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황금출처(1)- 경주 황금에 대한 논문 (2014 6.10) & 쿠쉬나메의 등장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개인적인 역사문화학적인 궁금점중 한가지가 바로 '신라의 황금'은 어디서 났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고고학적 발굴로 등장하는 유독 경주부근에서 많이 출토되는 금제품과, 문헌사료로 간접적으로 '상상'할수 있는 9세기경 신라의 '금'의 풍부한 모습 (특히 아랍권사료)는 '현재의 경주'를 생각해볼 때 언뜻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의 경주에 금광이라든가 풍부한 금제산업이 발달한 모습은 적어도 고려이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마치 어디 다른나라의 이야기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요컨대 예전에 자세히 살펴본 '9세기 금입택'의 기록이라든가 아랍권의 경주의 금에 대한 묘사를 학계에서 정설로 찾기 위한 노력을 선뜻 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이유 (혹은 발목잡기)가 되고 있습니다.

윗 링크글의 아주 일부만 발췌해 본다면 "알 라지의 기록은 880년, 즉 삼국유사의 금입택기록과 일치하는 바로 그 당대입니다. 따라서 '금이 풍부하다'는 이 사료의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약간 후대인 10세기 인물로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아마도 '금입택'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단서를 966년 그의 저서인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적어두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이보다 약간 후대인 12세기초의 저자 알 이드시리(Al Idrisi. 1099~1166)는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 일명 로제타의 書]에서 믿기 힘든 글을 남깁니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주: 원숭이의 목테라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
경주의 풍부했던 사금과 수정

그런데 다음의 뉴스가 바로 두달전인 2014년 6월중순에 있었더군요. 바로 신라의 황금의 출처가 풍부한 사금에서 나왔으리라는 논문입니다. 논문을 구해 읽고 싶지만, 우선은 뉴스의 거의 전문을 소개해 봅니다.

4세기 후반에 갑자기 시작된 신라의 황금 유물은 고구려, 백제의 금 관련 유물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 같은 시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는 재료로 쓴 금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을까.

수많은 금, 금동제 유물의 원료인 신라 금의 공급구조는 아직 풀리지 않는 신라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러 문헌자료상 경주와 인근 지역에는 금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사 연구에서 금의 공급체계는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핵심 주제이지만 학계의 노력에도 불구, 관련 자료부족 등으로 뚜렷한 학술적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신라의 금은 ‘경주와 경주 인근에서 채취된 사금(砂金)’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58)은 최근 ‘위덕대 박물관 논총’에 발표한 <신라 황금에 대한 소고-경주 및 인근 지역에서 채취한 사금을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신라의 금 생산은 금광 운영이나 외부로부터의 수입이 아니라 사금 채취에 의존했다”고 밝혔다. 박 관장은 <삼국사기>, 조선총독부 문헌자료 등을 연구하는 한편 사금 채취방법을 직접 배워 경주와 인근 지역에서 직접 사금을 채취한 결과 신라의 금 산출지를 밝혀냈다.

박 관장은 논문에서 “경주 월성지역을 기준으로 40㎞ 이내의 형산강 서쪽 지역 일부만을 조사했음에도 불구, 모두 10곳에서 사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본격 채취가 아닌 단 3개월간 학술연구 차원에서 채취해 확보한 금의 양은 적지만 신라의 금 생산이 사금 채취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는 사금 채취로 얻은 금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을까. “현장조사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박 관장의 결론이다. 

그는 “당시에는 지금보다 사금 채취 환경이 100배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신라는 외부로부터 금을 수입하지 않고도 사금 채취로 충분히 수요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실제 토사의 퇴적, 각종 공사에 따른 강폭 축소, 댐·저수지·보의 조성 등으로 사금 채취 환경은 크게 열악해졌다.

박 관장은 “조선총독부 자료상에 나타나는 사금산출지와 그 양을 분석하면 통일신라 당시 신라영토 내의 사금산출지에서 하루 1g씩만 채취하더라도 하루 1㎏이 넘는 황금이 쌓이게 된다”며 “설사 당시 금광이 발견됐더라도 기술력 수준을 고려할 때 사금이 금광보다 경제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대적인 사금 산출지 탐색과 대규모 인력을 통한 활발한 채취 활동, 뛰어난 제련과 세공술 등으로 신라는 황금시대를 이어갔다”고 밝혔다. 
짧은 시간동안 채취한 사금 (출처 당 논문)

