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近江名所圖會에 등장하는 조선통신사선 (수정)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이 글은 다음의 전-후 포스팅으로 이어지는 중간 글입니다. 순서대로 읽으시면 맥락상 좋을 듯 합니다.



近江名所圖會의 통신사선, 클릭하면 확대 (출처: 와세다대학교 디지털이미지)

(내용업데이트- 그림의 출처를 알려주신 번동아제님과 적륜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래 포스팅에서는 본 그림의 출처정보를 알지 못해 우선 그림의 오른쪽 한자인 '조선빙사'에 근거, 조선통신사라고 공식적으로 불리기 이전인 조선전기의 총 5회의 보빙사의 선박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운바있다.

하지만, 원 포스팅에서도 '에도시대'에 흔히 볼수 있는 삽화집의 느낌과 깃발의 정사관을 나타내는 '바를 정'자를 근거로 아마도 에도후기의 그림일수도 있을 것이란 가정을 열어 두었다. 결과적으로 이 가설이 맞았다. 이 그림은 近江名所圖會 라 불리우는 에도시대의 삽화집으로, 일본 오미지역에 관련된 소개하는 삽화집이며 총 네권, 발행인은 塩屋忠兵衛, 발행년도는 1814년, 그리고 현재 게이코 대학 소장중이다.  (*이하 저서관련정보, 적륜님도움)  이 책의 원출전은 1797년의 일로발행년도와 17년의 격차가 있다. 따라서 1811년 마지막 12차 통신사를 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秋里, 籬島 (1772-1830)과 秦, 石田. 그러나 그림을 그린 이는 시토미 칸케스라는 인물로 1747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이 사람이 16세때 1763년 11차 통신사를 직접보고, 30년후 다시 그렸을 가능성 (혹은 당시에 기본적인 스케치를 그려두었다가 다시 활용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칸케스와 동문했던 당대의 화가인 오카다 교쿠잔이라는 인물이 18세기 당시 조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지 못해 민화등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그리겠다는 약속만을 저서에 남긴 실례등을 볼때,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자료를 참조해서 그렸을 가능성도 고찰해 봐야하겠다. 다만, 통신사의 경우 화가가 조선에 가서 직접 보는 것이 아닌, 일본에서 볼 기회가 있는 문물이니 두가지 모두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러 정황상 한국학계에서 연구를 해볼 가치는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눈에 띄는 흥미로운 점은 역시 이보다 상세하기 힘든 누각의 모습과, 도깨비문양의 상세한 묘사, 그리고 그림 오른쪽 선체중간에서 나오고 있는 '배수'의 모습이다. 
선루의 모습
특이한 것은 문양이 선수에 그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망원경(천리경)의 존재이다. 망원경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것은 인조 9년 (1631)이나 당시엔 그저 신기한 물건이었을 뿐. 이 천리경의 존재는 이 배모습의 신빙성과 시대를 파악하는데 단초를 제공할 듯 하다. 예를 들어 망원경에 대한 설명은 1830년대인 기측체의나 역시 비슷한 연대인 임하필기등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1763년 통신사선에 쓰였을 가능성은 옅어 보인다. 1763년과 가장 비근한 년도 기록으로 1765년의 홍대용이 동지사행을 떠나 천주교서양인들과 망원경등에 대해 문답을 나눈 기록이 있다. 다만, 1711년 8차 통신사때 기록에 통신사를 보러 나온 시모노세키 주민들에게 '망원경이나 2층에서 구경하기'등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아, 18세기초중반 당대 동아시아의 망원경의 쓰임새에 대해 조금더 알아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조선의 경우 1808 년의 만기요람에 이미 각군에 천리경이 보급되고 있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경'의 경우 이미 임진왜란 이전인 1590년 통신사인 김성일의 안경이 지금도 현전하고 있다.
도깨비 (혹은 용) 문양
선체중간에서 배수되는 모습
그래서 조사해보았더니 다행히 국립해양박물관측에서 이 서적과 몇몇 일본측 통신사관련 고서를 구입한 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국립해양박물관 2011년의 4차 유물공개구입문서중:
근강명소도회 조선빙사(近江名所圖會 朝鮮聘使)
조선통신사선견비전주선행렬도(朝鮮通信使船牽備前舟船行列圖)
조선통신사 행렬도(朝鮮通信使行列圖)
조선통신사선도(朝鮮通信使船圖)

