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모량리 (황성사추정지)발굴과 금입택및 1천360방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바로 엊그제 이 글 [사라진 대건축 (5)-신라 금입택 35호]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바로 작년 (2013) 5월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발굴성과에 대한 정리기사가 바로 지난달 (2014. 4)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기사만 갈무리해두고 내용은 후일 차분하게 읽어볼 요량이었는데, 어제 글을 올리고 문득 떠올라 검토해보니 완전히 직접적인 뉴스였군요. 우선 기사부터 소개해봅니다. 두 기사를 뽑아 길더라도 전문을 소개하니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第一)  진한(辰韓)
新羅全盛之時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户一千三百六十坊五十五里三十五金入宅 言富潤大宅也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 부잣집 큰 저택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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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월
신라 고도 경주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면, 경주 시내에 이르기 전 큰 무덤떼를 지나치게 된다. 5~6세기 신라 6부 세력 중 하나인 모량부의 귀족 무덤들로 추정하는 금척리 고분군이다. 

지난해 5월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이 무덤떼 근처의 건천읍 모량리·방내리 일대에서 발굴 도중 뜻밖의 수확을 올렸다. 경주 도심에서 서북쪽 10여㎞ 떨어진 들머리 길목인 동해남부선 철로 연결 예정터 일대를 파보았더니 정연하게 구획된 도로와 네모난 주거지, 우물, 초석 아래에 기초석을 다져 넣은 적심 건물 터가 나왔다. 너비 8~5m의 남북-동서축을 잇는 도로도 10군데나 발견됐다. 하진호 경주사무소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흥분했다. 격자형 도로로 둘러싸인 이 도시 유적은 8세기 것으로, 경주 도심 왕경 유적의 도로·주거지 등과 얼개가 거의 같았다. 신라인의 경주 도시계획이 외곽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나온 것이다. 

이 사실에 쾌재를 부른 학자는 경주 역사를 연구해온 박방룡 부산박물관 관장이었다. 그는 알고 지내던 한 수집가가 몇년 전 경주 북쪽 흥해읍 근처 신라 성터에서 주워 국립경주박물관에 기탁한 기와 한쪽을 떠올렸다. 주목한 건 기와에 새겨진 ‘태수방’(太樹坊) 지명이었다. 태수방은 큰 숲이란 뜻이다. 신라시대 숲이 무성해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불렸고, 땔감 조달이 쉬워 기와가마가 번창했던 모량리 일대로 추정된다. 그는 발굴 내용과 태수방명 기와를 분석한 끝에 최근 연구서 <신라도성>(학연문화사)을 펴내 경주가 거대도시 규모인 1360방(坊)으로 구획됐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로 실증됐다고 단정했다. 모량리 유적은 8~9세기 신라 하대에 경주 팽창에 따라 닦은 신도시로서, 당시 경주 왕경의 행정단위인 1360방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진한조를 보면, “신라 전성기 경주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 고위층 주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호를 가구로 치면, 5인 가구 기준 70만~80만, 심지어 100만 이상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 방은 고대 도시 구역의 기본 단위다. 모량리 유적과 1980~90년대 경주 도심 황룡사 왕경 유적 발굴 성과까지 포함하면, 1방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160~120m로 추산된다. 발굴단은 모량리 일대에만 최소 200개 이상 방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른 방의 개수를 현재 경주 안팎의 땅 크기에 맞춰보면, 경주 도심은 900여방, 외곽의 모량리 방까지 합쳐 1360방에 얼추 들어맞게 된다. 방이 경주 남쪽의 불국사 근처 말방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전덕재 단국대 교수)까지 넣으면, 고대 경주는 동서 30㎞, 남북 20㎞에 달하는 광역 대도시였다는 추정 또한 가능해진다. 지금 서울 한강 이남 지역의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신라 전성기 경주 도시 규모와 인구 수치는 일제강점기부터 후지시마와 윤무병을 비롯한 많은 한·일 학자들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모량리 유적 발굴로 1360방 설은 유력한 기반을 얻게 됐다. 하진호 소장은 “8~9세기 경주가 분지를 넘어 훨씬 광역화한 ‘메가시티’였음을 실증하는 증거”라고 했다. 불국사 쪽까지 신라 왕경이 연장됐다는 설을 펴온 전 교수도 박 관장의 확장설에 힘을 실었다. “모량리가 신라 때 경주 외곽의 군 주둔지이자 통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집중돼 방리제 도시계획이 집행됐으며, 그 뒤 8~9세기 확장된 왕경에 포함됐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강봉원 경주대 교수는 “모량리 유적과 경주 시내를 잇는 사이 길목에서는 왕경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위성도시로 볼 수 있어도 왕경에 넣기는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그간 학계에서는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인 경주 분지의 도심과 주변의 좁은 공간 때문에 100만 가까운 인구가 살기는 어렵다며 <삼국유사> 기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러나 모량리 발굴과 박 관장의 사료 분석으로 실물 증거가 일부 확보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은 좀더 설득력을 갖게 됐다. 21세기 경주 개발로 드러난 옛 경주의 개발 흔적들이 앞으로 신라 왕경에 얽힌 어떤 비사들을 풀어놓을지 주목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영남문화재연구원, 박방룡 관장 제공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도입니다. 잘 보시면 그제 제가 올린 지도 (포스팅 말미에 다시 첨부)의 구간중 모량리~황룡사터와 일치함을 보실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기사에서는 모량리 유적을 근거로 불국사까지 포함하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쪽도 그렇지만, 우선은 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내(大內) 구간, 즉 황성사 (모량리)~ 황룡사, 을 중심으로 발굴을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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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작년 발굴당시 기사입니다.