박 관장의 논문에 대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최맹식 소장은 “신라의 많은 금제유물 연구는 유물 자체를 분석하는 데 치우쳐 있으며 금의 출처나 허리띠 드리개의 연구는 없는 실정”이라면서 “박 관장의 논문은 향후 신라 금제유물 연구에 큰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방룡 부산시립박물관 관장도 “아주 재미나고 흥미로운 논문”이라며 “신라의 금 생산과정이나 허리띠 드리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앞으로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관장은 “직접 사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어 좀 더 정밀한 연구를 할 계획”이라며 “신라의 금 공급체계 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학술적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당시에는 지금보다 사금 채취 환경이 100배는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외부로부터 금을 수입하지 않고도 사금 채취로 충분히 수요를 충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 토사의 퇴적, 각종 공사에 따른 강폭 축소, 댐·저수지·보의 조성 등으로 사금 채취 환경은 크게 열악해졌다.조선총독부 자료상에 나타나는 사금산출지와 그 양을 분석하면 통일신라 당시 신라영토 내의 사금산출지에서 하루 1g씩만 채취하더라도 하루 1㎏이 넘는 황금이 쌓이게 된다. 설사 당시 금광이 발견됐더라도 기술력 수준을 고려할 때 사금이 금광보다 경제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흔히 금광에 비해 사금은 금의 부스러기정도라든가 소량의 양을 얻는 기술이라는 선입견을 일반인은 가지기 쉬운데, 당대 경주부근 강들의 그것은 금광에 비근하거나 오히려 경제성에서 더 앞서는 수준의 양과 질이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문을 구해서 읽어봐야 정확한 정보와 신뢰도를 평가해 볼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연구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천하귀남님의 정보로 인해) 사금에 대한 정보를 더 조사해보니 이 논문의 근간이 되는 경북지역의 토양종류 역시 논문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사금은 보통 충적층 (충적층은 퇴적층의 일부) 지역에서 채취됩니다. 퇴적암은 충적층에서 (더 굳어지면) 나오는 암석입니다. 그런데 경북의 토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러 퇴적암 중에서도 '쇄설성 퇴적암' 즉, 운반에 의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 사금에 적합한데, 경북지역이 바로 쇄설성 퇴적암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는 점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사실 이 기사를 발견한 것이 엊그제인데, 이전부터 필자가 다뤄보고 싶던 옛날 경주에 대한 하나의 정보가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정보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금광을 찾다가 부차적으로 찾은 정보입니다. 바로 신라의 '수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래의 글입니다.

임하필기 순일편(旬一編)
수정(水晶)
정화(政和) 연간에 이양(伊陽)의 태화산(太和山)이 무너졌는데 그곳에서 수정이 나왔다. 유공보(劉貢父)는 오랜 세월 동안 묵은 얼음이 수정이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일본에는 청수정(靑水晶), 홍수정(紅水晶)이 있다. 이는 수정이 얼음이 아니라는 견해를 증명한다. 오늘날 수정은 민(閩)의 장주(漳州)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천하에 두루 쓰인다. 또 《이견지(夷堅志)》에, “수정은 신주(信州)의 영산(靈山)에서 나는데, 큰 것을 귀하게 여긴다. 장주에서 나오는 것은 흰 것이 가장 많다. 다색(茶色)을 다정(茶晶)이라 하고, 흑색을 묵정(墨晶)이라 한다. 또 옅은 자색, 진한 자색이 있지만, 녹색이 더욱 귀하다. 모두 산에서 나는 것이고 애당초에 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토착민들이 말하기를, ‘산에서 수정이 나면 그 지역에 먼저 연기 같은 기운이 서려 있게 되는데, 찾아가서 파 보면 왕왕 수정을 얻는다.’ 하였다. 

산출되는 곳은 일정한 장소가 없어서 수정이 산출된 지가 오래되었지만 빈 곳만 파는 경우도 있고, 평소에는 산출되지 않았지만 갑자기 나오는 경우도 있다. 별도로 발정(髮晶)이라는 한 종류가 있는데, 수정 속에 셀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머리카락이 물속에 떨어졌다가 얼음을 만나 맺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주의 수정은 산에서 생긴 것으로서 결코 물의 충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였다. 연경(燕京) 사람들이 천하 제일의 기이한 물품으로 고려의 동경석(東京石)을 일컫는데, 동경은 바로 경주(慶州)이다.

