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절정미남 이빙(李砯)공 동생, 그리고 한국역사의 미남들 역사전통마

정조대왕의 암살시도를 다룬 영화 '역린'이 개봉했습니다. 현빈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문득 의문이 들겁니다. 과연 정조가 현빈처럼 생겼었을까? 조선시대의 미남들은 어땠을까?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당대 최고수준의 미남이야기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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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백(李忠伯) 공이 말하기를,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빙(砯)이다. 아우 아무개가 있는데 용모가 뛰어나 천신(天神)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지목하였다. 나가 다니면 기생과 창녀들이 다투어 따라다니므로, 낮에는 시내에 감히 나가지도 못했다. 

성종(成宗)이 풍진풍정연(豐進豐呈宴)을 베풀어 관기와 사창이 뜰에 가득 찼었는데, 종일토록 그들이 모두 한곳만 주목하였다. 성종이 괴이하게 여겨 하문하니, 시신(侍臣)이 대답하기를, ‘선전관 이 아무개가 시열(侍列)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성종이 편전(便殿)에 있을 때, 시신(侍臣)이 들어가 입시하였는데 이모(李某)도 입시했다. 때는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임금이 용포자락에서 백첩선(白貼扇)을 꺼냈는데, 흰 명주가 석 자쯤 매어 있었다. 손으로 두세 번 부치더니 이어서 시신에게 묻기를, ‘이 부채를 누구에게 줄 것 같은가’ 하니, 어떤 사람은 정승, 어떤 사람은 주병상서(主兵尙書), 어떤 사람은 종백(宗伯)으로 문형(文衡)을 장악한 사람에게...”라고 하였다. 

임금이 잠자코 돌아보다가 마침 이모(李某)가 약간 멀리 입시함을 보고 그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네가 가질 만하다.”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사랑 받음을 영광이라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질투하여, 그는 종신토록 벼슬을 얻지 못하고 선전(宣傳)의 직함에서 그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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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하는 이충백(李忠伯)은 17세기중반 효종대의 정묘호란때 활약한 동명이인의 이충백보다 앞선 즉, 16세기의 인물입니다. 이는 오산설림초고의 저자 차천로가 어렸을 적, 이 이충백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빙(李砯)공이었는데 아우, 즉 작은할아버지가 '신급' 미남이었다는 겁니다. 성종대이므로 1469년 ~ 1495년의 일입니다.

여기서 이모(李某)는 이름이 아니라 '이 아무개'라는 뜻입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신'같았는데, 여자들이 따라다녀서 낮에는 길거리를 지나다닐수도 없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성종의 연회때도 모든 사람이 이 분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 성종이 미모로 편애하자 타인들이 질투, 결국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잘 생겨도 피곤하다는 전형적인 예.

이 분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문관이 아니라, 용맹한 사람을 뽑아 세우는 무관출신 선전관이라는 점입니다. 무예도 출중했겠죠. 이분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해 아쉽군요 (아마 이빙-이충백 가문에서는 알고 있겠죠). 참고로 흥미롭게도 작은손자 이충백에게도 비슷한 느낌의 기록이 실록에 등장합니다.

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8월 7일(갑진)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라 수사 이충백(李忠伯)은 별로 뛰어난 능력도 없는데 외람되이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하는 은총을 받았으니, 몸이 엎어지기 전까지 국가에 보답할 공효(功效)를 생각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친병(親病)과 신병(身病)을 핑계대고 교만하게 사직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만일 이런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누가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떠나 먼 지방에 나가 고생하려 하겠습니까. 이충백을 파직하여 무부(武夫)들이 제 마음대로 편하려는 습성을 막을소서.

능력도 없는데 (아마도 외모로)  은총을 받고 있는 주제에 사직이나 하고 있으니 내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는 아파서 그런거 가지고 뭘 그래..라는 식이죠.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충백의 사직은 친병 때문이었을 것이니 윤허할 수 없으며, 윤옥에 대한 일은 서서히 발락(發落)하겠다.”

