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5) 경복궁옆 5층 대전각 흥천사 사리각의 소실기록과 여타기록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연복사 5층누각 (1563년 전소)과 함께 1510년까지 궁궐외의 조선전기 대건축물로 우뚝 서있던 또하나의 5층 누각이 있다. 바로 도성내 경복궁 바로 옆에 존재했던 흥천사의 사리각이다. 

예전 포스팅 (사리각의 역사나 개요에 대한 정보를 아시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로):

보탑사 3층목탑

이 사리각(사리전이라 불리기도 함)에 대한 몇가지 고서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추가해본다. 우선 15세기중엽의 문인인 서거정(徐居正, 1420~88)의 [사가집]에 중요한 싯구가 등장한다.

사가집 시류(詩類)
6월 일에 고양 영상(高陽領相), 이 판경조(李判京兆) 석형(石亨), 홍 중추(洪中樞) 일동(逸童) 를 모시고 흥천사루(興天寺樓)에 올라가 놀며 구경하고, 그 다음날 일암(一菴)에 제(題)하다.

유월이라 어느 날 흥천사에 와서 / 六月興天寺
높은 누각을 유쾌히 함께 오르니 / 岑樓快共登

시에 능한 이는 훌륭한 손들이요 / 能詩皆好客
온화한 담론은 고승이 주관하네 / 軟語有高僧
처마엔 쓸쓸한 빗방울을 보내오고 / 簷送蕭蕭雨
쟁반에선 얼음덩이가 구르는구나 / 盤行點點氷
삼복의 더위를 씻으려고 할진댄 / 欲消三伏暑
여기 말고는 어찌할 수 없겠구려 / 捨此更無能



얼마전 [고려세가저택들과 황룡사 전각높이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포스팅에서 당대 저택들이나 전각의 높이와 온도에 대한 기록을 설명한 바 있는데, 이 싯구에도 어김없이 높이와 온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월(음력이면 7-8월에 해당)인데도 쟁반에서 얼음덩이가 구르는구나라는 비유로 사리각의 고층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서들에 등장하는 건축의 높이와 '온도'에 대한 구절은 꽤 흥미롭다. 예를 들어, 국내의 건축뿐 아니라 일본의 건축에 대해서도 높이와 온도에 대한 구절은 등장하고 있다.

선조 77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7월 24일(기축)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황신(黃愼)의 서장은 이러하였다.
“평조신(平調信)이 이언서(李彦瑞)를 불러 현소(玄蘇)가 쓴 서찰(書札)을 내보이며 그 자신이 내려 읽었는데, 이언서가 그 서찰을 들여다 보니 ‘관백(關白)이 심 부사(沈副使)【심유경(沈惟敬)】와 서로 만나자 기뻐하며 7층 누각(樓閣) 위로 인도하여 올라갔는데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높이가 있는 건축의 희소성으로 인해, 수십미터급 건축위에 오른 문인들은 자주 '차가운 온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복사 5층전각과 마찬가지로 5층 사리각을 '오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명뿐 아니라 '일동'이 올라가 시를 지으며 노는 모습에서 전각의 규모를 살필 수도 있다. 이미 예전 글에서 '외국사신'들이 사리각에 올라 경복궁의 전경을 보면서 감탄한 구절도 살핀 바 있다.

다른 기록으로 가기전에 예전 포스팅에서 기록만 소개하고 이 건축물의 구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지나친 부분이 있어 첨언하자면 세종때의 실록기록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세종 80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3월 16일(경자) 4번째기사 
흥천사 사리각은 본래 5층이었는데 이번에 규제(規制)를 개조하여 단청(丹靑)은 모두 예전대로 하였으나, 오직 맨 아랫 층은 처마를 보태고 벽을 조금 물려 안을 넓게 하고 층계[階]·축대[臺]·난간[欄]·원장[墻]은 모두 옛 제도보다 좋게 하였으며, 바깥 원장도 높게 쌓아서 외인이 엿볼 수 없게 하였다. 항상 근장 군사(近仗軍士) 두 사람을 시켜 각문 자물쇠를 지켜 외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1438년 세종이 사리각의 단청을 다시 칠하고 (15세기이전 방식으로), 1층에 처마를 설치하고, 벽을 옮겨서 1층내실을 더 넓힌다. 그리고 층계-축대-난간-원장 (원장은 '담'을 이야기함) 등을 더 강화했다는 구절에서 15세기 이전의 사리각에도 이미 이러한 시설들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층계의 존재는 5층으로 올라가는 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사리각주위에 '외담'을 사람키보다 더 높이 쳐둔 것도 알수 있다 (사진-보탑사 목탑 3층 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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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478년에 서거정등이 편찬한 동문선의 기록으로 '박은'과 '권근'이 지은 시와 글에 사리각이 기록되어 있다.