연경은 명나라 이전의 북경을 뜻합니다. 고려시대까지도 경주의 수정이 최고급품이 산출되었으며 유명세를 탔음을 짐작케 합니다. 지금은 경주에서 수정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같은 순일편에서 다시 한번 경주의 남산에서 채집되던 수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동경(東京)의 수정(水晶)
경주(慶州) 남산석(南山石)은 천하에서 가장 좋은 품질이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캐내어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강릉석(江陵石)을 취해 대신 사용하여 연경(煙鏡)을 만든다. 내가 남산석의 진품을 보았는데, 원근이 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눈이 부시는 탈도 없고 벗어도 상쾌한 기운이 남아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눈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경주중에서도 '어디서 수정이 채굴되었었나'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글인데 바로 유명한 남산입니다. 이 남산에서 옛날에는 최고급 수정이 많이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세를 타서 '남산석'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있습니다. [임하필기]의 저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이 19세기의 사람이므로 이미 이 시기에 와서는 고대부터 계속 파온 수정이 고갈,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통일신라 전성기 사금의 기록
이러한 기록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즉, '사금' 역시 고대신라부터 계속 사용, 고갈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을 가능성 역시 개연성이 있지요. 그럼 통일신라 당대의 사금기록이 남아 있을까요? 삼국사기에 다음의 기록이 발견됩니다.

卷第十一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景文王  
九年秋七月 왕자 소찬 김윤을 당에 보내 물품을 진상하다(869년 7월)

九年秋七月遣王子蘇判 金胤 等入 唐 謝恩兼進奉馬二匹麩金一百兩銀二百兩牛黄十五兩人蔘一百斤大花魚牙錦一十匹小花魚牙錦一十匹朝霞錦二十匹四十升白氎布四十匹三十升紵衫段四十匹四尺五寸頭髮百五十兩三尺五寸頭髮三百两 校勘 021  金신출자頭五色綦帶并班胷各一十條鷹金鏁鏇子并紛鎝紅幍二十副新様鷹金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鷹銀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様鷹銀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鷂子金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様鷂子金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鷂子銀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樣鷂子銀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金花鷹鎝鈴子二百顆金花鷂子鈴子二百顆金鏤鷹尾筒五十雙金鏤鷂子尾筒五十雙銀鏤鷹尾筒五十雙銀鏤鷂子尾筒五十雙繋鷹緋纈皮一百雙繋鷂子緋纈皮一百雙瑟瑟鈿金針筒三十具金花銀針筒三十具針一千五百又遣學生 李同 等三人随進奉使 金胤 入 唐 習業仍賜買書銀三百兩

국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자 소찬 김윤을 당에 보내 물품을 진상하다 ( 869년 07월(음) )

9년(869) 가을 7월에 왕자 소판 김윤 (金胤) 등을 당 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아울러 말 2필과 부금(사금) 1백 냥과 은 2백 냥, 우황 15냥, 인삼 1백 근, 큰꽃무늬 어아금(魚牙錦) 10필, 작은꽃무늬 어아금(魚牙錦) 10필, 조하금(朝霞錦) 20필, 40세짜리 올 고운 흰 모직포(毛織布) 40필, 30세짜리 모시옷감 40필, 4척 5촌의 머리카락 1백 5십 냥, 3척 5촌짜리 머리카락 3백 냥, 금비녀와 머리에 쓰는 오색 기대(棊帶) 및 반흉(班胸) 각 10조(條), 매 모양 금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붉은 칼 전대 20부(副), 새로운 양식의 매 모양 금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오색 칼 전대 30부, 매 모양 은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붉은 칼 전대 20부, 새로운 양식의 매 모양 은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오색 칼 전대 30부, 새매 모양 금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붉은 칼 전대 20부, 새로운 양식의 새매 모양 은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붉은 칼 전대 30부, 새매 모양 은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붉은 칼 전대 20부, 새로운 양식의 새매 모양 은제 사슬을 돌려 매달아 무늬를 아로새긴 오색 칼 전대 30부, 금꽃 모양 매 방울 2백 과(顆), 금꽃 모양 새매 방울 2백 과, 금으로 새겨넣은 매 꼬리통 50쌍(雙), 금으로 새겨넣은 새매 고리통 50쌍, 은으로 새겨넣은 매 꼬리통 50쌍, 은으로 새겨넣은 새매 꼬리통 50쌍, 매 묶은 붉은 아롱무늬 가죽 1백 쌍, 새매 묶은 붉은 아롱 무늬 가죽 1백 쌍, 보석을 박아 넣은 금 바늘통 30구(具), 금꽃을 새긴 은 바늘통 30구, 바늘 1천 5백 개 등을 받들어 진상하였다. 또 학생 이동 (李同) 註 065  등 세 사람을 진봉사 김윤 에 딸려 당 나라에 보내 학업을 익히게 하고, 아울러 책값으로 은 3백 냥을 내려 주었다.

