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당대 최치원의 '사금캐기' 표현 기록 (9세기) 역사

현대 한국에서 '사금'이란 존재에 대한 인식은 (특히 국내 사금채취에 대한 인식은) 희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왠지 외국의 -특히 서양영화에서- 반짝이는 강가에서 인디애나 존스풍의 모자를 쓰고 할 것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올해 소개된 바 있는 '신라의 사금채취 (2014. 6.10)'에 관한 논문 (경주의 황금출처 글링크)에 대한 느낌도 아직 생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05년 북한의 사금채취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북한 어린이 사금채취 노동 (2005)) 여기 보면, 사금은 아직도 "굴삭기나 포크레인 같은 기계를 쓰면 빠르겠지만 개인이 장비를 동원할 수 없기 때문에 순전히 재래적인 방법에 의존해 인력으로 해결한다." 고 합니다. 

간단한 나무발로 1.5미터 정도되는 면포(綿布)에 50센티미터 크기의 나무막대기 수백 개를 3~5밀리미터의 조밀한 간격으로 쭉 이어 붙인다고 합니다. 그 위에 모래를 올려놓고 물을 부으면 가벼운 모래는 그냥 씻겨 내려가고 무거운 금은 면포에 가라앉게 되는데 양동이로 3백~5백 번 정도 모래를 통과시킨 후 면포만을 분리시켜 씻는다고 하네요. 한 양동이당 10킬로그램쯤 되니 3~5톤은 족히 들이 붓는 힘든 노동이라고 합니다.

9세기 당대 신라의 사금표현

그런데, 우리 선조들 특히 문장가들은 '사금'에 대한 인식이 흔히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신라말기 문장가인 '최치원'의 글입니다.

신라왕 여당 강서 고대부 상 장(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최치원(崔致遠)

옛날 정관(貞觀) 중에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에 보이시기를, “지금 유계(幽薊)를 순행하여 요갈(療碣)에서 죄를 묻겠노라.” 하였으니, 대개 고구려의 사나운 습속이 기강(紀綱)을 범하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까닭으로 그랬던 것이외다. 그래서 마침내 천주(天誅 하늘이 내리는 벌)를 떨치어 해변을 숙청하고 무공(武功)이 이미 세워지니 드디어 문덕(文德)을 닦으며 인하여 먼 곳 사람에게도 또한 들어와 과거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로써 요시(遼豕)를 바치기에 부끄럼이 없었고, 천앵(遷鶯)을 따라갈 기약이 있었던 것이외다.

오직 저 고구려가 지금은 발해(渤海)로 되었는데 비로소 근년에 와서 계속 높은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외방의 좋은 것을 사모하는 정성을 수록(收錄)하고, 대국의 사(私)가 없는 덕화를 표시한 것으로써, 비록 집안의 닭을 천히 여기고 산의 학(鶴)을 귀히 여긴 것이기는 하나, 혹은 모래를 헤치고 금싸라기를 가려내는 일과 비슷한 일입니다. 

정공(精恭) 최 시랑(崔侍郞)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을 적에 두 사람을 발표하였는데, 발해(渤海)의 오소도(烏昭度)로 으뜸을 삼았으니, 한비(韓非)가 노담(老聃)과 함께 전하게 되는 것은 일찍부터 달갑게 여기기 어려웠고, 하언(何偃)이 유우(劉隅)의 앞에 있으니 그는 실로 한스러운 일이며, 비록 곡물(穀物)을 드날릴 제, 강비(糠粃 쭉정이)가 앞선다지만 어찌 능히 처진 술 찌꺼기를 마시기 좋겠습니까. 이미 사방의 조롱거리를 이루었고 길이 일국의 수치를 끼쳤습니다.

유명한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입니다. 이 분의 글이 전하는 [동문선 (東文選)] 은 조선 성종(成宗) 9년(1478년) 12월에 당시의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동료들과 왕명으로 삼국 시대 후기(대부분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인, 문사들의 시문 가운데 우수한 것을 모아 편찬한 시문집입니다. 

