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16)- 미궁의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와 대강당 발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여기 또 하나의 베일에 싸인 신라시대 대사찰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 전모가 드러나면 소개하려 했지만, 발굴결과가 현황상 요원해서 중간점검식으로라도 짚어보려 글을 씁니다.

현재 안양시에 가면 김중업(건축가) 박물관이라는 바로 2014년 3월 개관한 곳이 있습니다 (박물관홈페이지). 이곳은 그전에는 '유유산업'라는 곳이었는데, 이 공장부지를 일부 포함해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것이죠. 이곳을 안양시가 중요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곳이 시이름의 원천 '안양'의 근원이 된 고찰 안양사(安養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건립된 김중업 박물관 (현 건물 앞뜰과 뒤가 모두 중초사(안양사)발굴터)

박물관 개관 플랜카드가 붙어있는 모습입니다. 입구에 벌써 심상치 않은 고석상과 흩어진 석축들이 보입니다.

미궁의 중초사中初寺- 2009년 대강당 발굴

이 곳의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번지 일대입니다. 안양사라는 사명이 드러난 것은 2010년 발굴때입니다. 안양사는 고려사료에 등장하는 절로, 태조 왕건이 900년에 건립한 대찰이었습니다. 이때는 신라 효공왕 4년으로 그가 아직 궁예의 수하로 있던 시절입니다. 왕건이 이 지역을 정벌하러 가다가 삼성산 자락에서 능정(能正)스님을 만나 창건한 사찰이 '안양사'입니다.

안양이라는 지명유래의 강력한 두가지 설중 하나로, 첫 번째는 정조가 부왕인 장헌세자의 수원 화산능에 참배하고자 만안교를 건설했는데, 여기서 '안(安)'자를 취하고, 그 정성을 길이 일깨워 살린다는 의미로 '양(養)'을 취하여 안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바로 안양사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더 설득력이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조왕건이 이 안양사를 짓기 이전, 더 오래된 대사찰이 그 아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최소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세워진 '중초사'가 그것입니다.

이곳에 중초사라는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일제시대때부터 꾸준히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통일신라시대부터 남아있는 '중초사 당간지주'가 서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유유산업부지등, 현대화를 겪으면서 발굴이 지지부진,사료로만 (그것도 당간지주로만) 전하는 전설의 사찰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7년 유유산업이 문을 닫으면서 획기적인 발굴을 맞이합니다. 2009년,한울문화재연구원의 발굴결과 중초사의 거대한 건물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2009년 발굴된 중초사터 당시 전경
2009년 발굴기사중 일부입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인 827년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의 1 일대 옛 유유산업 부지에서 고려말, 조선초 무렵의 대형 사찰 건물터가 확인돼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미궁속 흔적이 실체를 드러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김홍식)과 안양시에 따르면 안양시가 매입한 부지를 지난 6월부터 발굴한 결과, 사찰 강당터임이 분명한 남북 폭 14m, 동서 길이 41.4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 흔적을 찾아냈다고 14일 밝혔다. 평면 장방형인 이 건물터는 정면 9칸(주칸 거리 420㎝)에 측면 3칸(주칸 거리 260-520㎝) 규모로 추정된다. 나아가 이 건물터 남쪽의 현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중초사지 삼층석탑 인접 지점에서는 사찰의 문이라 생각되는 건물터의 바닥 흔적도 드러났다

한올문화제연구원 측은 "사찰 강당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대한 조사를 통해 현재 노출된 여말선초 건물터 하부에서 통일신라말-고려초기 때 흔적이라고 생각되는 또 다른 건물터가 발견되고 있다"면서 "이번에 확인한 강당터 및 문터는 당간지주에 남은 명문(銘文)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초사의 흔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보통 한국 고대 가람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중문-탑-금당-강당 순서로 건물을 배치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에 문터와 강당터를 동시에 확인함으로써 중초사의 정확한 사역(寺域. 절 구역)을 확인할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중략 (원문기사)

2009년 중초사 추정 대강당터가 발굴된 겁니다. 41.4 x 14m에 이르는 대건물입니다. 항상 한국의 대형목조건물을 비교할 때 대상이 되는 황룡사 최대건물인 중금당은 황룡사지의 경우 강단의 기단 규모는 52.64m x 21.1m, 전면 11칸, 측면 6칸의 규모였으며 건물내부는 도리칸과 보칸이 모두 약 5m의 간격으로, 모서리칸까지 퇴칸이 없이 동일합니다. 기단이 아니라 건물만 보자면 황룡사 금당은 초창기 때가 54.7×15.9m이며, 중창기 때의 것이 49.1×15.9m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금당'이고 보통 고대사찰에서 가장 큰 규모는 금당뒤에 위치하는 '강당'입니다. 이 중초사 건물지는 강당입니다.