869년 당나라에 보낸 물품의 기록으로 사금 100냥을 보냈다는 기록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부금'은 찌꺼기 금이란 뜻으로 오늘날 사금의 뜻입니다. 또한 굵은체로 표기한 바와 같이 '금제품'이 매우 많아 보입니다. 이는 현재 출토되는 금제품이외의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신라의 금제품이 중국에 있음을 추정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위 삼국사기 원문을 토대로 후일 간략하게 소개된 [동사강목]의 기록입니다.
기축년 경문왕 9년(당 의종 함통 10년, 869년)
추7월 사신을 당에 보내 진상하였다.
왕자 소판 김윤(金胤) 등을 당에 보내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말 2필과 부금(麩金 사금(砂金)) 1백 냥, 은 2백 냥, 우황(牛黃) 15냥, 인삼 1백 근, 대소화어아금(大小花魚牙錦)ㆍ조하금(朝霞錦)ㆍ백첩(白㲲)ㆍ포저 삼단(布紵衫段)ㆍ두발(頭髮) 등의 물건을 진상하였다. 그리고 또 학생 이동(李同) 등 3인을, 김윤에게 딸려보내 공부하기를 청하고, 서적을 구입할 은 3백 냥을 주었다. 이동은 그 뒤 당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도 당시의 신라의 사금은 등장합니다.
예물고 서(禮物考敍)

삼가 생각건대, 번방(藩邦)이 바치는 것을 헌(獻)이라 하고 상국(上國)이 내리는 것을 상(賞)이라 하는데, 시보(施報)가 왕래하여야 예가 비로소 생겨 나는 것이니, 이를 예물(禮物)이라 한다.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때에 영동(嶺東) 함흥(咸興)과 강릉(江陵) 이 모두 영동(嶺東)임. 사람이 문표(文豹 무늬가 있는 범 가죽)ㆍ과하마(果下馬)ㆍ반어피(班魚皮)를 바쳤고, 중략.
후위(後魏) 때에는 고구려 사람이 해마다 황금(黃金) 2백 근과 백은(白銀) 4백 근을 바쳤으며, 당 나라 이후에도 많은 물품을 바친 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다.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에는 금총포(金總布)를 바쳤고, 당 고종 4년 문무왕(文武王) 때에는 자석(磁石)ㆍ금ㆍ은ㆍ동ㆍ침(針)ㆍ우황(牛黃) 등의 물건을 바쳤고, 당 고종 때임.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과하마ㆍ인삼ㆍ미체(美髢 다리)ㆍ조하주(朝霞紬)ㆍ해표피(海豹皮) 등의 물건을 바쳤고, 경문왕(景文王) 때에는 부금(麩金)ㆍ우황ㆍ은ㆍ인삼ㆍ어아금(魚牙錦)ㆍ백첩포(白氎布)ㆍ응요(應鷂)ㆍ금선(金鏇) 등의 물건을 바쳤으며, ... 중략.

그렇다면 이 사금이 정말 옛날 건축이나 의장등에 쓰였을까요. 오늘날 금으로 장식한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의 9세기 엔닌스님의 당나라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다음의 기록이 나옵니다 (사실 이뿐 아니라 절의 스님이 사금 10냥을 여행경비로 내놓는등 활발히 쓰이죠).

개성사년(開成四年)   삼월(三月)   二十二日
제2선에 승선하다 (839년 3월 22일(음))
[3월] 22일
廿二日早朝沙金大二兩大坂腰帶一送与新羅譯語
이른 아침에 사금 2대냥과 대판석(大坂石)으로 장식한 요대(腰帶) 1개를 신라어 통역 유신언(劉愼言)에게 선물로 보냈다. 

개성사년이면 839년입니다. 즉, 위의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경문왕대와 고작 30여년차이죠. 그 당시에 '사금'이 어떤 식으로 장식에 쓰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당시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해서 한국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사료이기도 합니다. 이 기록에서 사금으로 장식한 요대 (허리띠)를 신라방의 통역사인 '유신언'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입니다. 유신언은 초주 신라방의 통역관과 총관을 지낸 재당 신라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3년뒤인 842년 유신언은 답례로 역시 '사금'을 내놓습니다.
회창이년(會昌二年)  오월(五月)  二十五日 
원재와 유신언의 서신을 받다 (842년 5월 25일(음))

