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14)-11미터 동불상과 5층 전각, 고려 만복사 萬福寺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14번째로 소개하는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은 고려시대의 거찰이자 남원의 중심사찰인 '만복사'입니다. 이 거찰은 고려시대 사찰답게 남원시 한가운데 평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1481년) 남원도호부 편의 불우조(佛宇條)에 다음의 기록이 전합니다.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불우조(佛宇條)
만복사(萬福寺) 

南原萬福寺。在麒麟山東。有五層殿。西有二層殿。殿內銅佛長三十五尺。高麗文宗時所剙。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불전(佛典)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자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 ○ 강희맹의 시에,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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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재위1046년~1083년)대에 만들어졌다고만 되어 있을 뿐, 정확한 년도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로써 11세기중반무렵 만복사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 문단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인화가 강희맹(姜希孟)은 1424- 1483년의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약 백여년전의 만복사의 융성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외에 떠도는 세전(세상에 도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道詵 827∼898)이 창건했다는 설이 많습니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언변으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탑을 건립하였다는 구전이 전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견되는 유구들이 대부분 문종대의 것이므로 역시 정설은 동국여지승람의 것입니다.

주남철의 '한국건축사'를 보면 "1980년의 발굴조사를 보면 남북 자오선을 중심으로 남쪽에 중문, 다음 목조탑을 중앙에 세우고, 목탑 좌우로 동금당과 서금당을, 목탑 북쪽에 금당을 배치하였다. 동금당터의 동쪽에는 또다른 석탑이 있고, 또다른 건물터가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전체 면적은 39,269㎡ 약 4만 평방미터로, 예전에 다룬 고려 왕립호텔 혜음원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11미터 거대동불과 화려했던 5층 불전
만복사에서 거대건축으로 주목할 문화재는 역시 두 가지, 거대동불상과 5층전각입니다. 우선 2층 중층불전에 35자(척)급 청동불상이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토목에 주로 쓰이던 척인 영조척(자)은 31.6센티였습니다. 경국대전은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던 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의 책입니다. 따라서. 35척짜리 이 동불의 높이는 11미터 06센티가 되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간혹 10미터 6센티라는 일반적인 넷상기록들이 보이는 데 근거를 모르겠습니다).

필자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2층전각안에 동불을 모셨다는 명확한 묘사인데, 중층건축안에 거불을 모신 문헌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은 '복령사'의 높은 불전과 15미터 동불의 관계유추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더 나아가 복령사의 고층전각이 중층이었음을 가정해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용성지]기록에 나오지만 이 2층건물은 아마도 '장륙전'이었을 것입니다 (장륙전은 장륙존상을 모시는 곳이므로 당연한 추정입니다).

또한 11미터짜리 불상을 모신 2층전각 옆에 그 배가 넘는 5층불전이 있었다는 이 기록은, 만복사에 연복사 5층전각이나 흥천사 사리각같은 거대한 전각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이 두 고층전각 역시 만복사 5층전각과 같은 시대에 공존하던 건축들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숙종 때에 간행된 1699년의 남원 읍지인 용성지(龍城誌)에는 “만복사 내에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장륙전(丈六殿)·영산전(靈山殿)·보응전(普應殿)·종각(鐘閣)·천불전(千佛殿)·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의 불전이 있었으나 정유재란(1597)의 병화(兵禍)에 불타 잿더미가 된 뒤 사찰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현재 1986년 자료에 기대고 있는 5개의 건물지 (즉, 목탑지, 동서금당지, 북금당지, 강당지)외에 더 많은 건물들이 포진되어 있었을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수백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을 볼때 현재의 사역바깥쪽에 더 많은 건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주택지가 주위에 많아 발굴이 힘들뿐입니다). 특히 천개의 소상을 모시는 '천불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현재 발굴된 5개 건물지외에 긴 직사각형 건축지가 앞으로 더 나올 가능성을 크게 높여줍니다.

