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귀신들-17세기 묵사동(墨寺洞) 흉택(凶宅)에 대하여 설화 야담 지괴류

16-17세기의 서울 남산아래는 흉가가 많았나 봅니다. 그리고 귀신도 많았습니다. 기담서 [천예록]의 또 다른 흉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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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사동(墨寺洞) 흉택(凶宅)에 대하여

서울 선비 이창(李廠)이 가난해 집을 세 들어 살았다. 세 들 집도 못 구할 형편이 되자 남산 밑 후미진 곳 묵사동에 도깨비가 있어 비워둔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험해보기로 했다. 

형 이휴(李?), 이하(李廈)와 함께 친구 5, 6인을 데리고 가서 살펴보니, 잠겨있는 마루방 하나가 있는데, 상 위에 신주가 있고 빈 궤가 그 앞에 놓여 있었으며, 줄 없는 거문고와 헌신 한 짝, 그리고 오래 된 얇은 나뭇조각 등이 먼지 속에 널려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간단히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모여 앉아 종정도 놀이를 하며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거문고 소리가 다락 위에서 들렸다. 또 여러 사람이 묘하게 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또렷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들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 같이 소리가 매우 시끌벅적하였다. 

이창 등이 서로 의논하여 그 중 한 사람이 칼로 다락 창문을 뚫고 휘두르자 다락 안에서도 칼로 창문을 뚫고 밖을 향해 휘둘렀다. 그 칼날이 시퍼래서 사람들이 두려워 그만두었다. 다락에서 나는 거문고 소리와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이창 등은 날이 밝자 흩어져 돌아가서 다시는 그 집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어떤 선비가 이야기를 듣고 이 집에 들어가 다락의 물건이 나쁜 빌미가 된다고 하여 그 안에 있던 신주 와 빈궤, 줄 없는 거문고, 해진 신과 오래 전에 깎은 나무판 따위를 가져다가 마당에 놓고 태워 버렸다. 불길이 아직 솟기도 전에 한 계집종이 갑자기 땅바닥에 엎어지더니 아홉구멍(九竅, 사람의 몸에 있는 아홉개의 구멍) 모두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불을 끄고 물건을 다시 다락으로 올려다 놓고는 결국 그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또 어떤 집 없는 사람이 들어가 있으니 밤에 푸른 치마 입은 여자 귀매가 마루방에서 기어나와 방으로 들어와 요동을 치므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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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배경인 묵사동은 현재의 장충동입니다. 장충동은 '묵사墨寺'로 부르던 절이 있어서 '먹절골' 혹은 '먹적골', '묵동'(墨洞), '묵사동'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이 墨寺는 개성에 있던 유명한 묵사와는 동명이찰입니다. 먹 묵자를 쓰고 있어 '검은색'이 강조되는데 (따라서 '먹절골'로도 불리웠던), 이 이름은 깊이가 시커멓게 보일정도로 깊던 '감정우물'이란 우물이 있어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물도 절도 없습니다만.

아무튼, 이 묵사동에 이창이라는 17세기중반의 선비가 흉가라는 집에 세도 못들 형편이 되자 한번 시험삼아 친구들과 형들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참고로 이창은 예전에 나왔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의 검은개 두마리)

흉가라는 이름에도 가본 것을 보면 이 분의 당시 경제상황이 꽤 안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줄없는 거문고와 빈 신주 궤짝등이 있어 음울한데, 밤에 갑자기 줄없는 거문고에서 소리가 나고, 빈 다락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들립니다. 한 사람이 두려움에 칼을 다락으로 찔렀는데, 안쪽에서도 칼이 확 튀어나와 기겁. 새벽이 되어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 그 뒤에 다른 선비가 들어가서 위의 물건을 다 태우는데, 태우는 도중 그의 여종이 아홉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사망. 두려워서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이후에도 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귀신이 나오는 등, 끊임없는 귀신들이 나오던 흉가였던 듯 합니다. 그런데 이당시 기담들을 보고 있자면, 남산밑에 꽤 많은 귀신이야기가 전합니다. 위에 링크건 이창의 다른 괴담에서도 '필동' (장충동 바로 옆이죠)의 흉가가 나오고, 또 예전에 소개해드린 '할머니 요괴'이야기의 죽전동도 아마 남산부근 회현동 옆으로 추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추정의 "염동이 괴물기담"에서의 배경도 남산골 장악원 앞길에서 귀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죠.

