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언) 삼국의 대표자객 3인방- 뉴유, 황창랑, 김천 역사전통마

사료부족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의 한국사회는 '무武'에 대한 많은 인식론적 단절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조선시대 배경의 '자객'을 보면 생소한 느낌과 함께, 혹시 '왜곡'한것이 아닐까 (간단히 말해, 저런 자객들이 우리한테 있었을까)라는 생각들을 하기가 쉽지요.

이에 대해서는 사실 놀랍게도, 거의 지금 자객으로 등장하는 생김새, 활동과 비슷한 자객들이 성리학국가였던 조선에서도 많았음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궁금한 분은 예전 포스팅을 참조해 주시길- 드라마자객들과 진짜 조선자객!)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 영조실록 1733년기록에는 이런 장면까지 전하죠:
“잠결에 창 밖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서 칼을 들고 나가니, 사람이 칼을 가지고 대청 마루 위에 섰다가 이내 뛰어서 뜰 아래로 내려가므로 함께 칼날을 맞대고 교전(交戰)하여 외문(外門)까지 옮겨 갔었는데 그 자가 몸을 솟구쳐 담에 뛰어 올라 달아났습니다.”

문인중심의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기록들이 있었을진대, 무인중심의 고려나 그 전대인 치열한 전쟁과 전투가 끊이지 않던 남북국, 삼국시대까지 거슬러가면 사실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무술인, 무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문화컨텐츠화 될 수있는 아주 멋진 3인방이 있어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삼국시대의 자객들의 이야기가 현전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뉴유와 신라의 황창량, 신라 김천이 오늘의 주인공들입니다.
우선 소개하는 글은 일제시대 주요 야사잡지였던 '별건곤' (1926~34년)에 실린 기록입니다. 참고로 별건곤은 야사, 기행문, 수필등을 싣는 잡지였지만 그 내용이 만만찮은 내공이 있던 근대지였습니다.

이 글이 실린 별건곤은 제 59호 (1932년 12월 30일)으로 제목은 :朝鮮刺客列傳 (조선자객렬전). 필자는 壽春山人(수춘산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조선인인 '차상찬'입니다. 이분은 한국근대언론계에서 중요한 분이자 천도교인으로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시길 (링크).

조선자객열전 중 제 1편이란 뜻으로 그 후에도 시리즈가 계속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0년대 글 그대로 옮깁니다.
第一回. 三國篇 
고구려자객 뉴우 紐由
百萬軍 前에서 魏將을 刺殺한 高句麗 紐由

조선의 자객전을 쓰랴면 누구나 먼저 고구려(高句麗)의 뉴유(紐由)를 쓰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는 고구려 동부(東部) 사람으로 원래에 검술(釰術)이 천하 절륜하고 지모(智謀)와 충의(忠義)를 겸유하야 항상 나라 일에 몸을 밧치기로 맹서하얏섯다. 그때에 고구려는 지나의 위나라(支那魏國)와 항상 국제간 충돌이 생겨서 피차에 서로 평화할 날이 업더니 동천왕 20년 병인 추 팔월(東川王二十年丙寅秋八月)에는 위나라가 돌연이 유자 자사 관구검(幽州刺史毌(音관)丘儉)을 보내서 만여의 대병을 거나리고 현토도(玄菟道)로 나와 고구려를 침략하니 왕은 보병 이만 명을 친솔하고 비류수(沸流水) 우에서 마잀€ 싸워 적군을 크게 파하고 적군의 머리 삼천 두럼을 베힌 후 그 형세를 타서 다시 양맥(梁貊)의 산골에서 두번째 적군을 크게 파하고 적군의 머리 사천 두럼을 또 베혓섯다. 

그러나 왕은 그 승첩함을 보고 적군을 너머 업수이 녁이다가 필경 적군에게 크게 참패를 하고 그 해 시월에는 국도 환도성(國都丸都城)까지 함낙을 당하고 적장 왕긔(王頎)에게 쫏기여 남옥저(南沃沮)로 피란을 가게 되야 죽영(竹嶺)까지 이르니 그때에는 벌서 왕의 군사가 전부 분산하고 오즉 동부장군 밀우(東部將軍 密友) 한 사람이 남어 잇슬 뿐이요 뒤를 쫏는 적군의 형세는 더욱더욱 맹렬하야 위긔일반의 경우에 닥치엿다. 그러나 용감한 밀우 장군은 조곰도 굴하지 안코 적군과 대항하야 싸우는 까닭에 왕은 틈을 타서 다시 북옥저(北沃沮)로 도망을 갓섯다. 그러나 적군은 여전이 뒤를 추격하니 아모리 용감한 고구려의 왕이라도 세궁력진하야 다시 엇지할 도리가 업섯다. 그때에 동부 뉴유(紐由)는 왕을 차저 뵙고 이러한 게책을 말하얏다.

