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된 임진왜란이전 경회루 3층, 그리고 창덕궁 그림 (16세기)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조선전기-중기 경회루 3층 모습


예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경복궁 경회루 임진왜란 이전 복원 모습 (15세기 태조대 모델)

경복궁 경회루의 48개 용기둥과 황룡주 단상

 


즉,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중기대의 경복궁, 그중에서도 경회루의 모습을 상상해본 CG사진을 포함한 포스팅이었는데 지금의 밋밋한 기둥대신 화려한 용조각이 새겨진 기둥들과 특히 2층이 아닌 3층이 모습을 그린 것이었지요 (그 3층짜리 복원사진은 위링크를 따라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경회루 중층 (즉 3층)에 대한 기록은 성종실록에 있으며 그 연대는 15세기말인 1473년입니다. 다시 한번 소개하자면 다음의 기록입니다:


성종 3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2월 14일(경오)

경연에서 홍윤성·서거정·이극배와 경회루 수리에 대해 논의하다

지사(知事)  이극배(李克培)는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경회루의 견양 (설계도)을 보니 3층(層)에 이르는데, 만약 그렇다면 지나치게 사치한 듯하니 구제(舊制)대로 수리하는 것이 편(便)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니다. 다만 구제(舊制- 주: 이전의 제도)를 감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니 이극배가 또 아뢰기를,

“근정전(勤政殿)의 단청을 지금 고쳐 칠하려고 하는데, 신은 만약 진채(眞彩)로 하면 비용이 매우 많이 들 듯합니다. 비록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어찌 반드시 외관(外觀)의 아름다움에만 힘쓰겠습니까? 그 가운데 떨어져 나간 곳만 고쳐 칠하는 것이 가하고, 반드시 다 고쳐 칠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짐작하여 하겠다.”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용기둥 48개도 이때 새겨넣은 듯 합니다:


성종 50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12월 17일(무술)

정괄이 차자를 올려 경회루 돌기둥에 새긴 무늬가 지나치게 화려함을 지적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지금 들으니, 경회루(慶會樓) 돌기둥에 그리어 새긴 구름과 용과 화초들의 형상이 사치하고 화려함이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새기지 말게 하여 검소한 덕을 밝게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장차 물어보겠다.” 하였다.


이 모습은 서두의 링크글중 두번째 글에 유구국 (현 오키나와)의 사신이 1477년에 직접 보고 감탄하는 장면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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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에서 필자는 이렇게 경회루 3층설을 추정했습니다. "당시 경회루를 3층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데 만들었다는 설에 의거한 복원이지요. 용기둥이야 전대인 태조대에 이미 만들었던 것이지만, 성종의 대답을 보면 '구제' 즉 예전의 모델을 쓸뿐이란 말로, 원래 경회루가 3층임을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그림을 보면 경회루는 1412년 태종대에 건설될 때부터 (다만, 이극배와 성종 둘중 성종의 '구제'해석이 맞다는 가정을 택할때), 이 성종실록의 기록인 1473년이후 수리이후 뿐 아니라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 확실히 중층전각 (즉 3층)이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필자가 생각할 때, 이극배와 성종이 완파된것도 아닌 존재하던 경회루를 두고 두가지 해석을 하는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는 1412년과 1473년의 61년이라는 간극사이에 3층에서 2층으로 일시적으로 훼손된 적이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이긴 합니다. 어쨌든, 다음의 그림입니다. 


기성입직사주도 (1581년)

이 회화는 기성입직사주도 (騎省入直賜酒圖)라는 고화로, 이 그림은 기성(병조(兵曹)의 별칭)에 입직한 이들에게 왕이 술을 내린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관청계회도 형식의 그림입니다. 예안 김씨 집안의 김륵(金玏)이 참여하여 본가에서 내려온 고화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계회도라는 것은 조선 초중기를 통해 성행했으며 관아에 재직하는 사대부들이 춘추의 세시절일이나 화창한 날에 산과 강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후에 보면서 서로 잊지 않기 위한 회상의 자료로 삼기 위해 계회의 참가자 수만큼 화원에게 그리게 하여 각자 1폭씩 나누어 가졌으며, 각자의 집안대대로 보관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성입직사주도는 경복궁내의 계회를 그린 것으로 1581년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16세기 중반 경회루, 근정전과 광화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지요.


이 그림의 왼쪽 윗편에 '경회루'가 그려져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11년전 그림으로 임란직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운무를 묘사해서 궁내가 희미한 가운데 다행히 경회루의 누각모습은 명확히 나옵니다.  동그라미에서 보이듯 바로 지금은 볼 수 없는 '중층의 경회루'입니다.
현재의 경회루

역시 임란전인 1505년 연산군대 실록기록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明日將登慶會樓上, 通望處立標, 標內公廨幾處、人家幾坐, 竝計以啓。
연산 57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3월 20일(을사) 
경회루에서 바라보이는 곳의 건물을 세어 아뢰게 하다    
전교하기를,
“명일 경회루(慶會樓)에 오르려는데, 위가 바라보이는 곳에 표(標)를 세우고 표 안의 공해(公廨)가 몇이고 인가가 몇인지 모두 세워서 아뢰라.” 
하였다.