조선빙사 (朝鮮聘使)라고 씌여있는데 이 글자에 근거해서,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을 쓰기 이전인 '임진왜란'이전에는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라는 명칭으로 보내졌던 조선 전기 통신사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 바 있다. 물론 이 추측은 그림의 출처확인으로 오히려 19세기 마지막 통신사선에 대한 가능성으로 거꾸로 바뀌었다. 참고로 조선 전기에 보낸 (임란이전) 통신사는 5번. 세종대인 1428년부터 그 유명한 선조때의 헛보고로 유명한 5차 1596년까지다. 이 전기의 5회는 공식적으로 '통신사' 12회로 불리우는 후기와 구분해서 분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통신사 말기인 18세기 순조대에도 빙사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 의미있는 것은 '일본인'이 빙사라고 불렀다는 점:
성종 296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11월 4일(기축)
일본국에서 토의를 바치고 전포와 기치의 비용으로 동철·면주 등을 하사해 주길 청하다
일본국(日本國) 대내(大內)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 족하(禮曹參判足下)께 복계(覆啓)를 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강이〉 청승(淸勝)하시다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집안은〉 계통(系統)이 귀국(貴國)에서 나왔고, 대대로 구호(舊好)를 돈독히 한 지가 오래 되어 더욱 도타왔습니다. 이 때문에 빙사(聘使)가 끊임없이 왕래(往來)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정화(政化) 가 하국(下國)에까지 미쳐 남달리 융성하다고 여겼습니다. 

앞에 언급한 주목할 부분중 하나는 깃발에 그려진 이 '바를 정'자다.
이 '정'자와 완전히 똑같은 모양이 1748년 10차 통신사선박에서 발견된다. '정'자는 통신사의 수장인 '정사관'의 배에 붙은 깃발이었다. 따라서 1763년 11차 통신사와는 얼마 안되는 15년 차이. 같은 선박이었을 가능성도, 더 개조된 모델이었을 가능성도 공존한다.
또 하나 고찰해 볼 부분은 두 그림의 선상의 '깃대'의 모습의 유사성이다. 단순히 '정'자만 같은 것이 아니라, 깃발의 모습도 비슷하다. 양 그림의 깃발부분을 한번 살펴보자. 10차 통신사선의 깃발내용은 확인할수가 없지만, 깃발의 가장자리 유형이라든가, 특히 깃대끝의 비죽비죽한 깃털같은 장식이 완전히 같은 모양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깃발들은 조선후기형 의장기인 백신기나 홍신기에 가깝다 (*번동아제님 정보).



다양한 가능성과 연구과제

일단 소개한 이 선박그림은 2012년 한국에서 복원된 모형과는 꽤나 차이가 있다. 선체라든가 누각의 모양과 위치, 돛대의 모양등에서 차이가 있는 모델이다. 일단 선체부분에서 그림과 같이 '배수'기능이 없다. 그리고 누각의 크기와 지붕의 모양, 위치, 그리고 돛대의 크기도 큰 차이가 보인다.

통신사선의 규모는 적어도 대선의 경우, 당대 조선의 대형전함 (아마도 대맹선)급의 규모라고 알려져 있다. 1643년 정규통신사 5회에 해당하는 조경(趙絅·1586~ 1669)의 ‘동사록’에는 이런 묘사가 있다.

 “배 안에는 사신이 머무는 방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벽에는 연꽃을 그렸으며, 사면 벽에 있는 문에는 붉은 칠, 흰 칠이 되어 있었다. 배 왼편에는 용을 그린 큰 깃발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글자를 수놓은 깃발이 넷이었으며, 뱃머리에 큰 북틀을 놓고 그 위에 북을 놓았다

이 묘사 또한, 적어도 아래 복원된 국립해양박물관의 통신사선과는 꽤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당대 각 지역별 전선의 규모에 대해서는 실록외에도 '하멜표류기'에 자세한 묘사가 있다. 이때가 1653~1668년으로 정확히 통신사 5회의 연대와 거의 일치한다:
일본측 심문관:  그들이 바다에 띄우는 전선은 어떤 종류인가?
하멜: 각 고을엔 바다에 띄우기 위한 전선을 한 척씩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전선의 크기는 노젓는 사람과 병사를 합해 약 2~300 명 탈 수 있는 규모입니다. 이 배엔 작은 대포들이 실려 있습니다.