박은(朴誾)

더북솔옆의 사리각 / 盤松舍利閣
구름과 달에 밤이 맑고 시원하다 / 雲月夜淸涼
우연히 세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나니 / 偶作三人對

누가 일러 만사가 바쁘다 하였는가 / 誰言萬事忙
옷을 푸는 것은 오직 맞갖음을 취함이요 / 解衣唯取適
술잔을 들면 미치고 싶어진다 / 把酒欲成狂
응당 거기 사는 승려가 괴상하게 여겼으리 / 應被居僧怪
높은 말씀을 또 헤아리기 어렵네 / 高談又叵量
(주: 이 세사람이 사리각에 올라 회포를 푼 것으로 보인다).

권근(權近)

홍무(洪武) 병자년(태조 5년) 가을 8월 무술일에, 우리 소군(小君 왕비) 현비 강씨(顯妃康氏)가 돌아갔다. 상이 마음으로 깊이 슬퍼하며 유사를 명하여 추존하는 시호로 신덕왕태후(神德王太后)라 하고 장지(葬地)를 택하여 왕궁 서남쪽 몇 리 되는 가까운 곳에 얻으니, 언덕과 봉우리가 감싸서 풍수가 길하게 호응하였다. 얼마 후 명년 정월 갑인일에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또 묘역 동쪽에 절을 창건하여 흥천사(興天寺)라 이름하니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1년이 못 되어 공사가 이루어지자 불전(佛殿)ㆍ승방ㆍ대문ㆍ행랑ㆍ부엌ㆍ욕실 등 무릇 기둥으로 계산하니, 1백 70여 칸이었다. 서까래와 들보가 높이 환하게 금채색이 번쩍이는 데 소상(小祥) 때가 되어 불사[法采]로 베풀어 낙성식을 하고 전지 1천 결(結)을 하사하여 공급하는 비용에 충당하며 조계종 본사(曹溪宗本社)로 삼고 승당을 설치하여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을 영구한 규정으로 삼게 하였다.
(주: 권근의 글은 사리각뿐 아니라, 흥천사의 전체 규모 (170칸)를 살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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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기록으로 동국여지승람(1481년)을 증보한 신증국동지여람 (1530년)에 등장하는 사리각을 살펴보자. 여기서 바로 사리각이 방화에 의해 전소되는 모습이 나온다.

흥천사(興天寺) 서부 황화방의 정릉 동쪽에 있는데, 본래 고려의 옛절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 태조의 연호) 정축년에 중건하여 선종이 되었다. 권근의 기문이 있으며, 사리각(舍利閣)이 있어 우뚝한 높이가 5층이고 서울 안에 높이 섰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안에 간직하였다 (주: 연복사 5층전각과 마찬가지로 층층이 보물과 불경을 배치했음이 나온다. 어쩌면 이 두탑은 서로 건축구조학상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삼았고, 중종 반정 뒤에 계속 관청을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 3월에 이르러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러나 보일정도의 큰 불이었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걸었고,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이 있었는데 지금은 흥인문 안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각을 세웠는데 뒤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광화문 루에 걸려 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사리각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서울 안 (즉 경복궁 옆)에 우뚝 서있다는 표현으로 당대 궁궐전각들의 높이를 압도했을 가능성을 비춰준다. 연산군대에 흥천사가 폐지될때, 사리각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1510년에 '유생'들이 '이단'이라고 5층대전각을 태워버렸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타는 모습의 '규모'가 이 전각이 얼마나 대형건축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개성의 연복사 5층전각은 비둘기를 잡다가 태워버렸지만, 서울의 사리각 5층전각은 확고한 이념으로 사라졌음이 다르다. 연복사 5층탑이 사라진 시기는 오히려 이보다 53년이나 더 후대인 1563년인데,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의 불교의 위상과, 조선의 신시대의 심볼인 한양에서의 그것이 차이가 남도 엿볼 수 있다. 개성에서는 오히려 5층전각의 중건을 위해 개성의 상인들이 사비를 터는 모습까지 당대에 등장한다 (이 기록 역시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것으로 비슷한 연대이다).
보탑사 3층목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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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라진 사리각 5층대전에 대한 후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16세기중후반의
허봉(許篈 , 1551~88)의 잡문집 '해동야언'이 있다. 이 기록은 기본적으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축으로 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방화'후 유생들에 대한 당시 임금 중종의 분노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방화범의 이름과 그 성품이 등장하는데, 유생 윤형이라는 자로 '불량한 자이며 성범죄자'였음이 나온다.