현재 중초사 대강당터
발굴당시 (2009)사진입니다. 언뜻 주위 건물들과 비교해보아도 그 규모가 보입니다.
같은 강당으로 비교하자면 한국최대의 강당터는 백제 미륵사 대강당인데, 황룡사 강당보다 더 컸습니다. 무려 기단부만 133.4×14m입니다 (한변의 크기가 6미터인 방이 두개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방이 16개 늘어서 있습니다).
하긴 미륵사의 경우 대금당옆의 승방지만 해도 규모가 기단규모 65.5×14m입니다 (아래는 실측도, 정보는 논문 [6-7세기 백제 사찰 내 강당 좌우 건물지의 변천과정 고찰 (2010)중]). 또한 후일 소개할 기회가 되면 좋겠지만, 이 중초사발굴과 거의 동시인 2009년, 46.8mx 19.2m의 왕흥사지 강당터가 발굴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초사 대강당터 (41.4 x 14m)는 황룡사-미륵사보다는 부여의 백제 왕흥사와 비근하거나 약간 작은 규모로 보면 되겠습니다.

미륵사 대강당이 어떤 규모였는지는 다음의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위의 동승방지가 진한 붉은 색, 대강당은 분홍색입니다.

안양사 7층전탑塼塔 발굴

중초사 대강당 (2009)에 이어 다음해 '안양사'발굴(2010)때 중국은 많지만 국내에서 희귀한 '전탑'유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는 고려대 안양사의 것으로 그 유명한 '최영'장군이 중건한 기록이 전합니다. 이 안양사 전탑은 한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전탑입니다.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의 [도은집(陶隱集)] 속의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 , 그리고 또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문헌 속 고려안양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전합니다.

안양사 창건시부터 이 칠층전탑이 세워졌는데, 후인 고려말기 14세기초에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젊은 시절에 탑밑에서 기숙하면서 고려 태조가 직접 세운 탑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 탑을 다시 중수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이 당시 전탑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문하시중이 된 최영은 다짐대로 직접 "안양사 칠층전탑"의 개수에 착수합니다. 전탑의 준공때 당대국왕인 우왕이 환관 박원계(朴元桂)를 통해 향을 하사했고,당시 낙성식에 참여한 승려수가 무려 1,000여명이었습니다. 또한 더 놀라운 것은 이 때 축하품으로 탑속에 봉인한 사리의 수가 무려 열둘, 불아(佛牙)가 하나였는데 시주한 당대의 인사숫자가 무려 3,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중초사를 이은 안양사의 고려말기까지의 사격이 짐작됩니다.
당시 쏟아져 나온 전塼 (벽돌)유구
현재 다시 매장되어 박물관 옆에 자리한 전탑터
조성현 안양시문화해설사의 보고기록을 보면 2010년 발굴때 전탑의 전과 기와편들이 백자 및 분청자로 제작된 연꽃봉오리형 기와장식물 등과 함께 발굴됩니다. 이 연봉형 기와는 전탑의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에 얹었던 기와위를 장식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전-기와-전-기와 순(順)의 전돌과 기와가 층위를 이루며 내려앉은 일괄 폐기된 양상을 통해 볼 때 전탑은 폐기되기 전(前) 옥개부위에 기와가 덮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탑지 인근에서 철정(瓦釘, 못)편이 출토되어 전탑에 사용하여 전이나 기와를 고정시켰던 와정(기와못)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안양사 7층전탑의 규모와 모습추정에 큰 도움이 되는 단서가 쏟아진 것이지요.


중초사와 안양사

그렇다면 이 중초사와 후대의 안양사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그리고 금당터는 어디쯤 있을까요? 2009년 김태식 기자의 글을 잠시 살펴보죠 (부분발췌, 전문링크):