또한 이 기록에는 없지만 현재 터에서 200미터 떨어진 '칠성당골'에 예전에는 만복사 칠성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천불지로 보이는 건물지는 현재의 만복사터에는 없습니다 (86년 보고서 기반)

이 기록외에도 세종실록 지리지 (물론 이 지리지가 동국여지승람의 근거가 됩니다만)에도 대불과 5층전각이 나오는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즉 무게와 전각의 제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 남원 도호부)

만복사(萬福寺)

부의 서남쪽에 있다. 그 동쪽에 오층전(五層殿)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二層殿)이 있으며, 전각 안에 철불(鐵佛)이 있는데, 길이 35척, 무게 1만 3천 근이다. 그 전각의 제도가 이상하여,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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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가 1만 3천근이라고 적혀있어 약 7. 8톤의 거대불상임을 알수 있습니다 (황룡사 장륙존상이 3만 5007근입니다). 또한 전각의 제도가 이상하다는 것은, 15세기 당시의 만복사 고층전각들이 적어도 조선시대 전기 사람들의 눈에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고건물'들이었음을 쉽게 유추하게 해줍니다.

이 대불을 묘사한 것인지 다른 불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실록에 다음의 기록이 또한 전합니다. 1516년의 일로 불상안의 물건을 유학자가 도둑질했다는 기록입니다.

중종 24권,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2월 7일(무오) 
남원(南原)에 만복사(萬福寺)가 있는데 유생(儒生)이 부처 속에 간직해 둔 물건을 훔쳐갔다. 남원 사람 윤지형이 지평이 되어 사헌부 안에 이 사실을 퍼뜨리고 공문을 보내 추국하게 하였는데, 설령 유생이 참으로 이런 범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법사(法司)에서 금할 바가 아니다. 그가 한 일이 불가(佛家)를 부호(扶護)한 것 같다 하여 시론(時論)의 비난을 샀다.

그럼 당시의 화려했던 고층전각들을 직접 묘사한 사료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 1431~92)의 시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에 다음의 싯구가 전합니다.

남원의 만복사에서 南原萬福寺

일천 가호 바람 연기 자욱한 옛 고룡에 / 千室風煙古古龍
구름 위에 솟은 상찰이 단청도 찬란하여라 / 劖雲上刹爛靑紅
만억을 들여 재목 구하고 극도로 꾸몄으니 / 搜材萬億殫工巧
끝내 이 고을 보호한 공은 찾기가 어렵구나 / 畢竟難尋護邑功

이 기록을 보면 '구름위로 솟은 상찰'이란 구절에서 당대 만복사 전각들이 '고층'이었음을 알 수 있고, 단청이 찬란했고 재목역시 매우 훌륭한 최고급 건축들이었음이 직접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 이 '만복사'가 '실상사'처럼 남원을 보호하던 '호국사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옵니다.


전성기의 만복사 모습과 정유재란
[용성지]에는 도선국사의 일도 적혀 있는데 "전해내려 오는 말로 도선이 (중략) 남원부 지리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러 비보사찰과 함께, 축천(丑川)에는 철우(鐵牛)를 만들었고, 골회봉에는 용담(龍潭)과 호산(虎山)에 철환의 탑을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만복사의 고려~조선전기로 이어지던 전성기의 모습을 선하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 수백명의 귀가장면은 남원 8경 (여덟가지 볼거리)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이니, '중상골', '썩은 밥매미'같은 지명이 남아, 전성기의 사찰 규모를 엿보게 합니다. 우선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며 승려들의 빨래 널었던 곳이었습니다. 수백명의 승려의 흰 빨래를 마치고 널면 그 일대가 온통 '하얗게 보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한 썩은 밥매미는 당시 사찰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지명하나가 온통 음식쓰레기 처리장으로 불릴 정도의 규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수백 명의 밥을 하다 남은 식은 밥이 썩던 장소로 전하는 지명입니다. 썩은 밥매미 바로 옆에 있던 '중상골'은 현재 남원 신정동 파출소 뒤에 있었는데 이 곳은 승려들의 화장터였습니다. 

