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월정교, 고찰할 새로운 기록보고 月靜橋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최근 월정교 복원이 한창 마무리단계입니다. 특히 '누각'부분에 관해 설들이 분분한데, 오늘은 파악하는 한 아직 학계에서도 발표된 바가 없는 월정교에 대한 정보 한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재유고의 기록

월정교가 '언제 완전히 사라졌느냐'하는 문제는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고려중기 명종대 인물인 (12세기말), '입만 열면 시가 나왔다는' 천재문인 김극기의 시에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라고 표현월정교는 무지개다리 (즉 아치형)'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으며 (이 홍교라는 표현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그보다 약 100년 후인 13세기말인 1280 (충렬왕 6)에 경주 월정교를 중수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이미 월정교()는 월정교()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 -->자의 변화에 대해서는 일정교의 그것과 일치시킴으로 추측해 본 바 있습니다 (한국의 사라진 대표다리(2)- 월정교와 일정교). 하지만, 15세기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유지(遺址)만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14세기에서 15세기말사이에 파손된 것이 아닐까 대강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필자가 발견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정조대의 학자인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문집인 [이재유고]의 이 부분입니다.

和寄李時晦 (이재유고 권3)

璧沼團圓樂。江樓契闊悲。同心懷故友。尙古有餘師。一出時應可。先歸分自宜。秋聲指梧葉。看看別離期。

聚散人間事。何須管喜悲。知君肖先祖。羞我負賢師。月靜橋門好。風淸帆腹宜。詩成忽自笑。浮世且前期。

굵은 체로 표기한 부분을 해석하면 月靜橋門好, 즉 달은 고요하고(고요하니) 교각의 문은 좋구나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뒷구절이 '바람은 맑고 돛단배는 잘 간다' 정도의 해석이 되므로 우선 여기 나오는 교각은 말 그대로 다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月靜橋' 라든가 月靜橋門好 라는 표현은 적어도 조선시대의 오언시에서 단 한번도 비슷한 표현이 등장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검색으로도 찾기 힘듭니다. , 흔히 쓰는 절구표현이 아닐 것이란 것이지요. 또한 앞뒤를 살펴도 뜬금없이 '교각문'이란 단어는 이상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단어 즉 月靜橋라는 글자는 현재 알려져있는 '月淨橋'나 ''와 다릅니다. 이 문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의 신라교각으로 여긴다면 검증해 보아야 할 것은 우선 두가지. 이 싯구의 '원문 출처' '쓴 사람'입니다말씀드린대로 이 글이 실린 이재유고의 저자는 황윤석 선생입니다. 이분은 흥덕 (경북 울진) 평해 황씨가 본관이지만,전라북도에서 출생하고 주로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방대한 [이재유고]를 이분이 모두 직접 창작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 옛싯구와 글을 보고 적은 감상도 있고, 그대로 옮겨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다른 많은 문집이 그러하듯 말이죠).


원문史官 이존오의 싯구

이 부분은 3 ( 3)에 적혀 있습니다. 1764년∼1770 10월까지 지은 시 130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1764년 황윤석이 친구인 이엽 李爗(17291788)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이엽의 선조인 이존오 선생 (李存吾)의 詩軸을 본 소회(所懷)를 적고 있는 것이란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존오(李存吾)는 누굴까요

그는 1341년 태어나 1371년에 죽은 인물로, 1360(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水原)에 있던 경기관찰도(京畿觀察道)의 서기(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된 사람입니다. , 고려말기의 인물로,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관'출신입니다. 이존오의 저서로는 석탄집(石灘集)2권이 현전합니다. 그런데 이 석탄집은 그의 생전 출간된 것이 아니라저자의 시문은 사후에 모두 흩어져 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10세손 이유경(李裕慶)이 널리 문헌을 조사하여 저자의 시문을 모아 유고(遺藁)를 편차한 것입니다. 따라서, '흩어진 싯구'중 바로 이 황윤석 선생이 후손인 친우 이엽에게 보낸 싯구가 바로 이존오 선생의 싯구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시를 이렇게 평범한 탈속세 싯구로 해석할수도 있지만, '월정교'라는 저 단어에 그럼에도 주목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존오 선생이 바로 경주 이씨 출신이며, 월정교가 현존하던 동시대에 살았던 무엇보다, '사관'출신이라는 그의 배경때문입니다. 이존오는 그가 후에 개성과 여주군과 충남등으로 거처를 옮겨다닌 것만 나와 있을뿐, 출생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주이씨가 아니라, 경상북도에 어릴 적 거주한 사람임이 여러 정황으로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예를 두어가지 들어보면 우선 [고봉집 권2]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천사(天使)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중략 발췌)

