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불상 (1)-15미터급 복령사 청동대불 세개와 신라건축물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김억 펜화 (강화 고려성에 올라 내려다 본 송악산)

차천로(車天輅: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송악산(松岳山) 밑 불운사(佛雲寺)에 동불(銅佛) 세 좌가 있는데, 좌고(座高)가 다섯 길이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제일좌불(第一座佛)이라 한다. 그 뱃속에 이태백의 〈촉도난(蜀道難) 〉초본(草本)을 간직해 두었는데, 바로 이태백이 손수 쓴 것으로서, 오늘날 본과 매우 다름이 있고 뭉개고 고친 곳도 많다. 첫 구의 희(噫)ㆍ우(吁)ㆍ희(희嚱) 석 자가 처음에는 ‘우돌재(吁咄哉)로 되어 있었는데 뒤에 엷은 먹으로 고쳤다. 개성에 도사(都事)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정문진(鄭文振)이 이 초본을 찾아 가지고 갔다 한다. 그 부처는 뒤에 복령사(福靈寺)로 옮겨졌는데 나도 가 보았다. 뒤에 녹여서 총대를 만들었다 한다.

불상에 대한 원문은 이렇습니다:
松岳山下佛雲寺。有銅佛三像。坐高五丈。世傳第一座佛。 (주: 銃銅을 총대로 해석했는데 대포가 아닌가 추정합니다)

우선 차천로가 개성사람이므로 이 송악산은 개성 송악산일겁니다. 여기 등장하는 불운사는 현재 어떠한 정보도 찾을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사찰인지라 접근한계도 있고,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16세기 당시 불운사에 세 개의 동불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앉아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좌고(座高)는 아마도 아래 연대윗부분, 즉 두고를 포함하는 전신을 뜻합니다 (*수정본). 철불, 동불등의 좌불에서는 이런 자세의 좌고부분이 많지요. 아래 사진은 단호사의 11세기추정 고려철불좌상입니다 *좌고 1.3미터, 두고 0.5미터입니다.

그럼 저서에 등장하는 불운사의 세 동불의 크기는 몇 미터였을까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길이단위는 리(釐), 푼(分), 치(寸), 자(尺), 장(丈)으로 10리=1푼, 10푼=1치, 10치=1자, 10자=1장입니다. 보통 15세기의 단위로 한 장을 주척(周尺)과 영조척(營造尺)으로 따지는데, 주척은 당시 21.3 센티, 영조척은 31.6센티였습니다. 차천로의 기록은 광해군(1575~ 1641년)시대에 해당합니다. 영조척의 경우 태조때는 32.21, 세종때 32.08, 그리고 성종대에 31.19, 광해군대는 31.07센티입니다. 보통 토목, 건축등에 영조척을 쓰므로 영조척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보통 한 장(丈, 한 길)을 3미터로 다루는 것은 이 영조척이 이분야에 활발히 쓰이기 때문입니다 (주척은 보통 측우라든가 수표, 천문등을 측정할때 씁니다). 이렇게 보면 차천로당대의 한 장(한 길이라고도 함)은 10자이며, 따라서 3미터 10센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섯길, 즉 5장, 약 15.5미터의 거대동불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사 주척으로 한다해도 10.5미터 정도가 됩니다). 현재 국내의 최대 동불이 약 2-3미터급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후일 다룰 만복사의 동불과 비근하거나 그 이상의 규모입니다. 만복사의 동불은 그나마 조금 알려져 있지만, 북한 개성에 있는 이 동불들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지요. 그야말로 글에 나오듯 '천하제일 좌불'이라 불리웠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동불들이 어느시대에 제작된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8세기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집원본이 그 안에 모셔졌었다하니 그 가치는 대단했을 겁니다. 차천로가 직접 이 고서를 보고 쓴 글입니다. 이미 당시에 800-900년이 넘은 고서였지요. 지금도 어딘가 북한에 있을지 모르겠군요.

흥미로 단순비교를 해보자면 일본 동대사의 대불전에 있는 유명한 대불상이 15미터이니 거의 비슷한 규모로 보면 됩니다.옆에 있는 협시불 허공장보살상 (목조에 금칠)을 광배(두상뒤의 빛살)를 포함한 규모가 약 10미터정도 되는 듯 하구요. 즉, 영조척으로 계산하면 거의 대불상과 비슷한 규모의 동불들입니다. 이 정도의 거대동불이 세 개나 있었던 겁니다.