이렇게 융성하던 대사찰 만복사는 그러나 수많은 한국의 거대건축들의 운명처럼, 정유재란 때 왜병에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모두 불타버리고 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597년(선조 30)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와서 방화를 해버리면서 2칸의 불전과 석불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다음은 [난중잡록]의 기록입니다.

난중잡록 정유년 1597년 1월 13일
14일 적병이 숙성(宿星)ㆍ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다 풀ㆍ짚단ㆍ흙ㆍ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워 길을 내고 그 밖에도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 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어 죽 늘어 세우고, 또 (남원)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鍤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 나라 사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버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5백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하자, 중군은 말하기를,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10월 명 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부터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러 동철 5백 나한(羅漢)을 녹인 구리쇠 을 싣고 가므로 명 나라 군사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4급(級)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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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으로 보아, 16세기 말, 즉 정유재란때까지도 만복사는 매우 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백 나한과 사천왕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불전' '나한전'등이 그대로 건재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며, 왜병들이 이 나한들을 모두 녹여 구리쇠로 만들어 갔다는 기록을 보면, 나한상, 사천왕상등도 요즘처럼 나무가 아닌 '동'으로 만든 불상등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왜병들이 '사천왕상'을 싣고와 시위했다는 부분은 이 유물들의 퀄러티를 짐작케 해줍니다 (역설적으로 현재 만복사지에 남아있는 유물 중 보물 43호인 '석조여래입상'은 매우 훌륭한 유물임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아 거대동불이라든가 사천왕상, 그리고 오백나한상들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비교추정이 가능합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아무리 돌아봐도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장면은 18세기의 [연려실기술]에도 고스란히 등장합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오시에 또 칠전(漆田)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데 포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서문 앞에 있던 적은 만복사(萬福寺)의 사천왕(四天王)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밖에 돌려 보이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양원은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웠는데 적이 퇴각하므로 돌다리 밖에까지 쫓아나가니 적은 문밖에 잠복해 있다가 무릎걸음으로 나아와서 포위할 계획을 하므로 양원이 급히 바라를 울려서 돌아왔다. 

그 뒤 1678년(숙종 4)에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을 꾀하였으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예전처럼 꾸미지는 못하고 소규모 승방(僧房) 1동을 지어 적어도 불전의 향이 끊기지 않게 했다는 기록이 전할 뿐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양경우(梁慶遇:1568~?)의 싯구에 임란이후의 처참한 모습은 잘 드러나는데, 이 분은 남원사람으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대복(大樸)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제호집(霽湖集)

曠野饒悲風。蕭條歲將暮。僧亡古寺存。日落無鍾鼓。
“황량한 들판에 슬픈 바람이 부니(曠野饒悲風) / 해질 무렵 맑은 쑥대 가지가 슬피 우는구나.(蕭條歲將暮) / 옛 절은 그대로인데 승려는 간 곳 없고(僧亡古寺存) / 날이 저물어도 종소리와 북소리조차 없구나.(日落無鍾鼓)” 


더 철저한 발굴이 필요, 건물지 고찰
현재 알려진 만복사의 규모와 관리는 전북대에서 행한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 결과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습니다. 벌써 30년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현재의 만복사터는 당대의 기록으로 살펴볼 때, 역시 규모가 너무 작습니다. 언급한 천불전을 비롯 많은 건물터가 더 발굴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시 주변의 개발로 인해 현재로썬 한계가 있어 안타깝습니다. 만복사의 원래 사역은 경내주위가 2킬로가 된다는 기록도 있어 더욱 발굴이 필요해 보입니다.
진천 보탑사 3층전각