공해(公廨)는 관가소유의 건물을 말합니다. 通望處立標 라는 뜻은 '위가 바라보인다'기 보다 툭 틔여서 통하는 곳에 표를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거리에 표를 세운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경회루 3층에 올라서 틔여있는 곳에 표를 붙여두고, 그 표안에 관공서들과 민가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측량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도성내의 민가와 관공서들의 숫자를 파악하려 하고 있지요.

경회루를 올라본 분들이면 아시겠지만, 현재 경회루 전각의 높이로는 아무리 여러 사항 (즉, 대원군대의 더 많아진 전각수, 현대의 고층빌딩들, 담장높이 등)을 고려하더라도, 즉 앞이 탁 트인 상태라 해도 담장너머 공공건물과 민가들을 일일이 셀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즉, 3층에 올라 세었다는 이야기라 필자는 생각합니다.

현재 경회루 전각위에 올라 본 조망 (사진출처-링크)
 


임진왜란 후의 경복궁 묘사
따라서 앞서 소개했던 필자의 이전 포스팅에 나오는 CG 복원도와 거의 흡사한 모습이지요. 그로부터 12년후 즉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년뒤 경복궁이 전소된 후의 모습이 조선중기의 학자 성혼(成渾 1535~ 1598)의 우계집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 3층전각은 전소되고 용기둥만 남아있었던 모습이 나옵니다.

우계집 중 계사년(1593, 선조26) 
5월 30일에 양주(楊州)의 송산(松山)에 있는 민가에서 쓰다.
중략발췌:
2일에 송산(松山)에서 경성으로 들어가 종암(鍾巖)에 이르러 보니, 백골이 길가에 수북하여 눈을 뜨고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보제원(普濟院) 앞에 이르러 보니, 길 한가운데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동대문을 들어서서 종루(鐘樓)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댓 곳에 시신이 있었으며 송산에서 동대문 밖까지는 시신을 떠메고 가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성안의 백만 가호가 모두 부서지고 불타 다만 무너진 담장과 깨진 기왓장만 있을 뿐이었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얼마 되지 않는데, 모두기왓장을 쌓아 담장과 벽을 만들고 불에 탄 나무를 가져다가 얽어서 겨우 둥지와 굴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종루 앞에 시장이 있는데, 모인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궁궐 문에 이르니 남아 있는 궁전이 없고 다만 경회루(慶會樓)의 돌기둥만 보일 뿐이었으며, 잡초만이 큰길에 자라고 있었다. 왕래하는 행인은 겨우 몇 명뿐이었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빈번하게 들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생기가 없이 참담하여 살려는 뜻이 없었으며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하였으니, 이는 오래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아, 애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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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기록으로부터 19년뒤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한성의 모습은 재건의 활기를 띄고 있지요.  아래의 기록은 역시 중기의 그러나 약간 후대의 문신인 김상헌(1570~1652)의 유서산기(遊西山記)의 기행기 기록입니다. 정확한 년도는 1614년입니다.

1614년 기록발췌: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는데 십여 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 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木覓山)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임진년(1592)의 난리를 치른 뒤 23년이 지나 백성들의 수가 날로 불어나 집들이 많기가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堯舜)을 도와 당우(唐虞)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한갓 나라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초췌해지고 변방의 방비는 더욱 위태롭게 돼 지금과 같이 쇠퇴해지는 데 이르게 하였다.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인재를 내려 주는 것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재를 내려 주긴 했는데 쓸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

굵은 체로 되어있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우선 남산 아래쪽에 기와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백성의 숫자가 날로 불어나고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경복궁과 경회루가 나옵니다.

경복궁의 동산은 텅 비었고 성은 허물어지고 나무는 부러졌으며 용루(龍樓)와 봉각(鳳閣)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지 경회루 연못에 있는 연잎이 바람에 뒤집히면서 저녁 햇살에 번쩍이는 것만 보였다. 앞에서는 어진 인물을 막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전쟁을 불러들이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였으며, 뒤에서는 부추기고 이간질하면서 임금께 아첨을 하여 간사한 말이 행해지고 법궁(法宮)을 황폐해지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경복궁은 텅 비어있고, 경회루 역시 연못의 연꽃만이 무성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임란때 경복궁, 창경궁처럼 전소되었던 창덕궁은 1609년 (광해군1)에 가장 먼저 중건하여 오랫동안 법궁(法宮)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래 묘사된 창덕궁 (동궐은 창덕궁의 이명)은 따라서 다시 재건되고 겨우 5년이 지난 새건물입니다.