"지금에 나라 형세가 심히 급박하게 되엿사온즉 그대로 가만이 잇다가는 한갓 공연이 죽을 뿐이오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 가터서는 적군에게 가서 거짓 항복을 하는 척하고 음식을 만히 준비하야 적군을 크게 호군을 멕이다가 틈을 엿보아 한칼로 적장을 죽이면 과이 큰 수고를 하지 안코 적군을 능히 물리치오리다."

왕은 그의 말을 듯고 크게 깃버하야 뉴유를 적진으로 보냇섯다. 뉴유는 적진에 드러가서 거짓 항복하고 갈오되 우리 임금이 귀국에 죄를 엇고 해변까지 쫏겨와서 지금에는 몸을 의지할 곳까지 업게 되여 장차 진전에 와서 항복을 할 터임으로 먼저 변변치 못한 음식례물을 준비하고 소신을 보내 의사를 통한다 하니 위장 왕긔(王頎)가 그 말을 듯고 그런듯시 생각하고 장차 항례(降禮)를 바드랴고 뉴유를 각가이 불넛섯다. 

뉴유는 그것을 천재일우의 조흔 긔회로 생각하고 미리 음식 그릇에 숨겨두엇던 칼을 빼여들고 번개 가티 달녀드러 적장의 가슴을 한 칼로 찌르니 피가 댓줄긔 가티 쏘다지며 당장에 꺽구러저 죽고 자긔도 그 자리에서 비장하게 자살을 하야 죽으니 적군이 일시에 크게 소란하야 행오를 잘 차리지 못하는 지라 왕은 그 소식을 듯고 군사를 세 길로 논아 급히 드러치니 적군이 크게 참패하야 자국으로 퇴각 도망하얏다. 

왕은 국도에 도라와서 여러 사람의 론공행상을 할 새 밀우와 뉴유를 제일로 하야 밀우는 거곡(巨谷) 청목곡(靑木谷) 등 큰 땅을 베혀주어 식읍(食邑)을 삼고 뉴유는 추증으로 구사자(九使者―그때 벼슬 이름이다.)를 삼고 그 아들 다우(多優)는 대사자(大使者)를 삼엇섯다. 그리고 또 당시에 밀우를 구원하던 송옥구(松屋句)도 상당한 상을 주엇섯다.

한국의 자객열전을 쓸때 가장 첫머리에 써야 할 인물이 '뉴유'라고 단정한 후, 그가 고구려 동부출신으로 동천왕 20년 즉 246년의 위나라와의 전쟁시 활약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천왕이 적을 업신 여기다가 참패를 하고, 남옥저까지 밀리게 되는 상황을 설명한 뒤 (고구려 밀우장군덕에 북옥저까지 재진출하지만), 뉴유가 이때 왕을 찾아가서 계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북옥저는 현재 개마고원의 동쪽에 있던 소국입니다. 개마고원이 평안북도에 있으니 한반도 거의 북쪽끝이죠.
개마고원

아무튼 이렇게 위나라에게 밀리던 위급한 상황에서, 뉴유가 자진해서 적진에 거짓으로 항복합니다. 뉴유는 검술이 천하절륜의 최고검객이었습니다. 그는 기회를 엿본 것도 아니고, 항복하던 날 바로 적장을 암살하고, 자신도 자객답게 목숨을 끊습니다. 음식그릇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묘사가 흥미로운데, 여기서 적장은 '관구검'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구검은 255년에 사망하긴 하지만 뉴유에게 죽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의 전쟁이 아닌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백성인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 이 기록이 전하는데, 여기서도 위나라 장수의 구체적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위의 내용은 모두 삼국사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유유가 적장을 죽이고 함께 죽다 ( 246년 10월(음) )
魏將聞之將受其降紐由隱刀食器進前拔刀刺魏將胷與之俱死
위나라 장수는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유유는 칼을 그릇에 감추고서 앞으로 나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마지막으로 18세기 사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평안도 '의주', 인물편에 뉴유가 등장합니다 (다만, 의주지역은 한반도 서쪽이라 지역은 의아합니다).
輿地圖書 上
平安道 義州 人物

高句麗
乙巴素 故國川王 時四部共擧東 晏留王 委以國政 晏留 辭曰徵身庸愚不足參大政西鴨綠谷左物村有 乙巴素 者性剛毅智慮淵深若欲理國政非此人則不可王厚禮聘之拜中畏大夫仍爲國相 巴素 明政敎愼賞罰人民又安內外無事及卒國人哭之痛左勿村尙在玉尙坊 원주 密友 紐由 

東川王 時 魏幽州剌史 母丘儉來陷丸都城王欲奔南沃沮至竹嶺士卒皆散密友獨在王側募死士與之赴敵力戰王僅得脫間行至南沃沮魏軍追不止東部人紐由進曰勢甚危迫不可徒死臣請犒魏軍遂隱刀食器進前拔刀刺魏將與之俱死魏軍遂亂王引軍爲三道以逐之王復國論功以密友紐由爲茅一 원주 明臨答夫 新大王時爲國

뉴유는 요즘은 '유유'라고 부르는데, 이분은 밀우와 같은 정규장수가 아닌 (차상찬선생의 분류처럼) '자객'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보입니다. 다음으로 백제의 '황창랑'을 소개합니다. 

