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뒷이야기 (무용담)- 명량, 회오리바다 개봉에 부쳐 역사

올해 7월, 기대하고 있는 '명량, 회오리 바다'가 개봉합니다. 영화포스터에서의 충무공은 무장의 내음이 철철 흐릅니다.
하지만 사실 그간 우리에게 충무공의 빛나는 승전보는 대부분 그의 찬란한 해전 전술가로서의 승부사적 기질과 불굴의 정신력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무공' 그 자체를 보여주는 데는 조금 인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고대 그리스도 아니고, 장수가 직접 백병전을 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야담집인 청성잡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나눕니다. 충무공이 무명시절의 무공담이자 그의 인생의 벗 유성룡과의 드라마틱한 첫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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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잡기(靑城雜記)
서애(西厓)와 충무공의 첫 만남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로 있을 때 귀성(歸省)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은 많아 서로 앞 다투어 배에 오르느라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평복 차림으로 홀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 올라서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배에 오른 것에 화를 내며 거침없이 욕을 해 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모두 분개하여 심지어 그를 대신해 싸우려고까지 하는데도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였다. 서애도 속으로 그를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이 말을 몰고 먼저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자가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길손이 왼손으론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는데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하였다.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서애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군문(軍門)에서 살펴보니 바로 훗날의 충무공이었다. 서애가 공을 알아본 것은 사실 이 일에서 비롯된 것이지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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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유성룡이 배를 타고 가는데 일행중 왠 술취한 막 되먹은 인간이 배에 먼저 올랐다고 말을 데리고 탄 한 길손에게 쌍욕을 해대고 막 대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가 너무 막 되먹어서 같은 배에 탄 다른 승객들이 외려 화를 내는 지경이었지만 길손은 가만히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배에서 내려서 말 댓끈을 조율하고 있는 길손에게 이 막되먹은 취객이 명줄을 재촉하는 짓을 계속 합니다. 그 뒤는 묘사대로. 호랑이가 토끼잡듯 한손으로 휘어 잡아서 순식간에 목을 베버리고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에 올라 유유히 사라졌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주인공은 그 분입니다. 

유성룡이 직접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집필한 '징비록'에 이순신을 평가한 기록과 거의 같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야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평가했지요: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과묵하고 조용하나, 속에는 담력과 용기가 꽉 찬 (할 땐 하는) 인물이다. 야담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일치하는 듯 합니다. 그럼 이 야화의 시기는 언제쯤일까요?

서애 유성룡은 워낙 뛰어난 분이라 여러 겸직을 하시지만, 홍문관만 보자면, 
1567년 만 25세때 선조 즉위년,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1570년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종6품 -> 수찬-> 부교리->교리로 진급)
1576년 홍문관 전한(典翰-종3품)에 올랐고, 홍문관 응교(應敎정4품)가 되었고, 
1581년 (선조 14년) 40세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1583년 (선조 16년) 42세 홍문관 부제학에 재임명됩니다.

따라서 이 일화가 있었던 해는 아마도 1567년에서 1583년 사이의 일일 것입니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해가 1591년이니, 약 10여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천거하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야담입니다만 아주 재미있는 소재입니다. 

이러한 이순신의 '무인'기질은 비단 이 야담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조카인 이분 (李芬)이 쓴 [이 충무공 행록]은 어려서 반드시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여러 아이들이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들을 따라서 유학을 공부했는데 재기(才氣)가 있어 유자로 성공할 수도 있었으나 매번 붓을 던지고 싶어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조대의 대제학 이식이 쓴 시장(諡狀)에는 "글을 읽으면 큰 뜻을 통달했으나 문자만 새기는 글 공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 무예에 종사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소개한 청성잡기의 이 야담과 어긋나는 기록이 정사인 실록에 등장합니다. 바로 야담의 주인공 유성룡이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선조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선조 8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李琚)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이순신과 같은 동네출신이라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데 '무장에 적합하다'라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바로 '수군의 작전통제권을 맡길 장군'을 뽑는 평가를 하던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조가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라고 물어보니 '그렇습니다'라고 하는데 사실 여기서 국역은 토씨하나로 분위기가 달라질수 있습니다. 장군을 논하는 자리에서 글능력은 두번째일 것입니다. 따라서 '글을'을 '글도 잘하는 사람인가?" 로 바꾸면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추구하는 맥락이 됩니다 (선조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갑자기 '지적능력'을 물어본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더군다나 유성룡은 마지막에 '무장은 지식이 너무 많으면 교만해지고 쓸수가 없어진다'며 원균을 빗대서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서애 자신이 쓴 '징비록'에서 이순신에 대한 어릴 때의 기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이러한 기록들은 청성잡기의 야담이 당시 이충무공의 '무공'을 대중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야담으로 그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즉, 유성룡선생이 25세이후 (즉 홍문관시절) 충무공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 어릴 때에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알고 지나다가, 저러한 일을 우연히 겪고 다시 충무공을 발굴했을 가능설도 전혀 배제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유성룡은 경북에서 유년기를 이순신은 서울에서 자라는지라 그 접점이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유성룡은 이순신의 3살 위로, 형 이요신을 20대때 알게 되어 서울에서 서로 왕래하며 지냅니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퇴계이황의 제자로 지내다가 언제 서울에 오게 되었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알게 되면 야담의 시기와의 구분이 가능할 듯 합니다 (중간에 이순신가문과 왕래가 끊긴 시점).

