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바늘전투의 달인병사 & 신라 무술승려 강포 설화 야담 지괴류

아무래도 기대했던 명량이 순항하는 관계로 임진왜란 관계 글을 올리게 되는군요- 좋은 이야기건 나쁜 이야기건 일단 임진왜란의 담론이 대중사이에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본 영화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유재란 관련 야화중 일부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야화로 굉장히 흥미있는 소재가 있습니다.  바로 당시 조선병사중 '바늘던지기의 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가 명량대첩의 고작 10일정도 전입니다). 배경이 되는 소사전투 (素沙戰鬪)는 1597년(선조 30) 9월, 충청도 직산(稷山) 북방의 소사평(素沙坪)에서 명나라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제독 마귀(그 마귀가 아님)가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당연히 각국의 입장에서 '승전'을 위주로 대첩을 선정하는 바, 명나라에서는 육전만을 한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사전투 (직산전투)를 평양성전투와 행주대첩 (이건 온전히 조선군의 승리지만)과 함께 조선 3대전으로 꼽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98년 울산전투에서 제독 마귀는 조명연합군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전하고 맙니다. 공교롭게도 이 소사전투가 있었던 1597년 같은 9월에 명량대첩이 일어납니다. 배경은 그러하고 일단 이야기를 보지요. 
소사전투의 바늘달인 조선병사

청성잡기靑城雜記
왜병을 물리친 바늘춤

명(明)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소사(素沙)에서 왜적과 싸울 때의 일이다. 양군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한 왜병이 검을 휘두르며 기세등등하게 도전해 오자, 긴 창을 쥔 절강(浙江) 출신의 병사가 나가 대적하였으나 얼마 못 가 검에 찔려 쓰러졌다. 이를 지켜본 그의 아들 네 명이 연이어 나가 싸웠으나 모두 죽고 말았다. 검을 잡은 왜병이 더욱 앞으로 다가오자 조명(朝明) 연합군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마귀가 군중에 후한 상금을 내걸고 왜병에 대적할 자를 모집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와서 마귀에게 읍(揖)하고는 맨손으로 그 왜병을 잡겠다고 자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으나, 마귀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우선 나가서 대적하게 하였다. 그 무명옷 병사가 나가서는 양손에 아무런 병기도 없이 검에 맞서 맨손으로 춤을 추기만 하니, 왜병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웃곤 하였다. 얼마 후에 검을 휘두르던 왜병이 갑자기 쓰러지자, 무명옷 병사는 그의 검을 주워 들어 목을 베어 바쳤다. 이 광경을 본 왜군들은 크게 기가 꺾여 마침내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마귀는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물었다.
“그대는 검술을 아느냐?”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병의 목을 벨 수 있었느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는 어려서 앉은뱅이가 되어 혼자 방에만 있다 보니,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바늘 한 쌍을 창문에 던지는 연습을 하면서 날마다 동이 틀 무렵에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져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던지는 족족 바늘이 빗나가 떨어지더니, 오랫동안 연습하자 바늘이 그대로 구멍에 들어가 8, 9척 안의 거리는 던지는 대로 명중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먼 데 있는 것이 가깝게 보이고 가는 구멍이 크게 보여, 바늘을 던졌다 하면 손가락이 마음과 일치되어 백발백중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기술이 완성되었으나 써먹을 데가 없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서 마침 저의 앉은뱅이 다리도 펴져 오늘에야 적에게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맨손으로 미친 듯이 춤을 추니, 왜병은 저를 비웃고 무시하여 검으로 베지 않았습니다. 저의 바늘이 자신의 눈알을 노릴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귀가 이 말을 듣고 왜병의 머리를 살펴보니, 과연 그의 눈알에는 각각 바늘이 한 치쯤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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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컨텐츠로 사용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이야기지요. 이 야화는 성대중 (1732 ~ 1812)의 [청성잡기 靑城雜記]에 전합니다. 이 분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허구여부를 떠나 바늘을 던져 적군의 눈에 박아넣는 기술을 보유한 병사라는 것은 거의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소재입니다.

그럼 실제 소사전투의 양상을 기록한 실록을 한번 보지요. 이 기록은 '수정실록'본입니다.

선수 3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1일(기축)
  
경리 양호(楊鎬)가 부총병 해생(解生) 등을 시켜 적병을 직산(稷山)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부터 승승장구하여 경기를 핍박하였다. 경리 양호가 평양에서 그 소식을 듣고 경성으로 달려와 제독(마귀)을 불러 싸우지 않은 상황을 꾸짖고 (주: 양호와 마귀는 서로 사이가 원래 안좋았습니다), 제독과 함께 계책을 정해 정용(精勇)한 기사(騎士)를 몰래 뽑아 해생·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파귀(頗貴)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직산에서 맞아 치게 하였는데 제군(諸軍)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하였다. 해생 등은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 복병해 있다가 적병이 미처 대오를 정렬하기 전에 돌격하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또 유격(遊擊) 파새(擺賽)를 보내어 2천 기병을 이끌고 따르게 하여 네 장수와 합세하여 추격하여 또 격파하였다.