여기 나오는 내용은 따라서 '통일신라 당대'의 글입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과거합격을 '사금채취'하는 일에 비유한 것으로 9세기 당대 (즉, 아랍과 삼국사기-유사의 신라 '황금'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바로 그 시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의 기록으로 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참고로 최치원은 경주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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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문장과 사금캐기 

문인들이 어떤 귀한 것을 찾아내는 일을 모래에서 사금찾기로 비유하는 일은 고대중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이란 문집에, “육기의 글은 마치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기와 같아서 이따금 보배로운 작품을 볼 수가 있다.[陸文如披沙簡金 往往見寶]" 라고 되어 있어, 이런 종류의 인문적 메타포로 오래전부터 이런 표현은 가끔 등장하기는 합니다. 양(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의 3번째 왕조이므로 6세기의 표현이지요.

이런 영향인지 고려와 조선의 문인의 기록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가끔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려말 문인인 이색(李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덕군)은 목은집(牧隱集)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공교롭게 목은 이색은 경주와 가까운 경북 영덕 출신입니다.

시(詩)
느낌이 있어 읊다.

통달한 선비는 응당 천명을 알거늘 / 達士應知命
나의 삶은 마음만 괴로울 뿐이로세 / 吾生但苦心
이끗은 공명을 따라 급급해지고 / 利隨名汲汲
시름은 취기와 함께 깊어만 지네 / 愁與醉沈沈
긴 해는 읊어서 다하기 어려운데 / 永日吟難盡
쇠한 나이엔 병이 또 침범하누나 / 衰年病又侵
문장은 깊은 바다와 같은 것이니 / 文章似淵海
어느 곳에서 금을 일어낼거나 / 何處得淘金

또다른 고려의 대표 문장가 12세기 이규보 (1168∼1241년) 역시 [동국이상국집]에서 이런 시를 남깁니다.

동갑인 김연수(金延脩)의 집을 찾아가 옛사람의 시에 차운하다

태현경(太玄經)을 초하니 자운의 집 비슷한데 / 草玄眞似子雲家
일을 좋아하는 우리들 즐겨 찾아왔네 / 好事吾儕肯見過
미옥은 독 속에 길이 감추어 두지 않는 법이니 / 美玉不應長蘊櫝
황금은 모래에서 나올 날이 있으리 / 黃金行見一披沙
구멍 속에 추운 자라는 머리를 움츠렸고 / 穴中寒鼈藏頭角
시렁 위에 굶주린 매는 발톱을 오므렸구나 / 竿上飢鷹縮爪牙
나는 춤추고 그대는 노래 불러 기쁘게 놀았으니 / 我舞君歌歡意足
호탕한 풍류 명일 남에게 자랑하리 / 風流明日向人誇

또한 조선전기의 유명한 문인인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 역시 [동문선(東文選)]을 평하면서, "사사로움을 따라 공정함을 잃고 선택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였다 하여, 모래를 일어내고 금을 가리어 다시 그 좋은 문장만을 골라 문은 동문수(東文粹)라 하고, 시는 청구풍아(靑邱風雅)》라 하였으니, 극히 정밀한 것이다" 라고 평을 남깁니다. 흥미롭게도 (우연이겠지만) 김종직 역시 경주와 가까운 경남 밀양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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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대 직전인 양나라 때의 종영이 남긴 저 메타포를 최치원이 가져다 쓴 것인지, 아니면 당대 신라에 흔하던 사금캐기에 영향을 받아 본인이 저러한 비유를 창작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三十五金入宅 言富潤大宅也 삼십오금입택 언부윤대택야" 라는 유명한 삼국사기의 880년 헌강왕 6년 기록때 최치원의 나이는 한창때인 '만 24세'입니다. 그리고 경주에 살고 있다가 어린나이로 당으로 유학, 과거를 장원급제하고 '황소의 난'등을 관리로서 경험하고 884년 귀국합니다.

또한 다음의 기록을 남긴 아랍권의 사학자인 알 라지는 854년 출생, 932년 사망한 인물로 857년 출생인 최치원과 거의 동시대인물이라 해도 무방하죠.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 알라만이 시혜자이시다."