간접적이지만 두 기록이 겹치는 느낌입니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처럼 이충백 역시 무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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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의 '이모'씨와 비슷한 문신의 예로 효종때의 박태보(朴泰輔)가 있습니다 (아래 소개하겠지만 효종자체가 한인물). 박태보는 17세기중반 (1654 -1689년)의 인물로 문신입니다 자는 사원, 호는 정재로. 반중추부사 박세당의 아들이었습니다. 당대 모든 처녀들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의 미남이었습니다. 미남에 더해, 이분은 곧은 성품의 '암행어사'로도 유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에피소드가 전합니다. 어느 날 한 대갓집의 여종이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는데, 신분 반상의 법도가 엄한 당시에 도저히 나설수가 없었죠. 그녀는 며칠을 상사병으로 보내다가 결국 박태보의 유모를 찾아가 하루만이라도 그와 함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모는 이를 그의 양어머니에게 말했고, 이는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에게 전해집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이 박세당의 인품. 아들인 박태보를 설득해, 가엾은 여인이 원한에 죽게되면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로 하루 데이트를 성공시킵니다. 박태보가 여종을 하루 만나준 것이죠 (여종은 이 하루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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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국의 '왕'이나 유명한 권력가의 미남 계보는 어떻게 될까요? 모든 분을 나열하진 않겠지만, 대충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유명한 '호동왕자'. 호동(好童)이라는 이름자체가 '수려한 아이'란 뜻도 되지요.

다음으로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춘추를 보고 당 태종은 '신비스럽구나, 신성지인의 풍모다'라고 평했고, 당시 일본의 기록에서도 김춘추가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 권 25, 대화 3조년의 기록으로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한다'라고 씌여 있지요.

끼리끼리 뭉친다고 명장 김유신 역시 미남이었습니다. 청년시절 자신을 인정치 않던 할머님께 얼굴 한번 내비치니 바로 인정해버렸다는 야사가 전합니다. 할머니가 김유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모계중심이 강했던 당대 신라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한데 이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으니 한번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링크).

신라 당대 화랑들도 미남집단. 여러 기록이 있지만 [연려실기술] 하나만 보자면 "진흥왕(眞興王) 이름은 천맥종(川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중략. 미남을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불렀으며, 뒤에 또 미녀 두 사람을 간택하여 원화(源花)라 이름했다. 한 사람은 남모(南毛)요,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니, 나라 안 남자들로 하여금 좇아 놀게 하여 그 행실과 의리를 보아 등용했다. 뒤에 다시 미남을 뽑아 화랑(花郞)이라 하고, 명망 있는 이를 택하여 등용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을 만들어낸, 15세기말 폭군 연산군 역시 여리여리하고 고운 꽃미남에 가까운 인물. 어찌보면 그때까지 조선국왕중 처음으로 체구가 크지 않고 여리여리한 생김새였습니다. 백성 하나가 "우리 왕은 허리가 얇아서 저모양 저꼴이다"란 식의 말을 한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전에 실록기록을 갈무리 해둔 부분이 있는데 찾지 못하겠네요. 

다른 기록으로 대신하자면 연산군 2대뒤인 인조 때 이덕형의 [죽창한화]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덕형이 백 살이 넘은 노인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노인은 어린 시절 한양에 갔다가 연산군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노인의 회상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 구절입니다:
 "“젊은 시절의 일을 기억할 수 있소?” 하니, 늙은이는 입을 열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쟁쟁하고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7세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서 번(番)을 들었는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이 방탕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습니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습니다. 연산이 전교(箭橋)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는데, 화양정(華陽亭)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시신(侍臣)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습니다.”". (하는 짓은 역시나;;)

따라서 이런 연산군은 에러
장비수염 이대근도 아웃
16세기의 유명한 조광조 역시 엄청난 당대의 미남. 조광조가 거리에 거닐 때마다 아녀자들이 담장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고 구경했다는 야담이 전하고, 17세기 [어우야담]에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것이 어찌 남자의 얼굴이란 말이냐"라며 찬탄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이렇게 적혀있지요 "그는 “얼굴과 모습이 뛰어나게 아름다워서 늘 거동을 들여다보며 ‘이것이 어찌 남자의 길상(吉相)이란 말이냐’하고 탄식했다” 한다(於于野譚). 비슷한 시대의 '류성룡' 역시 미남자. 주변국에도 알려졌던 얼굴이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셨다는 (참고로 이분의 후손이 '류시원'. 직계는 아닙니다만 꽤 가깝죠).

17세기의 국왕, 효종은 한 술 더 뜹니다.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 안타깝게도 이런 분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침을 잘못 맞아서 이런 얼굴이 다 부어서 돌아가시죠. 승하하시고 어깨가 넓어 관이 안맞아 다시 짜기도 할 정도로 풍체도 좋으셨습니다.

18세기,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 역시 미남입니다.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만 입술, 왕위와 어울리지 않는 남성상이라고 당대에는 평가받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영조의 미모(?)는 어머니에게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머니 숙빈 최씨는 양반집 규수가 아닌 무수리 출신입니다. 당대의 이러한 신분 상승은 미모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설명이 부족해집니다.