============
백제왕을 살해한 신라자객 황창랑
朝鮮 칼춤의 主人公 黃昌郞 황창랑

여러분은 극장이나 혹은 연회석에서 조선 긔생들이 흔이 추는 칼춤 구경을 만히 하얏슬 것이다 (주: 30년대까지도 조선기생이 칼춤을 추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 춤은 이름이 칼춤이니 만큼 아모리 섬약한 녀자들이 추는 춤이라도 춘앵무(春鸚鵡)나 가인 전목단(佳人 剪牧丹) 가튼 요염(妖艶)한 춤보다 매우 활발하고 남성적이다. 지금에는 그 춤을 추는 긔생 자신이나 또는 보는 사람들까지도 그저 그것이 칼춤이거니 하고 심상하게 녁이지만은 그 래력을 생각하면 참으로 비장한 눈물겨운 력사가 잇다. 지금으로부터 1629년 전―바로 신라 흘해왕 7년(新羅訖解王七年)―백제(百濟)로 치면 분서왕 7년(汾西旺七年)이다. 

신라와 백제는 전날부터 감정이 좃치 못하던 차에 그 해에 와서 백제가 신라와 속지 악랑(屬地樂浪)―樂浪은 원래 高句麗에 屬하얏다가 新羅 基臨王 3년에 帶方과 가티 歸服하얏다.―의 서현(西縣)을 음습하야 빼아스니 악랑 태수(樂浪太守)가 크게 분한하야 그 보복을 하랴고 여러 가지로 게책을 생각하다가 최후에 자객 황창랑(刺客 黃昌郞)을 뽑아 보냇스니 황창랑은 원래 악랑 사람으로 검술(釰術)의 천재가 잇서서 여덜 살(八歲) 때부터 칼춤을 잘 추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비분강개한 의협심이 만어 자긔 생명을 초개 가티 녁이는 용소년이엿다

그는 악랑 태수의 밀명을 띄고 진무양(秦舞陽)이 열세 살의 소년으로 만승천자 진시황(秦始皇)을 찔너 죽이랴고 함양(咸陽)으로 가드시 혈혈단신으로 장검을 비껴차고 백제의 서울에 가서 찬란한 의복을 입고 시중(市中)으로 도라다니며 칼춤을 추니 백제의 사람들은 남자나 녀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업시 모도 모혀드러서 그의 칼춤 구경을 하고 박수 갈채하얏다. 더구나 그의 아리따운 풍채에는 누구나 더 한번 갓차이 하고 십헛다. 이러케 하루이틀을 지나니 그의 소문은 백제의 궁중에까지 드러갓섯다. 그때에 백제의 분서왕은 원래에 가무를 조와하는 님군으로 악랑의 소년이 백제에 와서 칼춤을 추는데 그 춤이 천하명무라는 소문을 듯고 맛치 오늘에 어떤 황실에서 외국의 가극단을 불러보드시 창랑을 궁중으로 불너드리엿다. 

왕은 한번 두번 그의 칼춤 구경을 하다가 그의 긔묘하고 용장한 춤과 미려한 얼골 찬란한 복색에 마음이 도취되야 최후에는 대궐의 전상(殿上)에까지 불너올려 바로 왕의 어전에서 춤을 추게 하니 창랑은 자긔의 게획이 드러맛는 것을 심중에 암암이 깃버하며 어전에서 춤을 추다가 백제의 군신 상하가 춤에 도취하야 정신을 일타십히 하는 중에 별안간 춤추던 칼을 한번 번쩍 드러 분서왕을 찌르니 분서왕이 당장에 마저 죽고 창랑은 또 그 자리에서 잡히여 백제 사람에게 죽엇섯다. 

때에 신라 사람들은 창랑의 백제왕 죽인 것을 불상이 녁여 그의 얼골을 그려서 탈박(假面)을 만들고 또 그의 칼춤 추던 흉내를 내게 하엿스니 이것이 이른바 신라의 무검희(舞釰戱)요 오늘까지 전하야 나려오는 조선 칼춤의 시초이다.