통신사는 보통 대선 2척, 중선 2척, 소선 2척. 총인원수가 보통 450~500명. 물품을 싣는 배가 총 3척이니, 따라서 대선에는 적어도 최소 백여명이상이 탔을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1607년, 바로 임란후 제1차 통신사로 부사로 따라갔던 조경의 해사록(海槎錄) 하권에 정확히 나온다.

일행의 원역(員役)으로는,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는 자제(子弟) 각 2명, 군관 각 7명과 종[奴子] 2명, 나장(羅將) 각 4명, 취수(吹手) 각 6명, 소동(小童) 각 2명, 도훈도(都訓導) 각 1명이다. 종사관(從事官)은 자제 1명, 종 1명, 나장 4명, 취수 3명, 소동 2명, 도훈도 1명이다. 세 사신의 군관ㆍ자제 등은 종 각 1명이다. 역관(譯官)은 6명, 의관(醫官)은 2명, 학관(學官)은 1명, 화원(畫員)은 1명, 서사(書寫)는 1명이며, 그들의 종이 각 1명이다. 기패관(旗牌官)은 4명, 소통사(小通事)는 4명, 취적(吹笛)은 1명이다. 상선(上船)이 2척인데, 사공(沙工)이 각 4명, 격군(格軍)이 각 1백 명이고, 하선(下船)이 2척인데, 사공이 각 3명, 격군이 각 80명이며, 소선(小船) 2척인데, 사공이 각 2명, 격군이 각 10명이다. 이상의 통계가 5백 4명이다. (* 격구- 수부의 종류로 사공을 돕는 사람). 즉, 1차 통신사의 대선에 탄 인원은 최소 104명이다. 현재 近江名所圖會에 등장하는 사람을 세어보면 약 40명. 이 정도 규모의 배는 되어야 대선급이 될 것 같다.

또한 치목 (즉, 키)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간접적으로 함선들의 규모를 알게 해준다. 치목 한개의 무게가 2천근, 즉 1톤 248킬로그램이다. 해사일기 12월 4일의 기록이다.
치목 1부의 무게가 2천 근에 가까우니, 배마다 6부씩 실었으면, 짐은 과연 무거울 것이다. 

조경이 기록한 저 17세기 통신사선의 묘사는 오히려 아래 링크한 이전포스팅에서 다루었던 후쿠야마 민속박물관 소장의 9차통신사선 (1719년)에서 찾을 수 있다(아래 선수확대그림). 5차와 9차사이의 시차는 76년.

마지막으로, 새로 정리한 아래 글과 연계해서 보면, 저 근강명소도회의 그림이 1763년의 대선, 그리고 11차 통신사선도의 모델이 중선일 가능성도 있을지 모르겠다.

1719년 통신사선- 뱃머리에 북이 분명히 보인다

2012년 복원된 조선통신사선 (국립해양박물관)- 아마도 통신사선은 이 모델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며, 또 다른 종류의 정립들이 필요해 보인다.
*큰 도움을 주신 번동아제님과 적륜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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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3/05 11:45 # 삭제

    포스팅 잘봤습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임진왜란때 왜군에는 조선 서적등 약탈을 전문으로 하는 군부대가 따로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대가 조선 전국에서 약탈해간 물건의 전모에 대해 한국이나 일본측에서

    여태까지 얼마나 연구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갠적인 생각이지만 한국보다는 일본쪽에서 더 연구가 되었을 법도 한데 말이죠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 연구에 있어 통상 일제강점기 연구는

    좀 되어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약탈에 대한 연구는 대중에게 별로 알려진 것 같지 않네요

    특히 저 약탈부대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은 더더욱

    예전에 본 역사연구 자료에서는 임진왜란때 약탈해간 여러 서적들이

    일본 전역의 당시 교육기관으로 널리 퍼졌다는 것 같던데

    구체적인 건 없더군요. 그래서 더더욱 궁금합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조선 전기 경복궁 내 집현전 ( 현재 수정전 ) 바로 옆에 있었던

