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말흘리건물지로 확인된 최자의 삼도부에서 발견된 정형한옥의 성립시기 역사

아마도 이런 발견이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로써 희열을 느끼는 순간중 하나일 듯 합니다.

2011년에 쓴 글중 "최초의 정형한옥기록?- 최자의 삼도부 동경부 (고려 13세기초)" 이란 글이 있습니다. 최자의 삼도부라는 개경, 경주, 평양, 강화도를 다룬 13세기초의 시를 분석해본 4부작중 하나였는데, 이중 경주(동경부)를 다룬 포스팅에서 싯구중 한 구절을 분석, 기존의 문헌근거 학설과 다르게 정형한옥 (즉, 온돌방과 마루가 합쳐진 형태의 현재한옥)의 출현시기가 기존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14세기보다 훨씬 앞당겨진 13세기초 (혹은 12세기말)로 당겨질 가능성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온돌과 마루의 결합시기에 대해서는 건축학계에서도 아직 정확한 시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전역 (즉 남부까지)에 상류주택까지 보급된 시기는 최소 14세기 이후로 보고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2000년의 "고려식 온돌집의 형성및 전개에 관한 연구"를 보면 이러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편, 마루와 온돌구조 자체적으로도 많은 역사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에서 온돌과 마루의 결합과정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며, 결합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마루와 온돌의 결합은 언제 우리나라에 완전한 전통주택의 정형(定型)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온돌과 마루가 연접(連接)해서 한 건물을 이루는 방식은 적어도 고려시대 후기 이전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온돌과 마루가 연접하는 방식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전면온돌의 출현이다. 전면온돌이 널리 확산되는 것이 13세기경이라고 가정한다면 그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온돌 옆에 마루나 부엌과 같은 다른 실이 달라붙는 현상도 나타났다고 짐작된다4고 하여 마루와 온돌의 결합과정과 시기를 제시하고 있다 (주: 이는 하류층의 이야기로 상류층의 경우 13세기중기이후가 되겠습니다). 또한, 상류계층까지 온돌구조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東文選의 公州東亭記의 기록만으로는 온돌과 마루가 고려시대에 결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의 주택 안에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문화의 지역적 이동과 전파에 따라 온돌과 마루가 다른 지역에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두개의 구조가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언급했듯 당 논문에서는 남부지방의 온돌과 마루의 결합시기를 14세기초도 아닌 중기이후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고려 충정왕 원년(1349년) 남부지역인 마산의 객사를 중창한 기록을 살펴보면, 여름의 더위를 고려한 청방(廳房 ; 마루방)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있으나, 온돌방이나 추위를 피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서술 중에 난방시설에 대해 생략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지역적으로는 추위보다는 더위를 고려하여 조영된 측면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온돌구조가 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남부지역까지 보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예가 아닌가 사료된다."


그럼 필자가 3년전인 2011년에 작성한 삼도부-동경부에 관한 포스팅중 해당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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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수가 말하되 / 叟曰
공경(곧 높은 직위의 관리)들이 차례로 벌여나가 / 公卿列第
잇달아 10리에 걸쳤는데 / 聯亘十里
가득한 문설주 (주: 아래사진)와 빼어난 누각이 가득했고/ 豐樓傑閣 (주: 당대까지도 경주에 수많은 관리소유의 (아마도 기와)집이 늘어섰음을 보여줍니다)
봉황이 춤추고 용이 일어나듯 / 鳳舞螭起
서늘한 마루, 더운 방이 / 涼軒燠室 
즐비하게 갖춰 있어 / 鱗錯櫛比 (주: 燠室 욱실은 온돌방, 軒 헌은 대청마루를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13세기 경기지방의 건동 절터의 중건묘사부분에서도 '큰방은 마루로 사용'한다는 부분에서 이 한자를 씁니다: 東文選 卷之六十九 記 重修乾洞禪寺記-益齊 李齊 賢(1287∼1367년)記(...丹楹藻梲宏且 麗者, 所以居 佛也, 洞房燠室窈而廓者, 所以處僧也, 崇而堂廣其 廡, 挹絶嶠於窗, 俯洪濤於庭戶,..))