한울문화재연구원 정상석 조사연구실장은 "안양사라는 사찰은 태조 왕건 때 처음 존재를 드러내고 12세기 무렵 재등장했다가 고려말 최영 장군과 관련한 기술에서도 다시 등장한다"면서 "이런 사찰 이름을 적은 명문기와가 추정 중초사 터에서 출토됨으로써 두 사찰간 관계 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9세기 무렵에는 중초사라는 명패를 단 사찰이 고려시대에는 안양사로 이름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으며, 아니면, 두 사찰은 가까운 지점에 동시에 존재했는데, 안양사 건축에 쓰다 남은 기와가 중초사 개ㆍ보수에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번 추정 중초사 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금당터는 하필 안양시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하고자 하는 근대 건축가 김중업의 현존 유일 공장건물인 옛 유유산업 건물 지하에 들어앉아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더불어 지금까지 발굴 결과 추정 중초사터 일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할 만한 성과를 쏟아냈다는 점에서 이 일대에 대한 사적 지정과 함께 김중업 건축물의 재활용 등을 둘러싼 논란도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김중업 설계 건축물은 주변 적당한 지역으로 이전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5년후인 2014년, 김중업박물관은 바로 중초사터위에 건립되었습니다. 정상석씨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당간지주에 따라) 9세기에 존재하던 통일신라 사찰인 중초사가 고려대에 안양사로 개명했을 가능성과 두 사찰이 이웃으로 공존했을 가능성도 살피고 있습니다.

중초사 강당터
위의 사진이 바로 발굴당시 모습의 강당터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기사에 보이듯, 현재 박물관아래가 중심건물인 '금당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노른자 부위니까요. 여기에 어떤 대건축이 자리잡고 있을 지 모릅니다.
위 사진은 첫번째 사진의 아랫쪽 '발굴'부분입니다. 이곳이 '문'터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안양시의 기원- 중초사(안양사)터

중초사 당간지주의 9세기 기록

중초사라는 사명이 등장하는 현전 유일한 기록인 당간지주는 827년이라는 연혁이 뚜렷하게 새겨진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입니다. 거대한 굴산사지 당간지주등에도 이런 기록은 없죠. 그래서인지, 발굴이 전혀 없었던 일제시대부터 이 당간지주는 '보물'취급을 받아왔습니다.

[해외사료총서 8권, 일본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2권]을 보면 일본 宮內廳 書陵部 소장 한국 古版本이 국내에서 조사된 서지목록으로 나오는데, 총 세건의 중초사 석주기 기록이 있습니다.

始興中初寺幢竿石柱銘
拓本. 新羅興德王1(826)刻. 1점. 163×50㎝. 寶曆二年歲次丙午(826)八月 … 備考:C27 복본 分類:515-149
始興中初寺幢竿石柱銘
拓本. 新羅興德王1(826)刻. 1점. 163×50㎝. 分類:515-149
始興中初寺幢竿石柱銘
拓本. 新羅興德王1(826)刻. 1점. 164×50㎝. 分類:C6-27

일제강점기가 한창이던 1931년 동아일보의 6월 9일자 소식에도 총독부소속 종교과라는 곳에서 중초사석주를 조사한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이 석주도 당당히 '보물보존령'에 속하는 즉, 보호할 유적으로 분류되어 있죠.

東亞日報 1931.6.9·10
이달에 總督府 學務局 宗敎課에서 審議한 朝鮮古蹟 名所 天然物保存令과 寶物保存令(보물보존령)으로 規定(규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中初寺址幢竿支柱, 同三層石塔,..."

1934년 같은 동아일보에서는 '보물'로 완전히 지정했다는 공식발표가 나옵니다. 

東亞日報 1934.5.4
朝鮮寶物古蹟保存會는 寶物 210點, 古蹟 21點 天然記念物 21點 合計 252點을 지정하다.
寶物(石造物) "中初寺 憧竽支桂,...中初寺 三層塔..."

그만큼 일본인들의 눈에도 이 중초사기록은 중요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이 중초사당간지주는 현재도 당연히 대한민국 보물 4호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같이 적혀 있는 중초사 삼층석탑입니다. 탑이 원래 이런 모양인지는 의문인데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1층 기단이라는 특이한 점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중초사가 아니라 '안양사' 그것도 폐사직전의 작품일 것입니다. 시대배경으로 보면 전성기를 지난 시대이므로 이런 작품이 나온 것도 맥락상 증거가 될수 있겠지요.
그럼 가장 중요한 기록인 당간지주에 적힌 석주기石柱記를 직접 보지요:

解釋文 
보력寶曆 2년(826)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의 승악僧岳에서 돌 하나가 갈라져 둘이 되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였고, 9월 1일에 이에 이르렀으며, 정미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때 주통節州統은 황룡사皇龍寺의 항창恒昌화상이다. 상화상上和上은 진행眞行법사이며, 정좌貞坐는 의설義說법사이다. 상좌上坐는 연숭年嵩법사이며 사사史師는 둘인데 묘범妙凡법사와 칙영則永법사이다. 저내유내典都唯乃는 둘인데 창악昌樂법사와 법지法智법사이다. 도상徒上은 둘인데 지생智生법사와 진방眞方법사이다. 작상作上은 수남秀南법사이다.