=======
여기 나오는 신라 기림왕은 기림 이사금(基臨 298~310년)을 뜻합니다. 이때 백제왕은 분서왕 (재위, 298~304년)이었는데, 신라의 속지였던 낙랑 태수가 칼의 명수였던 소년 황창랑을 자객으로 보냅니다. 황창랑은 낙랑출신인데, 장검을 잘 썼으며 지금의 서울 (한성백제)에 들어와서, 저자거리에서 검무를 시연하고 다닙니다. 미남자였던지 사람들이 모두 홀리게 되는데, 소문이 퍼져서 궁궐까지 들어갑니다. 분서왕이 그를 불러서 검무를 추게 하는데, 그 미모와 뛰어난 칼솜씨에 홀려서 바로 곁에 까지 오게 하게 되고, 그 최후를 맞습니다.

황창랑은 바로 백제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신라에서 그 용감함이 널리 알려져 그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고, 그의 칼춤을 대를 이어 '신라 무검희'란 칼춤으로 승화하고, 그것이 현재의 조선 검무 (황창랑무)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 황창랑은 현대까지도 자객의 대표격이 되었는데, 1934년의 상해 한국독립당의 '의사'에 대한 비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康義士 虹口擲彈에 대한 宣言(1934. 3. 10) 
康秉學(강병학) 義士는 나이가 불과 19세이며 上海로 온지 아직 6개월이다. 그는 일찍이 新羅 黃昌郞의 큰 뜻을 품고, 최근에 尹奉吉(윤봉길)의 의거에 이어 전세계를 경악시키고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올해 3월 3일의 일이다. 이날 이른 아침 상해에 주재하는 敵 육해군장관 및 외교 수뇌들은 그 추한 무리 6백여 명을 인솔하고 虹口에 모여 전사자를 弔文하였다. 중략.

다만, 황창랑이 정말로 분서왕을 죽인 자객이었는지 다른 이가 죽인 것인지는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이는 삼국사기-유사등에 기록이 전하지 않고 후대인 조선시대에 기록들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들인데 이 무용담이 '속설'로 당대에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문선 (1478년)
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한다. 

현종 [개수실록] 5년(1664년)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효종 대왕께서도 후원(後苑)에서 기예를 시험하셨는데, 그때에 이상진(李尙眞)이 백제(百濟) 황창랑(黃昌郞)의 검무(劍舞) 의 일을 끌어대기까지 하면서 간쟁하였습니다.” 중략.

이보다 앞선시대의 김종직(金宗直 1431~1492년)의 다음시는 조선시대에 그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黃昌郞(황창랑)
金宗直(김종직;東都樂府)
 
若有人兮纔濫觴 저기 저 사람 아직 어린애
身未三尺何雄驍 몸은 아직 석자도 못되는데, 어찌 그리 씩씩한가
平生汪錡我所師 평생에 왕기(汪錡)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
爲國雪恥心無憀 나라 위해 설욕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네.
劍鐔擬頸股不戰 목에 칼을 대어도 다리 안 떨리고
劍鐔指心目不搖 칼이 심장 가리켜도 눈 아니 흔들리네.
功成脫然罷舞去 공을 이루자 춤추고 사라지니
挾山北海猶可超 산을 끼고 북해(北海)라도 뛰어넘을 듯하다.

그런데 본국검(本國劍)의 기원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황창랑(黃倡郞)과 관창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려말 조선초 문인 이첨(李詹, 1345~1405)의 [쌍매당집(雙梅堂集)]을 보면, “청랑(淸郞)이 아니라, 기실은 관창이 와전된 것이다”라고 쓰고 있어 위의 기록들 이전에 이런 주장이 벌써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황창랑 이야기와 황산벌전투의 관창이 혼동되어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황창(昌郞)을 황창(黃昌)이라고 쓰면서 이 주장을 풀어 쓴 글도 있습니다. 조선말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의  해동악부(海東樂府) 황창랑무(黃昌郞舞)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 역사에서 격검장(擊劍場)을 근거를 찾을 수 없네.
여덟 살의 애꾸눈 아이[?童] 보복을 계획하여 술 단지 앞에서 부여왕(夫餘王)을 깜짝 놀라게 했네. 

특이한 것은 창랑이 애꾸눈이라는 유일한 정보가 여기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황창랑이 7세니 8세니 하는 기록은 아마도 17-18세를 잘못된 기록한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왕을 찔러죽일 정도의 근력과, 왕이 미소년에 반할 정도면 틴에이져는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세번째 소개된 인물은 또 한명의 신라자객 김천(金闡)입니다.

신라자객 김천
白雲의 妻를 救出한 新羅 金闡

김천(金闡)은 신라 진흥왕(新羅 眞興王) 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남보다 뛰여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매우 조와할 뿐 아니라 의협심이 풍부하야 남의 일이라도 의리에 틀이는 일이 잇스면 비록 자긔의 몸을 희생할지라도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이엿다. 그때 신라에는 두 대관의 집이 한 동리에 가티 사는데 한날 한때에 두 집에서 가티 아들과 딸을 나엇스니 남자의 이름은 백운(白雲)이요 녀자의 이름은 제후(際厚)엿다. 