工水手前年秋迴彼國 玄済 闍梨附書状并砂金廿四小兩見在弊所 恵蕚和尙 附舩到 
초주 의 신라 통역 유신언이 금년 2월 1일에 작성한 서신을 인제 (仁濟) 편으로 보내왔다. 이르기를 “조공사의 키잡이와 수수는 지난해 가을에 그들 나라로 돌아갔고, 현제 (玄濟)스님편으로 붙여 보낸 서신과 사금 24소량은 지금 저의 집에 있습니다. 중략. 원재상인 이 상세하게 말하기를 “승려 현제 (玄濟)가 가지고 온 금 24소량과 아울러 사람들의 서찰 등은 당 나라로 돌아가는 도십이랑(陶十二郞)에게 부쳐 보낸 것인데, 이 물건은 현재 유신언의 집에 있습니다.”라 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현제스님의 신라 밀교의 수법승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며, 도십이랑은 신라의 항해업자입니다. 유신언이 842년 당나라에 가는 도십이랑에게 사금 24소량을 보내왔다는 기록입니다. 이렇듯 9세기의 한일 기록에 '사금' 기록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가 바로 '금입택'의 기록이 등장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즉 헌강왕대의 금입택기록의 시기 (880년)과 이 경문왕의 기록 (869년), 그리고 유신언의 기록 (842년) 기록은 거의 같은 시기입니다. 여기서 예전 금입택 포스팅에서 등장하는 보문선사 비문의 헌안왕 기록 (860년)기록, 즉 금입택중 두 저택인 수망택과 이망택이 금을 무려 160근 (40킬로)이나 시주했다는 것이 허튼소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0세기 이전의 상황과 다르게 조선조이후 경상도지역의 사금은 눈에 띄게 기록이 줄어듭니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평안도의 순안지역과, 전라북도 김제가 사금의 주요채취지가 됩니다.
==========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견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굉장히 흥미로운 사료 하나가 이란에서 추가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의 11세기 서사시집인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입니다. 앞서 살펴본 아랍사료들과 달리, 이 저작에서는 거의 반에 육박하는 자료가 바로 신라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쿠쉬나메의 신라관련 기록이 국내에 알려진건 고작 5년전입니다. 그것도 국내학자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학자가 발견합니다. 2009년 10월, 이란 국립박물관의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박사가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 우리나라 고대 국가 신라가 언급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슬람]의 저자이자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의 이희수교수가 직접 테헤란으로 가서, 쿠쉬나메를 직접 읽으며 다르유시 박사와 토론을 거듭한 결과, 쿠쉬나메 전체 800여 페이지 중 신라 부분만 400여 페이지에 이르렀으며, 관련 내용까지 합치면 신라에 대한 내용은 500페이지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이 발견으로 한계에 봉착한 신라 역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평이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쿠쉬나메는 고대 페르시아의 구전 영웅서사시로 1만 쿠플레가 넘는 방대한 양이며, 수백 년간 구전으로 전승되다 11세기에 이르러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에 의해 필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필사본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귀중본으로 분류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룬 부분은 전체 10,129절 중 2011~5925절에 이릅니다.

쿠쉬나메는 이란에서도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서사시입니다. 보통 페르시아 서사시의 집대성이라고 하면 '왕의 책'으로 불리는 샤나메를 꼽는데, 샤나메는 기원전 1000년경 페르도우시가 편찬한 방대한 민족 서사시로, 페르시아 고전문학의 중심이자 이란 문화와 문화적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인데, 현재 이란에서는 이에 필적하는 자료로 평가되는 것이 바로 이 쿠쉬나메라고 합니다.

다음의 글들은 쿠쉬나메를 소개한 글들로 포스팅의 길이상 이 글들로 대강의 정보를 얻으시면 합니다. 이제 검증단계에 들어간 사료이니만큼, 그리고 서사시 특유의 신화적 성격의 스토리 (역사와 다른)를 감안하고 읽어내야할 기록입니다만, 꼼꼼한 교차연구가 꼭 필요해 보입니다. 참고로 다음의 두글을 올립니다만 그나마 내용이 많이 소개된 글이라 소개하는 것이지 학술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기자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인지하시고 주요내용만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신라(新羅)’는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계림(鷄林), 계귀(鷄貴),구구탁예설라(矩矩吒䃜說羅)등의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신라'라는 국호가 정착되는 시기는 대체로 지증왕대인 6세기초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쿠쉬나메의 신라는 적어도 이 시기이후임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2013년 6월 14일에는 한양대학교에서 쿠쉬나메에 대한 8번째 심포지움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부분 발췌: "아직 쿠쉬나메 연구는 지극히 초기단계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신라에 대한 묘사 부분이 이해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어로 기술된 신라의 인명과 지명의 해석에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쿠쉬나메가 어디까지나 구전 서사시이기 때문에 내용의 어느 부분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가 연구의 주요 쟁점이 된다. 이 교수는 “쿠쉬나메는 신라의 처용가와 같은 신화의 일종이다. 따라서 신화의 영역과 실제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쿠쉬나메의 연구의 핵심이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 라고 말했다. 한편, 연구비 조달 문제도 쿠쉬나메 연구의 큰 장애물 중 하나였지만 최근 언론을 통해 쿠쉬나메 연구가 발표되면서 연구기금 후원을 통해 이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쿠쉬나메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Silla)’라는 용어가 고대 삼국시대의 신라를 가리킨다는 것에 참석한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오는 10월, 마지막 학술대회가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리고 이후 번역판의 출간 작업이 시작될 예정이다."