28일에 흥인사(興仁寺) 사리각(舍利閣)에 화재가 나니 명하여 유생(儒生)들과 이웃 가까이 사는 백성들을 잡아 국문했었다. 이 절은 본래 신라(新羅)의 고찰로서 우리 태조(太祖)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죽음을 슬퍼하여 명해서 절 안을 둘러보고 인하여 사리각을 세운 것이다. 

우뚝하게 높이가 5층으로서 도중(都中)에 높다랗게 섰으며, 또 보물과 불경(佛經)을 그 안에 간직했다. 연산(燕山) 때부터 이것을 폐해서 분사복시(分司僕寺 말 먹이는 곳)를 만들었더니, 임금이 즉위한 뒤에 이어 관사(官舍)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그 절을 불태우고 다만 사리각과 대문(大門)만 남아 있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비(大妃)가 중사(中使)를 명하여 불경을 내수사(內需司)에 옮겼다. 

유생 윤형(尹衡) 등은 본래 불량한 자로서 혹 겁탈도 하고 능욕도 하는 자였다. 이날 밤 초경에 불이 일어나 화염이 공중으로 치솟고, 연기가 하늘을 덮어서 도성(都城) 안은 궁벽한 골짜기나 깊은 구멍 속 조그만 물건까지도 보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간사한 사람이 일을 빙자하여 난을 일으켰나 의심해서 궁중이 흉흉하다가 오랜만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유생들의 소위라고 억측으로 지목하여 곧 명하여 서학(西學)과 중학(中學)의 유생들과 절 사방에 이웃 열 집 안에 있는 유생과 거민(居民)들을 금부(禁府)에 잡아 가두게 했다. 즉시 잡아 가두지 않았다 하여 금부를 견책(譴責)하고, 특히 경력(經歷) 김보관(金俌官)을 파직시켰다. 또 영의정 김수동(金壽童)과 형방승지(刑房承旨) 이희맹(李希孟)에게 명하여 가서 죄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 옥사(獄事)는 증거가 없는 데서 나왔건만 반드시 형장(刑杖)끝에 죄상을 얻으려 하여 비록 대간과 시종(侍從) 삼공 육경(三公六卿)이 날마다 합문 밖에 엎드려 소를 올리기를, 유생은 불경(佛經)을 가져간 것으로 편벽되어 의심하고, 불 놓은 것으로 의심하여 어지러이 형장을 베푸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거절하고 끝까지 형벌하고 심문하였지만 과연 증거가 없으니, 이에 중사(中使)를 능욕했다 하여 죄주려 하였다. 

추관(推官) 등이 아뢰기를, “유생으로서 불경을 가져간 것과 중사가 불경을 폐찰(廢刹)로 옮겼다는 것은 본래 그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법이 없어 죄줄 수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자필(自筆)로 윤형(尹衡) 등의 죄를 쓰고 윤형은 주모자이니, 장형(杖刑) 80대를 때려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매를 때려 내쫓고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며, 혹은 다만 과거만 보지 못하게 하니, 대간과 시종이 또 논(論)하기를, “임금으로부터 율(律)을 정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또 윤형은 장류(杖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윤형의 부처(付處)를 면하게 하였다. 김수동은 수상(首相)으로서 임금의 지나친 처사를 보고서도 능히 간하지 못하고 조그만 일을 조사하고 증거를 찾는 것이 본래 그의 맡은 바가 아닌데도 머리를 숙이고 간하지 않았으므로 사림(士林)들이 한스럽게 여겨 말하기를, “비부(鄙夫)는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였다.

중종이 영의정에게 직접 추문을 시키는 등, 그야말로 유생들을 '잡아 죽이고'싶어하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당대 불교와 왕실, 그리고 유생들간의 구도가 여전함을 보여준다. 증거가 없다고 신하들이 아뢰자 임금이 자필로 죄를 직접 써서 주모자라도 장현 80대를 치고야 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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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팔상전

마지막으로 18세기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이 집필한 '연려실기술'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유생들을 엄벌에 처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사리각 주위의 사방 열집에 사는 모든 유생뿐 아니라 거주민들을 의금부에 가둬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僧]이 유생들의 옥사를 속여 꾸미다 경오년(1510)
3월 28일 흥인사(興仁寺) 사리각(舍利閣)에 화재가 나니, 유생과 이웃에 사는 백성들을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이 절은 본래 신라 때 지은 고찰로서 우리 태조(太祖)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절 안에 사리각을 창건하라고 명하였는데, 높이 5층으로 서울 복판에 우뚝 섰고, 또 보물과 불경을 그 속에 두게 하였다. 연산조부터 폐해서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썼다가 중종이 즉위하자 그대로 관청으로 썼었다.이보다 앞서 그 절은 불타버리고 사리각만 남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대비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불경을 내수사로 옮겼던 것이다. 유생 윤형(尹衡) 등은 본래 무뢰배로서 혹 중들을 협박하여 빼앗고 욕보인 다음날 밤 초경에 불이 처음 일어나 화광이 공중으로 솟구치고 하늘을 가려 서울 안은 비록 깊은 골짜기나 좁은 골목이라도 조그만 것까지 환하게 비쳤다 (주: 이 구절은 사리각의 '높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5층전각이 타는 불길로 인해 성내의 좁은 골목이 환하게 비출 정도라는 것이다)

