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3년 이원여의 집에 나타난 귀신, 그리고 귀신의 아내 (16세기 조선괴담) 설화 야담 지괴류

최근 17세기 조선중기의 괴담을 주로 다뤘는데, 이번에는 더 옛날 16세기 광해군대의 이야기입니다.
[어우야담 (於于野譚)]에 이원여의 집에 살던 이들이 겪은 섬찟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원여의 집, 그리고 귀신의 아내
一.
萬曆 만력 癸未年 계미년(1583년) 겨울의 일이다. 

어린 나이에도 해서(楷書)를 잘 썼던 參奉 신우안(申友顔)이 正言 이원여(李元輿)의 집을 빌려 자고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그가 간 곳이 없었다. 

이웃 사람이 말하기를
“밤에 어떤 사람 같지 않은 형태 없는 것이 담 밖에서 참봉을 불러서 갔습니다.” 했다. 

매우 이상해서 집안 사람들이 그를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에 반송지(盤松池-연못이름) 가에서 그를 찾았으니, 자줏빛 옷이 그물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찾았다.

二.
그의 (이원여의) 집은 도성의 서소문 밖에 있었다. 이 집은 돌아가신 재상 이충원(李忠元)의 집이었다. 

이충원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간 곳을 몰랐다가 며칠 후에야 大川橋 아래에서 찾았다. 

풀로 짠 자리를 뒤집어 쓴 채 반쯤 죽어 있는 상태였다. 
집으로 데려왔으나 며칠 후에 죽어버렸다. 

그 딸을 찾기 전 한 선비가 그 장소를 가르쳐 주었었다. 
찾은 날 밤 그 선비의 꿈속에 어떤 것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새로 고운 색시를 얻어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너 때문에 색시를 잃었으니 네 아내로 대신해야겠다.” 
놀라 깨어 보니 그의 아내가 사라져 있었다. 

며칠 후 다시 아내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날 밤에 그것이 다시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는 네가 내 색시를 빼앗아 간 것에 화가 나서 네 아내를 취했으나 이제 다시 내 색시를 찾았으니 네 아내를 돌려보낸다.” 

그 선비가 사람을 시켜 이원여의 집에 알아보니 그 딸이 (이충원의 딸) 이미 죽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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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들여다 볼까요. 

이갸기는 두가지로 전개됩니다. 우선 이원여라는 사람의 집에 묵었던 신우안(申友顔)의 사망에 관련된 괴담. 그리고, 그 이원여 집의 전대 주인이던 '이충원'의 딸에 얽힌 괴담.

우선 이원여는 신기하게도 동명이인인 1586년생 이원여(李元輿), 즉 광해군대에 폐비문제때 활발한 활동을 벌인 인물, 과 동시대의 인물로 조금 전대에 태어난 선비로 보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자세한 생몰년대는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서울 서소문 바로 바깥쪽, 즉 지금의 서소문동이나 순화동, 혹은 봉래동 같은 곳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소문(西小門)은 소의문(昭義門)의 속칭으로 서울성곽에 있는 4소문(小門)중 하나입니다. 1396년(태조 5년)에 건립되었고, 원래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습니다. 이 서소문은 '시체문'이라 불리던 남소문 (광희문)과 더불어 송장이 4대문밖으로 실려나가던 문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는 항상 스산했습니다. 귀신이 나오기 좋은 배경인 곳이지요. 서소문의 바로 옆에는 죄수를 사형시키던 사형장까지 있어서 그 분위기는 대단했을 겁니다.
서소문 (소의문)- 일제시대 철거, 현전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송장문으로 불리던 두 소문

이 근처에 이원여의 집이 있었는데 신우안이란 사람이 묵다가 한밤중에 형체를 알수 없는 어떤 귀신이 담밖에서 그를 불러, 이끌려 집을 나가는 것을 이웃사람이 목격합니다. 신우안은 결국 익사한 채로 발견되는데 이 발견된 장소가 당시 유명한 반송지의 그물에 그의 시신과 자줏빛 옷이 걸려 있는 채로 발견이 됩니다.

