩後]

연지의 다보탑이 법흥의 연대라서 / 蓮地寶塔法興年
선탑(禪榻)의 꽃바람이 한결같이 아득하이 / 禪榻花風一惘然
이게 바로 영양이 뿔을 걸어 놓은 데라 / 可是羚羊掛角處
어느 누가 괴석에다 맑은 샘을 쏟았는고 / 誰將怪石注淸泉

다보탑이 '蓮地寶塔' 즉, 연지(불국사 경내에 있었다는 연못)에 있는 보탑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에서는 '누가 괴석에 맑은 샘을 쏟아두었느냐'란 말을 합니다. 이 시는 김정희선생이 '직접 당시의 다보탑'을 보고 쓴 시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불국사 연지는 당대 인 1789년 (영조대)에도 직접 영조가 '불국사 연못의 연꽃을 뒤집었다'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존재하던 연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보탑의 위치가 '연지 속'에 서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석가탑이 만약 예전에도 다보탑과 병행해서 서 있었다면 그 위치가 연지속일 가능성도 열어둬야 합니다. 다만, 저 '괴석'이라는 것이 탑일지 아니면 따로 기이한 돌을 연지에 세워두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비유일지는 모르나, '맑은 샘물'이라는 부분에서 연지의 상태가 양호했음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보탑은 현재 한국의 어떤 당대 탑에서도 볼수 없는 '계단'이 존재합니다.그런데 이 계단옆에 '기단'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링크). 즉, 현재 다보탑의 기단옆 기둥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계단의 기단을 만들려던 흔적이란 것입니다. 이 설에 따르면 원래의 다보탑의 기단은 이런 모습입니다. '즉 직접 오르려는 계단' (장식만이 아닌) 용도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참고로 이 연지를 '경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싯구와 상충됩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 등장하는 간재집 불국사편에도 묘사되듯 연지는 연못, 즉 구품연지를 일컫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비교대상으로 같은 이름의 '다보탑'을 가진 금강산의 영원사를 직접 보고 쓴 시가 허균의 기행기인 1603년의 풍악기행(楓嶽紀行)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시입니다.

영원사(靈源寺)
깎아지른 취부용에 나궁이 우뚝하니 / 螺宮高削翠芙蓉
해가 돋자 금빛 무르익어 창(窓)을 쏘네 / 日出金霏射牖濃
사리는 예부터 다보탑에 감췄는데 / 舍利舊藏多寶塔
상좌중은 오히려 하당의 종을 치네 / 沙彌猶扣下堂鍾
연꽃에는 새가 모여 대낮에 경을 듣고 / 蓮花晝集聽經鳥
구름 기운 서리어라 가을 용이 골에 드네 / 雲氣秋盤入洞龍
외딴 곳에 우연히 인간 밖을 보게 되어 / 絶境偶拚人外賞
옷 떨쳐 입고 이내 망고봉에 올랐노라 / 振衣伋陟望高峯

연꽃은 당연히 연못에 피는 것이죠. 따라서, 이곳에서도 영원사의 다보탑과 연지는 같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조선중기 간재 이덕홍 (1541-1596년)이 집필한 '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卷之七)'중 경주를 돌아본 '동경유록(東京遊錄)'에 불국사 편이 등장합니다. 이 중 중요한 싯구만 얼추 살펴보겠습니다.

暮入佛國寺
날이 저물어 불국사에 들다

若無人跡
인적은 없고

然纔過一石橋
(해석이 힘든 부분입니다) 석교하나를 지난다라는 뜻인지, 앞의 두글자와 합해서 재앙으로 불타 잿빛이 된 석교하나가 있네라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국사는 임란(1592-98)으로 불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는 전쟁말기에 사망직전 이덕홍이 쓴 것일 겁니다. 어떤 쪽이든 '석교'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有巖上蓮
연지(연꽃호수)위에 바위만 솟아있네

飛泉橫流數里
빠른 물이 수리를 가로질러 나는듯 흘러가네

瀑下於石槽
폭포아래 돌로 만든 물통이 있구나

踰飛泉上雲橋
샘물위로 구름다리 높이 떠 넘나드네

橋刻石以成
다리(교각)는 돌로 만들었네

旣入門
이윽고 문에 들어서니

金閣石㙮
금으로 꾸민 누각과 석탑

古佛新畫
옛 부처님을 새로 그린 그림 (또는 옛불상과 새그림)

千態萬狀 奇奇恠恠 
천태만상 기기괴괴 

이 부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東轉十餘里。憇松木亭一餉間。暮入佛國寺。雲烟蒙翳。若無人跡。然纔過一石橋。有巖上蓮池。池北刳木。飛泉橫流數里。瀑下於石槽。踰飛泉上雲橋。橋刻石以成。若雲虹然。旣入門。金閣石㙮。古佛新畫。千態萬狀。奇奇恠恠。皆新羅遺躅也。僕謂中立曰。羅王盡民力於無用虛無之地。

불국사 연지를 다룬 글중 매우 자세한 편에 속하는데, 이 글에 대한 인용이나 논의를 한 논문이나 자료는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한글해석조차 없습니다). 만약 이 글이 내용처럼 '직접 연지'를 본 글이라면 연지는 최소한 영정조대인 1700년대의 훨씬 이전인, 16세기에도 아주 잘 보존되고 있었다는 사료가 됩니다. 