2013 6월
원문링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6307789&sid1=001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모량리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도시유적이 발굴됐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인 이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도로, 우물, 담장, 적심(積心) 건물지, 제방시설 등을 갖춘 도시유적이 확인됐다고 11일 밝혔다.

도로는 그 폭이 5∼8m로 총 10여 곳에서 확인됐으며 모두 남-북, 동-서 축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연구원은 전했다. 이 도로에 의해 구획된 하나의 방(坊)은 120m×120m의 규모로, 방 내에는 담장과 우물, 적심 건물지로 구성된 가옥이 조성돼 있었다. 

또 하천인 대천(大川)과 인접한 북쪽경계 지점에서는 동서로 연결된 길이 30m,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돼 도시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원은 덧붙였다. 유물로는 다수의 수막새(蓮花文막새, 獅子文막새), 암막새(飛天文막새)를 비롯해 고배(高杯), 인화문(印花文)토기, 청동접시, 수레굴대, 탑상전(塔像塼), 치미(용마루 장식기와), 청동거울 등이 출토됐다. 

특히 유물 중 우물주변 진단구(鎭壇具·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자 지하에 묻는 매장품)로 이용됐던 청동접시의 바닥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연구원 관계자는 "유적의 중심 시기는 8세기경으로 판단된다"면서 "도로와 건물지의 중복이 많고, 건물 조성 시 이용된 축성토에서 5세기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5세기경부터 마을이 조성돼 6세기, 7세기를 거쳐 8세기경에 경주왕경과 같은 도심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발굴지역 일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의 옛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왕경으로 진입하는 서북방면의 주요 교통로다. 조사지역과 인접해 사적 제43호인 '경주 금척리 고분군'(慶州 金尺里 古墳群)이, 북쪽으로 5㎞ 지점에는 사적 제25호인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이 있다.

이번 조사로 경주시내 외곽지역에서 방제(坊制)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돼 신라 왕도의 발달사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 결과가 "신라의 전성기엔 경중(京中)에 17만8천936호, 1천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고 기술한 '삼국유사' 진한조(辰韓條) 문헌과 "1천360방은 오기일 가능성이 크며 360방이 존재한다"는 현재 통설의 차이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경주 방내리·모량리 발굴 현장설명회는 12일 오후 2시에 열린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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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황룡사와 황성사 두 절 사이에 있고, 그곳은 大內  대내(궁궐)이다 (삼국유사, 7세기말)
그러나 기사 어디에서도 어제 소개해드린 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혹은 이를 인용한 '성호사설'의 인사문 부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발굴 결과는 정확하게 고고학적으로 아래 삼국유사 기록의 중요성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문무왕 법민(文武王法敏) 
詰旦居士欲辭行時曰: “僕京師人也. 吾家在<皇龍> <皇聖>二寺之間, 吾名<端午>也. [俗謂 “端午” 爲 “車衣” .] 主人若到京師, 尋訪吾家幸矣” . 遂行到京師, 居冢宰. 國之制, 每以外州之吏一人上守京中諸曹, 注, 今之其人也. <安吉>當次上守至京師, 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 人莫知者.<安吉>久立道左, 有一老翁經過, 聞其言, 良久佇思曰: “二寺間一家, 殆大內也; <端午>者, 乃<車得令公>也.
潛行外郡時, 殆汝有緣契乎” .<安吉>陳其實, 老人曰: “汝去宮城之西歸正門, 待宮女出入者告之” .<安吉>從之, 告 “<武珍州><安吉>進於門矣” , 公聞而走出, 携手入宮, 喚出公之妃, 與<安吉>共宴, 具饌至五十味.