동궐(東闕)이 쌍으로 우뚝 솟아 있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금원(禁苑)의 숲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가운데, 호분(虎賁)과 용양(龍驤)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王者)의 거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본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임금다운 임금이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흥인문(興仁門)의 빼어난 모습이 동쪽을 향하여 우뚝 서 있고 종로(鍾路)의 큰길이 한 줄기로 뻥 뚫려 있었다. 길 좌우에 늘어선 상점은 많은 별이 별자리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수레와 말이 오갔으며, 달리는 사람과 뛰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분주하게 오갔는데, 그들은 모두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도 모른다.〔相逢不知老〕”라고 한 것은 진실로 뛰어난 구절이다.

또한 종로아래 길 구획이 잘 되어 있고, 상점들이 별처럼 늘어서있다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또한 상인과 백성들이 종로거리에 지금처럼 북적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왜란이래 재건중인 17세기초 한성의 거리가 자세히 묘사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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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의 창덕궁 모습
그런데, 이 창덕궁 (동궐)의 이러한 1609년 재건이전의 모습, 즉 16세기대의 모습이 담겨있는 그림이 또 있습니다. 역시 계회도로 '은대계회도'라는 작품으로, 정말 최근에 발견된 그림입니다. 은대라는 것은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첫 논문이 올해 2월에 나올 정도로 최근에 발굴된 그림입니다. 

박효정의 논문인 "16세기 《은대(銀臺)계회도》와 《만력임오합사(合司)계회도》 연구" (2014.2)에서 이 은대계회도의 제작 시기는 세 가지의 단서를 바탕으로 ‘1560년’으로 도출하고 있습니다 . 첫 번째는 두 명의 계원이 관직을 제수받은 날짜 1560년 8월 19일과 두 번째는 명종이 창덕궁에 머물렀던 1560년 7월 27일에서 1561년 9월 26일, 마지막으로 1560년 9월 19일에 제작된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臺親臨賜宴圖)>와 <은대계회도>의 좌목에 기록된 ‘윤근수’의 관직이 일치됨을 통해 제작 시기를 추론했습니다. 

동논문을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은대계회도에 묘사된 누각의 표현은 1830년 이전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와 비교하여, 창덕궁의 임진왜란 전 · 후 건축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동궐도에는 인정문이 단층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계회도에는 중층으로 표현된 것, 두 번째는 인정문의 좌우 행각(行閣)의 모서리 위의 ‘십자각(十字各)’ 역시 은대계회도에만 그려 있다. 마지막으로 계회도에 표현된 ‘어도(御道)의 박석’과 인정문 축대의 ‘막돌쌓기’ 기법 또한 임진왜란이전의 창덕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요소이다."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1560-1561년)
1560년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2년전입니다. 이렇게 조선중기대의 창덕궁에는 특히 중층의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 있었음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회화입니다.
중층이었던 인정문과 지금은 없는 십자각 (좌우 중 좌)
현재의 인정문
십자각 역시 현재 경복궁의 단층과 달리 그림속 창덕궁의 십자각들은 중층입니다.
동논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역시 새로 발견된 그림인 또다른 계회도인 "만력임오합사계회도(1582년)", 역시 창덕궁을 묘사하고 있어 당대의 건축복원에 앞으로 커다란 힘이 되어줄 회화입니다. 여기서도 지금은 사라진 십자각들이 웅장하게 각루로 서있습니다.
만력임오합사계회도(1582년)

이처럼 새로이 발견된 이 세 점의 회화는 앞으로 임진왜란으로 타서 사라진 조선전기-중기대의 '왕궁'모습 재현이나 중건에 매우 큰 힘이 될 소중한 자료들이 될 듯 합니다.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조선전기의 경복궁의 전각수는 고종때 재건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규모가 가장 크지요- 또한 단일건물별로 다른 역사가 존재합니다. 어떤 건물은 후대에 더 커지고 어떤 건물은 위의 예처럼 전기것이 더 화려하고 사라진 것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맥락에서 경복궁과 5대궁을 봐야 합니다.

몇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선이라도 경복궁내의 박물관에 조선전기-중기의 주요건축들을 미니어처라도 제작, 관람객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만이라도 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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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그나저나 예전 포스팅에서도 썼는데 이 연산군대의 기록은 아직도 모르겠군요. 신대라면 새로운 건물인데, 후원에 경회루같은 건물을 짓는다는 뜻이지요.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5월 7일(신묘)

후원의 신대를 경회루와 같게 지으라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후원(後苑)의 신대(新臺)를 경회루(慶會樓)와 같게 지으라.” 하였다. 


사족2: oo님의 댓글로 이 구절이 연산군대에 짓다 만 '서총대'가 아닐까 하는 제안을 주셨는데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후원'이 창덕궁(혹은 창경궁)을 뜻한다면 확실합니다. 서총대에 대한 간략한 정보와 사진을 첨부합니다.