    춘추관 사고에 있었던 각종 서적 특히 역사 책들의

    행방도 궁금하네요. 춘추관에 조선전기 조선실록은 물론이고

    고려실록도 보관중이었다고 알고 있거든요

    ( 참고로 현재 한국 정부 기관 문화재청등의 공식 적인 견해는

    임진왜란때 경복궁 방화 주체는 왜군인 걸로 거의 확정하는 것 같네요

    현재 문화재청이 발간한 경복궁 안내서/팜플렛등에도 기존 한양 백성 방화설은

    잘못된 걸로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

    이와 관련해서

    고려시대 보면 가장 큰 전란이었던 몽골 침략때가 오히려

    실록등 역사책이나 각종 기록들 보존이 더 잘된 것 같네요

    기록을 찾아보니 고려시대엔 고려 말 홍건적 침략때가 가장 큰 피해 입은듯

    공민왕이 개경 환도 당시 이인복을 보내 조사했는데 남아 있는 역사책 중

    8할이 사라졌다고 하네요. 대비를 하고 안하고 차이가 이정도 ㅠㅜ



  • 역사관심 2014/03/05 14:06 #

    몰랐던 부분인데, 알아보니 히데요시의 6개 특수 약탈부대가 있었군요. 서적전문 약탈은 '도서부'에서 행했다고...

    말씀대로라면 이분야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해 보입니다. 약탈서적이 교육기관으로 퍼졌다면 지금도 산재해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들의 아카이빙 수준을 볼때). 유학서적들이 많았겠지만, 말씀처럼 고서나 역사서는 이루 말할수 없이 귀중할테니까요.

    2012년 연구논문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군요:
    [도요토미는 전쟁을 통하여 조선의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반출할 계획을 세운 뒤 相國寺의 승녀 承兌,南禪寺의 승녀 靈三,東福寺의 승녀 永哲,文英,安國寺의 승녀 惠瓊 등의 많은 學僧들을 함께 보냈다.이들 학승들은 일본 장수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각종 서적 등을 약탈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여러 장수 중에서도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안국사의 승녀 惠瓊가 가장 많은 서적을 약탈했다고 알려져 있다.우키다는 약탈한 서적을 도요토미에게 헌상했는데 이후 도요토미가 이 중의 일부를 曲直瀨正琳에게 주었다.

    또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關原合戰)에서 승리한 도쿠가와는 우키다와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등이 전란 중 약탈한 조선 서적을 몰수하였는데,1602년 후시미테문고(富士見亭文庫)나 스루가문고(駿河文庫)는 이들 조선 서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스루가문고의 소장본은 약 1만여 권이었는데,도쿠가와의 유언에 따라 네 군데에 나누어 보관됐다.이와 같이 도쿠가와막부와 고산케(御三家)로 구성된 친번(親藩)에서는 주자학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여 문치주의 정책을 주도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조선의 전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 뿐만 아니라 조선에 출정하였던 지방의 다이묘(大名)들도 임진왜란 때 약탈해온 조선의 서적을 바탕으로 문고를 형성하였다.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의 손케이가쿠문고(尊經閣文庫)19)를 비롯하여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약탈 서적으로 토대로 형성된 동경의 세이카도문고(靜嘉堂文庫),야마구치현(山口縣)에 있는 모리문고(毛利文庫),우에스기 가게카쓰(上彬景勝)의 약탈 서적이 소장된 요네자와(米澤)도서관,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약탈 전적이 소장된 가고시마대학(鹿兒島大學)도서관,쓰시마번(對馬藩)의 종가문고 등이 그것이다.에도시대에 세워진 이러한 문고는 오늘날 일본의 도서관을 형성하는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란을 통해 대량으로 유입된 서적은 일본에 있어서 지식의 생성과 전파를 촉진하고 출판문화의 성장에도 기여함으로써 에도시대의 문화적 부흥을 일으켰다.에도 초기의 문화부흥기의 형성은 물론 도쿠가와의 문치주의 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또 대중화에 성공한 바탕에는 조선에서 유입된 서적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게 2012년이니, 이 서적들을 찾아나서는 연구는 아직 없는 듯 합니다. 사실 이게 중요한데 말이지요. 저정도 정보면 충분히 연구진행을 해볼만 한데...누군가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사라진 책들도 사실 태우지 않았다면 대륙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어느날 우리건 아니었지만 고려도경처럼 불쑥 튀어나올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이유입니다 (워낙 중공시절에 폐쇄적이었고, 최근까지도 그러한 곳이 대륙이었으니).

    http://orumi.egloos.com/214612
    일제시대에는 생각보다 사서가 많이 전소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 ㅇㅇ 2014/03/05 15:37 # 삭제