자, 이 세개의 동불이 옮겨져 사라진 복령사는 어떠한 절인지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령사에 당시에 이러한 천하제일좌상들을 옮겼다면 무언가 그럴만한 사찰이었을 것이리라 짐작하기 때문이지요. 역시 개성 송악산에 위치했던 복령사는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309년 충선왕때 중창기록이 있습니다. 역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읍취헌유고]에 실려있는 조선중기 박은의 복령사라는 시입니다. 읍취헌(挹翠軒)은 그의 호인데 사후 친구 이행이란 사람이 그의 글을 모아 편찬한 책입니다. 참고로 고려말기 박은이 아닌, 읍취헌 박은은 이 시를 짓고 2년후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복령사- 朴誾(박은) 

伽藍却是新羅舊(가람각시신라구) 가람은 실로(도리어) 신라시대 옛 건물 
千佛皆從西竺來(천불개종서축래) 천불상은 다 축국에서 가져온 것들 
終古神人迷大?(종고신인미대외)   옛 신인이 찾아 천지를 헤매었던 땅 
至今福地似天台(지금복지사천태) 지금은 천태산같은 복된 땅이어라 
春陰欲雨鳥相語(춘음욕우조상어) 스산한 봄 그늘에 새들은 지저귀고
老樹無情風自哀(로수무정풍자애) 늙은 고목에 불어드는 바람소리는 절로 애처롭다 
萬事不堪供一笑(만사불감공일소) (인간)만사는 한 바탕 웃음거리도 못되니
靑山閱世只浮埃(청산열세지부애) 푸른산도 긴 세월앞에 한갓 떠도는 먼지일뿐

박은이 1479~ 1504년의 인물이고 이 시를 지었을 때가 24세 (즉 1502년). 대강 연대로 짐작해 적어도 15세기초까지 신라의 건축물이 당대의 복령사에 남아 있었음을 추정해 볼수 있습니다 (이미 500-600년이상 된 건물들이었겠죠). 물론, 박은이 건축전문가일리도 없거니와 당시 조선의 연대추정능력에 의심을 해볼수 있겠지만, 문장에 등장하는 표현은 확실하게 복령사의 건물이 신라시대 건축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다음에 등장하는 천개의 불상은 모두 천축국, 즉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천불전이 있었다는 가설이 타당한데 큰 규모의 건물이 많았을 이유가 커집니다. 

과연 실제로 볼수 있는 신라건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정말 궁금해집니다. 또한 차천로가 박은보다 약 130년 후의 인물이므로, 박은이 들렀던 복령사에 약 150여년이 흐른후 불운사의 거대동불 세개가 옮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불상들을 모실수 있는 '불전'에 대한 기록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아래의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합니다.

복령사(福靈寺)-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위에는 효성굴(曉星窟)이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넓고 넓은 큰 현묘한 고향에, 높고 높은 불당[虛白堂] 있는 것이. 달빛 아래 청정한 모습 장엄하고, 무지개 채색 원광(圓光)이 빛나누나. 슬기로운 이슬 일천 세계에 젖는데, 자비로운 구름 시방(十方)을 덮었네. 봉인(封人) 와서 성인을 축복하니, 한 조각의 선한 마음 향기롭구나.” 하였다. 

김극기는 고려중기 즉, 명종 (12세기)때의 사람이므로, 이때 '높고 높은 불당'이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위에 박은 (즉 15세기말)의 시에 '신라시대의 건물'이 있다고 나왔으니, 이 불당이 '신라시대의 대불전'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채수(蔡壽, 1449년 ~ 1515년)가 쓴 [유 송도록(遊松都錄)]에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갑신일에 새벽밥을 먹고 복령사(福靈寺)에 이르니, 불전에 십육 나한(羅漢)이 있는데, 원 나라 사람이 만든 소상(塑像)으로, 정교(精巧)함이 짝이 없다. 

즉, 15세기중반 위에 나온 박은과 같은 시기에, 신라건물, 인도의 천개의 불상외에도 원나라시기부터 있던 매우 정교한 십육나한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塑像 소상은 참고로 당나라때부터 원나라대까지 유행하던 찰흙으로 빗은 사람의 모습을 뜻합니다. 같은 시기 '유호인(兪好仁, 1445년 ∼ 1494년) ' 역시 이런 글을 남깁니다
복령사(福靈寺)에 들어가니 그윽하고 고요하여 마음에 들며 전(殿)에 16나한(羅漢)의 소상이 있는데, 제작(制作)이 절묘하여 천태산(天台山)에서 단식(斷食)하고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

참고로 훨씬 전대인 '당나라'시기의 현전하는 소상을 한번 들여다보죠. 돈황 막고굴 45굴에 있는 것으로 놀랄만큼 정교하며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럼 채수(蔡壽)가 보고 '정교하기 짝이 없다'던 원나라의 소상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중국의 운림사의 원대 25 尊塑像 존소상)). 아마도 이런 소상들이 16나한으로 조각되어 복령사에 있었던 것이지요 (*정보제공 oo님).
같은 '원대'인 1208년 제작된 일본의 목상 두점을 보면 11-12세기 당대 동아시아 조각의 정교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이 무저입상, 오른쪽이 세친입상).