최치원이 이 표현을 남겼을 당시가 금입택과 신라의 여러 황금유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당대'라는 점에서, 그의 표현은 후대의 기록과 달리 더욱 눈에 띄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양나라 종영의 표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면, 최치원이 사금캐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2012년 기사 [가족과 떠난 여행, 물속에 200만원짜리 금이] (사진-사금채취 동호회 ‘금을 줍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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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4/09/01 11:11 # 삭제

    (포스팅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조선 전기의 동문선도 그렇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최치원은 마치 한국역사속 단군과 같은 위치로 추앙받았던 것 같네요

    조선시대 유학자들 문집 원문을 좀 살펴보면

    그런 경향이 거의 100퍼센트라고 무방할 정도더라구요

    그러면서 고구려 백제는 무도한 놈들인데

    신라가 당나라를 공경하면서 유교의 도를 제대로 익혔다는 식의

    글 전개가 아주 많더군요

    즉 조선 후기 주류 유학자 거의 대부분의 역사 의식은

    사실상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고

    신라 조선을 치켜세우는 흐름이 분명 있긴 있는것 같았습니다

    조선이 신라 최치원의 유교 학맥을 제대로 계승했다는 식의 논조 말이죠

    요약하자면

    조선시대엔 경직된 유교중화주의 일원론 때문에 자국 역사 흐름에서

    의도적으로 고구려 백제등을 폄하하는 시각이 전반적으로 팽배했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경향은 신라 말기부터 시작해서 고려를 거쳐 차츰 차츰

    점층화된 결과구요

    암튼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걸 제대로 알고

    한국사 전체를 판단해야 된다고 봅니다

    고조선 고구려 부각하는게 무슨 일제의 조선비하 찬동하는 논리다

    이런 억지땡깡은 그만 부렸으면 좋겠네요

    상식적으로 전근대 시절 특히 조선시대 유교일원론때문에 이상해진 역사인식을

    조금씩 바꾼다고 봐야지 그게 무슨 조선비하라는 건지




  • 역사관심 2014/09/02 12:13 #

    분명 최치원의 성향은 신라위주의 사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면이 있어보이죠. 고구려고 신라고 모두 고려이래 우리의 역사인데 그걸 또 나눠서 비하하고 하는 것 자체가 저는 이해도 안되고 말도 섞고 싶지 않습니다.
  • 천하귀남 2014/09/01 17:20 #

    의외로 비슷한 경우가 1700년대까지의 백금에 대한 취급이더군요.
    중남미나 맥시코에서 사금과 함께 백금이 나왔는데 당대에 백금은 높은 녹는점(1700도 이상)으로 가공이 불가능해 백금을 쓸모없다고 선별햇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백금이 많이 섞여 나오면 가치가 없는 사금광으로 취급했답니다.
    1700년대 후반부터 백금을 비소등과 가열해 전보다 낮은 온도로 녹이게 되면서 귀금속으로의 가치가 점점 늘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이전 폐석 무더기도 다시 뒤졌다던가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보듯 사금은 비교적 손쉽게 채취가능하고 한번 훓고 지나가면 사실상 끝이라 이제는 에전같이 사금이나 사백금같은건 안보이지요.
  • 역사관심 2014/09/02 12:15 #

    결국 기술력이 보물을 재발견하게 칸든 케이스군요 ^^

    이전 소개한 논문에서도 그랬듯 신라당대의 사금량은 지금의 수십배가 되었을 거라는 말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 이경호 2014/09/02 01:49 #

    와 님은 역사학자입니까? 님의 글을 읽으면 진짜 전문가의 스멜이..ㅋㅋ 암툰 흥미로워요...
  • 역사관심 2014/09/02 12:15 #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 bergi10 2014/09/02 17:21 #

    어... 저도 사학자거나 사학과 대학원생이 아닐까 생각은 했었는데..
  • 봉래거북 2014/09/03 23:38 # 삭제

    조선시대 병서류에도 그런 사상이 좀 보일 때가 있죠. 대표적으로 동국병감이라던지...
  • 역사관심 2014/09/26 05:02 #

    아 그렇군요.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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