또한 5층전각의 기록은 비슷한 시대 (조선전기)에 공존하던 개성 연복사의 5층전각과 경복궁 바로 옆 흥천사에 존재하던 5층전각 사리전과의 상호비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다만 연복사의 경우 북한측 자료에 기대야 하고, 사리각의 경우 현재 전혀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건축지의 규모를 알수가 없습니다. 사리각의 경우 전혀 고고학적 성과가 없지만, 연복사는 분명 어디엔가 자료가 있으리라 생각이 되므로, 그 건물지의 모습과 만복사 5층 불전의 터를 비교해 본다면 의미있는 비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필자의 생각으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물은 역시 서금당지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생각이지만 결국 5층이나 되는 건물은 규모에서 가장 클 것이니 현재까지 나온 건물지중, 강당지 (29.80×20.85)를 제외하고 최대(5칸 x 4칸, 20.55m×15.00, (기단 24.7×19.2)인 이 건물지가 현재로선 유력한 후보같습니다. 현재 서금당을 2층불전으로 목탑을 5층전각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는데 아마도 그 근거는 1985년의 발굴이전에 있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문화재청에서 발표한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에도 어느 건물지가 5층, 2층으로 추정된다는 설은 귀결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유구의 규모로 볼 때 이 설에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조선 전기에 보았던 터와 지금의 터가 다를 가능성 (즉 현재의 주택지의 건물터에도 건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더 발굴이 진행됨을 지켜보아야 할 듯 합니다. 

또한 고려대의 사찰답게 회랑지가 있고, 흥미롭게도 고구려의 대표적인 사찰배치인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1980년대의 발굴이전에는 배치가 ‘동탑서전식(東塔西殿式)’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과 [용성지(龍城誌)]의 두 기록을 근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고려 문종 때의 만복사 가람배치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만복사 창건 당시의 건물들이 퇴락된 뒤의 현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다 발굴 조사 결과 실제 고려 문종 때 만복사는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가운데 위치한 목탑 역시 흥미로운데 규모는 한변 9미터 (기단 12.8미터)로 한변의 길이가 18미터급인 미륵사나 제석사 목탑이나, 20미터를 넘어가는 실상사나 황룡사의 목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같은 고려대의 목탑인 최근 발굴된 영암 사자사 3층목탑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규모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비슷한 기단규모의 고대목탑으로는 백제 왕흥리사지 목탑이나 군수리사지 목탑이 있습니다. 

만복사 목탑터 (계단을 통해 기단부를 올라가는 특이한 형식)

만복사 목탑은 각면 5개의 주춧돌만 보이지만 사실 소실된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이렇게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형식은 시대는 한참 다르지만 어떤 목탑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신라의 사천왕사 목탑입니다. 역시 계단부를 갖추고 이중기단 기준 12.9미터로 크기도 매우 비슷합니다.
또한 현재의 정면앞 주택가에는 축천이라 불리던 냇물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어 명주실 꾸러미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의 맑은 곳이었다 합니다. 이 곳에는 잉어 붕어들이 넘쳤다고 합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현재의 절터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30호인 만복사지오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31호인 만복사지석좌(萬福寺址石座), 보물 제32호인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석불입상만이 쓸쓸하게 전합니다.



당간지주와 석인상

남한 최고最高의 당간지주인 굴산사 당간지주 5.4 미터 바로 다음으로 높은 축에 속하는 것이 바로 만복사의 5미터 당간지주 (보물 32호)입니다. 조선시대이후 이러한 규모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이 사찰의 연대를 짐작케 해줍니다. 이 당간지주는 형식상 고려전기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고려 문종대와 들어 맞습니다.

그 옆에 서있는 유명한 석인상(?)은 후대 용도를 알수 없어 그냥 붙인 이름일 뿐 이 조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 2기가 있어 금강역사 한쌍으로 파악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크기는 무려 5.5 미터.

그나마 2009년 8월까지 이렇게 도로변에 파묻혀 있었죠.


만복사저포기

마지막으로 건축적인 면에 집중하는 시리즈이므로 그냥 넘길수도 있지만, '만복사저포기'는 너무나 유명한 글이므로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조선 세조 때의 김시습(金時習, 1435 ~1493년)은 이 사찰을 배경으로 불교소설을 지었는데 이 작품이 바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입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이 소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한문)로 평가됩니다.