보력(寶曆) 2년(826) 8월 6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僧岳)이라는 산에서 돌 하나가 갈라져 둘이 되자 이를 당간지주로 제작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 30일에 공사를 완료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각종 승려들의 보직이 적혀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전체 높이 3미터 70센티인데 높이 176cm 넓이 52cm에 글자 크기 약 6cm의 해서체(楷書體)로 위의 기록을 새겼습니다. 자료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미상이며, 보시다시피 당시 사직(寺職), 즉 승려들의 직책과 직함 이름들은 9세기 전반의 승관제(僧官制)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신라 황룡사와의 관계

재미있는 것은, 당간지주를 만들 때 황룡사에서 항창(恒昌)화상이라는 스님이 파견되어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경주와 안양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9세기 당대에 통일신라 국내에서 '황룡사 건축'의 상징성이나 기술력의 영향을 잘 살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전에 살펴본 통일신라대 8세기 유일한 현전 건축그림인 [대방광불화엄경 (아래 링크)]도 황룡사의 8세기 승려 연기법사가 발주한 작품이었죠.

따라서, 이런 기록은 당대 통일신라의 '황룡사'라는 사찰의 건축적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료라 생각됩니다. 또한 만약 중초사의 대강당과 (후일 발견될 지 모르는) 중금당을 추정복원해 본다면 황룡사 중금당과 대금당 형식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중건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합니다. 참고로 황룡사 금당들이 지어진 것은 566년이 되므로, 826년이라는 당간지주기록과는 260년의 시차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수'는 했을지언정 건축의 기본틀을 9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건축상의 연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김중업 박물관으로 불러야 하는 옛 유유산업부지 뒷편 암벽에는 스님이 종루에서 종치는 모습을 새긴 국내 유일의 마애종(磨崖鍾 신라말-고려초 추정)이 자리해 '중초사지'와의 연관성도 제기되며 최근 민예총안양시지부는 보물로 격상시키기 위한 사업을 본격 추진중에 있습니다. 현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말여초 승려의 복장을 연구하는데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같습니다.

확대사진 (스님이 웃고 있죠)
마지막으로 중초사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입니다. 역시 통일신라대와 고려대의 귀면양식들입니다. 앞으로 발굴할 수만 있다면 더 쏟아져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귀면 수막새
귀면 암막새
이 중초사 귀면문 암막새는 고려시대 사찰인 충주시 정토산에 위치한 '정토사(淨土寺)'에서 출토된 귀면문 암막새와 꽤 유사합니다. 신기한 건 정토사 역시 그 기록이 미비하며 통일신라시대 말기나 고려시대 초기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각이빨이 듬성듬성 나있는 모습이 꽤 유사하죠.

하지만 아쉽게도 정토사터는 충주댐 공사로 인해 수몰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중추사지는 오히려 후대에라도 발굴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정토사 귀면 암막새
결언

필자의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시리즈를 주욱 보아오신 분들은 이제는 어렴풋이 느끼실 수 있겠지만, 그 유래와 실측이 명확한 건물지도 많지만, 국내에 '베일에 싸인' 건물터 역시 특히 2000년대 이후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숭례문사태나 일부 날림복원으로 불거진 문화재계 전반에 걸쳐있는 후진스러운 모습들입니다. 바로 앞서 살펴본 '하남 동사지'의 방치상태도 그렇고, 예전에 살핀 그 설화로 유래깊은 경주 호원사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상태도 그러하고, 문화재계 내부의 알력과 돈과 관련된 여러 비리의 정황이 요즘 드러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비리들은 선진문화강국으로 가기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한번은 뼈아프게 처리하고 겪어내고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한국사회 특유의 '극단적 선택' (즉, 복원이나 중건문화에 대한 무조건 적인 No형태의 담론)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히려 황룡사복원이나 최근 일어나는 경희궁 중건을 통해, 철저한 투명성 (지금 당장은 호된 비판과 질책, 감사를 겪더라도)을 앞으로 수년간 확보해서, 우리 사회에 절대로 필요한 고대-중세건축 중건의 학구적이며 투명한 철학이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이 김중업 박물관아래 묻혀 있는 중초사터 역시 더욱 의미있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참고문헌] 
기내사원지(경기도, 1988)
고대 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중업 박물관 홈페이지
안양시 홈페이지
전탑관련: http://www.oneclick.or.kr/cop/bbs/gallery/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15&nttId=5382

덧글

  • hansang 2014/10/24 08:34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로 옆 군포에 사는데 주말에 한번 가봐야겠네요
  • 역사관심 2014/10/24 11:35 #

