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명량해전에 대한 원균과 이순신, 그리고 조선전선과 일본전선에 대한 평가. 역사

방대한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에는 거북선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의 주제는 거북선이 아니라, 당대 조선인들의 조선전함과 일본전함의 성능에 대한 인식입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거북선

선조 25년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 좌수사로 삼으니,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왜적을 쳐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앞서 왜와의 문제가 이미 야기되자 이순신은 창을 만들고 쇠사슬을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 지혜를 짜내어 큰 배를 만들었는데, 모습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아 거북선이라 하였다. 그 제도는 배 위에 큰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의 작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하고 거기에 모두 뾰족한 송곳을 꽂아 사방 어느 곳에도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없게 하며, 앞쪽 용머리와 뒤쪽 거북이 꼬리 부분에는 모두 총구멍이 있고, 전후좌우로 각기 6개씩을 설치하여 큰 탄환을 쏠 수 있게 하며, 병기(兵器)는 바닥에 보관해 두도록 하였다. 또 적을 만나면 띠로 만든 것으로 위를 덮어 뾰족한 송곳을 감추니 적의 선봉(先鋒)이 배에 오르려 하면 뾰족한 송곳에 찔리고, 와서 불의에 공격하려 하면 일시에 총이 발사되어 향하는 바에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로써 공적을 거두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수광(李睟光)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제도가 매우 굉장하였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선 수십 척이 우리나라의 전선 한 척을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니, 대개 선박의 이로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대신해서는 100여 척의 전선으로도 여지없이 패배하였고, 이순신이 다시 원균을 대신해서는 13척의 전선으로 바다를 뒤덮은 600척의 배를 탄 적을 꺾었으니, 또한 장수에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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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이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인 이수광 (1563~1628년)의 말을 옮겨 적은 부분입니다. 이수광은 거북선뿐 아니라 판옥선등을 포괄하는 전함을 만드는 제도 자체가, 일본보다 조선이 훨씬 앞서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당시에 이미 '왜적을 막는 데는 수전만한 것이 없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당장은 못찾겠군요). 짧은 기록이긴 하나, 당대에 이미 조선의 선박기술이 일본에게 앞서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꽤 인상적입니다.

또한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600척으로 묘사)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원균과 이순신의 평가를 명료하게 칼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즉, '전선의 능력'이 뛰어나서 이순신이 이긴 것이 결코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소양에서 천지차를 보였다는 이야기를 당대의 지식인인 '이수광'이 하고 있는 것이죠 (류성룡이야 원래부터 당연히 그런 평가이고). 이는 마치 요즘 일부 원균과 이순신 담론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는 듯해서 재밌습니다.

참고로 임하필기의 문헌지장편은 고대부터 조선까지 선대의 여러 지식을 망라한 부분인데, 거북선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아래의 선조실록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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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0번째기사
전라 수군 절도사 이순신이 거제 앞 나루에서 왜적을 격파하다
전후생략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보를 보고 상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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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임란 담론중 하나인 전란초기에 왜군이 승전한 지역의 민중이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한가지 추가합니다. 꽤 생생한 보고죠.

간이집(簡易集) 괴원문록(槐院文錄)
송 경략(宋經略)에게 회답한 자문(咨文)

"중략...심지어는 왜적들이 정계비(定界碑)를 운위(云謂, 입에 올려 말함)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들이 또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말을 조작해 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산(善山) 이남으로는 그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왜적에게 귀의했다고 떠벌려 대고 있는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 말이 또 얼마나 기이할 정도로 포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근거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원래 그들의 천성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제멋대로 꾸며 대는 것이 이쯤 되어서는 극에 달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말들도 자꾸만 반복해서 듣게 되면 혹시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 지역이 일본과 가까운 점도 있다고 일단 인정한 상태에서, 그곳이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로서 산림(山林)의 독기(毒氣)가 만연되어 있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군대를 철수시켜야겠다는 의논이 나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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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은 선조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최립(崔岦,1539~1612)의 시문집입니다. 총 9권중 제 5권인 괴원문록은 저자가 승문원(承文院)에 재임할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에게 보낸 문서들을 모은 것으로 모두 조정을 대신해서 지은 것입니다. 명과의 외교문서인 [정축서 丁丑書], [신사서 辛巳書] 등 임진왜란을 전후로 외교서들이 실려있고, 장계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당대의 생생한 기록이지요. 일본군이 항복한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자신들에게 귀의했다는 심리전을 펼치고 있지만, 포로로 잡혔다가 살아나온 사람들의 말로는 그것이 모두 심리전에 불과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물론 앞잡이도 나오고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었지만, 이러한 기록도 하나 보태봅니다.