신우안(申友顔)에 대해서도 알기가 힘듭니다 (아마도 영산신씨 가문에서는 아실듯). 다만, 이 분의 아들인 신술(辛述)의 기록으로 대강의 생몰년대를 추정할 따름입니다. 신술은 1578년 ~ 1658년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인 신우안은 대강 1550년경대의 사람으로 보아도 될것 같습니다. 즉, 이 기이한 경험은 이 분이 30대정도에 겪은 일 같습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반송지(盤松池)는  반지(盤池)는 또는 서지(西池)라고도 하며, 서대문 밖 반송방에 있던 큰 연못으로 명승지의 하나였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서지는 마치 이곳이 어디 동구밖 외딴 연못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사대문 바로 바깥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던 명승지였습니다.

경치가 좋아서 후대 화가 이윤영이라든가 그 유명한 심사정등도 반송지 근처에 집을 짓고 삽니다.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둘레가 넓어 150여보나 되고 수심 또한 깊었다 합니다. 도성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주로 서지(西池)라고 불리었고, 서지 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東池)가 있었고,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가 있었습니다. 모두 연꽃이 활짝 피던 곳이었다고 하죠. 이 세 연못의 연꽃은 궁궐의 연밥을 만드는 식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세기 경기감영도에 묘사된 반송지 (서지)- 후대긴 하지만 주위에 건물이 빼곡합니다.

이 가운데 서지의 연 규모가 가장 크고 무성하여 반송정, 모화루 등 명소와 함께 이곳에서의 연꽃구경은 도성민들의 커다란 즐거움이 되었다 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당시 세 연못 가운데, 서지의 연꽃이 보다 많이 피면 서인이 세력을 잡고, 동지의 연꽃이 성하면 동인이 우세하고, 남지의 연꽃이 잘 피면 남인이 힘을 얻는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내내 도성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서지는 서소문과 함께 역시 일제 때인 1919년에 메워져서 죽첨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광복 후에 금화국민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송지에서는 가끔 이런 '익사'가 일어나곤 했나 봅니다. 예를 들어 이 기록보다 약 90년후인 숙종대인 1671년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어제 본사의 낭청 3명을 동서도(東西道)에 나누어 보내 병자의 움막과 시체들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또 반송지(盤松池) 속에 밧줄로 묶인 한 시체가 물위에 떠 있었는데 이는 남에게 피살된 것 같고 죽은 시체가 우연히 못 속으로 들어간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형조로 하여금 그 동네의 행수(行首)와 유사를 추문하여 실상을 조사하게 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익사가 자주 발생하자, 나중에는 개성에 있는 사찰인 숭교사에 있는 연꽃을 옮겨 심게 하고 물고기도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꽃이 유명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신우안 선생을 '형체를 알수 없는 무엇'이 담장밖에서 불러내는 장면은 오싹합니다.

그림은 반송지옆에 살던 이윤영 (1714- 1759)의 그림- 18세기까지는 이 모습이었을지도..

이야기는 두 번째로 넘어갑니다. 

이번에는 이 이원여가 살던 집의 원래 주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충원(李忠元, 1537~1605)이 그 주인공으로,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형조참판, 한성부판윤등 승승장구하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한 공으로 공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분은 선조에게 일본장수인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는 본래 고니시 유키나가를 서로 이간질시키는 반간계를 내놓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때문에 본 야담에서도 '재상'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지요. 
1605년 돌아가시던 해 (69세)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충원 공 영정中

이 두번째 이야기는 더욱 더 놀라운 기이한 괴담입니다. 우선 이 이충원 공에게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대천교 밑에서 풀로 짠 돗자리를 반쯤 뒤집어 쓴채 거의 사망직전 상태로 발견됩니다 (대천교는 큰 하천의 교량에 흔히 쓰던 명칭으로 서소문 근처의 대천교를 찾으면 알수 있겠지요). 집에 데리고 왔으나 며칠내로 죽어버립니다.