그의 부모들은 그 두 남녀의 장래 혼인할 것을 예약하고 그들을 곱게곱게 길넛스며 그 두 남녀도 비록 나히는 어렷슬지라도 남유달이 서로 사랑하며 자랏섯다. 백운은 차차 장성하야 국선(國仙)에까지 뽑히엿스나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불행이 눈이 멀어 맹인(盲人)이 되니 제후의 부모가 전날의 혼약을 깨트리고 무진 태수 리교평(茂椿太安李佼平)과 곳처 혼인을 하게 되엿다. 

제후는 그것이 부모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하지 못하나 마음에 퍽은 안타가워서 장차 시집을 가게 될 때에 비밀이 백운을 차저보고 하는 말이 『여보시요. 당신과 내가 생일이 한 날일뿐 아니라 이미 약혼한 지가 오랫는데 지금에 부모께서 다른 곳으로 곳처 시집을 가게 하시니 그 명령을 좃지 안으면 불효가 될 것이고 무진(茂椿)으로 가면 죽고 사는 것은 내게 달인 것이니 당신이 만일 신의가 잇다면 나를 차저서 무진으로 오십쇼... ...』라 하얏다.

... 이럿케 약속을 하고 제후는 무진으로 가서 교평을 보고 말하되 혼인은 인도(人道)의 읏뜸이니 조흔 날을 가려서 례를 이르는 것이 조켓다 하니 교평도 그럴듯시 듯고 승낙하얏섯다. 그런지 얼마 아니하야 백운은 어둔 눈으로 길을 더덤으며 무진 땅을 차저가니 제후가 비밀이 따러나와서 늰�운과 가티 손에 손을 잡고 백운의 집을 향하야 갓섯다. 

그러케 가다가 한 산골(山谷)을 당도하니 난데업는 부량한 협객이 달녀드러 제후를 략탈하야 가지고 도망을 하엿다. 그때의 백운의 친구인 김천(金闡)은 그 소문을 듯고 크게 분개하야 그 길로 달녀가서 한 칼로 그 협객을 죽이고 제후를 차저오니 세상 사람들이 모도 그의 의긔를 층찬하고 나라에서도 그 세 사람의 신의를 가상히 녁여 각각 삼급(三級)의 벼슬을 주엇섯다.

===
이 이야기구조는 본격적인 앞의 '자객'과 완전히 다른데, 백운과 제후라는 남녀의 러브스토리에 김천이 부수적인 인물로 말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백운과 제후라는 귀족아들딸이 서로 사랑하는데, 백운이 눈이 멀어, 제후가 교평이란 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제후가 백운에게 자신이 시집을 가게 될 '무진'으로 오라고 (맹인에게...) 하고 둘은 무진에서 몰래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불량협객이 등장, 제후를 겁탈하려 약탈해 갑니다. 백운의 친구인 '김천'은 이 때 등장, 뛰어난 무술로 협객을 단칼에 베어죽여버리고 친구의 여자를 되찾아준다는... 그야말로 '협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진흥왕대이니 6세기의 일로, 앞선 두 자객보다는 후대의 인물입니다.

다만 이 기록은 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이야기가 자세히 전하고 있어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또다른 기록이 [동사략]에도 전하고 있습니다 (동사략은 독립협회와 계몽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신 남궁억선생의 1920년대 저서입니다). 정확히 1924년 겨울에 집필된 동사략은 국역이 안되어 있는데, 화랑세기를 필사한 박창화가 1930년대에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할때 살펴볼 의미가 있겠습니다. 

東史約 (동사략)
新羅眞興王二十七年高句麗平原王八年百濟威德王十三年 원주 新羅遣使朝陳, ○新羅賜白雲際厚金闡 等, 爵級.
初, 有二達宦家同閈, 一時生男女, 男曰白雲, 女曰際厚約爲婚媾, 白雲年十四爲國仙, 十五而盲, 際厚父母欲改聘于茂榛太守 李佼平, 際厚密語白雲, 曰若違父母命則爲不孝, 歸茂榛則死生豈不在我乎, 子有信義尋我於茂榛, 旣歸謂佼平, 曰婚姻人道之始, 不可不涓吉爲禮, 佼平從之, 白雲尋

至茂榛, 際厚出從之, 遂與潛行山谷, 忽遇俠客刼白雲竊際厚, 而走白雲之徒, 金闡 勇力過人, 追俠客殺之, 奪際厚而還, 事聞, 王謂三人信義可尙, 竝賜爵三級.
新羅皇龍寺成.
造丈六佛像, 入銅三萬五千餘斤, 鍍金百餘兩, 使率居畫老松於寺壁, 鳥雀望之飛入着壁而落, 畫久色漫, 寺僧補采鳥不復至, ○率居微賤史不記族, 而慶州芬皇寺觀音菩薩, 晉州斷俗寺維摩像皆其筆蹟, 世傳爲神畫.