상이 처음에는 간인(奸人)이 이를 빌미로 난을 일으키려고 할까봐 의심하여 궁중이 흉흉하다가 한참만에 가라앉았다.상이 크게 노해 유생들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즉시 중학(中學)과 서학(西學)의 유생들과 절의 사방 열 집 안에 사는 유생과 거주민들을 의금부에 가두라고 명하고, 즉시 잡아 가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금부의 관리들을 견책하고 특별히 경력 김보(金俌)를 파면시켰다. 또 영의정 김수동(金壽童)과 승지 이희맹(李希孟)을 시켜서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자 고문을 하여 기어이 자백을 받으려 하였다. 대간과 삼공과 육경이 날마다 합문 밖에 엎드려 아뢰기를, “유생들이 불경을 가져 왔다 해서 편벽되게 화재를 그들의 짓이라고 의심해 매질을 함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나, 상이 더욱 듣지 않고 마침내 형벌을 써서 심문했으나 과연 증거가 없었다. 윤형 등은 주모자라 하여 장 팔십(杖八十)에 부처(付處)하고, 나머지는 혹은 매를 때리기도 하고, 혹은 과거 시험 자격을 정지시켰다. 대간이 또 논하기를, “임금이 조율(照律)하는 것은 부당하며, 윤형은 또 곤장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니, 면하라고 명하였다.

현재 경복궁의 바로 옆에 있었던 흥천사 사리각 5층대전각에 대해 알고 있는 서울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황룡사 9층목탑뿐 아니라, 그리고 조선후기에서 이어지는 여러 한국전통건축들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있었던 여러 랜드마크적인 건축물들에 대한 조금 더 활발한 이용과, 인식이 있으면 한다.

이런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법주사 팔상전 모형- 바깥은 5층이지만 내부는 사람이 올라갈수 없는 통구조이며 따라서 22.7미터정도에 그친다. 몇번 언급했듯 사리각과 연복사 5층전각의 경우, 기록에 60미터정도로 나와 있어, 새로 지은 진천 보탑사 3층 (상륜부제외 42.7미터, 아래사진)에 2층을 더한 구조가 될 듯 하다. 그리고 그 정도 높이를 갖추어야 전각에 올라 온도차를 느낄수 있으리라. 보탑사 목탑의 경우, 단한개의 쇠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으로 지어, 일정 시간이 흐르면 문화재반열에 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출처: http://blog.daum.net/lyp23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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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3/13 12:03 # 삭제

    흥천사도 그렇고 원각사도 15세기 당대 조선 수도 한양의 랜드마크 격 불교사찰이었죠

    16세기들어 오늘날 표현대로면 소위 유교탈레반이라 불릴만한 유교근본주의적 유생들

    때문에 한양은 물론이고 경기도 일대 주요 불교사찰들이 꽤 많이 사라진거 참 아쉽습니다

    ( 예를들자면 회암사.. )

    중종~명종조 저런 현상이 꽤 많았죠. 정치적으로 보자면 사림세력들이 조선정계에

    전면적으로 부각되던 시기하고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원각사의 경우 오늘날 종로 탑골공원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세조 당시 크기는 현재 세운상가 전체와 탑골공원을 합친 규모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유교세력의 경우 불교만 탄압한게 아니고

    전통 토속신앙에 대한 탄압도 조선시대 기록보면 아주 많이 나오더군요

    17세기 제주도 토속신앙을 극렬하게 탄압했던 제주목사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 역사관심 2014/03/13 13:03 #

    동감합니다. 역시 정치력과 맞물린 감이 있어보입니다. 그런면에서 당시 지방의 문화재들과 한양의 상황비교도 좋은 주제가 될듯하구요.

    제주목사 이야기도 한번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 ㅇㅇ 2014/03/13 17:23 # 삭제

    유교도 그렇고 무슬림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타 종교에 대해 왜 저렇게들 비이성적으로 반응하는지 ;
    정말 종교가 사람의 이성을 어느정도로 마비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4/03/14 05:11 #

    그런 일부 왜곡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진정한 종교인들이 아닌거죠.
    현대한국에서도 불교문화재복원에 대해 종교와 문화재 구분도 안되는 16세기적사고를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니 그 우매함은 어쩔 도리가 없나봅니다. 민도가 올라가는데는 제대로 된 교육만이 희망. 국민구성원들의 수준이 높아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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