현재의 만복사터
김시습의 '만복사의 저포놀이' 중 

寺裏燒香歸去來, 金錢暗擲竟誰媒.
春花秋月無窮恨, 銷却樽前酒一盃.
漙漙曉露浥桃腮 幽谷春深蝶不來
却喜隣家銅鏡合, 更歌新曲酌金疊.
年年燕子舞東風, 腸斷春心事已空.
羨却芙蕖猶竝蔕, 夜深同浴一池中
一層樓在碧山中, 連理枝頭花正紅.
却恨人生不如樹, 靑年薄命淚凝瞳.

만복사에 향 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꽃 피는 봄날 가을 달밤에 그지없는 이 원한을
임이 주신 한 잔술로 저근덧 녹여 보세.

복사꽃 붉은 뺨에 새벽이슬이 젖건마는
깊은 골짜기라 한 봄 되어도 나비조차 아니 오네.
기뻐라. 이웃집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새 곡조를 다시 부르며 황금술잔이 오가네.

해마다 오는 제비는 봄바람에 춤을 추건만
내 마음 애가 끊어져 모든 일이 헛되어라.
부럽구나. 저 연꽃은 꼭지나마 나란히 하여
밤 깊어지면 한 연못에서 함께 목욕하는구나.

푸른 산 속에 다락이 하나 높이 솟아
연리지(連理枝)에 열린 꽃은 해마다 붉건마는
한스러워라. 우리 인생은 저 나무보다도 못하여
박명한 이 청춘에 눈물만 고였구나.
                                                 
석인상만 보아도 만복사는 아직 그 전모를 보여준 적이 없는 고려의 거찰이자 명찰입니다. 언젠가 이 작품에 걸맞는 '만복사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그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해 볼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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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만복사저포기를 더 알고 싶은 분은 아래 글들을 참조하시길.

김시습은 왜 만복사를 무대로 소설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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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2 : 너무 글이 길어져 본 포스팅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몇몇  만복사 관련사료가 더 있습니다. 추후 이 글과 연계지어 올려보겠습니다.

湖陰雜稿卷之
覲省錄
萬福寺南原地。寺今頹落
巋然毀殿尙干霄。福地應隨劫火燒。雨涴金身渾剝落。風含鐵鳳自飄搖。殘僧起廢功休問。神力驅魔事已遼。無數偶人當戶踣。野童摧踏草苔饒。

오봉집- 이호민(李好閔 , 1553~1634)
鰲峯先生集卷之一
 五言四韻
萬福寺。別蘇宜卿。 
近郭荒凉寺。迎門一老僧。五層金佛殿。千載石蓮燈。白酒忘懷久。靑山識面曾。臨分意無盡。回首暮烟凝。

정약용- 여유당전서
辛應時按察湖南。南原有一富民。惑於左敎。盡貲事佛。施田於萬福寺。授券永給。以表其誠。其後竟不免饑死。只有孤兒行乞。將朝夕塡壑。具狀訴官。冀還施田。累訟累屈。往訴于按察。辛公手批狀尾曰。捨施田土。本爲求福。身旣飢死。子又行乞。佛之無靈。據此可決。還田於主。收福於佛。一道稱快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amrae007&logNo=100098231087
http://www.gojb.net/u_html/sub2/detail.jsp?trSeqId=888&searchTrWebCate=003&searchOpt=04&searchWord=&isShopping=N&isArea=N&isExpr=N&cur_page=1&returnUri=/u_html/sub2/index_3.jsp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7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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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cchii 2014/07/16 06:42 #

    와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사천왕상 이야기의 사천왕이 바로 만복사의 물건이었군요 안타까움이 더욱 와닿습니다
  • 역사관심 2014/07/16 06:45 #

    감사합니다.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 바람불어 2014/07/16 08:21 #