이부분이 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한옥'의 기원의 한 단서가 될수 있는 중요한 문구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위키백과의 한옥을 살펴보면. "청동기시대에는, 내부에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운 비교적 넓은 집에서 거주하였으며, 철기시대에는 여기에 구들과 온돌이 더해져 난방기능이 향상되었고 흙을 구운 기와를 지붕에 얹은 기와집이 등장하여 오늘날의 한옥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지하에 땅을 파서 지은 움집은 장마 폭우에 매우 취약하여 차츰 지상건축물로 변화했다. 초기에는 백제 사람들이 큰 나무 위에 집을 지었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허공에 마루를 까는 오두막집이었다. 그 뒤 고구려 인들이 이주하면서 고구려의 구들과 백제의 마루가 합쳐졌다. 현재 한옥의 특성인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 것을 한옥의 정형이라고 부르며, 한옥 중에서 구들이나 마루만 있는 것은 원초형 한옥이라고 부른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 자료를 더 살펴보죠.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인가 중 166쪽"을 보면, '전면온돌'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지만 고려말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라고 했는데, 고려말을 14세기로 본다면, 12세기에 이미 이러한 구절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서긍이 고려도경을 쓴 시기인 (바로 이시기 12세기) '귀족층'에 국한해서 이야기한 것이라면, 맞는 말일수도 있겠지요 고려도경에는 서민층이 온돌을 쓰고 귀족층은 입석을 한다고 나오니까요. 다만, 이 삼도부에 나오는 구절이 빼어난 누각이 가득하고, 란 구절 바로 뒤에 이런 마루+온돌 구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민층집에만 온돌이 있었던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워보입니다. 아무튼 필자는 고려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한옥양식이- 즉, 구들과 마루가 합해진- 고려중기 (13세기초반) 의 경주의 상류저택들에 이미 번창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는 13세기이전 즉 12세기후반까지도 온돌과 마루의 결합시기를 올려볼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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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이 마루와 온돌방임을 표현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로 시대는 차이가 나지만 조선후기인 1848년에 琴詩述이 쓴「移建上樑文」에  濯淸亭을 표현한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은 마땅히 間架의 규모를 줄여 맞추었다."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琴詩述 撰, 「移建上樑文」‘凉軒燠室適宜稍損間架’. 놀랍게도 13세기초의 삼도부 구절(서늘한 마루, 더운 방이 / 涼軒燠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표현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팅을 올린 2011년보다 2년전에 발표된 [창녕 말흘리고려시대 건물지의 성격에 관한 연구]라는 2009년의 논문을 이제서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관련 저작을 활발하게 내고 계신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주영민 선생의 논문이 그것입니다 (논문링크

본 논문에서 다루는 말흘리유적이란 경남 창녕군 말흘리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건물지 유적을 말합니다. 아래는 말흘리 고려건물 유적지 배치도입니다.

논문의 개요부분을 조금 소개하면:

검토결과 건물지에서 난방용으로 온돌을 시설한 것과 공간구획을 위해 벽을 설치한 것, 그리고 마루와 방이 연접되어 설치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온돌의 사용과 전파에 관한 그간의 문헌중심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13세기 전기에 개경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의 기거처에 온돌 사용이 보편화되고, 고려 말 (주: 즉 14세기이후)에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확인된 구들(온돌)과 마루의 결합건물지

그러나 중심연대가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초기인 한반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말흘리 건물지에서 온돌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온돌의 지방전파시기에 대한 물적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실증 유구없이 문헌자료를 근간으로 마루와 방이 연접하여 설치된 시기를 13세기대로 추정하던 그간의 연구와는 달리, 말흘리 건물지의 조사로 마루와 방이 연접된 시기를 12세기 중기까지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건물지의 주거평면과 입지를 관련문헌자료와 비교하여 살펴본 결과 사원과는 달리 방지형의 연못을 중심으로 정과 당 동의 건물이 배치된 별서와 담장을 두른 ㅁ자형 형태의 살림집으로 구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별서의 위치가 살림집과 별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지 않고 지척지간에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말흘리 건물지의 입지와 문헌 자료의 비교 결과 당대 별서건축이 도시에 지척을 두고 조영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셋째, 말흘리 건물지를 조영하고 경영하였던 계층에 대해선 지방 사회의 지배계층인 중류층들로 추정된다. 중략.