이날에 경리와 제독이 상에게 강가로 나아가 보기를 청하여 상이 부득이하여 행차하니 인심이 흉흉하고 놀라 백성들이 짐을 꾸려놓고 대기하고, 내전은 전쟁을 피해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첩보가 이르러서야 서울이 조금 진정되었다.

소사전투의 전황에 대한 더 자세한 보고는 선조실록본에 있습니다.

선조 92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9일
제독 접반사 장운익이 직산 전투의 상황을 보고하다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방금 직산(稷山)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天安)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들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시살(廝殺)하며 한참 동안 교전(交戰)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道級)은 30여 개를 베었으며 해 부총(解副摠)3898) 과 양 참정(楊參政)3899) 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白旗)를 드니, 천안의 대군(大軍)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너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독이 즉각 각 군영에 명을 내려 모조리 강변(江邊)으로 나가 진을 치고 그대로 야영(野營)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 영기(令旗)를 보내 파 유격(擺遊擊)으로 하여금 정예병 2천 5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서 수원(水原) 길에서 왜적을 맞아 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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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마귀가 전투초반에 머뭇거리는 모습은 분명 닮아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기사(騎士)'를 '몰래' 뽑아 직산에서 치게 했다는 부분인데, 기사는 말타는 무사를 뜻하죠. 따라서 야화와는 다르지만,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가 누구인지 흥미로운데, 드라마나 영화소재로 쓰일만 한 것 같습니다 (영화 광해도 겨우 사료의 두줄기록으로 훌륭하게 탄생한 것 처럼).

또한 두번째 기사에서는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들처럼 흰옷으로 가장하고 있어서 공격을 주저했다는 정보가 등장합니다. 다만 첫기사에서는 명의 네장수가 끝까지 적을 추격해서 격파하는 것에 반해, 두번째 소식에서는 전투후반부에는 일본군이 대군으로 역공해서 명군도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소사(직산)전투의 명나라군 승전보가 울리고 약 열흘 후, 바로 그 명량대첩(9월 16일)이 일어납니다 (직산전투의 정확한 날짜에 대해선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9월 6일로 봅니다- 정보링크). 여기 나오는 '마다시'가 바로 '구루지마'로 영화에선 나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 '마다시'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교감 해설 징비록 (김시덕역, 2014)]에 따르면 마다시가 일본 수군장중 누구인지 여러 설이 있는데, 마타시로 마사카게로 이 역해본에선 보고 있습니다. 보통 구루지마설과 마사카게설로 나뉩니다).
선수 3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1일(기축)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왜장 마다시(麻多時)를 죽였다.
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수습하여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배를 타고 피난해 있던 연해(沿海)의 사민(士民)들이 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였다. 순신은 길을 나누어 그들을 불러모아 군대 후면에 있으면서 군사의 형세를 돕도록 했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인데,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범하려고 하여, 벽파정 아래에서 접전하게 되었다. 순신은 12척의 배에다 대포를 싣고는 조수를 타고 순류(順流)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주(敗走)하였으므로, 수군의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씁쓸한 것은 (정치역학적이라곤 하지만) 선조는 후일 직산전투의 총대장 명나라장수 '경리 양호'를 만난 자리에서 은근히 명량해전을 아래로 깔면서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하죠 

상(선조)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였다. 

사소한 왜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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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무술승려 강포

이상 소사전투에서의 바늘달인 병사에 대해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맥락상 관련있는 또하나의 야화로 전설적인 무술인 최영의(1923~1994, 일본명 오야마 마쓰다쯔)이 쓴 [백만 인의 가라테]에 신라의 무술인 강포가 등장합니다.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신라시대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신라군은 적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승려모습을 한 사람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갑주와 투구로 몸을 가린 적들 사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며 몇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손을 휘둘렀더니 마상의 적병이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열 몇 명의 병사들이 땅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감쌌고,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었다. 모두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멀리에서 바라본 적장은 불교가 성한 신라에는 도사가 많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이것이 '마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적장은 크게 두려워하며 후퇴했다. 이틈을 이용해 신라군은 응원군의 도래를 기다려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려가 바로 신라의 기인 강포였다.