이존오(李存吾)는 경주(慶州) 사람입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강개(慷慨)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대범하고 묵중하여 말이 적었습니다. 나이 10여 세 때 〈강창(江漲)〉이란 시를 짓기를 “온 들이 다 묻혔는데, 높은 산만 가라앉지 않았네.〔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라고 하니, 식자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경주이씨라는 뜻일수도 있습니다만, 이 분의 딸과 결혼한 사위인 '권근'이 유명한 경북 안동권씨이고 이쪽에 살았던 것으로 보아, 개성에서 생활하면서도 계속 본가가 있던 경주지역에 다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분은 신돈의 정책에 극렬히 반대하기도 했지요. 이에 공민왕의 격노를 사 공주 석탄(石灘)[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의 옛 지명]으로 좌천, 이곳에서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특이하게도 이엽의 아버지 이신의 [李愼儀, 1551~1627]도 호가 석탄(石灘)입니다. 정작 이엽은 전북 남원에 살았습니다만 (같은 전북에 거주하던 지역성으로 인해 '황윤석'선생과 연결된 건지 모릅니다).

'황윤석 한시에 나타난 고의식孤意識 연구'(2008, 이상봉) 이란 논문을 살펴보면 이 3권의 전체적인 성격과 의의가 더욱 명료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Ⅲ장에서는 황윤석의 시가 나타내는 孤意識이 어떠한 표현 국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孤意識을 어떻게 인식하고 승화시키며 이겨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첫번째는 歷史 古蹟을 통한 自意識의 反芻이다.앞서 말한 대로 이재는 평생을 고향을 떠나 지냈다. 그러면서 고독감에 슬퍼하기도했지만 여행 중에 맞이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유물을 통해 자기 자신이 느끼는 孤意識을 역사적 인물의 숭고한 孤意識과 동일시하여 반추해보곤했다.

말 그대로 '역사 고적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따라서, '월정교'라는 단어가 역사적 문화재의 그것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한자입니다. 앞서 살펴본대로,1300년대 중엽인물인 이존오보다 약 60년전인 1280년의 기록에 橋 라고 표기한 최초의 기록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원래의 다리 이름이던 橋이라는 표현과도 다른 이 '橋'라는 글귀는 유일한 기록이 됩니다. 더 후대인  17-8세기 이만복의'식산집', 19세기의 '가오고략'등에도 어김없이 월정교는 橋 이렇게 씁니다.

세글자의 음과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淨= 1) 깨끗할 정, 2) 맑을 정

靜= 1) 고요할 정, 2) 깨끗할 정 

精= 1) 정할 정, 2) 깨끗할 정

'사관' 이존오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그가 '싯구'로 표현할때 운치있도록 원래의 이름인 橋을 가장 비슷한 음훈을 가진 橋로 표기했을 가능성을 쉽사리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18세기이후 사료들과는 달리, 시기적으로 이 단어와 최초로 이라는 글자가 등장하는 1280년과 이존오의 시기는 길게 잡아 90년도 채 안됩니다. 당시까지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열어두고 연구를 진행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보자면, 역으로 이 한자는 이 기록이 (이미 "精"를 쓰던 18세기의) 황윤석의 창작이 아닌 14세기 이존오의 원문을 그대로 썼음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참조로 현재 각종 한자사전을 참조해보면 이 두글자는 '서로 모양이 가장 비슷한 같은 음을 가진 글자'로 등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생김새도 이 淨, 靜 두 자가 보다 서로 더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1280년의 '월정교 중수'기록은 겨우 90년도 안된 후의 인물인 이존오가 '직접 존재하던 월정교'를 보았을 가능성을 매우 높여줍니다


본 기록의 중요성

이야기가 돌고 돌았습니다. '단어'의 근거를 찾기 위한 간략한 여정이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썼느냐하면, 만약 이 문구가 이존오의 그것이며, 또한 월정교를 뜻한다면 복원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 존재입니다月靜橋門好 즉, 월정교의 문이 좋구나, 아름답구나 같은 해석이 가능하고 따라서, 당시 월정교에 '문 (문루)' 형식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경우, 현재진행중인 '누각' 형식은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누각이 없는 교각에 문은 이상한 모양이 되는 것이니까요.

또한 이 기록의 중요성은 현재 1280년 정도로 최대 존속기간을 잡고 있는 월정교의 연대를 적어도 1300년대중반으로 끌어내려 줍니다아무튼 한번 깊이 살펴 볼만한 구절입니다.

현재 진행중인 월정교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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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이외에 국내기록으로 '月橋' 라는 한자가 쓰인 기록은 1975년에 정재종 교수님의 논문제목 (아래)가 유일합니다.