무서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이 딸을 이충원이 찾게 되는 것은 어떤 선비가 대천교에 있던 그녀를 알려준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을 찾아 데려온 날 그날 밤, 이 이름을 알수 없는 '선비'가 꿈을 꿉니다 (이충원이 아니라). 그런데 그의 꿈속에 어떤 것이 나타나서, '내가 색시를 얻어 사랑하였는데 (이 색시는 이충원의 행방불명되었던 딸), 니가 알려준 덕에 빼앗겼다. 네 아내를 대신 데려가야겠다" 라고 합니다. 후다닥 깨보니, 선비의 아내는 이미 사라진 상태.

며칠 후에 다행이 자신의 아내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 귀신인지 무엇인지 모를 존재는 그날밤 선비의 꿈에 다시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전에 내 색시를 너때문에 잃었는데, 다시 내 색시를 오늘 찾았으니 네 아내는 돌려보내준다". 

선비가 찜찜하여 이충원의 집 (후대 이원여의 집)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그 딸이 사망한 날이었다는 것. 오싹한 이야기입니다. 저 꿈속의 존재는 어떤 귀매였을까요.

이 이야기가 실려있는 유명한 어우야담은 유몽인(1559년~1623년)이 지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연대인 1583년이나 바로 전대인 이충원(1537~1605)의 이야기는 전에 소개한 '1609년, 경운궁에 등장한 귀신의 무리'처럼 당대에 실시간으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저자가 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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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 오싹한 이야기는 여기 사족에 하나 더 등장합니다.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은 기억하시는 이야기가 하나 있지요. 바로 "대를 이어간 경덕궁 목재귀매, 그리고 추적" 이란 글로 1694년 경덕궁 (현 경희궁)의 도총부 목재가 된 (추정) 윤휴의 저택의 목재에 서린 귀신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대의 사람인 이 이충원의 집, 즉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된 이 저택 역시 헐려서 이보다 76년전인 1618년 역시 '경덕궁의 목재'로 쓰입니다. 광해군 10년 (1618년)의 기록입니다.

광해 13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0월 16일(신미) 
경덕궁 공사에 사용할 재목과 연목을 서둘러 바치게 하라고 전교하다    

“올 겨울에 재목을 벌목한 뒤라야 내년 봄 공사가 정지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경덕궁(慶德宮)의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황인데, 요즈음 대내에 놀랄만한 변고가 더욱 심해지고 있어서 이곳에는 일각도 그대로 머물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귀물(鬼物)과 요변(妖變)이 속출하는 곳에서 머물고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
이전에 하교한 대로 재목과 연목(椽木)을 십분 참작해서 배정하여 이번 달 안으로 도감관을 내려 보내 급히 벌목해서 실어 나르게 하라. 그리고 김흡(金洽)이 산 나무와 이충원(李忠元)의 집 재목을 아울러 속히 재촉해서 실어 바치게 하여 사용하라. 그리고 이미 벌목한 연목은 속히 올려 보낼 일로 각별히 행회(行會)하라. ”

귀신이 이미 출몰하고 있던 경덕궁에, 귀신으로 사람이 몇이나 죽어나간 이충원의 집 재목을 재촉해서 사용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조선중기...지금의 경희궁에 귀신이 들끓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록에도 나오듯).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후일 알아보고 싶어지는군요.



덧글

  • 동글기자 2014/05/14 17:27 # 삭제

    무서워용! 잘못한 것도 없는데~
  • 역사관심 2014/05/15 04:32 #

    괴담의 묘미!
  • 솔까역사 2014/05/14 18:03 #

    재미있네요 ^^
    예전에 시골에서 상여를 보관하는 곳을 굉장히 무서워했었는데 그런 느낌이 납니다.
  • 역사관심 2014/05/15 04:32 #

    어릴 적 그런곳이 있다면 기겁했을 것 같습니다.
  • Cheese_fry 2014/05/15 07:26 #

    읽고 싶은데 무서워서...ㅜㅠ;;
  • 역사관심 2014/05/15 07:50 #

    아침이니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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