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요괴 (17세기, 천예록) 설화 야담 지괴류

필자가 즐겨 읽는 여러 야담집중에서도 이야기구성이 특이한 것이 많이 실려있는 [천예록, 17세기]에, 노파 요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야기 구성은 역시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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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요괴 [천예록] 중
士人家老嫗作魔

죽전방(竹前坊)에 어떤 선비의 집이 있었는데 선비는 외지에 나가 있고, 그의 아내만이 혼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어떤 할미가 문 앞을 지나다가 찾아와 구걸을 하였다. 모습이 마치 늙은 비구니 같았다. 나이는 비록 많았으나 생김새는 그다지 쇠약해 보이지 않았다. 

선비의 아내가 불러 물었다. 
"바느질을 할 수 있소?"

"할 수 있다우."

"만약 여기 머물면서 일을 거들어 주면, 내가 마땅히 아침과 저녁을 주어 구걸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렇게 할 수 있겠소?"

"그러면 아주 다행입니다.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선비의 아내가 기뻐하면서 그 할미를 머물게 하고, 그 할미더러 솜을 타고 실을 잣고 실을 감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였다. 그 할미가 하루 동안에 하는 일이 능히 7,8명이 하는 일을 감당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선비의 아내가 매우 기뻐하며 음식을 풍성히 차려 주었다. 
6,7일이 지나자 대접이 점점 소홀해져서 처음과 같지 않게 되자, 할미는 노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는 발끈해서 말하였다. 

"나만 혼자 있을 수 없으니, 우리 영감을 데려오겠다."

그리고는 즉시 일어나 나갔다. 잠시 후에 영감과 함께 왔다. 영감의 거동과 모습은 이른바 거사(居士)와 같았다. 

집 안에 들어와서는 곧 벽 위에 있는 감실을 비우게 하고, 두 영감과 할미가 문득 그 안으로 들어가 있더니, 곧 형상은 사라지고 노한 소리만이 들렸다. 

"음식을 극히 풍성하게 차려 올려라. 만약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집안에 어린아이들부터 차례로 갑자기 죽여내겠다."

친척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 보았다. (들어가는 족족)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곧 병들어 죽으니 누구도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겨우 열흘이 지나자 종들이 모조리 죽고, 선비의 아내만 남아 있었다. 

이웃에서 그 집을 바라보고 연기가 나는 것으로 그녀가 살아 있음을 알았다. 5,6일이 지나자, 연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었는데도 끝내 감히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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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소개한 같은 천예록에서 '두억시니'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누군가, 집에 불쑥 들어와 (이 이야기의 경우 아내가 나서서 들이지만), 갑자기 괴이한 병이 발생하고, 모든 이가 죽어나가는 이야기.

이 이야기들의 독특함은 여느 설화들의 '교훈'적 성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서사구조가 전혀 한국의 전통동화나 민담과 다른, '목격담'이나 '떠도는 괴담'수준의 구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할미귀신이 이야기만 봐도 물론 아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내오는 음식이 소홀해졌다고는 하지만, 고작 그정도의 일로 집안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그것도 아이들부터), 결국 주인공인 아내마져 죽어버립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섬뜩하기까지한데,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들도 죽을까봐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연기 (즉 밥짓고 방데우는)'가 나오다가 안나는 것으로 죽었음을 사람들이 추정하는 장면은 여느 설화에서는 보기 힘든 묘사입니다. 과연 마지막 5- 6일간 아내는 어떤 무서운 경험을 저 빈집에서 했을까요.

그나저나, '늙은 비구니'의 모습이었다면 머리카락이 없었을 겁니다. 또한, 그 남편을 불러왔는데 거사의 모습이란 것은 보통 두가지가 있는데 불교의 남자수행자 혹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지내는 유랑인같은 부류를 뜻하는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후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감실(龕室)을 비우게하고 둘이 들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집안에 불상등을 모셔두는 작은 방을 말합니다.

이것도 감실

마지막으로 이 괴담의 발생지는 죽전방(竹前坊), 아마도 한문이 같은 것으로 보아  죽전동(竹前洞)으로 추정됩니다. 죽전동은 1746년 영조대까지도 있던 곳인데, 이런 기록으로 그 위치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최근 남문 밖 칠패시장(七牌市場)에서 다량의 난매(亂賣)를 하고 무리를 누원주막(동대문 밖)과 동작진 등에 보내어 남북으로부터 한성에 들어오는 어상들을 유인하여 무려 1,100태(큓)를 칠패에 들여다 놓고 성 안에 있는 중도아(中都兒)를 데리고 와서 난전(亂廛)을 벌이고 있다. 남자는 바구니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성 중에 들어와 매매를 하고 있어 수각교(水閣橋) · 회현동(會賢洞) · 죽전동(竹前洞) · 주자동(鑄字洞) · 어청동(於靑洞) · 어의동(於義洞) · 이현병문(梨峴屛門) 등에 산같이 쌓아 놓고 있는 바 이러한 건어와 염어는 모두 칠패의 난전배(亂廛輩)가 분급한 것이다. 그리하여 본전(本廛)은 도산실업할 지경이고 금명간 파시(罷市)할 수밖에 없다.」 

이 기록에서만 보자면, 아마도 회현동 근처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아무튼 무서운 할머니 요괴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참고로 홍콩할매귀신입니다. 비슷한 삽화같은 게 있으려나 아무리 찾아도 역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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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4/05/13 20:3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5/14 15: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솔까역사 2014/05/13 21:34 #

    드라큐라나 프랑켄쉬타인 등과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요.
    으시시한 느낌이 더 와닿습니다.
  • 역사관심 2014/05/14 15:10 #

    그쪽이 고어물에 약간 가까운 느낌이라면, 우리는 역시 심리를 파고드는...이야기구조가 기승헉 혹은 기헉..식이라.
  • Griffin 2014/05/13 22:19 #

    교훈이나 훈훈한 마무리가 아예 없는 날것 그대로의 그냥 괴담으로만 기록이 있는 것도 신기하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덧. 링크합니다
  • 역사관심 2014/05/14 15:11 #

    현대의 우리에게 안 알려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교훈적인 이야기를 추려내서 동화형식으로만 활용해온 한국사회 100년의 필터링때문 같아요. 찾아보면 정말 많습니다.
  • 애쉬 2014/05/14 09:53 #

    집안의 노동력이 다 죽고난 뒤 요괴부부의 안위를 걱정하면 진건가요? ㅎ

    바이러스 감염과 비슷합니다. 괴질이나 감염성 질환을 의인화한 이야길까요?

    바느질로 은혜를 갚는다는 대목까지는 일본의 은혜값은 학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효용이 있어서 배양했더니 쌍을 갖추어 무시무시한 파국을 몰고오고 감히 두려워 관여조차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구조는 바이오해자드의 엄브렐라 사가 위치한 라쿤시티가 떠오르네요

    사람세상에 사람다운 연민과 박애가 사라지는게 정말 무서운 일인가봅니다
  • 역사관심 2014/05/14 15:12 #

    저도 그런 은유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특히 머리가 깨져죽는 두옥신의 경우, 그런 병이 있었나 싶은 정도;;

    라쿤시티~ 멋진 비유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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