    언제 시간이 되신다면 좋은 가을날 한번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
  • 2014/10/24 09:5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0/24 11: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동글기자 2014/10/24 11:20 # 삭제

    오랜만에 들렸습니다. 여전히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 우리 주변의 소중한 유물에 관한 정보 비롯해,,,유적의 보존과 재건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4/10/24 11:37 #

    아 기자님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요즘 많이 바쁘시죠.^^
    블로그 부활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 松下吹笙 2014/10/24 12:48 #

    음 안양사는 사적지로 정비하고... 김중업 선생님의 작품은 다른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듯 하네요 . 물론 예산이....T-T
  • 역사관심 2014/10/25 02:12 #

    항상 문화예산은 부족...T.T
  • 이 감 2014/10/24 13:19 # 삭제

    잘 읽었습니다. 발굴이 계속되었으면 좋겠군요. 일단 주변 정비는 잘 해놓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수요일에는 사직단 정비 복원 공청회가 있었는데 때가 안맞아 서울 밖에 있게되어서 가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부분 정비 복원하기 전에 그 이상한 홍살문부터 제대로 복원할 계획은 있는 것인지 듣거나 묻거나 했어야 되는데 이 얘기가 나오기나 했나 모르겠네요. ;;
  • 역사관심 2014/10/25 02:14 #

    감사합니다. 사직단 쪽 이야기는 심심찮게 뉴스에서 봤는데, 말씀대로 홍살문처리도 주목해서 봐야겠습니다. 좀 제대로 하면 좋겠어요, 이쪽에서 꼭 감시안해도...Credibility를 스스로 만들어가면 서로서로 편한데 말이지요.
  • ㅇㅇ 2014/10/24 14:47 # 삭제

    중초사 안양사도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죠 아무튼
    고려말 이후 전설처럼 잊혀진 대형 불교사찰이 이땅엔 남한지역마 국한해도
    엄청 많은것 같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예전엔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대에 따른 불교 승려 숫자가
    한국 불교 쇠락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더군요

    고려시대 수십만명에 달하던 불교승려가
    조선말 20세기초가 되면 고작 8천명 수준으로 급락했다니..
    (참고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는 10만명 수준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는 5만명 수준)

    아직 갈길이 먼것 같습니다

    참 그리고 며칠전 전라도 나주에서 백제 마한 신라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고분 발굴이 있었더군요. 하사품으로 보이는 금동 신발도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됬던데 기대가 됩니다
    최근 몇년 사이에 예전보다 백제관련 유적 유물 발굴이 굉장히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더군요

  • ㅇㅇ 2014/10/24 19:56 # 삭제

    참고로 현재 남한내 전체 불교 종파 등록 승려 숫자 합계는

    3만명 정도 되더군요

  • 역사관심 2014/10/25 02:15 #

    동감합니다 oo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인데 정말 승려의 숫자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울 듯 합니다.

    나주에서 발견된 기사는 일단 스크랩해두었습니다. 언젠가 관련 포스팅을 할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군요. 말씀대로 최근 백제쪽 문화유산이 많이 나와 즐겁습니다. 이왕이명 이참에 한성백제의 확실한 (빼도박도 못하는) 궁궐터가 나와주면 얼마나 좋을런지...
  • 성홍 2014/10/26 16:37 # 삭제

    오늘좋정보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4/10/27 04:59 #

    고맙습니다.
  • 부산촌놈 2014/10/31 17:52 #

    부산 만덕동에 위치한 기비사도 한 번 다뤄주세요 ㅎㅎ

    발굴 결과 상당한 대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에 더 이상 진전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기비사지 출토 치미는 아마 황룡사지 출토 치미보다 사이즈가 컸던 걸로 기억합니다.
  • 역사관심 2014/10/31 22:21 #

    기비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소재 감사합니다. 지금 쓰던 글들이 밀린 것이 있어 정리하면서 자료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시간은 좀 걸릴것 같네요 ^^
  • 한님 2015/09/18 22:04 # 삭제

    좋은 글 관심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좌대가 있던 터로 짐작하여 국내에 있어서 사상 최대크기라는 부산의 사라진 거대사찰 만덕사와 아홉개의 금당,여덟 개의 종각 등 무려 천 칸이 넘는 전각이 있었던 성주 법수사와, 과거 수만 평 대지 위에 일주문이 3키로 밖에 있었다던 완주 송광사에 대해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5/09/21 10:28 #

    만덕사와 송광사는 언젠가 다루려 하고 있었는데 다른 대사찰은 정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사찰시리즈는 조금씩 평소에 자료를 모으고 일정수준의 데이터와 스토리가 내부적으로 완성되면 써내니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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