나는 서울(경주)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 궁궐안)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황성사 (모량리) ~ 황룡사 구간과 이때까지의 신라궁궐 및 금입택 추정지
그제 소개해드린 필자가 만들었던 지도인데, 환기시켜드리자면, 황성사의 추정지가 바로 왼쪽의 '모량리' 입니다.  따라서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과 황룡사 사이는 모두 대내, 즉 궁궐지라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그제 이렇게 말씀을 드린바 있지요 "필자가 만들어 본 현재까지의 위치비정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황룡사를 기점으로 월성, 그리고 남산의 동북쪽에 현재까지 많은 주요건물지들이 위치가 비정되거나 발굴조사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황룡사 바로 오른쪽에서도 큰 저택지가 발굴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글에 나오는 '황성사'에서 북서쪽 (즉 황룡사와의 사이)는 아직 큰 발굴이 이뤄지거나 한 적은 없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간에 대한 연구도 한번 해볼 가치는 있어 보입니다." 

저 황성사 추정지가 바로 이번에 도시유적이 발굴된 모량리이지요. 이 삼국유사의 '노인의 말'은 이번 발굴과도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데, 황성사와 황룡사 두절 사이는 대내(大內 , 궁궐내)이다, 라는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번 모량리 유적이 중심부의 가장 바깥부분에 해당되는 발굴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모량리옆) 하천인 대천(大川)과 인접한 북쪽경계 지점에서는 동서로 연결된 길이 30m,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돼 도시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원은 덧붙였다."

시기상으로 이 발굴은 작년에 있었지만, 마치 이 글을 올리자마자 발굴소식을 만난 느낌이라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좀 의아한 것은 '이 모량리'유적을 (현재까지 적극적인 이부분에 대한 발굴이 없이) 위성도시로 보는 반론이 기사말미에 보입니다. 예를 들어, 강봉원 경주대 교수는 “모량리 유적과 경주 시내를 잇는 사이 길목에서는 왕경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위성도시로 볼 수 있어도 왕경에 넣기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만, 모량리에서 경주시내사이의 발굴을 그간 얼마나 적극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의문입니다.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로 단순히 위성도시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한 중요한 것은 연대입니다. 이번 발굴유적의 추정연대를 연구원은 "유적의 중심 시기는 8세기경으로 판단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노인의 기록이 나오는 삼국유사의 연대는 문무왕대 (재위기간  681년 ~ 692년)이므로 약간 앞인 7세기 말입니다. 따라서, 조금 앞서 나가본다면 경주의 저택지들이 모량리 (황성사)근처까지 뻗쳐 있었던 시기는 금입택의 기록이 나오는 880년 (즉 9세기)보다 훨씬 앞선 시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매정택 (7세기 김유신종가)"이 금입택에 포함되어 있어 이미 35호의 금입택중 여러 저택은 9세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경주 곳곳의 유명한 대저택들이었음을 추정하는 설이 있어왔는데,  이번 발굴과 문헌의 비교로 이러한 가능성도 커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기사에서는 8세기에 '모량리'까지 왕경이 확장되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이 문헌사료의 기록은 7세기말 (문무왕대)에 이미 이곳은 왕궁大內 로 불리던 지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사에도 보이듯 일부에서는 현재의 관점에서만 인구수와 방수의 기록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발굴과 더불어 필자가 소개해드린 이 삼국유사 부분, 즉  황성사 (모량리)- 황룡사 사이구간에 대한 구절이 앞으로의 적극적인 발굴에 동기부여와 함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필자가 할수 있는 것이야 이렇게 미력하게 글을 쓰는 것뿐이지만, 직감적으로 저 구간에 분명 저택지나 궁궐지가 나올 것 같아 앞으로의 소식이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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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5/23 14:50 #