    만복사 저포기에서 만복사가 가상의 절인줄 알았더니 실재했군요.
  • 역사관심 2014/07/16 08:29 #

    그럼요!! :)
  • 솔까역사 2014/07/16 08:40 #

    갸날픈 석인상이 특이하네요.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이기도 한데 매력적인 고장인거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7/16 08:47 #

    남원은 분지라 그런지 아늑하고 고요한게 좋더라구요 .
  • Esperos 2014/07/16 09:04 #

    한국 불교 전설 99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던 절 이름 같기도 하군요. ㅎㅎ (하도 절이 많이 나와서 헷갈리긴 하지만요.) 우리나라의 고찰 치고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사라지지 않은 곳이 드무니 정말 아깝습니다.
  • 역사관심 2014/07/17 04:18 #

    T.T
  • ㅇㅇ 2014/07/16 11:05 # 삭제

    갠적인 의견이지만

    폐사지를 보면서 감상을 느끼는 사람들 참 꼴불견이더군요

    역시 문화재는 발굴해야 되고 가능하다면 복원,중건 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요즘 자꾸 돈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뇌물 받아서 뒷돈 챙기는 것만 다 까발려도

    충분히 보수 복원 중건 가능하다고 봅니다

    더이상 조선 후기 목조 건축으로 한국 전통 미학 따지는거

    보고 싶지 않네요
  • ㅁㄴㅇ 2014/07/16 11:36 # 삭제

    ? 조선 후기 목조 건축은 안 넣는게 더 나으실 뻔 했네요.
    조선 전기나 이전 시대를 강조하는게 조선 후기 건축물ㅇ의 가치없음 때문이 아닐텐데.
  • 역사관심 2014/07/17 04:22 #

    복원/재건에 대한 제 관심이 사실상 이 블로그를 열게 만든 가장 근본원인이기도 하고, 무슨 말씀인지 잘 압니다. 표현이 직설적이셔서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이 조금 불편하실수도 있겠지만, 저도 기본적으로 '터'에서 무엇을 느끼는 것과 어떤 경우는 어쩔수 없이 터는 두더라도 곁에 재건을 하는 쪽이더라도 '가시적인 고대-중세 한국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인식적 밸런스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끼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의 '시스템'과 복원전문가수준문제, 그리고 말씀하신 개선부분에 대한 고민들은 선결되거나 병행해서 풀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중요한 첫 단추가 경주복원프로젝트겠지요.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 하는 '국책'사업입니다. 어찌 보면 숭례문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솔까역사 2014/07/16 18:52 #

    꽃이 아름다운 것은 피었다 지기 때문입니다.
    옛 절터가 더욱 애틋한 것은 지금은 없기 때문입니다.

    절이 있던 공간은 누군가가 편히 쉴 수 있는 초가집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하는 농작물이 자라는 공간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절을 중건하는 돈은 굶주리는 소외계층의 배를 불릴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옛 절터를 보며 감상을 느낄 수도 있고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도 있으며 복원이나 중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가치가 인간에게 더 중요한가하는 생각을 깊게 할 수도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4/07/17 04:25 #

    좋은 말씀이고, 분명 옳은 말씀입니다. 다만, 윗댓글의 답글이 제 개인적인 입장이고 이 블로그의 기본 입장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현대한국같은 경우) 철학적인 고민이 필요한데, 현재 연구중이고 작성중인 여러 글이 있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다만 아직 갈 길이 멀군요;.
  • 이 감 2014/07/17 01:18 # 삭제

    저는 매년 일년의 한달 정도는 남원에서 보내서 만복사가 더욱 애틋하죠. 남원에서는 시즌이 되면 줄기차게 나오는 문화재 관련 프로젝트가 3개 정도 되는데요. 남원객사 용성관 복원, 남원읍성 복원, 만복사지 추가 발굴인데...용성관은 많은 객사들처럼 초등학교라 학교이전 등의 조율이 쉽지않고, 남원읍성은 북쪽 성벽 정도가 가능하죠. 만복사지는 역시 민가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변변치 않고요. 남원객사는 객사 규모로는 최대급의 반열에 들기 때문에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번번히 무산되고 있습니다. 만복사지는 남원 한복판은 아니고 시내 기준으로 변두리 지역이기 때문에 사실 관광객이 없어서 조용히 과거를 상상하며 바로보고있다 올만 하지요.