이상과 같이 말흘리 건물지의 성격을 살펴보았고 그 결과 중앙의 주거문화를 차용한 지방 세력이 건립한 건축들로 사료되며, 그간 풍부한 문헌자료에 비해 실증 유구의 부재로 그 실체가 모호하던 당시 (고려중기) 지배층 주거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즉, 이 유적지의 발굴분석결과로 보면, 11세기 전기에 이미 중부에서는 상류주거건축물에 온돌이 사용되었고, 12세기 중기에는 남부의 중류계층 저택에까지 온돌이 사용되는데, 그냥 온돌만이 아니라 온돌과 마루의 결합, 즉 '정형한옥'이 말흘리 건물지 발굴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필자가 앞서 확인한 '삼도부의 경주부'의 문헌사료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고고학적 결과입니다. 경주와 창녕 말흘리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도에서 확인할수 있듯이, 거의 인접한 지역으로 삼도부의 고려시대중기 경주저택들 묘사부분과 창녕의 고려시대 중기저택지의 시기는 거의 같습니다. 즉 두 지역 모두 논문에서 이야기하듯 '한반도 남부'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삼도부에 등장하는 '공경들의 저택', 즉 관리들의 저택이 이러한 정형한옥 (온돌과 마루의 결합)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논문에 나오듯 말흘리 유적지 역시 '고려시대 중류층 지배계급 저택'입니다. 

따라서, 이 말흘리 유적지의 발굴분석결과는 동시대 인접지역인 삼도부의 동경부에 등장하는 정형한옥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해도 과언은 아니라 판단됩니다. 조금 앞서 나가보자면, 이는 앞으로 고려시대말의 상류층의 생활을 다룰 때 혹은 저택을 복원할시, 침상을 쓰는 방, 온돌방, 그리고 마루를 갖춘 저택으로 만들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논문의 11세기 온돌의 남부진출 (기존의 학설보다 약 200년 앞서는)과 무엇보다 현재 14세기중기로 보는 "온돌+마루의 정형한옥"의 남부진출은 적어도 12세기중반~13세기초로 앞당겨지는 것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발굴결과로 인해 확인할 수 있던 한가지는 이러한 고대-중세의 '문학류(시가류포함)'의 신뢰성이라 사료됩니다. 앞선 몇번의 포스팅에서도 필자가 자주 인용한 여러 싯구에 등장하는 고려저택, 황룡사 전각등의 묘사의 건축학적 연관성 (예: 높이와 온도의 연관관계묘사등)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는 결과가 나와 또한 기쁩니다.

아무튼 이 논문의 결과가 널리 알려지면, 그리고 필자가 판단하는 바로는 아직 한번도 기존문헌학계에서 다룬 바 없는 최자의 삼도부에 등장하는 고려시대의 경주에 존재하던 고려저택들 (한옥)에 대한 더욱 실증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문화컨텐츠사이트에서 복원한 고려저택의 내부 중 침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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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연구결과에 따라, 각종 한국학 사이트의 다음과 같은 온돌과 마루의 해설도 단순히 500년간의 고려시대를 뭉뚱그려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전기-중기-후기 혹은 전 후기로 나누어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부발췌:
고려시기 상류주택에는 온돌이 시설되지 않았다. 따라서 열기와 연기를 처리하는 방식이 조선후기와 달랐다. 조선후기의 주택에서는 열기와 연기를 방 밑의 고래를 통하여 굴뚝으로 배출하며 난방과 취사를 겸하였다. 당연히 아궁이와 부뚜막을 설치한 부엌은 방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주택에서는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으므로 난방과 취사가 별도로 이루어져야 했다. 취사공간은 열기와 연기를 방출하기 쉬운 장소와 시설에 마련되었다. 핵심 주거영역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개방된 형태의 부엌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최근 발견된 대전 원골유적에서 확인된다. 