우선, 연지위에 바위가 솟아있다는 부분은 위에 언급한 김정희선생의 '괴석에 맑은 샘물을 쏟아두었구나'라는 구절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해석을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지만, 유속이 빠른 물이 연지를 가로질러 수리를 간다는 의미는 아래의 두 안중 첫번째 모습에 가까울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구절로 '문에 들어서니 금의 누각과 석탑'이란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는 자하문 을 뜻한다고 보면, 적어도 두탑중 하나를 의미할 것입니다. 단수 복수가 없으니 탑이 하나였는지 두개였는지 더 조사가 필요하겠죠.

또한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는 말 역시 예전에 '사라진 대건축- 불국사편'에서 짚어 보았던 이 구절과 아주 흡사합니다.[ 1973년 보고서를 근거로, 연지의 물공급은 지도의 범영루(우경루)와 자하문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려왓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마지막으로 물위로 다리가 떠있다는 구절은 당연히 백운교, 청운교가 될 것입니다.

현재 예전 불국사의 연지 모습에 대한 두가지 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는 한양대 학술회의의 자료).

역시 두 탑의 위치는 연지와 떨어져 있지요. 다만 한가지 가능성은 양 탑의 상륜부가 자하문의 회랑을 넘어 바로 앞의 연지에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김정희의 싯구의 첫구절을 '연지의 다보탑'이라고 한다면 역시 연지내에 솟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석가탑이 무영탑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아사녀전설의 선후를 바꾸는 참신한 이론(링크)도 있습니다만, 필자 생각에는 '연지'와 관계된 이야기가 정답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아무튼, 연지가 되살아난다면 불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설화, 그리고 탑의 모습도 다시금 재조명 받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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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2/11 11:50 # 삭제


    지금 말씀하시는 연지 얘기 중에 구품연지하고 좀 섞인 부분이 있는 것도 같네요

    (갠적으로 기록이나 묘사에 있어 오류 혹은 비유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던데)

    석가탑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보이려면 구품연지가 그 연지일 가능성이 현실적으론

    가장 큰 걸로 보입니다. 사실 저 구품연지라는게 임진왜란 때 사라진게 아니고

    조선후기 영정조때 어느정도는 남아있었다고 하니,, 조금 의문이 생기는건

    조선말기 수량이 줄어들고 연못 범위가 줄어들어서 자연적으로 구품연지가 사라졌다고들

    하던데 과연 불국사 주변 산줄기 물 흐름이 그렇게 미약한지는 좀 의문입니다

    가량 주변의 석굴암만 봐도 석굴암 바로 밑 감로수는 여전히 수량이 상당하더군요

    ( 현재 석굴암 습기 문제의 원천이 그 엄청난 수량과 수압때문인 것도 있죠 그래서

    일제때 수로 보수를 잘못해 지금까지 문제있는 것도 있고 )

    전체적으로 봤을때 구품연지라는 건 불국사 기단부 수로를 통해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였던 것 같던데 저런 구조를 만들려면 수량도 당연히 크니깐 만들었다고 보는게

    이치에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 들어서 불국사 경내로 흐르는 물줄기 방향에

    뭔가 문제가 생긴건지 그 덕분에 구품연지도 사라지게 된거구요.

    블로그에 포스팅하신 사진의 연못도 제가 알기론 원래 그런 모양이 아니라

    박정희때 불국사 중건하면서 더 증축된 것 같던데 아무래도 구품연지쪽으로 흐를 물길이

    그쪽으로 바뀐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때 바뀐게 아니고 조선말기에 이미

    그런게 좀 있었죠. 구품연지 복원하고 싶으면 일단 물길부터 바로 잡아야 할듯

    그리고 포스팅 내용중 김대성 중건 당시라고 하셨는데.. 중건이 아니라 창건 아닌가요?



  • 역사관심 2014/02/11 12:35 #

    연지는 사실 두안중 구품연지라고 되어 있는 두번째 안이 원래 더 컸던 (즉 전면을 감쌌던) 연지의 축소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량이 왜 줄어서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문이라든가 연구결과를 더 찾아봐야 알 것 같습니다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 김대성 중건이라고 한것은 세가지 창건설중 '눌지왕 아도화상 창건설'에 따른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다룬 바 있습니다. http://luckcrow.egloos.com/2423986
    그래서인지, 다른 글에서도 중건이라는 표현이 꽤 나옵니다.
  • 2014/02/11 13:3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2/11 13: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2/11 14: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2/11 14: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솔까역사 2014/02/11 13:36 #

    오래된 절과 애절한 전설 그리고 옛사람의 시가 있어 대단한 글입니다. 게다가 상상과 추론의 재미도...
  • 역사관심 2014/02/11 13:43 #

    고맙습니다. 불국사는 그 이름만큼이나 여러가지 매력을 던져주고 있는 한국의 명사찰같습니다.
  • 무지개 2015/01/04 11:19 # 삭제

    깊이도 있고 좋습니다.
    사실 영지가 어디일까 매우궁금했습니다.
    70년대발굴조사에도 연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5/01/04 15:25 #

    여러모로 재건해야할 부분이죠. 관광적인 면에서도 말할나위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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