마지막으로 흥미로 일본측의 인식 (한국에선 잘 모르는)을 하나 살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

일본의 기록과 인식

일본의 닛코에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테마파크로 꾸며진 닛코에도무라(日光江戸村, 즉 닛코 에도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에도시대 체험 테마파크로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일본의 대표자객인 '닌자忍者'들입니다.

에도 원더랜드 (한국어페이지, 이런 건 우리도 많으면 좋겠군요)

흥미로운 것은 이곳의 닌자관련 설명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야이가 씌여 있다는 점. 닌자(忍者)란 뜻은 몰래 스며드는 사람(忍びの者)입니다. 다음의 간판에 흥미로운 설명이 있습니다. 
닌자(忍者)란 정확하게 말하면 "몰래 스며드는 사람(忍びの者)"을 뜻하며, 지금부터 약 500년 정도 전에 무라마치시대 말기(전국시대)에 활약한 소수 정예의 특수기능집단이다. 스며드는 사람(忍びの者), 인술(忍術), 인법(忍法)의 전래는 불교 전래와 함께 중국 대륙, 조선 반도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며, 특히 한반도의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삼국으로부터 건너온 사람을 선조로 둔 이가(伊賀)의 하토리한조게(服部半蔵家)가 유명하다. 

인술(忍術)은 세계 최고의 병학서라고 말해지는 중국 손자의 병법을 도입하여, 특별한 수행과 훈련을 하여서 발달하였다. 인술은 인기(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강과 성의 운하를 넘어, 성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잠입하여, 때로는 적과 싸우고, 때로는 화약을 사용한 화약술로 불을 뿜었다. 당시에 일본 전국에는 이가시노비(伊賀忍び), 고가시노비(甲賀忍び), 후마시노비(風魔忍び), 다케시노비(武田忍び), 우에스기시노비(上杉忍び), 사이가시노비(雑賀忍び), 야규이치조쿠(柳生一族)가 존재하였다. 시노비(忍び)란 문자와 같이 세상에 몰래 스며드는 것으로, 발각되지 않고, 늘 가라앉은 마음으로 행동하고, 때로는 칼을 들고 싸우고, 적의 정보를 알아내려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절대로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생존술을 지닌 사람들이다.
=======

일제시대에 연구된 한국의 사료들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즉 자객의 전래) 국내의 연구는 일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측 사료에 이러한 정보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근거가 되는 원기록이 궁금해집니다. 다만 일본에서도 대부분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거란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하는 하나의 기록이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고, 일본저서에만 등장하는 신라무술승 강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추측가능한 정보는 핫토리 한조가문이 신라계 '진씨'가문을 도래인 조상으로 둔 '하타씨'의 직계일족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하고 있을 가능성입니다. 예를 들어 핫토리가의 집안이 모시는 스쿠나비코나노미코토(少彦名命)는 하타씨가 모시던 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닌자의 기술인 '인술'도 한반도 도래인설이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글 뒤에 살펴보죠.
관련기사2 (이 기사를 보면 진씨가 한반도계라는 것은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학설같습니다. 중국인이라는 설이 그동안은 지배적이었던 듯).
일본 광륭사의 하타씨(진하승)부부 조각상
또한 2011년 저작인 '닌쥬츠(忍術) -그 역사와 닌쟈(忍者) '이란 책에도 저자가 '도래인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익들은 무조건 중국직수입을 외치고 있나 봅니다. 아마존 재팬 책링크.

고대의 닌쥬츠(인술忍術)
누가「손자(孫子)」를 수입했는가?
닌쥬츠(忍術)의 원전(原典)이『손자(孫子)』인 이상, 일본에『손자』를 수입한 최초의 사람을 닌쥬츠의 시조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조사해보면, 문서상으로는 '키비노마키비(吉備真備)'가 최초의 수입자라 되어있다. '키비노마키비'는 나라 왕조(奈良朝)에서는 처음으로 견당사(遣唐使)로서 18년동안 당(唐)에서 유학하다 734년에 귀국했다. 그때, '마키비'는『손자』『오자(呉子)』『육도(六韜)』『삼략(三略)』『제갈량 팔진(諸葛亮八陣)』등의 병법서를 갖고왔다고 하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닌쥬츠 전서(伝書)에서는,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가 '오오토모노사비토(大伴細人)'라는 시노비(志能便)를 측근으로 두었다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써두고 있기 때문에, 설령 그 바탕이 전승이라 할지라도, '쇼토쿠태자'가 '마키비'보다 먼저『손자』를 읽었으리라는 것은 믿어볼만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다, 670년대에 황위에 오른 '텐무(天武)'천황이, '타코야(多胡弥)'라는 측간(側間)을 사용했다는 것도 밝혀졌기 때문에, 나라 왕조가 되고나서야『손자』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설은, 개인적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손자』를 일본에 가져왔는가 하고 반문할텐데, 나는 '마키비'의『손자』수입은 공식적인 수입이며, 그 이전에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아도『손자』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한다. 