    신라의 왕도가 거대하다고 인식하면, 자존심이 만족시켜진다라고 하는 기분은, 정직한 곳 있습니까? 어떻든간에, 일본 통치 시대의 일본인학자의 연구도 신라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 역사관심 2014/05/23 16:25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신라의 왕도가 거대하면 자존심운운한 적 없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발굴자료가 나와 흥미롭고 기쁠 뿐입니다.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누구인지 모르겠고, 이제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군요 (예전 몇 댓글들을 포함해서). 자국의 문화를 애정을 가지고 보고 사료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면 기쁜 것은 국적을 떠나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밝혀진다면 더 기쁜 것도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또한 어떤 블로그도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은 있기 마련입니다. 제 블로그는 현재 사라진 많은 거대건축이나 잊혀진 야담/설화등이 주로 다뤄지고 있고, 이 부분은 분명 한국의 현재 국내 대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정체성과 미학에 큰 단절로 문제가 있는 아쉬운 부분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부족하나마 실증적인 부분에 촛점을 맞추고 있고, 일반대중분들에게 이러한 잊혀진 한국의 문화재나 문화를 알리고 살려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웃국가들에게서도 (전통의 보존과 이용은 특히 일본의 현명하고 성공적인 경우도 많이) 배울 점은 배우자는 취지의 글을 주로 올리는데, 만약 이러한 주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것까지 저로서는 어쩔 수는 없습니다. 그건 최소한의 본인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의 권한입니다.

    생산적인 토론은 좋지만, 님이 자주 말씀하신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어떤 '고정된 시각'만큼이나, 거꾸로 한국에 대한 어떤 '관' 혹은 이데올로기를 가지시고, 일일이 딴지를 거는 셈이라면 제 블로그는 더 이상 오지 않으셔도 좋고, 본인이 주장하시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면 본인의 블로그에서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위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더 생산적인 내용을 좋은 이웃분들에게 배우고 서로 지식을 나누고, 꼭 그렇지 않은 가벼운 주제라도 기분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개설한 장소니까요. 감사합니다.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5/23 16:49 #

    아니,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한국인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라고 하는 순수한 의문을 쓴 것 뿐입니다.
    특히 「뭔가를 주장하고 싶다」의가 아니고, 「자존심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라고 하는 확인합니다.
  • 역사관심 2014/05/23 17:07 #

    한국인이 아닌 어느 국민이건 자신의 수도가 번영했던 것을 싫어할 국민은 소수겠지요. 이 이야기는 애써 쓴 글의 논지와 관계가 없이 비껴가는 판단이 들어 이만 줄이겠습니다.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5/23 17:19 #

    저는 외국인이며, 한국인의 내셔널리즘에 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친소감의 차이에도 흥미가 있습니다. 투고의 내용과 벗어난 코멘트가 불쾌하면, 사과합니다.
  • 역사관심 2014/05/23 17:41 #

    분명 제가 다루는 글의 주제중 일부, 특히 규모의 미를 보여주었던 건축문화재들의 경우 , 그 주제와 연계될 가능성이 없을수는 없습니다. 랜드마크 문화재는 그러한 의미를 당대건후대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종종 내포하기도 하니까요 (태생적으로 완전히 비껴가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그 일면보다 훨씬 다양한 테제를 담고 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다만 제 취지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있지않고 좀더 근본적인 한국사회의 문화적 밸런스 혹은 또 조금더 들어가는 지점에 있습니다- 또한 전통문화의 활용도 주제입니다 (이 모든주제는 균형잡힌 한국 사회로 만들어주는 우리자신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자칫 이데올로기적으로 흐를까 주의를 하고 있고 그런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내셔널리즘자체에 관심이 있으시면 더 전문적인 블로그가 많습니다. 그쪽에서 훨씬 깊은 이야기를 하실수 있을겁니다. 오해가 있었다면 역시 사과드립니다.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5/23 18:07 #