또한 공민왕이 1352년 자신의 공주와 함께 방문하는등 대사찰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는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종은 1245년(고종 32)부터 그가 죽은 1259년까지 매년 건성사(乾聖寺)와 함께 이 절에 행차합니다. 또한 [동문선]을 보면, 익재 이제현 (1287~1367년)편을 보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의 제자인 혼구 보감국사 (1250~1322년)의 탄생비화에 복령사의 '관음상'에게 기도를 올려 낳았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즉, 1250년 사내에 관음상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보감국사는 충렬왕때 고려최고승려지위를 얻고, 충숙왕의 왕사(王師), 국사(國師)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이분은 스승의 삼국유사작업을 도와 직접 일부를 맡아 저술하기도 합니다.

국사의 휘는 혼구(混丘)요, 자는 구을(丘乙)이며, 구명(舊名)은 청분(淸玢)이고, 속성은 김씨(金氏)다. 고(考)는 증첨의평리(贈僉議平理)로서 휘는 홍부(弘富)이니, 청풍군(淸風郡) 사람이다. 황려(黃驪) 민씨(閔氏)의 딸에게 장가들고 복령사(福靈寺)의  수월보살상(水月菩薩像)에게 기도하여, 충헌왕(忠憲王) 27년 신해년 7월 27일에 국사를 낳았다.

지승(地乘)의 개성부 (송도부)에 등장하는 복령사입니다. 지승은 1776년에서 178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복령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당시까지도 신라건축이 보존되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 지도의 저 건축일수도 있겠죠. (오른쪽위로 또하나의 대사찰 영통사가 보입니다).

현재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동불상' 문화재. 중앙박물관에 철불과 함께 몇구가 함께 모아져 전시되고 있습니다만, 최고높이가 2.7미터급입니다. 그러함에도 직접 가서 보면, 석불과는 다른 굉장히 엄숙하달까요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풍기는 미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10미터가 넘는 동불상은 그 존재만으로 분명 '거대미학'적 요소를 풍깁니다 (동대사에 가보면 느낄수 있습니다).

조만간 만복사에서도 유명한 청동대불상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만, 잊혀진 이 불운사의 '제일좌상'들에 대해, 그리고 신라건축과 아름답고 이국적이고 장엄한 나한상, 천불상, 관음상, 대동불상들이 즐비했을 복령사를 한번 느껴보시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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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이 감 2014/02/13 03:12 # 삭제

    현대에 조성된 10m 이상 대형 청동좌불로는
    공주 성곡사, 부산 홍법사, 강진 남미륵사의 좌불 등등이 있네요.
  • 역사관심 2014/02/13 05:21 #

    네, 현대에 만들어진 건 꽤 있지요. ^^ 다만 역사성이란 걸 생각하면 복원문화재라도 역시 고문헌에 등장하는 것들이 매력있더군요. 특히 너무들 금칠을 해놔서..(강진 미륵사 좌불이 가장 낫더군요- 나름 고풍스럽고). 목불이건 동불이건 그냥 원색대로 채색만 약간 한것이 훨씬 세월이 지나면 좋아보이는지라. 오늘도 감사합니다.
  • ㅇㅇ 2014/02/13 11:11 # 삭제

    그런 정도의 대불이 모셔질 사찰 전각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는게

    ,,, 지금 남북한에 현존하는 불교 사찰 규모를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전통 문화의 "총체적" 모습은 현재 너무 잘못 알려져 있어요

    2014년 현재 한국인의 일반적인 한국전통문화 인식수준은

    용인민속촌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게 ㅠㅜ
  • 역사관심 2014/02/13 14:47 #

    동의합니다. 가시적인 접근점이 더 많아져야 할것 같아요. 그나저나. 말씀대로 복령사의 불전도 규모가 대단했을 겁니다. 유적지를 가볼수가 있어야 뭘;;
  • 역사관심 2014/02/13 14:47 #

    기록을 더 첨부했으니 약간의 답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 ㅇㅇ 2014/02/13 15:28 # 삭제

    여기 원나라 때의 소상이 있네요. 아마 이 느낌하고 가장 비슷할 것 같네요.

    http://q.sohu.com/forum/17/topic/53668707
  • 역사관심 2014/02/13 15:51 #

    아 감사합니다. 곧 사진을 첨부하지요. 정말 완벽하네요.
  • ㅇㅇ 2014/03/08 03:04 # 삭제

    좌고는 불상의 앉은 키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렇다면 좌고라는 것이 머리까지 다 포함하는 것 아닌가요?그리고 '길' 이라는 단위가 본래 사람 키를 나타내는 것인데 후대에 '여덟 자 혹은 열 자'가 '한 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하니 최대 '15m' 까지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 되면 동대사 대불보다 약간 작은 정도의 불상 세 좌가 있었을 수 있겠네요.
  • 역사관심 2014/03/08 06:17 #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음 글의 수정전에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다름이 아니라 본문에서도 언급한 '좌고'의 정확한 정의를 온라인으로는 찾기가 힘이 들어서 두가지 안을 적어봤었습니다. 만약 좌고란 것이 아래 '연대'를 제외한 '두고'를 포함한 (즉, 발에서 머리끝까지) 높이가 확실한거죠? (즉, 두고와 좌고가 따로가 아니라, 좌고가 두고를 포함하는 것).