그 누군가라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귀화인이라 나는 답하고 싶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538년, 즉 6세기 전반이다.  한반도를 경유하여 대륙 사람들이 일본으로 귀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까지 사이라 생각된다. 

'오우진(応神)'천황 시기에는, 대륙 이민의 일본으로의 이동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손자』가 세상에 나와 약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손자』는 이미 중국의 고전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으로 흘러들어온 중국 이민들 중에는, 기술자, 지식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4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4백여년 동안, 일본으로 입국한 귀화인이 서로 말을 맞춰놓기라도 하듯『손자』나 다른 병법서를 한권도 갖고 오지 않았다거나, 혹은 그러한 병학에 관한 지식을 무엇 하나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특히 불교 도래 이전, 이미 일본에 집단 이주해 있었다고 일컬어지는 '하타(秦)'씨('핫토리'씨는 그들의 일족이다)가, 그후의 일본의 닌쥬츠 발달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견주어봤을 때, 나는『손자』(혹은『손자』에 관한 지식)이 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수입되었던 것조차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상으로는 '키비노마키비', 실제로는 '하타'씨 혹은 불교 전래 전후로 입국한 귀화인들 중 누군가가 일본으로 닌쥬츠의 종자(種子)인『손자』의 병법을 가져왔으리라 믿는다. 
======
여기서 이야기하는 '귀화인'이란 '도래인'을 뜻합니다. 즉 간단히 말해 핫토리 한조의 가문인 핫토리가는 신라계열인 하타씨가 확실한데, 이 하타씨 계열이 '인술' 즉 닌자기술을 발달시킨 최초의 가문이란 것. 거기에 더해 인술의 본류가 되는 중국의 병법서 '손자' 역시 하타씨뿐 아니라 한반도 도래인들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일본 닌자의 원류는 한반도가 만들었다고는 볼수 없지만, 한반도계열 인물들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게 됩니다.

다만, 원류/원조가 그렇다는 것일뿐 그것이 일본문화로 발전한 지금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상한 형태가 되면 곤란하겠죠. 이 기록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더 귀중한 정보는 당시, 즉 4-6세기 경 고구려인-백제인-신라인-가야인 (진씨가 가야계란 학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들이가 이러한 전파를 할 정도로 '인술' (즉 전투기술)에 통달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일 겁니다. 일본처럼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그 구체적인 당대의 모습들을 보지 못할 뿐, 하타씨가 가지고 있던 닌자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삼국의 풍부했을 자객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에도 삼국시대의 무사, 자객들이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알려져서, 구체적인 이미지화와 더불어 많이 이용되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관련 사료라도 덜컥 나와준다면 얼마나 좋을런지.



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4/09/26 09:18 #

    중국 같은 경우는 매력적인 자객들이 많죠 어장검 살화라던가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자객 세명이 쳐들어 가서 마지막까지 왔으나 목을 냅두고 간 전설 등등...

    우리나라는 뭔가 그런게 없어서 아쉬웠는데 있었네요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닌자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거군요... 대체 우리나라에서 안 건너간건 뭔가요....
  • 역사관심 2014/09/26 09:36 #

    더 활발하게 소비될 수 있는 소재가 많은데 지금부터라도 알려야겠습니다. 이가류의 경우 넷상으로는 저런 이야기의 근거사료를 찾을수 없어서 단정지을 순 없어 보입니다. 하나의 동기자료는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실 우리문화도 중국전래가 많으니... 문화는 그렇게 돌고 도는거겠죠.

    다만 원조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느 문화권이 그걸 잘 쓰고 활용하느냐가 훨씬 중요할것입니다.^^
  • Nocchii 2014/09/26 09:42 #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김천은 자객 보다는 해결사(?) 같은 느낌이 드네요 ^^

    사마천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자객은 첫째 정치적 신념이 뚜렷한 목적을 갖고 둘째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돌보지 않는다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보면 김천은 자객에 넣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4/09/27 03:04 #

    해결사에 가깝죠. 동감입니다 =)
  • 진냥 2014/09/26 09:56 #

    [사기] 자객열전 예양편은 내용도 흥미롭지만 문체도 비장하여 몇 번을 읽어도 피가 뜨거워지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근사할 듯합니다!
  • 역사관심 2014/09/27 03:06 #