후에 춘당대(春塘臺)로 이름을 고쳐 지금도 이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명칭은 성종 때 이곳에서 한 줄기에 아홉 잎의 파가 나와 서총이라 한 것을 연산군이 여기에 돌을 쌓아 배양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드는데, 용을 아로새긴 돌 난간을 만드니 천 명은 앉을 수 있으며, 높이가 열 길이나 되며… 대 앞에 큰 못을 파는데 관원 백 명이 감독하고 역군(役軍)이 수만명이다…" 한 것으로 보아 대공사였던 것 같다. 원래의 계획에 의하면 100척의 높이로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화려한 돌난간을 만들며 그 아래에는 수십길의 깊이로 못을 파고 배를 띄우려고 하였다. 또 그 옆에는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다.


연산군은 또 서총대 앞의 큰 못을 열 길이나 되게 파서 큰 배를 운항할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나 1506년(연산군 12) 폐위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의 풍광이 아름다워 임금의 유연(遊宴)하는 장소가 되어 실록(實錄)을 보면 1560년(명종 15) 9월에도 서총대에 나가 문무관원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무신들은 활을 쏘아 기(技)를 겨루고, 문신들은 왕과 함께 율시(律詩)를 지어 화답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고 하였다. 


현재 흔적으로 남아있는 곳이 아마도 작은 전각인 춘당대와 그 앞의 작은 소춘당지가 됩니다 (이곳에 경회루같은 누대와 연못을 만들려 한 것이죠).

현 창경궁내 소춘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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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유독성푸딩 2014/06/05 10:25 #

    이야 그러고보니 경복궁 건물들이 전부 대원군 집권기에 재건되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군요. 초기의 형태라면 확실히 달랐겠었지요. 이 단순한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니oTL
    그렇다면 경복궁의 원래 모습은 고려말기 건축양식과도 이어져 있을까요? 고려 고궁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아있다면 경복궁의 원래 모습 추정에도 도움될 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4/06/05 12:02 #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만간 그 모습을 보여주는 글을 올리려 합니다. 그리고 한옥의 통시성인 측면에서도 조선전기건축의 재현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 ㅇㅇ 2014/06/05 13:41 # 삭제

    현재 남아있는 대원군 중권 경복궁의 궁궐 건축 양식은 19세기 초반 재건 혹은 중수된 창덕궁과 경희궁 주요 궁궐 건축물 양식을 많이 반영했죠. 일설에 따르면 경희궁 건축양식을 많이 따랐다고 합니다. 참고로 창덕궁 경희궁 둘다 동궐도와 서궐도안이 그려지고 얼마 안있어 꽤 큰 화재가 발생해서 상당수 건물을 다시 지었죠. 현재 한국엔 그때 화재 전후의 궁궐 의궤가 꽤 남아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 조선 중기 후기의 건축양식 변화를 쉽게 알수 있죠. 예를들어 인정전 같은 경우도 광해군이 재건한 건물과 현재 남아있는 건물 양식이 꽤 다릅니다. 장식적인 화려함 같은 경우도 조선 중기보다 조선 후기 재건된게 좀 단조로운 느낌이 나죠. 특히 기와 지붕 날개부분이 후대로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있음
  • 평론가 2014/06/07 20:20 # 삭제

    조선초 건축이 원대 건축양식과 유사한걸 보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 ㅇㅇ 2014/06/05 10:59 # 삭제

    연산군때 후원의 신대라면.. 서총대를 말하는 건지도

    그리고 역시나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과 창덕궁등 주요 궁궐 건축들은
    조선 후기 건물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군요

    그만큼 임진왜란 피해가 엄청났다는 걸 반증하는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5 12:00 #

    심증을 가지고 있던 문헌사료들이 최근들어 확인되는 소식이 많아 흥미롭습니다.

    서총대라...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
  • ㅇㅇ 2014/06/06 04:27 # 삭제

    그런데 경복궁은 창건당시보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할때가 더 큽니다.
  • ㅇㅇ 2014/06/06 14:04 # 삭제

    전체적인 궁궐 면적은 대원군때가 더 클지도 모르겠지만

    개별 건물 크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궁궐의 주요 건물들은 중층이나 2층인 경우가

    기록은 물론 저렇게 실증적인 그림 자료로 증명이 됬구요

    건물 면적의 경우 임진왜란 직전 건물 크기와 대원군 중건시 건물 크기가

    사실상 거의 비슷합니다

    근데 임진왜란 직전의 경우 중층이나 2층 건물이 많으니 면적은 비슷해도

    높이와 규모가 더 크니 당연히 조선 전기가 더 웅장했다고 봐야죠

  • ㅇㅇ 2014/06/06 15:52 # 삭제

    이번에 발견된 광화문 터의 경우 고종때의 건물 터가 좀 더 조선초 창건때보다 큽니다. 그 외에 왕권의 위엄을 내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좀 키운 건물들이 많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6 16:04 #

    좋은 정보들 감사드립니다. 심증만 가지고 있던 부분들이 가시적으로 조금씩 밝혀지고 있어 흥미롭네요 .
  • ㅇㅇ 2014/06/05 13:26 # 삭제