    전문의 블로그에서 보는 것 보다도, 자연스러운 투고 안에 의도하지 않고 표출하는 민족주의적 향기에 대하여, 가장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 역사관심 2014/05/24 00:12 #

    관심을 가진 부분을 보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입니다. 또한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 국가정체성과 관련된 관심도 민족'주의'로 본다면 그와 관련된 글은 말씀대로 모두 자연스럽게 그쪽이 되버립니다. 다만 제게는 큰 관심 주제는 현재로선 아니고 특히 본문주제가 종종 흐려져버릴수 있으니 그와 관련된 질문이나 토론은 이곳이외의 곳에서 부탁드립니다.
  • ㄹㄹ 2014/05/24 15:54 # 삭제

    ㅉㅉ방사능 원숭이가 분탕치다 망신을 제대로 당하는군요.
  • 역사관심 2014/05/24 21:48 #

    ㄹㄹ님 자극적인 말씀은 삼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제 의도가 저분께 잘 전달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 ㅇㅇ 2014/05/23 14:53 # 삭제

    이제 그만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신라 수도 서라벌 인구 100만명 고려 수도 개경 인구 50만명..
    인정할껀 인정했으면 좋겠네요.
    아직까지도 고려 전체 인구는 200만명 개경인구는 10만명 등등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계속 할까요?
    서라벌은 물론이고 남북국시대 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 도시유적도 요즘
    대대적으로 발굴되는 형편인데 언제까지 저렇게
    한국사 축소해석 못해서 안달난건지 ㅉㅈ
    예전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도 있다고 봤는데
    요즘은 필요 이상으로 조선왕조를 과대포장하느라고 조선 이전시대를
    깍아내리는 조선사 위주 기득권적 학문 풍토도 만연한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인 발전사관.. 분명 문제있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4/05/23 15:28 #

    비전문가인지라 관련 전문가들의 입장을 일일히 알지 못해 뭐라 할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식이 일천하여 더욱더 어떤 설에 짧은 지식으로 뭐라할 능력도 안됩니다). 다만, 문헌자료나 고고학적 성과들을 어떤 안경을 쓰지 말고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만 갖추면 하는 희망입니다.^^;
  • 동글동글 바다코끼리 2014/05/23 16:55 #

    당시의 신라(新羅) 수도는,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보다도 거대한 인구를 가지는, 세계최대의 도시이었다라고 하는 추정일까요?
  • 솔까역사 2014/05/23 16:45 #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신라기와를 보니 엄청나게 크더군요.
    또 신라때는 온돌이 보급되지 않아 입식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라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이국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그 모습이 우리의 고정관념 바깥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라벌 인구 100만명이라든지 금입택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지금의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고정관념을 좀 열어둘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5/23 17:06 #

    어떤 사회이건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시공이나 가까웠던 시대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수 없고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어요. 다만 같은 공간의 오랜 이전 사회의 이국적이기까지한 느낌을 느껴볼수 있다면 거꾸로 그 이질감과 또다른 맛때문에 그마만큼 매력적인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상 2014/11/12 09:39 # 삭제

    실크로드와 신라에 관한 과제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많이되고있습니다
    동서양의 교역로인 신라가 실크로드의 종착지인만큼 인구 약100만명이였을거라는
    추측이 정말 사실로 다가올것이라는 기대를 해봅니다.경주 고분에서 로만글라스와같은
    서역관련 유물들이 출토되는데 인구 100만명의 거대도시였다면 그만큼의 규모가큰 시장이발달되었을것이고 인적.물적교류가 활발한 곳을 국내뿐만아니라 해외 외국인들이 시장을 확보하기위해 경주로유입되어 신라가 국제도시로서 변모할수있게끔 하지않았나 싶습니다
    더불어 금이 남아돈다는 소문(?)도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라에대한 관심을늘려
    외국인들을 유도하지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 역사관심 2014/11/12 23:18 #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요즘 이란측 사료발굴등, 여러 정황상 9세기당시 경주가 부흥했던 것 만큼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만, 좀 더 확실한 왕궁터발굴, 당시 화려했던 직접적인 문화유산등이 등장해주면 좋겠습니다 (특히 금제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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