참고로 청성잡기는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18세기의 저서입니다. 성대중은 일본통으로 통신사로도 일본에 다녀와 일본록 (日本錄)이라는 왕환기록을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화가가 그린 성대중 (일본 통신사 시절)
어찌됐든 개인적으로 어릴 때 충무공 기념관에 가서 이순신장군이 사용하던 밥그릇과 숟가락의 크기가, 각각 거의 투구와 거짓말보태서 작은 삽같은 느낌이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은 보통 장수가 아니구나..라는 것이었지요 (물론 어릴때의 느낌이고 매우 주관적인 감상일 뿐입니다). 

찾아보니 이 밥그릇같군요 (이래보여도 실제 보면 왠만한 투구크기입니다. 숟가락은 못찾겠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그 때 느꼈던 감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이 활쏘기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 그 영향으로 결혼 후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필자는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개하는 김에 같은 저서에서 충무공의 비화 두가지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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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언(醒言)
충무공(忠武公)은 어떻게 왜적을 물리쳤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호남 좌수사(湖南左水使)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

송 좌상(宋左相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魚泳潭)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鳴梁)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이다.

백성들과 평복차림으로 좌수영 뜰에서 농담까지 하며 대화를 해서 그 물길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이건 아니건 18세기 당시 충무공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과 대중들의 느낌을 알수 있는 야담입니다. 여기 나오는 어영담(魚泳潭)은 충무공처럼 문무를 겸비한 무과출신으로 진해(鎭海) 여러 진(鎭)에서 부하로 해로를 자세히 조사하여 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했으며 충무공휘하에서 수로향도(水路嚮導)로 큰 공을 세웁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 소재'로 쓰이면 딱 좋을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순신의 숨은 Ment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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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언(醒言)
충무공의 숨은 벗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인정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상의하곤 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자 공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다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국사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공이 이 책에서 도움 받은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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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실록등 정사로는 도저히 짐작도 불가능하지만, 충무공일기나 위에 소개한 이 충무공 행록등을 자세히 뒤지면 추적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다 (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삼국지연의]를 충무공이 참조해서 전쟁에 사용했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세상을 등진 참모가 한명 있었다는 야담은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밌는 사실 하나. 저렇게 이순신의 평생의 힘이 되어준 유성룡의 서울집은 지금 '충무로'에 있습니다 (길 이름도 유성룡의 호를 따서 '충무로 서애길'). 정말 인연이지요.

아무튼 올해 하반기 최대 기대작 중 하나인 '명량: 회오리 바다'가 잘 되어서, 감독이 꿈꾸는 삼부작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를 모두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2부 한산대첩은 작가공모중이더군요).

일본측 명량해전 기록도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1797))


핑백

  • 까마구둥지 : 충무공과 삼국지연의 2014-08-26 05:09:01 #

    ...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필자가 올해 소개했던 글에 이 '삼국지연의'에 대한 야사가 전한다.http://luckcrow.egloos.com/2472611 바로 '성대중 (1732∼1809)'이 쓴 18세기의 잡저인 [청성잡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언(醒言)충무공의 숨은 벗 충무공에게 ... more

덧글

  • 飛流 2014/05/20 12:21 #

    부디 영화가 성공하길 바랍니다
  • 역사관심 2014/05/20 12:46 #

    저도 그러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3부작이 한국 '사극영화'의 한 획을 긋는 기획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 Fedaykin 2014/05/20 12:50 #

    근데 아무리 노비라지만 저렇게 댕겅 목을 베어도 되는건가요?!
  • 역사관심 2014/05/20 12:56 #

    ㅎㅎ 일본 사무라이들에 비하면 '양반'이지요. 애초에 노비가 저렇게 가만있는 무관에게 '개길수 있었다는게' 더 신기합니다. 물론 저런 살생은 안되지만요 ^^;
  • 공손연 2014/05/20 13:54 #

    일본 사무라이도 함부로 목을 베기 힘듭니다.