    그러고보니 은대계회도의 창덕궁 건축양식이 궁중숭불도의 건축양식과 굉장히 흡사하네요. 궁중숭불도의 조선전기 궁궐건축 고증에 대해 의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견해가 옳지 않다는 반증이 될듯 일각에서는 궁중숭불도가 봉은사 그림 아니냐는 의견도 있던데 이름 그대로 궁중숭불도 즉 궁궐 안에 있었던 내불당 그림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경복궁 선원전이 있었던 .. 즉 조선 전기엔 문소전이 있었던 곳 근처에 내불당이 있었죠. 그걸 그런게 현재 남아있는 궁중숭불도라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4/06/05 13:40 #

    네 조만간 소개할 생각입니다 . 말씀대로 두 그림의 연관성이 있어 보여요. 확실히 고려대 건축의 흐름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 ㅇㅇ 2014/06/05 13:49 # 삭제

    참고로 좀 다른 얘기지만 조선 전기에 대대적으로 중창된 봉은사는
    선정릉의 수호사찰 역할도 하는등 규모가 꽤 컸다고 하죠
    조선전기 잠시동안 불교중흥기(?)때 조선불교의 메카(?)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봉은사는 그냥 산 중턱에 걸쳐 앉은 느낌이지만
    원래 봉은사는 현재 강남 코엑스 부지 전체를 아우르는 꽤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강남 개발전 근처 농지 수요도 봉은사쪽에서 가지고 있구요
    그래서 실제로 박정희때 강남 개발 하면서 봉은사로 부터
    코엑스를 비롯한 광대한 평지를 거의 갈취하다시피 했다네요 ㄷㄷ

    암튼간에 궁중숭불도와 봉은사는 아무 관련 없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4/06/05 13:54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
  • 이 감 2014/06/05 17:09 # 삭제

    ㅇㅇ님이 쓰신 것처럼 경복궁이 경희궁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당시 경희궁에 비하면 경복궁 건물들 처마가 너무 처져있습니다. 지금 복원된 경희궁 건물들의 지붕부분은 유리건판사진이나 현재 동국대 정각원으로 남아있는 원 숭정전과 비교해보면 복원이란 말을 무색케 할 지경이더군요.
  • 역사관심 2014/06/06 02:10 #

    그렇군요. 확실히 갈수록 처마의 모양도 "날아갈듯"한 모양에서 수수한 쪽으로 가고, 장식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의 영향력이 크긴 컸나봅니다.

    확실히 그렇네요. 동국대 정각원 (숭정전)의 처마를 보니:
    http://cfile223.uf.daum.net/image/20628A35508F89AF2DFD30
  • 이 감 2014/06/05 17:19 # 삭제

    3층 경회루는 성종대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이극배는 구제대로 지으라 하고 성종은 구제를 감하지 않겠다하고...^^;;
  • 역사관심 2014/06/07 00:45 #

    ㅎ 하긴 그렇죠. 저는 성종의 판단을 믿어봅니다만, ^^; 내용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첨언을 해야겠군요.
  • 진보만세 2014/06/05 18:37 #

    1614년이면 광해군 치세에 영창대군이 저승간 해이긴 해도, 김상헌의 기록을 토대로 하면 전후복구가 거의 60년대 박통 치세급으로 신속하고 탄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군요..

    그런데, 대관절 도중에 무엇이 있었길래 김상헌을 비롯한 서인무리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시 도성과 전토를 잿더미로 만드는 참화를 일으켰는지..

    알면 알수록 비애와 한탄만 더해가는 조선망국사..
  • 역사관심 2014/06/06 02:16 #

    확실히 활기가 넘치던 시기죠. 결국 당론에 휩싸인 게 아닌가 합니다. '국가'를 보지 못하고 당을 보는 무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많죠. 다만 그게 솔직하게 당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무리와 그게 국가를 위하고 있는거라고 대착각을 하고 있는 무리와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오십보백보.
  • ㅇㅇ 2014/06/06 04:25 # 삭제

    과거 종로의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죠. 글에서 묘사한대로네요.

    http://blogfiles.naver.net/20131121_75/lnn0909_1384988489814dxrf0_JPEG/2013-11-21_08%3B04%3B05.jpg
  • 역사관심 2014/06/06 16:05 #

    그림이 블록되었네요 ;;
  • ㅇㅇ 2014/06/06 23:18 # 삭제

  • 역사관심 2014/06/07 00:32 #

    감사합니다~. 링크 따라가보니 본 사진도 있고 처음 보는 사진도 있는데, 말씀대로 16세기의 묘사가 적어도 종로통에서는 그대로 이어진 느낌이 납니다.
  • 아빠늑대 2014/06/06 18:22 #

    연산군 시대에 흥청을 다 불러놓고 경회루에서 놀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흥청의 인원이 천에서 최대 이천명까지 추정되는데 지금 경회루는 그렇게 놀기에는 좀 좁죠. 뭐 물론 가감해야 할 내용도 있고, 실제로 초기 궁궐은 지금 보는 것 보다 작았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하곘지만... 뭐...
  • 역사관심 2014/06/07 00:30 #