    근데 가만보면 저렇게 해외 약탈 서적 관련 조사같은 것 보면 특히 일본의 경우

    고려말 왜구 약탈은 불교 문화재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는 유교 서적.. 이런거 위주로

    현재 일본 현지 학자들이 전모파악한 것 같더군요. 몇년전 mbc 지역방송국에서

    일본 현지 취재한거 기억이 나는데 현지 일본인 학자들 인터뷰 보면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시절 약탈 반출된 서적 조사를 보면

    하나같이 유교 관련 서적만 언급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도쿄 황궁 서릉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한국 관련 서적 조사 보고에도 그렇게 나오죠

    그 사람들 얘기대로면 일본내 현전하는건 거의 대부분

    조선 전기 혹은 고려시대 유학 서적이에요

    갠적인 견해지만 일본측에서 뭘 감추고 있거나 아니면 일본내에서도

    제대로 조사가 안되었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조사해보니 조선전기 유학서적만 있었다고 말하는

    일본측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야 되는지도 좀 그렇고..

    고대사 관련 서적은 커녕 고려실록이나 조선전기실록 현존 여부도

    제대로 언급을 안하니,,

    참고로 현재 조선왕조실록 중요 부록중 조선전기에 제작된 팔도지리지의 경우

    경상도편만 한국엔 남아있다죠.. 왕조실록같은 경우 본편 못지않게 부록도

    상당히 중요하더군요.

    추가로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전통사찰 중 경상도 해인사만큼

    전쟁의 화마에서 잘도 버텨낸 문화유적지가 없는것 같습니다

    물론 사찰 내부에 자체적인 화재는 좀 있었지만

    전쟁 피해가 거의 없어서

    창건 당시에 근접한 각종 문화유산들이 현재까지 꽤 많이 남아있죠

    석탑같은 건 물론이고 불상이나 스님목조좌상 같은 것도 그렇고

    팔만대장경도 보관 그럭저럭 잘되있고,,

    후삼국 혼란기, 고려 중기 몽골 침략, 고려말 왜구 침략, 조선 중기 임진왜란

    그리고 구한말 혼란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온갖 풍상을 요리조리 잘도 피했는데..

    아쉬운건 우리나라 중요 문화재나 특히 각종 서적들이 해인사에

    많이 보관되어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마음도 있네요

  • 역사관심 2014/03/05 16:20 #

    듣고보니 해인사의 경우 정말 운이 좋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료등도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네요- 결과론이겠지만 ^^;

    또 일본측이 가져간 도서가 '유학서'만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곧이곧대로 당시에 거둬간 서적들이 거의 전부 유학관련 서적이라고는 도저히;;
  • 번동아제 2014/03/05 21:21 #

    저건 일본의 近江名所圖會 혹은 近江國名所圖會라는 제목을 가진 책의 일부입니다. 전체 4책(일본식으로는 4권) 중 제2책(일본식으로는 제2권)의 중간 부분쯤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일본 오미 지역의 명소를 글과 그림으로 소개한 책으로 알고 있는데 편찬(혹은 판각?) 연대는 1814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책을 보면 신공황후와 임진왜란 등 한일 관계에 대한 잡다한 설명 중간에 나오는 그림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상정하고 그린 그림인지는 의문이며, 그런 점에서 조선빙사라는 표현 자체에 어느 정도 무게를 둘 수 있을지도 약간 의문이 남습니다.

    다만 그림 좌상단의 텍스트는 태합(풍신수길을 지칭하는듯)이 과거 삼한이 일본이 조공한 사례를 거론하면서 조선 사신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 같아 임진왜란 개전 직전의 내용 같습니다. 그런 설명이 그림과 어느 정도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전근대 일본 문헌에 정통한 다른 분이 좀 더 구체적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통신사선 선박 그림 자체에서 연대적인 기준이 될만한 특징은 별로 보이지 않은데...억지로 찾아보자면 이물에 받침대 위에 길쭉하게 놓인 것이 만약 망원경이라면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반명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배의 고물에 보이는 깃발도 백신기 내지 홍신기와 유사한 모양이어서 역시 조선 후기형 의장 깃발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본문의 텍스트 자체는 임진왜란을 포함한 다소 통시대적인 설명이어서 시대를 특정하기가 조금 애매하고, 그림을 그릴 때 참고한 배 자체는 책의 제작시점과 멀지 않은 시점의 조선 후기 통신사선을 모델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됩니다.
  • 역사관심 2014/03/05 23:16 #

