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여름, 경운궁에 등장한 귀신의 무리 (이이첨의 경험담) 설화 야담 지괴류

요즘 괴담이나 지괴류 이야기를 자주 전하는데 이번에는 하나의 요괴가 아니라, 여러 귀신의 집단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소개한 천예록의 잡귀무리도 있긴 합니다만).

유몽인(1559년~1623년)의 어우야담 (於于野譚)에 이런 기이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시어소(時御所)인 경운궁(慶運宮)의 승정원(承政院)은 전쟁 전 평시에는 정릉동(貞陵洞)의 종실(宗室) 집이었는데, 평소에 귀신이 많다고 했다. 

(한번은) 종실이 말을 잃어버리고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말이 누각 위에서 울어서 그 봉하여 잠근 것을 살펴보니, 
예전과 같았는데 말이 그 속에 있었다. 

승정원으로 쓰이게 되어서는 관리가 그 여막에 있으면 매번 꿈에 가위눌릴 때가 많았다. 
한 승지가 들어와 숙직을 했는데, 여름밤이어서 창과 방문을 사방으로 열어두었다. 
아전들은 모두 창 아래에서 자고 있었고, 승지 홀로 잠들지 않았다.

홀연히 키가 8,9자쯤 되는 귀신이 나타나, 긴 정강이를 가진 큰 키로 창 밖에 서 있었다. 
또 조금 작은 한 귀신이 걸어와서 큰 귀신 왼쪽에 섰다. 
또 작은 귀신들이 연이어 와서 큰 귀신 오른쪽에 섰다. 
모두 다 서로 의지한채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식경의 시간이 흘렀다. 

승지는 눈을 뜨고 자세히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말을 하지도 놀라지도 않으며, 그 하는 바를 보고자 했으나, 
많은 아전들은 코를 골고 자면서 그것을 살피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아이 귀신들이 큰 귀신을 둘러싸고 대여섯 바퀴를 빙빙 돌았다. 
큰 귀신이 먼저 뛰어 달아나자, 여러 귀신이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승지는 바로 이이첨(李爾添)"이라고 한다.

=====

요전에 경덕궁 (현 경희궁)의 귀매어린 목재에 대한 포스팅('대를 이어간 목재귀매')을 한바 있는데, 이번에는 경운궁 (현 덕수궁)입니다. 우선 시어소라는 것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뜻합니다. 경운궁의 '승정원'이라는 건물은 현전하지 않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황후의 능으로 원래는 현 중구 정동에 있던 것을 1409년 (태종 9년)에 이곳, 즉 현재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깁니다. 태종이 왕자의 난후 앙심을 품고 당시 사대문 밖이던 이곳으로 옮겨버린 것입니다. '정동'은 원래 명칭이 '정릉동'입니다. 즉 '정릉이 있던 동네'란 뜻인데 현재는 성북구의 정릉동이 이 명칭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貞陵

즉, 여기 등장하는 '정릉동'은 성북구가 아닌, 원래 중구 정동입니다. 이 정동의 왕가 친척 저택에 원래 귀신들이 자주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경덕궁의 귀매목재와 비슷한 맥락이 되는 것이지요.

그럼 여기 등장하는 '종실'이란 누구일까요? 이 글의 '전쟁'은 임진왜란(1592)입니다. 따라서, 이 저택은 임진왜란후 경운궁으로 쓰이게 되는 곳이며 이 원저택의 주인을 찾으면 됩니다. 누굴까요? 

월산대군
바로,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입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합니다. 월산대군은 1454년 출생하지만, 겨우 20세에 죽은 아버지처럼 역시 1488년, 만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 기담을 살펴보자면 월산대군이 하루는 말이 사라져서 어디갔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알고보니 '누대'안에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평소에 이 누각을 문으로 잠궈두었나 봅니다. 괴이한 것은, 문이 평소처럼 단단히 잠궈져 있는데도 그 큰 말이 안에 들어가 있더라는 이야기. 

따라서, 이 저택은 적어도 15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지요. 지어진 지 약 130년후, 경운궁이 된 겁니다.

이이첨
이런 배경을 가진 이 집이 경운궁으로 쓰이면서, 더욱 괴이한 일이 계속 발생하는데, 관리들마다 가위에 눌리는 둥 계속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로 보아) 승지로 부임한 이이첨(李爾瞻, 1560년 ~ 1623년)이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상세한 묘사가 돋보이는데, 이이첨이 한 여름에 숙직을 하는데, 한 여름이라 문을 모두 열어두고 잡니다.

그런데, 아전들은 모두 잠들지만 더워서인지 이이첨 혼자 안자고 있었는데, 8-9자 정도 큰 키의 귀신이 창밖에 문득 서있었다는 거죠. 8-9자면 약 2미터 40에서 2미터70센티로 엄청난 장신. 정강이가 긴 귀신이었다는 상세한 묘사까지 써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그보다 조금 작은 귀신들이 연이어 와서 그 왼쪽에 한놈, 그리고 오른쪽에 우르르 차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더 무서워..).

이대로 두식경(한시간정도 되겠죠)을 보내는데, 이이첨은 강심장으로 놀라지도 않고 이 무리를 가만히 관찰합니다. 그러자, 키큰 귀신은 가만히 서있고, 작은 귀신들이 그 주위를 대여섯바퀴 빙빙 돕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큰 귀신이 후다닥 계단아래로 달려내려가고 여러 귀신이 우르르 그 뒤를 따라가는데, 계단아래로 나아가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

이이첨은 광해군대의 실세이자, 인조반정으로 삼대를 멸족당하는 참혹한 몰락을 맞이한 인물입니다. 이 이야기의 정확한 시기는 1609년의 여름입니다. 왜냐하면 이이첨이 '승지'로 있던 해는 그가 의주부윤이 되는 1609년말의 딱 한해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공교롭게도 이이첨과 거의 생몰년대가 같은 인물입니다. 유몽인은 1559년~1623년, 이이첨은 1560년~ 1623년. 딱 한해 차이로 태어나 같은 해 사망합니다. 따라서 이 기담은 유몽인이 '실시간으로 전해들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이 이야기는 '인조반정의 역적' 이이첨을 깎아내리기 위한 어떠한 글일 가능성은 적어집니다. 왜냐하면 유몽인 자신이 억울하게 인조반정의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 유몽인은 사실 어떤 붕당에 얽매이기 싫어한 인물임에도 아들과 함께 이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정말로 이이첨이 그대로 '본' 것일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떼로 서있던 귀신무리. 삽화로 누가 한번 제대로 구현해 주면 좋겠습니다. 
오싹...

전설의 고향 (네이버웹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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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BaronSamdi 2014/05/09 13:10 #

    어렸을때 어느 괴담집에서 읽었던 내용인데요 우리나라도 모로호시 다이지로같은 만화가가 나와서 이런 것좀 그려주었으면 합니다
  • 역사관심 2014/05/09 15:19 #

    정말이지 고우영식의 화풍이후 맥이 끊긴 한국적풍으로 누가 좀 충실하게 시리즈를 그려주면 좋겠네요. 현대식이거나 웹툰정도의 퀄말구요.
  • Cheese_fry 2014/05/10 03:22 #

    너무 세세해서 오싹하네요.
  • 역사관심 2014/05/10 09:52 #

    그렇습니다. 다같이 서서 꼼짝도 안했다는 구절이 가장 오싹;;
  • 零丁洋 2014/05/10 07:55 #

    반정 세력이 이이첨을 사갈같은 인간으로 묘사하지만 귀신과의 대면을 보니 인물인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 역사관심 2014/05/10 09:52 #

    대담하죠. 대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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