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 간 경희궁 목재귀매, 그리고 추적 설화 야담 지괴류

18세기 후반에 노명흠(盧命欽, 1713~1775)이 저술한 야담집인 [동패락송]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합니다.
이 글에 나오는 '귀매'는 귀신중에서도 산에 서려있는 이상한 정기가 뭉쳐저 만들어진 것으로 아주 까다로운 귀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패락송> 
한 귀공자가 낙봉 아래에 새로 큰 저택을 지었다. 집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귀매가 있었으며 낙성을 하고 나니 밤마다 귀매의 행패가 더욱 심해졌다. 귀공자는 건장한 종 10여명을 시켜 귀매가 나타나는 곳을 몽둥이로 치게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마 후 여종 하나가 귀매에게 끌려갔다 와서 귀매의 말을 전했다. “좋은 재목을 가려 집을 잘 지었다. 잘 지은 집은 계속 세 공자집이 되고, 그 뒤에는 존귀한 사람들이 모여 자는 것이 되리라.” 

모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숙종 경신해(1680)에 이 집 주인이 죄에 걸려 사사당하고 이 집은 훈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 후 훈신이 헐어 다른 곳에 옮겨지었다. 옮겨 지은 후에도 역시 귀매가 나타났으며, 기사년(1689)에 이 훈신 또한 죽음을 당했다. 그 뒤 한 재상이 이 집을 다른 곳에 옮겨지었는데, 역시 거기에도 귀매가 있었다. 다시 갑술해(1694)에 이 집을 가진 재상이 죽음을 당하니 마침내 이 건물을 또 헐어 옮겨 경덕궁의 도총부로 되었다. 그러니 많은 재신들이 여기에서 숙직을 하게 되었으니, 처음 여종이 전한 귀매의 말이 모두 맞았다.

경덕궁 도총부는 아래 동그라미부분으로 개양문밖에 설치된 관리들의 숙소같은 곳이었습니다. 1694년이면 숙종대로 경덕궁은 영조대 (18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바로 이 곳에 지어진 건물의 목재가 세명의 집주인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귀매가 서려있던 목재라는 것이지요.

서궐도
아래는 경희궁 전각들을 복원해 놓은 그림들중 도총부 부분입니다. 저 목재들이 '그 목재들'이었겠죠.

추정 복원도 (경덕궁 도총부)
경희궁 (전 경덕궁) 도총부(都摠府)

그럼 야담집에 불과한 저 기록중 적어도 도총부에 이 귀매들린 집의 목재가 쓰였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실록 숙종 19년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숙종 25권, 19년(1693 계유 / 청 강희(康熙) 32년) 6월 7일(기묘) 
부수찬 정시윤이 경덕궁의 역사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음을 상소하다    
이때 경덕궁(慶德宮)에 한창 수리(修理)하는 역사가 있었는데, 부수찬(副修撰) 정시윤(丁時潤)이 고향에서 입조(入朝)하여 상소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진술하기를, “원주(原州) 지경에 노소(老少)의 인민들이 아람드리 나무를 끌어내느라고 길가의 곡식을 손상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물었더니, 경덕궁을 수리하는 데 나누어 배정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구중 궁궐에 깊숙하게 거처하시면서, 백성들이 시름하고 한탄하는 상황을 어떻게 모두 알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백성들이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은 참으로 나의 과실인데,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따라서 1694년에 경덕궁의 일부가 수리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 야담에 나오는 저택을 헐어 도총부의 목재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이 귀매들린 '집'을 애초에 지었던 귀공자라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1680년 숙종때 이 저택을 지었던 원주인이 사사당했다는 것은 이 주인이 '경신환국'에 몰려 죽거나 사사된 남인중 하나일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이때 사사된 남인의 숫자가 약 90명. 이 중 '낙봉'아래 집을 짓고 살았던 인물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실상 낙산, 즉 낙봉은 동인들의 무대였으므로 남인은 몇 안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의외로 이 인물을 쉽게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중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가 있습니다. 윤휴의 저택은 쌍계동에 자리잡고 있었다고하는데, 이 쌍계동은 현재 지명이 없고, 이화동과 동숭동에 걸쳐있던 조선시대 지명입니다. 윤휴는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장년에는 서울 쌍계동(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조선 학자 윤휴(尹鑴)).

우선 낙봉은 현재 혜화동근처의 낙산, 즉 동소문 옆의 산을 가리킵니다. 지도의 오른쪽위에 보이지요.
현재 이화동은 지도의 분홍색부분 (왼편), 그리고 낙산은 오른쪽의 초록색부분입니다. 바로 붙어있죠. 따라서 '한 귀공자가 낙봉 아래 새로 큰 저택을 지었는데'라는 것에 들어 맞습니다.