    맞습니다 . 기록에 과장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악행을 과장하기 위해 그런것이 아닌가싶은데 , 또 이게 야사가 아닌 그 엄격하다는 실록사가들이 남긴 기록이라 실제같기도하고.. 암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건물은 위 댓글에 나오듯 숫자로는 대원군대 재건된 것이 가장 큰규모가 맞다고 보입니다 (다만 전각수가 그렇지, 궁궐면적은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단일 건물들의규모와 높이는 몇 건물의 경우 전기것이 더 컸음이 몇몇 발굴로 드러나는 중인데, 저런 그림들과 다른 전기- 후기 건물 회화들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또한 적어도 몇가지 건물의 경우 같은 평수라도 화려함과 웅장함에서 임란 호란후 후기의 절제미와는 전혀 달랐다고 봅니다 (아마도 고려건축의 양식미가 아직 많이 남아있던 모습들...).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대의 경회루도 더 큰 규모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임란전. 연산군이 일례로 배 열척을 연못에 끌어오는데 한척당 수백의 민간인이 동원되었다는 실록기록을 보면 그 묘사가 꽤 사실적이라... 말씀대로 현 경회루로는 어림없는 일이죠. 후일 경회루 외각에서 더 넓었던 못의 흔적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 역사관심 2014/06/06 22:45 #

    예를 들어 이런 기록입니다. 이건 배 열척과는 또다른 기록입니다:
    연산 61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2월 7일(정사) 3번째기사
    군인을 뽑아 서호의 배를 운반하여 경회루에 띄우게 하다
    군인을 뽑아서 서호(西湖)에 있는 배 수십 척을 끌어 경회지(慶會池)에 띄웠다. 배 한 척을 육지로 운반하는데, 민정 5백여 인이 들었으므로 호야(呼耶)하는 소리가 성안을 진동하였다.
  • ㅇㅇ 2014/06/07 00:11 # 삭제

    조금 잘못 알고 계신게 개별 건물도 전기보다 후기가 큽니다. 조선전기에는 강녕전이 3칸, 중기 8칸, 말기 11칸이런 식으로 커지고요. 광화문도 마찬가지로 후기것이 크고, 다른 건물들도 후기건물들이 큽니다. 인정문이 이층인데 일층이 됐다, 십자각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고로 조선전기 궁궐 건물이 후기보다 크다 이런식의 단순 논리로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7 01:12 #

    안녕하세요 oo님> 정보 감사합니다. 개별건물별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포스팅 내용이 그런 일괄적 흐름을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면 제 불찰입니다 (포스팅에도 그런 맥락을 첨부했으며 아빠늑대님의 글에 대한 댓글도 오해가 될만한 부분의 문맥을 수정합니다). 그런데 혹 위에 정보를 주신 oo님과 다른 분인지 궁금합니다. 정보가 상충되는 느낌이 들어서요 ^^; (7번째 댓글).

    현재 있는 개별건물별로 말씀하셨듯 더 커진 건축도 있고, 존재했던 거대건물이 없어진 경우도 있고, 경회루처럼 중층이 단층이 된 경우등 다양한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건물처럼 말이지요.
    http://www.ytn.co.kr/_ln/0106_200811181858030000
    http://m.chosun.com/article.html?contid=2008111800850

    또한 광화문역시 이번 발굴때 터가 태조때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http://minorblog.egloos.com/m/2185165

    아무튼 수정할 부분에 대한 지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ㅇㅇ 2014/06/07 00:30 # 삭제

    사람들의 막연한 선입견, 편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경우를 보면 정말 답답하네요.

    커진 것이 있고 작아진 것이 있고 화려해진 것이 있으면 수수해진 것도 있고 하는 것인데, 마냥 조선후기로 가면 뭔가 성리학을 숭상해서 수수하고 소규모일 것이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

    참고로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이 1000칸도 안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조선후기에는 7000여칸으로 늘어납니다. 개별 건물들도 커지고요.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한 편입견으로 궁궐이 작아졌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그게 나라욕으로 이어지죠.
    답답해서 댓글을 달다보니 내용이 상충되게 됐네요.
  • ㅇㅇ 2014/06/07 00:36 # 삭제

    + 광화문은 실측도를 보면 전기 광화문이 훨씬 작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7 00:50 #

    마지막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실 현재 크게 보면 한국학, 좁게 보아 한국건축에 대한 흐름에 대한 문제도 마지막 댓글부분에 다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여러가지 흐름이 있는 것인데, 양쪽 극단에서 주장을 하는게 문제겠죠. 한쪽흐름 (사실 제 블로그는 이 흐름에 대한 비판적시각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 지적하신 부분처럼 오류가 나는 경우가 있지만)은 조선후기 양식미에만 근거해서,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미를 뭉뚱그려 후기식의 안경을 가지고 몰아넣는 문제점과 답답함이 분명 존재하고 (또한 이 부분은 한국의 일괄적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큰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반작용으로 조선중기 이전의 것이 무조건 화려하고 더 나았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별거아니고 망국이다..라는 또하나의 극단적 흐름을 낳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 이 흐름은 결국 극단적으로 말해 '국뽕'이냐 '패배주의자냐'로, 또한 그 부작용으로 말만 하면 국뽕으로 비판한다거나, 또 거꾸로 말만하면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커다란 문제- 이데올로기화-를 낳고 있지요.).