책에는 정확히 어떤 시대의 어떤 전투에서 이 분이 활약했는지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최영의 저서외에 다른 고전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신라의 승려중 '무술승려'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도가와 불교의 접점 (도사의 언급)등이 꽤 흥미를 당깁니다. 우리에겐 '무술승려'라는 개념이 중국쪽에만 지금은 머물러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도 무술을 중시하던 승려집단은 있었습니다.
티벳 (중국이 아니다)의 무술승

정유재란의 저 바늘춤 병사처럼 손을 휘둘렀더니 순식간에 눈이 멀었다는 점도 '무언가를 던져' 싸우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꽤 흥미로운 소재인데, 많이 알려지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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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존다리안 2014/08/08 09:17 #

    바늘 암기는 무협지,만화 등에서는 단골로 등장하는 무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돌격 남자훈련소에 나왔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투명 유리침
    같은 무기가 나오기도 하던데...
  • 역사관심 2014/08/08 09:33 #

    그렇군요. 무협지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닌지라... 이런 이야기도 당대의 무협지느낌이죠.
  • Nocchii 2014/08/08 09:44 #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4/08/08 10:30 #

    항상 감사합니다.
  • ㅇㅇ 2014/08/08 14:05 # 삭제

    직산전투와 명량해전 얘길 하시니 갑자기 생각난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명량해전의 진실

    명량 이야기 나오면

    당시 왜선이 몇 척이었느냐 이런 이야기 꼭 나오죠.




    근데 대부분 전쟁의 기본을 모르고 하는 헛소리들입니다.

    윤관장군이 오랑캐를 토벌할 때




    17만을 동원했지만 실제 전투는 몇 천명 단위로 일어납니다.

    수나라, 당나라가 기본 100만을 동원하지만




    압록강까지 오면 30만, 평양성 근처까지 오면 10만으로 줄어듭니다.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일으켰는데 모스크바까지 간 병력은 8만입니다.




    게티스버그에서 남군이 7만대군을 일으켰는데

    총맞아 죽은 인원은 고작 5천명입니다.




    5천명이 죽으면 1만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전염병에 도주자, 행방불명 등

    2만 정도의 병력손실이 일어나고 이 정도면 남군은 궤멸됩니다.




    2차대전때 쓸데없는 카미카제로

    수백명의 엘리트 조종사가 죽었는데




    일본생각 - 고작 수백명 죽었어. 카미카제 계속해.

    그러나 현실은 .. 알고보니 그 수백명이 일본공군전력의 90퍼센트




    이후 급조된 초보 파일럿은

    미군 항공모함 근처도 못가보고 작은 경비함에 박았어요.




    카미카제로 일본 전투기 손실 1500여대, 미군사망자 5천명.

    전투기 한대와 에이스급 조종사 버려서 겨우 미군 3명 죽인거.




    카미카제를 안했다면 미군에게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전쟁을 꼼수로 이기려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예.




    명량당시 왜군은 600척 이상이 있었고

    그 중 상당은 전투함이 아닌 작은배입니다.




    한산도 담배값 그림을 보면 조선군도 작은배를 꽤 많이 끌고다닙니다.

    명량으로 이동한 배는 300척, 그 중에서 전투에 투입된 전함은 133척




    거기서 선봉부대 33척이 격파되었다면 왜군은 거의 전투불능상태가 된 것입니다.

    선봉부대와 후속부대의 전력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7만명의 남군 중에 겨우 5천명이 죽었는데도 사실상 궤멸된거 보세요.

    이후 남군은 공격다운 공격을 못합니다.




    명량에서 왜군은 탈탈 털렸다고 봐야 합니다.

    칠천량에서도 원균이 전투에서 진 것은 아닙니다.




    왜군은 교묘하게 원균을 뺑뺑이 시켰는데

    주변의 섬들을 이용해 조선군이 다가오면 도주하고 도주하고 거듭해서




    피로하게 만든 거지요. 왜군이 계속 도망가니까 원균은

    왜군이 밤에 야습할거라곤 상상을 못한 거.




    결국 칠천량은 본격적인 전투도 못해보고

    그 이전단계의 신경전에서 완전히 말려버린 것입니다.




    신경전이 중요하다는 거.

    왜군은 패전도 패전이지만 완벽하게 포위해서 다 이겨놓고도




    결국 털렸다는 점에서

    다시는 이순신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거죠.



  • 역사관심 2014/08/08 15:41 #

    잘 읽었습니다. 저도 사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요약해서 (모르던 전투들까지)상세히 정리해주시니 많은 도움이 되네요.^^

    마지막 말씀처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심리' (군사들의)가 눈으로 보이는 숫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로보캅'같은 녀석이 나오면 현실이 끔찍하겠죠...
  • ㅁㄴㅇ 2014/08/08 16:51 # 삭제

    줄 간격 좀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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