    네, 다만 항상 그렇듯 사료부족으로 무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서 아쉬워요. 자객만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하고 협객이나 백동수같은 검객들까지 몽땅 넣어야 리스트가 만들어질 수 있을 듯 합니다.
  • 존다리안 2014/09/26 10:01 #

    현대를 배경으로 한 킬러물로 각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느와르 분위기도 나겠군요.
  • 역사관심 2014/09/27 03:06 #

    괜찮네요! ㅎㅎ
  • Fedaykin 2014/09/26 10:16 #

    호오..이가의 하토리한조가 한반도 출신이라는건 흥미롭네요 허허
  • 역사관심 2014/09/27 03:06 #

    저도 이 부분이 신기해서 찾아보았습니다만, 자세한 정보는 얻기가 힘들고 한조계의 이가류가 도래인인건 거의 확실한가 보더군요 (흔히 말하는 하타씨).
  • 迪倫 2014/09/26 12:52 #

    최근 한중일 닌자학회가 있었습니다. 주간조선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는데 유료라서 전문은 저도 보지못했습니다만...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324100022
  • 역사관심 2014/09/27 03:07 #

    김시덕선생께서 발표하셨군요. 흥미로운 학회가 많아지네요~! 결과물을 나눠주시면 좋을텐데 (김선생님이 ㅎㅎ)...
  • 역사관심 2014/09/27 04:30 #

    날짜를 보니 바로 얼마전이네요. 공교롭게 이런 포스팅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
  • ㅁㄴㅇ 2014/09/26 13:12 # 삭제

    구한의 살아남은 전통무술이라고 해야 놀이적 성격이 강했던 택견이나, 아예 놀이로 변화한 씨름 정도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200년 전 정조시대의 무술마저도 그 맥이 끊겨 '복원'한 것이니.

    이가가 한국에서 건너 갔다는 건 새롭네요. 물 건너는 정말 여러모로 신선한 동넵니다.
  • ㅁㄴㅇ 2014/09/26 13:21 # 삭제

    이가 전체가 아니라 하토리한조 계열 정도인가 보군요.
  • 역사관심 2014/09/27 04:31 #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덜컥 여러 전문사료가 발견되면 얼마나 좋을런지...

    하토리한조계열을 포함하는 '하타씨'가 신라계 도래인이었기때문에 저렇게 표현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연구논문이 있으면 좋을텐데...
  • 초록불 2014/09/26 13:23 #

    삼국시대 자객이라면 이외에도 김유신을 암살하려 한 "백석"이나, 장보고를 죽인 "염장"도 있죠...^^
  • 역사관심 2014/09/27 03:12 #

    백석은 고구려와 신라어에 대한 단초를 주는 인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염장은 덕분에 찾아보니 흥미진진하군요!

    30년대 별건곤 차상찬 선생 시리즈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려했는데 저 둘도 같이 붙여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Scarlett 2014/09/26 14:55 #

    하토리 한조의 선조가 한국계였다니....놀랍네요.
  • 역사관심 2014/09/27 03:12 #

    하타씨 계열이라 그런것 같아요, 글에 정보를 좀 첨언해봐야겠습니다.
  • windxellos 2014/09/26 17:08 #

    야규 일족이라면 보통 검술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걸 닌자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나 보군요.
  • 역사관심 2014/09/27 03:12 #

    그러게 말입니다. 자기들끼리 분류한거라 뭐라 할수도 없고 ^^;
  • 밥과술 2014/09/28 11:12 #

    답방와서 보니 여러방면으로 다양하게 흥미로운 글이 있네요. 링크신고 합니다~
  • 역사관심 2014/09/28 11:14 #

    감사합니다. 이웃이 되어 반갑습니다 ^^;
  • 2014/10/11 23:45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역사관심 2014/10/12 00:18 #

    ^^ 우선 축하드립니다~~
    예비남편분의 가문족보를 보시면 의외의 성과(?)가 나올지도~~
    그땐 꼭 알려주세요 ㅎㅎ^^;; 농담입니다.
    남편분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게 흥미롭네요. 외외로 명확한 사실일지도.

    닌자의 명가문 핫토리가에 시집가심을 축하드리고, 나중에 닌자기술도 알려주세요 ㅎㅎ
    좋은 댓글 감사드려요~. 블로그 링크 감사하구용 (먹을게 많아 괴롭군요 -_-).
  • 역사관심 2018/02/06 03:24 #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게되어 보다보니, Prin님 (링크타고 가보니 이젠 민키치님)글이 있어 이제 핫토리가에 시집가신지도 몇년이 되셨겠구나 싶어 안부답글을 달아봅니다.

    나고야에 계신가 봅니다. 그곳에는 핫토리 한조를 배경으로 하는 닌자학교도 있다고 들었는데 가보셨는지도 문득 궁금해지네요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