    말씀처럼 조심해서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학자들의 몫이고, 또한 이러한 흐름을 잘 견지해서 대중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이 그 역할이라고 항시 생각합니다. 제 블로그는 아무래도 현재 한국학의 큰 흐름과 그로 인한 한국사회에 대한 해외의 시각은 역시 조선후기의 양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래서 현재 놓치고 있는 조선이전의 '미학' (특히 거대건축들의 경우)을 이야기하고자 해서 만든 것이라 한쪽의 흐름으로 이야기가 쏠릴/혹은 쏠리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는데, 이런 지적이 정말 그래서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ㅇㅇ 2014/06/07 01:27 # 삭제

    기와로 예를들면 고대의 기와는 오로지 상류층들만이 사용하던 사치품의 일종이어서 사치성을 띄나 조선후기로 가며 서민의 집에도 기와를 올리는 등 사치품의 성격이 줄어듭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의 기와를 보면 조선시대에 비해 화려해 보이기 쉽죠. 그에 반해 조선시대 기와는 물론 기와 자체가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물건이지만 보다 보급품의 성격을 띄며 수수해보이죠. 이것도 뭐 조선시대의 고급기와나 고대의 보급형 기와를 보면 도찐개찐처럼 보이나.. 이런 인상입니다.

    반면 공포를 보면, 조선후기의 공포는 고대의 공포에 비해 엄청나게 화려하게만들어집니다. 단청으로 색색의 진채에 금을 올리는 등 단청은 후기로 갈수록 계속 화려해지고요. 고대인들이 흙바닥에 평상깔고 잘때 조선시대에는 건물전체에 마루를 깔고, 거기에 온돌까지 놓고요.

    예술의 경우도 조선 후기 이전에는 예술이 오로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면 조선후기에는 민간경제가 발달하며 민화 등 민간예술의 제작이 활발해지죠. 서민들의 상류문화 흉내?도 활발해지고요.
    이런 이유로 그 이전의 예술은 귀족적으로 보이고 조선후기는 서민적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조선후기에는 귀족예술이 없었을까요? 그건 또 전혀 아니죠.

    이런 흐름을 읽는게 중요한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7 01:58 #

    아빠늑대님의 글에 댓글이 길어져서 그분께 좀 죄송하다는 말씀을 우선 드립니다.>
    oo님께서 바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사회에서 다양한 시대별 흐름의 건축을 '시대별'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블로그의 가장 큰 취지입니다. 말씀처럼 삼국시대의 목탑을 재현하면서 조선식의 화려한 단청이나 공포양식을 보여준다든가, 거꾸로 고려대의 건축지가 나오면 조선시대의 건축규모를 우선시해서 이건 저택일리가 없어, 관아일것이라는 성급한 추정을 한다든가...하는 모습들을 지양해야 할것 같습니다. 예컨대 흙바닥은 흙바닥 그대로 당연히 보여줘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건축군을 최대한 사료와 유구에 맞춰 재건하고, 파악하고 우리 사회에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한 듯 합니다. 이런 흐름이 나오려면 역시 가시적인 성과와 함께, 극단의 이데올로기적 이야기들이 아닌, 제대로 된 담론 (밸런스가 있는) 대중서적들의 편찬도 꼭 필요한 듯 해요.
  • 평론가 2014/06/07 20:21 # 삭제

    이번 논문으로 입증된게 하나더 있다면 경복궁 흥례문에도 똑같이 십자각이 있다는 기록이 있었죠. 조선왕조 건축의 양식을 한번더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8 00:52 #

    십자각같은 각루가 고구려 벽화에도 있던데 만약 고려성벽에서도 나온다면 꽤 흥미롭겠습니다.
  • 이 감 2014/06/08 01:52 # 삭제

    예전부터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에도 현재 경복궁의 동십자각 같은 망루는 아니더라도 창경궁의 두 십자각 같은 망루는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어오긴 했죠. 궁궐은 궁+궐이라는 정의에 따라서 말이죠.

    인정문이나 흥례문의 십자각은 궁장의 망루가 아니라 궐내망루라 또 흥미롭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08 05:08 #

    이감님 말씀대로 궐내 망루라는 게 생각해보니 특이하군요.
  • 평론가 2014/06/08 20:17 # 삭제

    재밌는게 저당시 관경변상도에 십자각이 2층짜리 자주 나옵니다. 불화가 어느정도 사실방영을 한다는것도 유추해볼수 있죠.일본 지온지 소장 관경변상도라던가
  • 이 감 2014/06/08 23:01 # 삭제

    그래서 고려 궁궐은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정도는 유추가 되죠. 산수화에 보이는 원경의 사찰이나 정자처럼 대충 그리는 것이 아닌 디테일하게 건물을 그리는 것은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의복과는 달리 당시 주변 상황을 반영했을테니 말입니다.
  • 역사관심 2014/06/09 00:36 #