이희수 교수가 발표한 내용에 대한 또다른 기사입니다.
철저한 적극적이고 냉정한 분석이 필요
언급했다시피 쿠쉬나메에 대한 관심이 국수적인 성향으로 흘러선 결코 안됩니다. 하지만, 꼼꼼한 교차검증과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부처에서 지원이 필요해보이며, 현재 한양대뿐 아니라 타 사학과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의 관심도 필요해 보입니다. 한두명의 분석결과가 아닌, 여러가지 관점과 분석이 객관적인 실체에 대한 접근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사에서도 나오듯, 그리고 필자가 평소 (특히 거대건축 시리즈를 쓰면서) 느끼듯, 우리 고대-중세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사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때문에 파편적으로 나오는 사료기록과 고고학적 성과가 주류이론과 맞지 않는 경우가 (당연히) 허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료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으로 한국사학, 고고학, 문화재학, 건축학계등에서 새로운 문헌사료기록이나 고고학적 사료성과가 출현하면 '방어적'으로 그 기록을 대하기 보다, (필자 생각에는)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반갑게 그러나 냉정하되 적극적으로 그 사료에 대한 연구를 파고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태도에는 결단코 반대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극히 시작단계인 이 연구에 대한 이러한 유형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학설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 시작점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Silla, Sila, Shila는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이 줄거리를 읽으면 미심쩍은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먼저 여기에 묘사된 신라가 과연 우리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시대의 ‘신라(新羅)’인지 의심스럽다. ‘타이후르’ ‘프라랑’이라는 신라왕·신라공주의 이름이 우선 그러하다. 나아가 신라 공주가 외국인과 결혼했다거나, 신라-이란 연합군이 중국의 성을 함락하여 대륙에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내용은 더더욱 미심쩍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로서는 매우 중대한 사건들인만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렸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중국측 사료에도 신라가 이란과 연합하여 중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중국의 사료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11세기 이슬람의 서사시에 실린 이야기를 신라사 연구의 사료로 채택할 수 있겠는가. 중략. 

이처럼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라를 섬, 여섯 개의 섬, 또는 여러개의 섬(군도)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신라가 섬, 혹은 군도가 아님은 주지하는 사실이거니와, 신라왕 ‘타이후르’와 그 공주 ‘프라랑’ 왕자 ‘가람’이 신라 이름의 이슬람식 음역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상식적이다. 이로 본다면 이슬람 세계가 알고 있었던 Silla, Sila, Shila는 우리의 신라가 아니다. 그것이 섬, 혹은 군도로 이루어졌다거나, 왕과 왕자·공주의 이름으로 보아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 혹은 군도임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울산대 송수환교수라는 분의 글로 기사내용을 보면, 이 분은 쿠쉬나메를 제대로 읽어 본적이 없어 보입니다. 단순히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중 영웅적인 내용을 과장하기 위한 중국과의 전쟁내용을 주로 근거로 단칼에 이 책에 나오는 Silla는 신라가 아니라는 논지를 펴고 계십니다. 또한 이슬람세계에서 신라를 섬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으시는데, 이것은 거의 '상식선'에서 틀린 논지입니다. 신라뿐 아니라 그 후대인 고려, 조선까지도 '섬'으로 아랍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식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신라인의 이름으로 나오는 '프라랑, 가람'이 신라이름의 이슬람식 음역이 아니라는 것이 '상식'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왜 상식인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듣는 순간 외려 신라의 이름같다는 인식이 강하게 들었는데 이런 주관적인 비평을 엄밀한 조사없이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외려 존경스럽습니다. 현지에 찾아가 한번 전문이라도 보시고 이런 주장을 하시는 것이 학자로서 옳은 태도가 아닐런지요.

필자는 보통 특정주장에 대해 자주 비판적인 날을 세우지 않습니다만, 일부 학자들의 이러한 '처음부터 극단적인 방어적'인 태도는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사학계나 문화재계는 고대-중세의 경우 기억상실정도의 사료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자료가 등장하면 일단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엄밀하고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은 우리학계의 임무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설은 밝혀진 자료에서 자유롭게 세우되 검증은 차분하고 꼼꼼하게, 이러한 태도로 접근하면 어떨런지요.