    이런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역시 번동아제님, 감사드립니다. 조금후 정보를 찾아보고 개정판을 올리지요.
  • 번동아제 2014/03/06 08:08 #

    혹 업데이트 부분의 이름이 틀린 것이 아닌지요.
  • 역사관심 2014/03/06 08:12 #

    -_-;; 완전히 틀렸군요.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들이신지라 이상하게 섞여버렸네요 ^^; 수정합니다. 죄송합니다.
  • 번동아제 2014/03/05 21:33 #

    일본 뿐 아니라 일본 국외에도 몇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이고, 국내에서도 저 그림이 실린 近江名所圖會 제2책을 소장한 곳이 몇몇 있고 저도 부산에서 저 그림이 실린 책의 실물을 본 적도 있습니다.
  • 동글기자 2014/03/06 16:26 # 삭제

    여러분들의 높은 내공에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4/03/06 17:17 #

    잘 지내고 계시지요. 동글기자님 블로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참에 이글루스로 이사하시는 것도 ^^)
  • 동글기자 2014/03/07 09:42 # 삭제

    예 블로그 죽어서,,한경닷컴 직장인 칼럼(www.hankyung.com/community/raj99)에 일단 기본 디비만 살려놨는데요...나중에 다른 블로그 사이트로 업뎃해서 이사해야 할거 같습니다. 옮기는게 보통일이 아니네요.ㅎ~
  • 역사관심 2014/03/07 13:45 #

    다행히 내용은 살려두셨군요. 옮기는 툴이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지요;; 백업이 항상 문제입니다.
  • 나도사랑을했으면 2014/09/01 16:53 # 삭제

    위 한경닷컴 기사(www.hankyung.com/community/raj99)링크는 에러가 나오는데 혹시 주소가 잘못된것은 아닌가요?
  • 역사관심 2014/09/02 00:13 #

    아 현재 한국경제신문 블로그는 전체가 문을 닫았습니다.
  • 迪倫 2014/03/07 12:59 #

    아쉽게도 12차 통신사행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번동아제님이 알려주신 1815년에 간행된 近江名所図会는 기본적으로 『木曽路名所図会』『伊勢参宮名所図会』『二十四輩順拝図会』라는 이런 유형의 명소그림책 3권에서 각각 오미(近江)지방에 관련된 그림을 뽑아서 편집한 것입니다. 원래 이 조선빙사 그림은 이중에서 원래『伊勢参宮名所図会』제7권에 실린 그림입니다. 아래 링크가 와세다대 소장의 디지털 이미지입니다.
    http://archive.wul.waseda.ac.jp/kosho/ru04/ru04_03526/ru04_03526_0007/ru04_03526_0007_p0034.jpg
    문제는 이 원출전인 책은 1797년에 발간된 것입니다. 그러니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는 해당안되고 1763년 11차 통신사를 봤다면 가능하지만 그러면 30년전의 일이 됩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시토미칸게쓰(蔀 関月)인데 그 사람이 태어난 해가 1747년, 그러면 16살떄 혹시 11차 통신사를 본 것을 기억해뒀다가 30년 뒤에 그렸다고 한다면 몰라도, 아무래도 조금 무리인듯합니다.

    실은 아리사토 리토가 편집한 이런 유의 그림책에 그림을 그린 화가 중에 시토미칸게쓰와 동문수학한 화가 오카다교쿠잔 岡田 玉山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김시덕 선생의 블로그에서 한번 얘기를 다뤘는데 조선인에 대해 그리려다 자료가 너무 없어 열심히 찾아다닌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http://hermod.egloos.com/1953649

    그런 점을 미뤄보면 직접 통신사배를 본 기억으로 그렸다기보다, 기존의 기록에 남아있던 자료가 있었다면 그런 자료를 참고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실은 오카다교쿠잔의 조선인 그림에서 이번 광학시리즈에 쓸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침 올려주신 조선빙사의 배에 관련된 내용이 있어 엮어서 쓸려고 찾아본 것입니다. 덕분에 저도 배말고 다른 내용을 좀 쓸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더불어 처음 실마리를 제공해주신 번동아제님께도 저도 감사드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역사관심 2014/03/07 13:03 #

    호오 이런 자세한 정보가 또 있군요. 곧 수정하겠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기쁜 일입니다. 정보 정말 고맙습니다.:)
  • 남중생 2018/01/19 15:51 #