좋은 귀신이지만 남산아래 회현동에 또다른 16세기 귀신이야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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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길 흉가 기담

시골에서 책을 많이 읽은 정유길이란 사람이 서울에 왔으나 살만한 마땅한 집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남산 밑에 빈집이 한채 있긴 하나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 야단법석을 떠는 흉가라고 한다. 정유길 내외는 하는 수 없이 흉가도 아랑곳 않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부잣집의 삯바느질을 하고 정유길도 밤새 근무하는 즉 번을 서는 벼슬을 하나 얻어서 착실히 근무하였다. 어느 날 밤에 이불을 깔아 놓고 등잔불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 오길래 남편인 줄 알았다. 곧 들어오자 자기의 무릎을 베고 드러 누었다. 얼굴을 보니 남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화로에 꽂아 놓았던 인두로 드러누웠던 사람의 이마를 지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경이(새벽 5시) 되어서야 남편이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자 부인은 지난 밤에 일어났던 일을 남편에게 자초지종 이야기하였다. 남편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 이상하구나. 건넌방으로 가봐야지."하고 건넌방으로 가서 이구석 저구석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정 반자 한 곳이 쳐져 있었다. 정유길은 쳐져있는 반자를 뜯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검은 칠을 한 관 하나가 있었다. 

관을 조심스럽게 방으로 내려 놓고 관 뚜껑을 뜯었다. 두 내외는 깜짝놀랐다. 그 안에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금과 은이 가득하였다. 정유길은 마음을 가다듬고 난 다음 이것이 조화를 부렸구나!하고 그 많은 금과 은을 나라에 바쳤다. 조정에서는 정유길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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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길(鄭惟吉)은 1515년에 태어나, 1588년에 사망한 16세기의 인물로 좌의정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이야기의 정확한 장소는 회현동 1가 14번지. 현재는 이곳은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고 쉼터인데 일명 ‘정씨 터’라고 불립니다. 정확하게는 정광필집터(鄭光弼家址)로 정광필(1462-1538)은 동래정씨 문익공으로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입니다. 

이 후손중 하나가 손자 정유길인데 도합 12명이 정승 반열에 올라 '정씨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도 예전에 다룬바가 있습니다- "고려 강감찬 장군 1천년 나무 살아있다"

일명 정승배출 은행나무 (현재 회현동)
이 정광필 선생 역시 예사롭지 않은 경험을 합니다. 그의 집앞에 있던 저 은행나무가 그의 꿈에 신으로 나타나 이르기를 ‘이 나무에 서각대 열둘을 걸게 되리라’ 했다는 거죠.

이 외에도 또다른 남산밑 흉가이야기가 있는데 다음에 또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남산 밑에 이런 저런 관련 기담들을 모아, 귀신마을 하나쯤 만들어도 재밌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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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굴아저씨 2014/06/10 12:34 #

    ...
    인두로 이마를 지ㅈ..............
    기지를 발휘해서 도적때를 참살하고(!?) 어린신랑을 구한 여인네가 생각나네요(...)
  • 역사관심 2014/06/10 15:56 #

    그게 누구였죠? 가물가물 ..
  • 이선생 2014/12/07 23:07 #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알리바바의 아내이야기 일겁니다.
  • 역사관심 2014/12/07 23:15 #

    오 그렇군요. 간만에 아라비안 나이트가 읽고싶어집니다.
  • 동굴아저씨 2014/12/08 00:17 #

    ...
    조선의 아녀자였는데...ㅂㄷㅂㄷ
  • 역사관심 2014/12/08 00:27 #

    헉....
  • 화호 2014/06/10 12:42 #

    이제 괴담의 계절이네요~ :)
    남산 쪽에 이렇게 괴담이 많은지는 몰랐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
  • 역사관심 2014/06/10 15:56 #

    감사합니다. 슬슬 시원한 이야기를...
  • Nocchii 2014/06/10 13:15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4/06/10 15:56 #

    감사합니다~
  • 2014/06/10 15:26 # 삭제

    어찌된게 저는 귀신얘기보다 묵사동이 먹절고을로 불렸다는게 더 흥미롭네요. 지금은 이런 석독 문화가 사라져서 많이 아쉬움.
  • 역사관심 2014/06/10 15:58 #

    그러게요. 이 이야기에서 사실 묵사라는 절과 감정우물에 대해 꽤 궁금해졌었는데 기록을 찾기가 힘들더군요.
  • BaronSamdi 2014/06/10 19:15 #

    두번째 이야기는 이원수 아동문학전집에 실려있어서 본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4/06/10 23:36 #

    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저도 그 책있었는데.... 열권까지였나..감사합니다.
  • 세진 2014/06/16 02:02 #

    귀신마을이라니 ㅋㅋㅋ 근데 진짜무섭네요
  • 역사관심 2014/06/16 18:31 #

    여름이 다가오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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