새로운 자료가 사료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의 주론이나 본인의 강한 주관성을 가지고 판단하기 전에, 그 자료에 대한 최선의 검증과 분석을 해보는 것이 '필수과정'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결론부터 도출하는 일부에 대해 저는 좋은 감정을 가지기가 어렵군요 (물론 위의 이기환기자의 글처럼 반대로 확정적인 태도 역시 똑같이 주의해야 합니다. 두 태도는 거울에 비친 상이나 다름없습니다).현재의 실정에서 그런 태도가 일말의 이해조차 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결언

포스팅이 길어졌습니다. 내용상 축약한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되었군요. 서두에 나오는 '금입택' 포스팅의 여러 기록과 오늘 발견한 삼국사기와 일본의 당대 '사금'의 기록, 그리고 쿠쉬나메까지 통일신라의 800년대, 즉 9세기는 확실히 신비로운 시대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의 짧은 기록으로만 전하던, 그래서 학계뿐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금관등 몇가지를 제외하면 아직 이 시대의 기록들에 대한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이 속칭 '황금의 시대'가 아랍권에서 속속 등장하는 당대의 자료들과, 살펴본대로 최근의 흥미로운 국내 고고학적 연구성과로 인해 그 베일을 조금씩 벗는 느낌입니다.

학계와 관련부처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사족:
물론 방송특유의 '매우 성급한 확정형'문장이 불편하긴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배경설명이나 이란측의 이론에 대한 개요정보를 나름 충실히 알수 있어 도움이 되는 다큐입니다.

2013년 10월 KBS 방영- 쿠쉬나메 1부
모바일유저는 링크클릭:



핑백

  • 까마구둥지 : 통일신라 당대 최치원의 '사금캐기' 표현 기록 (9세기) 2014-09-01 05:36:21 #

    ... 반짝이는 강가에서 인디애나 존스풍의 모자를 쓰고 할 것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올해 소개된 바 있는 '신라의 사금채취 (2014. 6.10)'에 관한 논문 (경주의 황금출처 글링크)에 대한 느낌도 아직 생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05년 북한의 사금채취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북한 어린이 사금채취 노동 (2005)) 여기 보면, ... more

  • 까마구둥지 : 통일신라의 황금 출처 (2)- 문헌기록들 2016-04-30 06:49:21 #

    ... 된 적이 있지요. 꽤 사회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연구였기도 합니다. 경주의 황금출처에 대한 논문 (2014 6.10) 당시 연구는 통일신라의 그 많은 양의 황금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 more

  • 까마구둥지 : 신라 왕실 8세기 수세식 화장실터 경주서 발견 (2017.9.27) 2017-09-29 10:54:02 #

    ... 대 고상창고, 장창(長倉)- 100미터급 창고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남자거인들- 7~9세기 신라의 거인국 (장인국) 기록9세기 통일신라의 황금출처- 경주 황금에 대한 논문 (2014 6.10) &amp; 쿠쉬나메의 등장8세기 신라의 자동기계산機械山, 만불산, 그리고 옥루기계신라 자동기계산 만불산 중국측 교차기록 (그리고 광경을 지 ... more

덧글

  • 루나루아 2014/08/20 09:14 #

    음.. 옛날에는 금이 많았는데 일본놈들이 왜란과 강점기에 있는거 싹싹 긁어간걸지도요! .................저만의 판타집니다만. 흠흠...
  • 역사관심 2014/08/20 09:30 #

    ㅎㅎ 타지역은 몰라도 경주는 이미 그전에 바닥이 난것으로 보입니다.
  • ㅇㅇ 2014/08/20 11:32 # 삭제

    이런말해서 안됬지만..
    울산대 송수환 교수같은 한국사 인식태도가 현재 인터넷을 비롯한 한국 주류역사학계의
    메인스트림이 아닐런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조선후기가 저평가 받고 있는거에 대한 어떤 억하심정으로 가득찼다고 볼수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임진왜란 이전 한국사 전반에 대해 조선후기 프레임으로 모든걸
    판단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죠. 여기엔 소위 발전사관도 한몫하고 있구요
    근데 말이죠
    조선후기비판은 일제식민사관 옹호하는 거다란 논리가 있다면
    조선후기옹호 임진왜란이전 과대포장비판 논리또한
    제국주의 사회진화론의 발전사관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수밖에 없는거 아닐까요?
    역사를 무조건 발전적으로 본다는 건 조선후기보다는 일제강점기가 낫다는
    논리로 귀결될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조선후기바판만 식민사관논리에 놀아나는게 아니고
    조선후기과대포장또한 식민사관논리에 놀아나는 거라는 거죠
    결국 동양의 순환사관도 고려하는등
    케이스 바이 케이스도 충분히 따져봐야 한다고 봅니다

    조선후기비판 ->
    임진왜란이전재평가 ->
    조선후기재평가 임란이전재평가비판 (현재한국상황)

    이런 구도는 분명 문제 있다는거죠

    아무튼..