영조가 '미모'에 관심이 있었던 왕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경주 남산 근처의 풍천 임씨任씨 중, 任玉 이란 사람이 서자임에도 학문과 인물이 충중해서 대과에 붙습니다. 이때 영조대왕이 그의 얼굴을 보고 반해서 내려와 직접 손을 잡으며 '아직 이런 미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18세기 영정조대의 세도가이자 역린의 주인공 정조대왕의 최측근, 흥국영 역시 초식남계열 미남. 당시 그를 싫어하던 정조대왕의 생모, 혜경궁 조차 '한중록'에 '잘 생겼다, 너무 잘 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내 아들을 홀렸다'라고 썼습니다. 키도 크고 예쁘장한 용모때문에 동궁에게 총애를 받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19세기의 헌종 역시 빠지지 않는 미남입니다. 당대에 궁내에서 영조에 버금가는 미남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미모때문에 궁녀들이 끊이지 않고 빠져 유혹했다고 합니다. 23세로 요절하십니다.

 최근 만들어진 헌종 어진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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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썼는데... 주인공을 빼놓았습니다. 과연 '정조대왕'은 미남이었을까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할아버지 영조가 조선국왕에서도 역대급 미남임을 감안할 때, 그리고 그의 운동능력을 생각할때 풍체좋은 미남이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언급했듯이 최측근이었던 흥국영 역시 꽃미남이기도 했구요.

'얼굴' 자체로 좋은 소재가 될 듯해 나눕니다.



덧글

  • 플로리몽 2014/05/07 10:02 #

    이번에 새로 번역되어서 나온 자저실기라는 책에 보니
    잘 생긴것때문에 박문수에게 성희롱(갑작스레 입맞춤을 당했다네요)교리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영조의 경우는 루머겠지만..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
    당대의 풍운아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죠.
    생김새가 비슷했다나 뭐라나..
  • 역사관심 2014/05/08 00:55 #

    자저실기가 나왔군요!
    이게 참 체하는 문집과 다른 쪽이라 흥미있는 글인데... 역시 내용이 그답습니다 ㅎㅎ.
  • Cheese_fry 2014/05/09 02:26 #

    잘 읽었어요. ^^ 덧글란 맹꽁이 서당 배경이 새삼스럽기도 하고요. ㅎㅎㅎ
  • 역사관심 2014/05/09 03:15 #

    ^^; 감사합니다. 훈장이 된 느낌입니다 ㅋ
  • 9회역전만루홈런 2014/05/13 21:26 #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당시와 지금의 미적 기준이 다소 다른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원빈이나 강동원같은 꽃미남을 생각하면 조금 에러일까요? 오히려 호남형의 다소 푸근한 인상일수도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
  • 역사관심 2014/05/13 22:05 #

    아마도 그렇겠죠? ㅎㅎ
    그런데 몇분의 경우 최근의 관점과도 맞아 떨어지는 분들도 엿보입니다. 이것이 남자의 얼굴이냐 라는 조광조나 호리호리한 연산군같은 분의 경우 처럼 말이죠 :)
  • 멋진만남 2014/09/13 20:17 # 삭제

    연산군이 요즘으로 따지자면 장근석 송중기 박진우(배우)스타일의 꽃미남이었다니...!
  • 역사관심 2014/09/14 00:15 #

    미모와 행동은 관계무라는 산 증인!
  • 이산외모 2014/10/27 22:29 # 삭제

    정조는 얼굴은 할아버지인 영조를 많이 닮고 풍채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닮아서 키크고 뚱뚱한 스타일이였다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4/10/27 23:35 #

    나름 풍채좋은 미남이었겠네요. 혹시 사료출처를 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랑과 진실 2015/05/06 23:35 # 삭제

    효종 헌종 연산군 등이 미남이었단 말은 들어봤어도, 영조는 금시초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몇점 안 남아있는 어진들 중 그의 것도 남아있는데, 짝 찢어져 올라간 눈에, 심하게 휘어진 메부리코 아, 꿈에 볼까싫은 아주 천박한 얼굴이었네요. 미남은 개뿔~ 그나마 남자얼굴이라 다행, 여자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면 완전 최악.
  • 역사관심 2015/05/07 00:36 #

    영조가 미남이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어진은 제가 봐도 이상하지만 ㅎㅎ. 어진이 정말 그대로였다면 요즘과는 미남기준이 다를수도 있고, 어진이 그대로가 아닐가능성도 배제는 못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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