鄭在勳(1975), “慶州月靜橋址 遺址調査”, 文化財, 제9권, 文化財管理局

특이한 점은 같은 학회지의 같은해 같은 권 (9권)에 月精橋 라는 단어로 다른 논문도 개제하셨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한번 직접 뵙고 여쭤보고 싶어집니다.

정재종(1975), “慶州月精橋 遺址調査”, 文化財, 제9권, 文化財管理局, pp. 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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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엑스트라 2014/05/12 09:25 #

    분명 몽골과의 전쟁때 황룡사와 같이 불타버린건 아닐련지...........
    그런데 위치는 어디일련지가 궁금하네요.
  • 역사관심 2014/05/12 23:44 #

    안녕하세요 엑스트라님, 완전히 사라진 시점은 본문에서 언급했듯 몽고전쟁보다는 후대에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다만, 1280년의 중수기록이 아마도 말씀처럼 몽골항쟁 시기에 망가진 다리를 수리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해볼수 있겠습니다.

    위치와 교각의 규모는 이미 80년대 (정확히는 84년에서 86년까지의 발굴로)에 드러났습니다. 아래글을 보시면 지도가 있으니 참조하시길.
    http://luckcrow.egloos.com/2252724
  • 솔까역사 2014/05/12 09:28 #

    멋지군요.
    재건할 때는 단청을 안하거나 좀 옅게 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저 다리가 한국적인 다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꼼꼼한 사료수집에 찬사를 보냅니다.
  • 프랑켄 2014/05/12 22:02 #

    단청은 이미 다 해놓은 상태입니다. 조선시대와 별반차이가 없어서 문제시되고 있긴 하지만요.
  • 역사관심 2014/05/12 23:55 #

    프랑켄님의 말씀처럼 아쉽게도 또다시 단청에 대한 고증문제가 불거질 듯 합니다 (특히 문양부분). http://cfile30.uf.tistory.com/image/2030BB3B517007971162EE

    왜 이렇게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청의 경우는 다른 부분보다도 삼국시대의 형태와 색감이 잘 남아 있는 편인데 왜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문화재청등에서 시대별, 그리고 건축물의 부분별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서, 아무리 지자체에서 (경주시등) 사업을 진행하더라도 엄격한 기준에 의한 관리와 정보제공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런 글처럼(굳이 포함시켜본다면) 각계에서 현재형으로 나오는 학문적 성과도 복원에 실시간으로 고려할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황룡사의 경우만 해도, 한국건축학계나 고고학쪽에서 90년대부터 꽤 많은 성과가 있어왔는데 솔직히 요즘 한국사회의 화두인 '신뢰성'이 가질 않습니다. 즉, 과연 제대로 모두 살펴보고 꼼꼼하게 반영하는지 말이지요.
  • 아빠늑대 2014/05/13 05:48 #

    월정교에 대한 복원은 제가 경주에서 살때부터 있었는데 그때 부터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 '정말 그때의 모습이냐?' 라는 것이었죠. 사실 경주에서 시대 복원을 하면서 학설 변화에 의해 사업 자체가 뒤집어 지거나 딜레이 되는 경우가 한두건이 아니었죠.

    어느 정도의 타협은 감안할 만 하지만...
  • 역사관심 2014/05/13 08:00 #

    고대의 문화재복원에 그때그대로란 건 어느나라나 무리죠. 복원이 아니라 재건에 가까운 개념이며 사실 이런 용어정리부터 자리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같은 경우 이런 ' 재건' 노하우가 최근 여러가지 고증과 학계-문화재기관간에 자리잡는 추세라 확실히 배울만 합니다. 그냥 해보고 끝내는게 아니라 그 프로젝트를. 통해서 연구결과가풍성해지고 다시 다음 복원-중건때 다시 쌓인 노하우와 학계결과가 축적되서 쓰이고.

    항상 이야기하지만 하자말자의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상황에 도움이 별 안된다고 보는지라.. 결국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 ㅇㅇ 2014/05/16 12:53 # 삭제

    '월정교 문은 좋고' 뒤에 '바람이 맑아 돛단배는 잘간다'라는 표현을 보면 그 문이라는 것은 무지개 다리 아래의 아치를 말하는 것은 아닐지..
  • 역사관심 2014/05/26 11:36 #

    또 그런 해석이 가능한가요 ㅎㅎ 전문가들에게 맡겨보고 싶습니다.
    (다만, 무지개표현을 한 김극기가 명종대 1170년대-90년대, 즉 12세기말의 인물이므로, 1280년에 중수한 월정교는 이미 무지개다리모양이 아닌 문루와 반듯한 모양이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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