저 귀매들린 저택의 원주인공이 '윤휴'일 것이라는 심증을 더 굳혀주는 것이 바로 1679년, 즉 1680년에 '이 집주인이 경신환국으로 사사되기' 일년전의 기록입니다. 바로 윤휴가 이 해에 저 쌍계동에 저택을 짓는데, 그 저택을 짓는 소나무를 불법으로 베어왔다는 상소를 받게 됩니다. 귀매기록의 일년전에 저택을 지었다는 결정적인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숙종 8권, 5년(1679 기미) 2월 16일(신사) 
판윤 김유형 등이 윤휴의 소나무 채벌에 대한 조사 결과를 올리다    
판윤(判尹) 김우형(金宇亨)과 좌윤(左尹) 신정(申晸)이 상소하기를,
“남구만(南九萬)의 상소로 인하여, ‘해당 관원을 분명하게 조사하라.’는 하교를 받아 즉시 서원(書員)과 산지기[山直]를 불러 초사를 받았더니, 모두 말하기를, ‘서도(西道)에 사는 김세보(金世寶)란 자가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였는데, 그의 선산(先山)의 어린 소나무 뿌리가 선영의 봉분을 침범하였다고 하므로 본부(本府)에서 선례를 따라 벌목(伐木)을 허락하였더니, 김세보가 허가한 문장(文狀)에 의거하여 소나무 3백여 그루를 베어 윤휴(尹鑴)의 집으로 운송했다.’고 하기에 신 등은 마음에 괴이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판관(判官) 심익선(沈益善)과 참군(參軍) 이상은(李相殷), 감역(監役) 송광엄(宋光淹) 등을 보내어 낱낱이 적간(摘奸)하였습니다. 김세보(金世寶)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없고 그의 사위 임대(任戴)가 하는 말이, ‘김세보가 벌목한 소나무는 3백 64그루였는데, 이달 10일에 윤휴가 종들을 보내어 실어갔다.’고 했으며, 나누어 준 사람의 진술은 ‘지난해 윤 대사헌(尹大司憲)이 종들을 보내어 소나무 3백 64그루를 베어서 일부는 수레로 운반하고 일부는 말에 실어 보냈으며 그 나머지 절단한 나무 93개는 지금 김세보의 집에 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서원(書員)의 진술과 견주어보건대, 그루 수가 더 많으니 증거가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신 등이 이에 근거하여 입계(入啓)하려던 참이었는데, 느닷없는 대신(大臣)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조사하지 말라는 전교를 받았으니, 놀랍고 의혹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도끼 자국이 아직도 낭자하게 남아 있는데, 있는 것을 없다고 이르고 사실을 거짓이라고 한다면,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는 도리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윤휴(尹鑴)는 비록 예로써 대우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하라는 명을 갑자기 거두었다지만, 김세보(金世寶)는 남의 사주를 받고, 솔뿌리가 종분을 침범 했다고 핑계하여 금송(禁松) 수백 그루를 베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이 장차 이로 인하여 폐지될 것이며, 국도(國都)의 사산(四山)이 다시는 푸른 숲을 보지 못하는 민둥산이 될 것이며, 동네의 사기한들은 필시 낫을 흔들고 도끼를 잡고 아무 거리낌없이 벌목하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을 터이니, 법관된 자가 무엇으로 호령하겠습니까? 신 등은 직책이 직책인만큼 감히 침묵을 지킬 수 없어 말씀드리니, 부디 통촉하여 명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윤휴(尹鑴)는 빌렸거나 아니면 샀을 뿐인데, 어떻게 금송(禁松)을 벌목한 죄가 되느냐? 김세보(金世寶)는 문장(文狀)을 핑계삼아 소나무를 함부로 베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유사에게 조사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즉, 허목이 윤휴가 서도西道의 금송을 불법으로 가져다가 재목으로 집을 지었다며 소나무 재목을 받은 것을 문제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경덕궁 도총부'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경희궁 도총부)가 된 이 소나무는 낙봉밑 쌍계동의 윤휴저택, 그리고 원래의 위치는 서도, 즉 지금의 황해도(혹은 평안도)의 가좌동에 살던 김세보란 사람의 소나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황해도에는 '가좌면'이 있습니다, 아래 지도의 벽성군내에 있습니다). 
이 소나무가 만약 귀매들린 것이었다면 저 구절이 심상치 않아 보이네요. 애초부터 이 소나무는 "(김세보)의 선산의 어린 소나무 뿌리가 부모의 봉분을 침범해서 잘라 보낸' 것이니 말입니다. 귀매가 들릴만한 소나무였다는 것일까요 ^^.

물론 흥미로운 일로 그칠 일입니다만, 경희궁의 운명이 그러했듯 도총부 역시 조선왕조말기 일제시대에 아마도 철거되어 어딘가의 주택가나 고급요정의 목재로 이어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전각목재의 기록을 추적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듯 하군요.