    먼저 역관광 당하면 할복해야 하고 목을 베더라도 그 지역의 영주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해서 납득을 시켜야 합니다. 농민은 영주의 재산이니까요.
  • 역사관심 2014/05/20 14:05 #

    네 맞습니다. 다만 그렇다는 이야기죠 ㅎㅎ 야담이니까요..
  • 동굴아저씨 2014/05/20 13:38 #

    오오오오오....충무공!!
    ...
    충무로가 그 충무로였군요.
    헛살았네.헛살았어...
  • 역사관심 2014/05/20 13:48 #

    넵 바로 그뜻이죠 ^^ 이곳과 인접한 건천동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 9회역전만루홈런 2014/05/20 19:28 #

    실제로 충무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비나 관우처럼 우락부락한 전형적인 무관의 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선비의 상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백의종군을 통한 잦은 병치레와 갖은 고문 등에 의해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도 전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장군의 모습은 광화문에 서 있는 그 동상의 모습이죠...^^;

    개인적으로는 김명민이 연기했던 이순신 장군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최민식은 또 어떤 식으로 표현을 했을지 꽤 기대가 됩니다.
  • 역사관심 2014/05/21 00:20 #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영화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
  • 두얼굴의 사나이 2014/05/20 19:49 #

    진정 기대되는 영화 인듯...ㅋㅋ
  • 역사관심 2014/05/21 00:21 #

    일단 출연진과 감독이 적어도 극적연출만큼은 믿을만 한지라..
  • 네비아찌 2014/05/20 19:56 #

    충무공의 숨은 모사라 생각되는 자가 있으니 나이는 스물 서넛쯤 되보이는 옥골선풍의 대장부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 때문이 아니라 그자가 요괴를 아비로 둔 반요여서 그러하다 하옵고 그자의 성명은 이씨 성에 이름은 승기라고 하더이다^^;;;(드라마 구가의 서 패러디입니다)
  • 역사관심 2014/05/21 00:23 #

    오호... 승기도 출연하는건가요~~^^ 의외로 그림이 나올지도 ㅎㅎ
  • 이 감 2014/05/24 16:53 # 삭제

    하지만 그 반인반호는 성질이 앞서는 자였...
  • 역사관심 2014/06/01 11:06 #

    ㅋㅋㅋ
  • 청순한 크릴새우 2014/05/21 08:12 #

    7월 개봉인건가요? 기대됩니다. 가기 전에 이 시기 부분 책이라도 좀 읽고 가야겠네요 ㅎㅎ 벌써부터 보고 싶다는!
  • 역사관심 2014/05/21 08:42 #

    아무래도 알고 보시면 더 재밌죠!
  • 로가디아 2014/05/21 09:16 # 삭제

    목격자가 많앗는데 살인에 대한처벌은 받은건지, 아니라면 조선의 법제도가 매우 형편없음을알수잇겟네요
  • 역사관심 2014/05/21 09:30 #

    ㅎ 야담이니 그러려니 하죠.
  • 곰늑대 2014/05/21 10:20 #

    밥그릇은 좀 작은 편이네요. 조선시대 사람들의 한끼 식사량은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라... 심지어 청나라쪽 기록에는 조선의 만성적인 식량부족은 너무 먹어대서 생긴 것이라 할 정도니까요.

    영화는 좀 거하게 잘 나왔으면 좋겠네요
  • 역사관심 2014/05/21 10:28 #

    사진에 작게 나왔는데. 실제로 보면 거대합니다. ㅎㅎ
    영화 아주 잘 나와주길...
  • 이 감 2014/05/24 16:59 # 삭제

    최종병기 활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아직 내용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소품 고증 부분에서는 여전히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좀 아쉬운 면도 있고 그렇습니다.

    야담은 이 경우에는 썰에 그쳐 보이네요. 조선에서 실제로 저러면 사단이 나지요.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갈 일입니다. ^^;;
  • 역사관심 2014/05/24 17:12 #

    네 맞습니다.그만큼 당시 대중들에게 이순신의 이미지는 강렬했다는 기록정도겠지요.^^
    여러 무갑전문가들이 아쉬움도 표하고 감독님과 직접 이메일로 궁금증도 대화로 하고 하나보더군요. 그정도 자세면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냠냠꾸르륵 2014/05/29 20:10 # 삭제

    오홍..이게 삼부작이었군요! 역사에 관심이 많고 또 역사 영화도 즐겨보는지라..

    그나저나 CG때문인지 티저가 5월 초에 나온다고 들었는데 이제 6월인데도 무소식이네요..ㅜㅜ
  • 역사관심 2014/05/29 22:31 #

    지연인가요... 지연되더라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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