    만복사의 건물들로 이야기를 옮기자면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예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관련해서 연구하는 분의 이야기로도 그렇고 목탑이 5층 전각이고 세 금당이 각각 2층의 전각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14/07/17 04:42 #

    그러시군요, 예전 글에서도 남원지역을 자주 가신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
    역시 민가들이 나중에 옮겨지는 시점에서나 가능하겠군요.

    만복사에 대한 논문이 생각보다 구하기 어려워서 제 추론만으로 써보았습니다. 목탑 5층설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있다면 나누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만 '동쪽에는 5층불전' 이나 '오층전'이라는 구절이 이 건축을 목탑으로 보기에는 당장 (제 생각에는) 선뜻 공감이 가지는 않기는 합니다 (현재 기단규모로 볼때도 그렇습니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동금당지가 조선시대 이후 발굴되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조선전기에 현재의 주택지에도 건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때까지 다른 문헌사료들을 볼때 기단규모가 저정도인 목탑을 '불전'이라고 표현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좀 더 많은 연구자료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감 2014/07/17 11:50 # 삭제

    (첫 댓글에서 바로보고있다-->바라보고있다)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이나 3층 목탑인 쌍봉사 대웅전도 불전이지요. 탑은 원래 무덤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나 중국에서는 불상을 모시기도 하니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석탑이 무덤역할을 하면서 목탑 일부는 불전으로 이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단 규모도 내부를 올라가지 않게 만든다면 5층 목탑으로 충분하지요.

    다만 현재로써는 일단 말씀대로 지금의 만복사지를 사찰 중심구역으로 보긴 하지만 아직 현재 발굴구역 만큼이나 발굴해야 할 권역이 많다는 점을 들면 기록의 5층전과 2층전이 지금의 만복사지에 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겠지요. 연구원과 나눈 이야기는 사견에 가까운 대화였습니다만, 목탑 5층설이 담긴 글 혹은 책을 읽은 적은 있는데 인터넷에서 찾기가 힘드네요.
  • 역사관심 2014/07/17 11:57 #

    하긴 연복사탑처럼 올라가는 구조가 아니라면 현재기단규모로도 충분할 수 있겠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주변이 더 발굴되면 문헌사료와의 일치를 통해 더 확실한 점이 발견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현재의 상황은 좀 많이 아쉽습니다).
  • ㅇㅇ 2014/09/14 05:41 # 삭제

    창건당시에는 동향의 금당(지금의 서금당지)과 그 옆의 5층불전(5층목탑)이 처음 세워져 중심축이되었으며, 이게 나중에와서 금당이 남향하게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건물들이 계속 늘어나며 북금당 동금당이 생겨난겁니다. 이게 발굴의 결과이고요.

    고로 중창전으로 생각되는 기록속의 동불을 모신 서쪽의 2층의 불전과 동쪽의 5층의 불전은 지금의 서금당지과 목탑지를 가리킨다고 추정하는게 다방면으로 가장 매끄럽습니다.
  • 케이 2015/09/21 20:11 # 삭제

    저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다는 고려사찰 모형은 글쎄요..아무리 봐도 고려 사찰보다는 당나라 신라방이나 뭐 그런거에 관련된 모형같네요...중국풍이 강해요..너무
  • 역사관심 2015/09/22 23:01 #

    다른 포스팅에 관한 댓글이네요 ^^. 그렇지 않아도 케이님이 맞았습니다. 알고보니 '신라방에 있던 신라원'을 묘사한 모형이었습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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