핑백

  • 까마구둥지 : 1609년 여름, 경운궁에 등장한 귀신의 무리 (이이첨의 경험담) 2014-05-09 08:25:17 #

    ... 혹자는 말하기를, “그 승지는 바로 이이첨(李爾添)"이라고 한다. ===== 요전에 경덕궁 (현 경희궁)의 귀매어린 목재에 대한 포스팅('대를 이어간 목재귀매')을 한바 있는데, 이번에는 경운궁 (현 덕수궁)입니다. 우선 시어소라는 것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뜻합니다. 경운궁의 '승정원'이라는 건물은 ... more

  • 까마구둥지 : 1583년 이원여의 집에 나타난 귀신, 그리고 귀신의 아내 (16세기 조선괴담) 2014-05-14 14:50:40 #

    ... =*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 오싹한 이야기는 여기 사족에 하나 더 등장합니다.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은 기억하시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요. 바로 "대를 이어간 경덕궁 목재귀매, 그리고 추적" 이란 글로 1694년 경덕궁 (현 경희궁)의 도총부 목재가 된 (추정) 윤휴의 저택의 목재에 서린 귀신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대 ... more

덧글

  • 솔까역사 2014/04/12 20:36 #

    소설가는 이거 보고 빨리 소설 하나를 써야 할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한양의 옛 지도를 보니 새삼 신기하군요.
    청계천이 도읍의 중심을 흐르고 있었군요.
    한강이 아니라...
  • 역사관심 2014/04/12 22:48 #

    기록을 소재삼아 소설소재가 될만한 것 같습니다. 옛지도도 영감을 주곤 하는것 같아요.
  • ㅇㅇ 2014/04/13 11:29 # 삭제

    음.. 근데 저 그림 (서궐도안)이 그려지고 나서 몇십년후 철종~고종 이 시기에

    경희궁 근처에서 화약폭발로 큰 화재가 발생하죠. 덕분에

    서궐도안에 보이는 경희궁 대다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답니다

    일제강점기 직전 즉 19세기말 경희궁 주변 유리원판 흑백사진을 보면 이미 그 당시에

    경희궁은 담장 권역만 남아있고 주요 건물을 제외한 대다수 목조건축들은

    다 사라졌더군요. 걍 빈터로 남아서 잡초만 자라거나 뽕밭으로 변했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건뭐 상상이지만 귀매들린 나무가 경희궁 대화재에도 영향을 ㄷㄷ
  • 역사관심 2014/04/13 11:58 #

    아.. 그런 일이... 그렇지 않아도 이후 일이 궁금했는데 감사해요. 그 화약폭발이 도총부근처라면 ㄷㄷㄷ. 가능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닌게 저 근처가 군사관계 건물이 있던것 같더군요. 확인해봐야겠지만...
  • ㅇㅇ 2014/04/13 14:29 # 삭제

    맞습니다 그 군사관계 건물 (정확한 명칭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요 ㅠㅜ)에서

    화약폭발로 경희궁 화재가 발생했네요.. 좀더 찾아보니 그 화재때 경희궁 주요 건물도 꽤

    불타서 나중에 중건됬더군요. 경희궁이 전체적으로 중건된 건 아니고 몇몇 건물들만 중건

    된것 같습니다. 현실으로 그 당시 경복궁 중건사업과 겹쳐서 경희궁 대대적 중건은

    힘들었다고 봐야 ( 참고로 대원군 경복궁 중건시 남아있던 경희궁 건물양식이

    많이 참고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면 조선 후기 한양 궁궐 존재감은 창덕궁 창경궁

    보다는 경희궁쪽이 더 큰 것 같기도..)



  • 역사관심 2014/04/13 14:47 #

    이거 참 흥미롭네요. ㅎㅎㅎ
  • 쪼쪼 2014/04/22 12:05 # 삭제

    안녕하세요~궁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경희궁과 그 주변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는데요, 특히 경희궁 최남단인 현재의 금호아시아나, 흥국생명, LG, 씨티은행의 위치도 경희궁 담 내에 속하던데 예전에 궁의 어떤 건물이 있던 자리였는지 혹시 아시는지요?
  • 역사관심 2014/04/23 03:00 #

    쪼쪼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
    경희궁 아래쪽 전각들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주욱 대강 나열하면 (담장밖 제외):

    홍문관, 내의원, 약원, 도감군사, 승정원, 선정관청, 빈청, 전설사, 그리고 멀리 홍화문까지 연계됩니다. 도움이 되셨길...(다만 가장 바깥쪽 담장을 두르는 건물들입니다).
  • 쪼쪼 2014/04/23 09:39 # 삭제

    답변 감사드립니다 ^^ 지도를 보니 현재 흥국생명이 있는 곳이 담장 밖이네요- 경희궁 담장 밖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을까요? 종로에서 이어지는 상점들이 있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
  • 역사관심 2014/04/23 22:44 #

    사실 본문의 주인공인 도총부역시 외담밖에 존재하던 (서쪽) 건물입니다. 그외에도 도총부, 총부대청, 내구정도가 있었네요. 말씀대로 그 동쪽 담장 밑약간, 그리고 오른쪽(즉 동쪽)으로 내려가면 아마도 경운궁을 만나는 지점까지 상점이나 그런 건물이 자잔하게 들어서지 않았을까요.

    지도를 보니 그러해보입니다.
    http://blog.daum.net/sonsang4/13741884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