    네 고려궁궐에 대한 이야기. 특히 변상도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 다룰 예정입니다 (자료만 모아두고 십자각에 대해선 눈여겨 보지 못했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게을러서 미루고 있네요 ㅠㅜ.
  • 이 감 2014/06/08 01:10 # 삭제

    1582년 그림에는 옛 침전(으로 보이는 건물)도 그려져 있어서 좋네요. 동궐도의 대조전과 같은 형식이군요. 당연히 경춘각(징광루)는 없겠지만요.
  • 역사관심 2014/06/08 04:49 #

    그렇습니다. 저 건물에 대한 결과도 지켜보는 것이 꽤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최근 옛회화를 중심으로 건축적 성과들이 꽤 나오고 있어 기쁩니다. 고려시대 건축을 묘사한 그림들도 어딘가에서 나오면 좋겠구요.
  • 와대박 2014/09/04 22:33 # 삭제

    저 혹시 조선 전기의 지붕마루 부분은 어떤모습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 회화나
    불화같은건 없을까요? 제가 조선 전기의 건축물들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려고 하거든요
  • 역사관심 2014/09/05 04:32 #

    안녕하세요, 조만간 소개할 그림중 조선전기 궁궐 혹은 궁궐내 불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시면 보고 싶네요 ^^

    http://www.ilbe.com/files/attach/new/20130529/377678/1300752917/1308469221/bdc99fbacbcbe761956fb1b48b63b4a0.jpg

    http://img.bemil.chosun.com/nbrd/data/10044/upfile/201010/20101029225704.jpg

    이 그림들에 대해서 건축과 함께 곧 포스팅 올릴 예정입니다.


  • 와대박 2014/09/06 00:35 # 삭제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 와대박 2014/09/06 00:40 # 삭제

    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경회루가 3층이었던 건 알겠는데
    취두가 금색? 인건 무엇을 토대로 고증하신건지 알고싶습니다ㅠ
  • 역사관심 2014/09/06 03:28 #

    취두가 금색이란 말씀은 혹 처음 그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개인적으로 아직 분석은 못해봐서 제 대답은 준비가 안되겠네요 ^^;
    2번째 그림 즉 '궁궐불사도'는 분명 조선궁궐내 이지만 (다만 궁궐인지 궁궐내 불사인지는 아직 단정못합니다), 첫번째 쾰른박물관 조선그림은 주제가 '석가모니의 출가'를 표현한 것으로 경복궁등 당대 우리 궁궐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변상도 특유의 '고유문화'를 응용한 표현이라는 점엣어, 당대 우리 건축모습이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문화재청 소속인 문화재연구소에서 2008년에 펴낸 쾰른박물관 소장한국문화재 보고서를 보면 실사를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 부분만 소개합니다:

    "이장면은 석가의 출가 후 태자궁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쓰러져 울부짓는 야수다라와 빈 의자가 태자의 출가를 암시하고 있으며, 금니의 용문으로 장식된 화려한 기둥은 당시 궁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 하다. 조성시기는 15세기후반-1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사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2006년 발견된 조선전기 석가탄생도와 거의 셋트입니다. 화가는 달라도 궁궐이 거의 흡사하죠.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3440

    따라서, 당대 인도건축의 모습이 저렇지 않다면, 두 화가가 저러한 동일한 건축을 우연히 그렸을리는 만부당하므로, 당대 조선궁궐을 많이 투영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물론 전제를 아직 살펴본 연구는 없습니다.
  • 역사관심 2014/09/06 03:38 #

    또한, 링크걸어드린 기사에서도 보이듯 이미 등장하는 왕의 복식이 '조선'이므로, 궁궐만 인도것을 그렸을 가능성도 확 줄어든다고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전기와 바로 근접한 '공민왕'대 기록에 다음의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사 권 43, 공민왕 21년 (1372년) 8월 갑오
    영전의 취두가 완성되었는데 황금 650량과 은 800량을 들여 장식하였다.
  • 와대박 2014/09/23 15:07 # 삭제

    아ㅋㅋ그림이아니구 cg복원한 경회루를 말씀드린건데ㅜ
  • 역사관심 2014/09/23 22:16 #

    와대박님> 아,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카페의 다른 분이 복원하신 것이라. 미안합니다.
  • 와대박 2014/09/24 16:00 # 삭제

    아니예요!! 제가더 죄송합니다ㅠㅠ
    제가 저거 만드신 분께 여쭤보니
    기록과 회화를 통해 고증하신거라네요!
  • 한라온 2020/06/09 18:38 #

    혹시 세조 대에 창덕궁에 빈청이 있다는 기록이 있나요? 지금의 빈청과는 다른 위치였을 듯한데 감이 오질 않네요.
  • 역사관심 2020/06/14 02:48 #

    이 부분은 아직 찾아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구글링으론 찾기 힘들고 사료를 직접 봐야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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