마지막으로 이 괴원문록의 같은 문서에서도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고 나면 도망친 왜적들이 비록 다시 건방진 마음을 낸다 할지라도 이미 육지의 근거지를 잃은 데다 수전(水戰)에는 또 자신이 없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측의 기록이 아닌 '명나라'의 공식문서에서도 이런 구절이 나오죠.
○ 형개(邢玠)가 요양(遼陽)에 이르자, 소서행장은 성루(城樓)를 세우고 가등청정은 파종(播種)을 하는가 하면, 섬오랑캐들은 물을 저장하면서 조선의 지도(地圖)를 구하고 있었다. 이에 형개가 드디어 군사를 출동하기로 결의하였다. 마귀(麻貴)가 압록강을 향해 동쪽으로 출발하였는데, 휘하의 군사가 겨우 1만 7000명뿐이었으므로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형개가 조선의 군대는 오직 수전(水戰)에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천(四川)과 절강(浙江)의 병사를 모집하고, 아울러 계주(薊州), 요주(遼州), 선부(宣府), 대동(大同), 산서(山西), 섬서(陝西)의 보병(步兵)과 복건(福建), 오송(吳淞)의 수군(水軍)을 조발하도록 하였으며, 유정(劉綎)에게 사천병(四川兵) 및 한병(漢兵)을 통솔하면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부분은 조선후기 해동역사의 본조(本朝)의 비어고(備禦考)라는 권에 나오는 명나라 당대의 기록입니다. 명나라 장수인 '형개'가 조선의 군대는 오직 수군만 강군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후 얼마 뒤 일본기행기인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의 문견별록을 보면 안택선으로 보이는 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일본배에 대해 조선지식인은 여전히 깔보고 있습니다.

"배는 누선(樓船)이 가장 호화스러우니 검은 칠을 한 널판자 기와로 덮고 안팎에 금벽(金碧)이 찬란하기 그지없으며, 방사(房舍)와 누함(樓檻)이 보통 사는 집과 똑같음. 그 다음은 과선(戈船)으로서 역시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견고하기는 우리나라의 배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어디나 배의 돛에는 각기 표지가 있어 구별됨".

명량을 이번주에 보러가는데, 시류(?)를 타는 포스팅을 하게 되는군요. 이것자체가 영화의 순기능이겠죠. 아무튼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알만한 지식인들사이에서 이미 당대에도 저러한 모습입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원균에 대한 당대의 평가. 2016-04-27 12:55:34 #

    ...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로 원균에 대한 또다른 당대의 기록으로 이수광선생의 평가 역시 예전에 한번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http://luckcrow.egloos.com/2486833 ... more

덧글

  • 동굴아저씨 2014/08/13 16:03 #

    원균 영웅화 작업이 모처에서 열심히라는데...
    ...
    개인적으론 원균이 대판 깨지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영화는 해전파트가 아니더라도 긴장감있게 이야기가 진행되서 재미있게 봤지요.
  • 역사관심 2014/08/13 16:19 #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격입니다. 외려 선조를 더 욕보이는 격 같습니다.
  • ㅇㅇ 2014/08/14 10:25 # 삭제

    임진왜란때 조선 민중들이 조선 조정에 환멸을 느꼈다.. 왜에 투항했다 .. 기타 등등

    이런 식의 역사기록은 이제 전반적으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까놓고 말해서 당시 조선 백성들의 유교적 충효 마인드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솔직히 그동안 후대 한국인들이 좀 너무했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무조건 외국의 기록, 지배층의 기록만 신봉했으니..

  • 역사관심 2014/08/14 13:21 #

    사료를 꼼꼼히 차근차근 교차비교해보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4/08/14 15:48 #

    그런데 영화명량은 다른게 문제죠... 보시고 잘하면 분노하실수도....
  • 역사관심 2014/08/14 16:39 #

    왜군이 상대역으로 강하게 묘사되었다는 건 인지하고 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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