    또한, '길'이라는 단위 역시 제가 찾아본 바로는 180-2미터란 정보와, 3미터라는 정보가 혼재되어 있어 정확히 조선시대에 어떤 것이 '길'의 단위였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여력이 되신다면 너비를 재는 '발'이 몇미터인지도 알려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이 넘 많군요^^;
  • ㅇㅇ 2014/03/08 09:25 # 삭제

    찾아보니 어느 곳에도 '좌고'를 머리 높이, 몸통 높이로 구분 하지는 않습니다. 또 통상 앉은키라면 앉아 있는 면부터 정수리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니 정수리까지의 높이를 좌고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네요.
    그리고 '길'이라는 것이 사람키에서 부터 3m정도에 이르기까지 얼마로 정해져있는지는 못 찾겠네요..
  • 역사관심 2014/03/12 09:18 #

    잘 알겠습니다. 일단 좌고부분은 수정하고, 2미터와 3미터에 대한 정보가 있기전까지는 두가지 모두 언급해두는 것이 맞을 듯 하네요. 고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3/12 09:18 #

    영조척과 주척의 변화에 대한 논문을 살펴보고 수정을 했습니다. 15미터급이 맞는 듯 합니다.
  • 은열공 2014/03/17 19:56 # 삭제

    놀라운 사실의 글들을 잘 봤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역사를 배우고 있지만 그것이 제도사 정치사 같은것이 주류여서 이런 부분을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화와 생활사 같은걸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잘 안 나오더군요.
    요즘 인터넷을 보면 흔히 말하는 국뽕드립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비뚤어진 애국심을 꼬집기 위해 사용된거라고 하던데 솔직히 별로 좋은 현상 같지는 않습니다. 쓰지 말아야 할 경우에도 막 쓰는등 그냥 욕과 신조어처럼 막 남발되고 있죠. 역사는 여러 견해가 있을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이러이러 합니다'라고 지적을하고 토론을 할 일이지, '잘난것 없는데 뭘 잘났다고 정신승리질임 ㅋㅋㅋ 너 국뽕' 식으로 쓰이고 있으니 기가찰 노릇입니다. 비록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문화유산이 결코 비루한것들은 아니나 타국과 비교했을때 현전하는것이 매우 적으며 규모도 타국과의 비교에서 그다지 우위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부족함이 염세에 찌든 현대인들의 비뚤어진 관점과 시너지를 내어 국뽕드립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님께서 쓰시는 이런 역사의 조명되지 않은 부분, 거대 건축물과 유적같은 부분을 집중연구하고 공론화 시켜서 당대 생활사와 문화를 엮어 역사를 새로 개편해서 가르치면 이런 현상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복원도 열심히 하고요(그렇다고 숭례문처럼 하면 안되겠죠). 현대 사람들은 자국을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국의 산천이든 역사든 문화든...
  • 역사관심 2014/03/19 02:44 #

    댓글 고맙습니다. 대학에서 문화재학이나 고고학 관련이 아니라면 문화재 자체와 문화사에 대한 부분은 조금 피상적으로 다루고 넘어갈 테니까요 ^^
    그리고, 제가 다루는 부분은 주로 '사라진 규모미가 있는 건축이나 문화재',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현대한국사회에서 활발히 쓰임새가 있을 만한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컨텐츠를 주로 되살려내고자 하는 쪽이라, 아무래도 문화재학쪽에서도 조금은 독특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유형뿐 아니라 무형인 실록등의 정사와 설화류의 야담도 포함합니다만).

    말씀하신대로 현재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많은 분야에서 '양극단'으로만 치닫고 중간에서 고고하게 담담하게 객관적인 시선과,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계층이 많이 부족한 듯 합니다. 어느 '편'이 아니면 매도하는 현상은 반드시 사라져야 정말 (속칭) 선진사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님처럼 젊은 분께서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은 시선을 유지할수 있다면 그러한 시선들이 모아져서 우리 사회도 점차 더 성숙해지겠지요 ^^

    복원에 대한 제 기본적인 입장은 예전글에서 다룬바 있습니다. 사실 더 철학적인 부분을 가미해서 후일 한번 개정할 필요는 있는 글입니다만.
    http://luckcrow.egloos.com/2109884
    http://luckcrow.egloos.com/2410302

    시간되실때 들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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