    저도 사금관련 기사는 봤습니다
    충분히 고려해볼만하구요
    이 기사와 좀 다른 얘기지만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인을 비롯한
    유럽인 미국인들의 한반도 금 관련 각종 조사같은 걸 보면
    생각외로 아니 한반도가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금 생산지라는 걸
    단박에 알수 있더군요. 그 사람들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세계에 몇군데 남지 않은 금채취 신천지.. 이런 얘기까지 나올정도이니
    솔직히 조선시대 들어와서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금 은 등 고급광물에 대한 광산개발을 축소 금지 시켰다는 기록도 있는등
    여러 상황으로 살펴볼때 20세기 초반까지도 한반도엔 금이 굉장히 많았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 급격히 줄어든게 아니고
    오히려 인위적으로 save 되었다고 보는게 맞죠
    다만 죽쒀서 개줬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기껏 500년동안 아껴서 식민지시대 유럽 미국 일본에 다 퍼준꼴이 됬으니
    이건 개안습이지만 말이죠.. 차라리 조선시대에 적극적으로 개발하는게
    더 좋았을뻔..
    일제강점기때 여러 증언들을 보면 금광산 개발 때문에 벌써 그당시부터
    소위 싱크홀(?)문제가 많이 발생했다죠. 식민지시절 무자비한 약탈현실을
    보여주는 한 일면이죠.

    그리고 경주지역은 수정도 유명하지만 옥 도 중요한 광물자원중에 하나였죠
    그러고보면 옥 이란 광물은 신라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같는 광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 고대사 시원에서부터 굉장히 중요시된..
    청동기와 양대산맥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9/23 22:48 #

    예전의 수로왕무덤 이야기만 봐도 옥의 생산은 활발한 느낌이 듭니다. 학계가 어느 곳보다도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어떤 자료를 대해야 함은 분명 옳은 태도입니다.

    다만, '기존의 좁은 안경'을 미리 쓰고 자료를 보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두가지를 구분못하는 분이 꽤 있는 것 같아요.
  • 炎帝 2014/08/20 11:58 #

    전에 들은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지형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합니다.(특히 경상도쪽이 오래되었다던가 그랬던걸로 기억해요.)

    그렇게 오래된 만큼 광맥이 지형적으로 마모되거나 해서 사금으로 남는 것도 가능할 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4/08/26 13:20 #

    아 그렇군요. 댓글을 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보니 놓쳤네요 . 답변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덕분에 경북지역 지질을 살피게 됐습니다 :)
  • ABS 2014/08/20 12:16 # 삭제

    이란어권은 아랍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정복 이후 아랍문자를 사용하게 되었으나 아랍기원의 단어가 일부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언어적 공통점은 없습니다.
    중동지역이나 이슬람권이라면 몰라도 아랍권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 하네요.
  • 역사관심 2014/08/20 13:02 #

    아 맞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닉네 2014/08/20 12:57 # 삭제

    조공무역은 루즈루즈관계가 맞습니다. 주원장 개객기!
  • 역사관심 2014/08/21 05:55 #

    개객기!
  • 그래서 2014/08/20 13:45 # 삭제

    경주가 금성으로 불렸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재밌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4/08/21 05:56 #

    재밌는 추론이네요 ^^ 감사합니다.
  • ㄴㅇㄹ 2014/08/20 14:22 # 삭제

    정말 잘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4/08/21 05:59 #

    고맙습니다~.
  • 천하귀남 2014/08/20 17:10 #

    금속 성분이 많은 화성암이 많고 이걸 깍아내는 강수량도 풍부했으니 과거에는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많았다는것이 어느정도 신빙성 있기는 하군요.

    여기에 수많은 금 채굴법중 고대에는 사금만큼 효율적이고 순도도 높은 방법이 없기는 하군요. 요즘처럼 사금을 보고 지질을 추적해 광맥을 찾는기술도 없고 암맥을 굴착할수도 없으니까요.
  • 역사관심 2014/08/21 06:11 #

    아 생각치 못한 부분인데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사금에 대해 조금 더 깊은 내용을 첨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4/08/20 20:27 #

    확실히 금이 정믈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네요 그것도 사금의 형태로 존자했을 줄이야... 다박이네요
  • 역사관심 2014/08/21 06:11 #

    연구자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 평론가 2014/08/24 14:01 # 삭제

    생각해보니 일본도 진짜 금이 많기보다는 사금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 많더군요. 괜히 그림에 황금색을 칠하는게 아니였음. 경주지역에도 사금출토기록이 있다면 그럴수도..
  • 역사관심 2014/08/26 13:21 #

    정말 그렇습니다. 베일이 벗겨지면 좋겠습니다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