온돌이 시설되지 않았으므로 바닥재도 조선후기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습기를 피하고자 실내의 대부분에 마루를 깔아 공중에 띄었다. 동월의 『조선부』에 이러한 구조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었고, 온돌 이전의 방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에서도 판방이 대부분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바닥에는 풀로 짠 두툼한 돗자리를 깔았다. 두툼한 돗자리는 여름에는 습기를 흡수하는 기능을 하였고 겨울에는 한기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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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4/16 12:35 # 삭제

    음..여러가지로 생각해볼 문제네요. 근데 저런 사례 연구가 좀더 필요한 것 같기도 하네요.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처럼 일반화 시키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 같은,,
    그리고 마루와 온돌 구조에 대해서 고려 상류층의 대형 건축물에서 쓰임새도
    좀 더 연구될 필요가 있을것 같네요.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 까지는 수도와 지방 곳곳에
    대형 주거 건축물이 꽤 많았으니 말이죠 (용도에 있어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전 상대동 유적지도 그렇고,, 각종 기록만 봐도 조선시대 상류층 주거 한옥과 비교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저택들이 꽤 많으니,,)

    그건 그렇고,, 한국 문화는 중국 문화의 아류인가란 책 제목을 보니
    조선시대 북학파들이 청나라 문명 무시하지 말아야 된다고 얘기한거나
    중국의 문명이 중심이라고 얘기한 조선유학자들 말이 마치 복사-붙여넣기 한것처럼
    보이는건 왜 일까요?

    주변의 여러 문명이 흘러들어와 중국 문명이 탄생하고 왕조가 뒤바뀌며
    역사가 흘러간걸 생각하지 못하는 저런 자세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조선시대는 조선시대라 그렇다치더라도 왜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저런생각을 하는지..
    마치 지동설 무시하고 천동설 신봉하는 중세 유럽 카톨릭 신봉자들 같네요

  • 역사관심 2014/04/16 14:26 #

    물론입니다. 일반화하기엔 아직 추후연구가 필요하고 고고학적 성과도 더 나와 줘야겠지요. 다만 당대에 '여러 형태'의 저택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열어둬야 하는 발견으로 기존학설을 다시 생각해야할 시작점으로서의 의의는 틀림없겠습니다.

    책제목을 판매를 의식해서 지은것이 약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겠습니다 :) 이 책은 사실 한국학전문학자들이 문화각분야에서 중국문화와의 차별성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다룬 개론서입니다. ^^

  • ㅇㅇ 2014/04/17 11:59 # 삭제

    네 그렇죠,, 판매를 위한 어그로로 보이긴 하는데 차별성과 정체성을 따지기 이전에 저런 선입견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수동적 사고방식 아닌가 싶네요.은연중에 드러난다는 말이 있죠. 참 무섭습니다.. 중국이 잘난게 아니라 중국에 들어온 서양문물이 잘난건데 그걸 중국이 대단한 걸로 과대포장했던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있는 것 같아서 섬뜩합니다. 문화의 주체성 정체성을 중시한다면 말이죠 .. 일테면 소매상 보다는 도매상이 되야 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역사관심 2014/04/18 01:32 #

    동의합니다. 저런 제목자체를 쓸 필요는 없죠. 사실 그렇게따지면 프랑스문화는 로마문화의 아류인가..등등 나와야겠죠. 어불성설입니다 저 논의는.
  • ㅇㅇ 2014/04/18 05:13 # 삭제

    그런데 발견 되는 것들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특수한 것들은 잘 발견되지도 않죠.

    이거 말고 비록 사찰건물이지만 경주, 익산 등에서도 온돌이 발견되어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4/04/18 06:06 #

    하긴 그렇습니다. 사실 특수한 것인지 보편적인 것인지 현재의 우리로써는 알기가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보편적인 것이 더 숫자가 많았으니 발견될 확률도 높아질 뿐이겠지요.
  • 2015/08/27 10:11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역사관심 2015/08/28 05:12 #

    찾아봤는데 제가 외장하드로 옮겼나 보더군요. 외장하드가 한두개가 아니라 찾아봐야 할것같습니다 만약 찾으면 이 포스팅에 화일을 첨부해드리겠습니다. ^^
  • 역사관심 2015/08/31 23:32 #

    죄송합니다. 며칠간 하드를 다 뒤지고 회원으로 있는 발행기관까지 뒤졌는데 PDF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정리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해뒀거나 불행히도 지운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기다리셨을텐데 미안합니다. 혹시라도 찾으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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