    오옷, 오카다 교쿠잔과 망원경, 그리고 일본인이 상상으로 "그린" 조선인은 이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제 이전 포스팅에 링크 걸어놓겠습니다.
  • 迪倫 2014/03/07 13:06 #

    흥미있게 잘 쓴 글을 자꾸 뜯어고치게 만드는군요 -_-;;

    그렇긴한데 이러면서 저도 배우고있습니다. 오카타교쿠잔과 이 조선빙사 그림이 이어지게 된 것은 역시 역사관심님과 번동아제님 덕분입니다.
  • 역사관심 2014/03/07 13:13 #

    블로그글의 미덕(?) 중 하나겠습니다 ^^ 제겐 배움의 연속이지요.
    미력한 힘이 도움이 되어 기분 좋습니다 ㅎㅎ
  • 2014/03/07 14:1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koviet2 2014/12/08 11:25 #

    많이 공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4/12/08 13:58 #

    댓글 감사드립니다.
    흥미가 조금 있으시다면, 외전격인 이 글외에 포스팅 말미에 핑백섹션에 링크를 단 두가지 글을 "조선통신사 선박들의 모델들- 통시적 모습에 대해" 와 "조선통신사 대-중-소선은 어떤 모형이었을까(진위보충)'의 두 글 (이 포스팅의 앞선 두 글)을 시간나실때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http://luckcrow.egloos.com/2459989
    http://luckcrow.egloos.com/2459989
  • 2014/12/08 14: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09 04: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역사관심 2014/12/08 14:11 #

    좋은카페와 논문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당장 시간이 없지만, 곧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
  • 봉래거북 2014/12/08 21:26 # 삭제

    저 그림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도록에서 처음 봤을 때는 그림의 구석구석까지 상세히 살펴보지 않아, 저 물이 나오는 구멍이 중국 정크선 중 복선에서 보이는 활수창(배의 평형 유지장치)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침 뱃머리에 귀면과는 별도로 복선에서 잘 보이는 눈알 무늬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죠. 그런데 오늘 그림을 세세하게 살펴보니 배수로일 수도 있어 보이네요. 배수시설과 활수창을 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사실 화장실 선미옥란도 있고, 흘수선 근처에 설치하는 활수창의 특성상 활수창이거나 겸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활수창이라는 게 필요할 때마다 물이 잘 들어오고 빠져야 되는 거라 공기가 통하도록 위에 구멍이 뚫린 걸 배수장치로 겸용할지도...
    다만 저런 구조라면 뭔가 배수관 역활을 할 관을 설치함은 물론이고, 그 관을 지지할 구조물(특히 격벽)의 존재 또한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거 없이 저런 시설물을 설치/유지하기란 여러 가지로 까다롭죠.
  • 역사관심 2014/12/09 04:29 #

    전통배의 구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설명만으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은, 일본선박의 예를 참조하거나 혹은 다른 중국이나 조선배를 적어도 참조하지 않고, 이런 그림을 (혹여 실사화가 아닐지라도) 그렸을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 봉래거북 2014/12/08 21:27 # 삭제

    사족이지만 저런 구멍이 전라좌수영귀선 그림이나 이순신 종가 거북선 그림에도 하부선체에 존재합니다. 위치는 좀 다르지만, 역활은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 역사관심 2014/12/09 04:41 #

    찾아보니 정말 그렇군요! 두 그림 모두 상단쪽에...재밌네요 이 부분!

    제가 하나 더 찾아낸 것은 유명한 판옥선 그림위 뒷부분에서 나오고 있는 물줄기입니다 (착각같기도 하고).
    http://pds27.egloos.com/pds/201408/05/99/c0102099_53e0e98029826.jpg
  • 청풍명월 2014/12/17 13:55 # 삭제

    우연한 걸음으로 이곳에 들렀다가 매우 유익한 글들을 접하고서 그냥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하여 이렇게 몇 자 남기고 갑니다. 저도 대학원에서 조선통신사 관련하여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런 글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군요. 잘 보고 배우고 갑니다. ^^
  • 역사관심 2014/12/17 14:18 #

    감사합니다 청풀명월님.
    사싱, 이 주제는 더 천착해보고 싶은 것인데 올해초 포스팅후 여러이유로 더 파고들지 못해 항상 아쉬운 중입니다. 혹여 학계의 새로운 흐름이나 연구가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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