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17)- 두두리가 하룻밤에 만든 영묘사(靈廟寺)의 3층 불전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신라시대의 건축물중 '3층'이라는 복층구조가 명확한 건축물이 하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전하는 전설의 사찰 '영묘사'의 전각이 그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慶尙道) 
영묘사(靈妙寺)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으로서 체제가 특이하다. 신라 때의 불전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다른 것은 다 무너지고 헐어졌는데, 유독 이 불전만은 완연히 어제 지은 듯한 모습으로서 있다. 속설이 전하기를, “이 절 터는 본래 큰 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에 사는 여러 무리들이 하루 밤 사이에 메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한다.

靈妙寺 
在府西五里唐貞觀六年新羅善德王建殿宇三層體制殊異羅時殿宇非一而他皆頹毁獨此宛然如昨諺傳寺趾本大澤豆豆里之衆一夜塡之遂建此殿今廢

이 짧은 기록은 그 길이에 비해 아주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는 중요한 것으로, 우선은 표현그대로 신라시대의 '복층건축'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그냥 있었다가 아니라 '신증...'이 씌여진 1530년대까지, 적게 잡아도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462년까지 신라의 3층전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지요. 보통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한 처마', '서늘한 기운'등의 은유적 표현으로 그 높이가 추정되는 우리의 고대건축에 대한 여타기록과 달리 정확히 그 층수가 나와있는 몇 안되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두두리(豆豆里)에 사는 여러 사람들

또 한가지 중요 포인트는 바로 '두두리'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두리는 마치 '행정구역'인 '리'처럼 느껴지는데 신라당대의 지방 행정구역명은 군(郡) 현(縣) 향(鄕) 부곡(部曲)등은 있어도 '리는 없었습니다. 이 '두두리'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사료가 바로 유명한 '귀교'를 만든 퇴마사이자 귀신대장 '비형랑'이 등장하는 [삼국유사]부분입니다. 예전에 포스팅한 '한국의 사라진 다리- 귀교'에서 소개한 바대로 왕가숲의 귀신들을 모아다가 하룻밤에 돌대교인 '귀신다리 (귀교鬼橋))'를 만드는데, 이 비형랑을 퇴마부적의 모티브로 삼아 당대 신라에서는 다음의 시를 포함하는 부적으로 대문에 붙이곤 합니다.

"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비형랑의 집이었네. 
날고 뛰는 귀신의 무리들아, 
여기에는 머무르지 말라!"

이러한 향속을 바로 목랑(木郞, 木神) 또는 두두리(豆豆里)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귀신숲인 왕가숲은 어느덧 목랑을 붙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는 거목들의 숲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언젠가 비형이 아닌 이 왕가숲자체를 모티브로 한 영화나 애니-만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사실 이 제사기록은 삼국유사자체에는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합니다.

즉, 목랑을 ‘豆豆里’라고 하는데, 이 목랑을 왕가수 (王家藪, 즉 왕가숲)라는 곳에서 제사하며, ‘두두리’는 신라 진지왕의 혼령이 桃花女와 관계해서 낳은 鼻荊郎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으로 두두리 신앙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경주 출신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더라도 두두리를 모셨습니다. 

예를 들면 무인집권기의 유명한 무장 이의민(李義旼, ?~1196년)은 자신의 집에 신당을 차려놓고 두두리 신의 화상을 모셨으며, 이의민이 패망할 무렵에는 두두리 신이 울면서 이 신당을 떠났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또 1231년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는 두두리 신이 무당을 통해 무기와 말을 제공하면 몽골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공언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필자의 추측으로는 '목랑', 즉 '나무귀신 혹은 나무사내'라는 '객체'를 '두두리'라는 것과 동일시하는 현재의 학계맥락은 적확하게 말하자면 오류인듯 합니다. 즉, '목랑'이라는 나무신은 '왕가수'(왕가숲)이라는 귀신숲에 존재하는 특정나무나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목랑'형태의 조각이나 부적을 특정 나무에 붙여두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또한 글 서두에 소개한 기록에서도 '두두리'는 마치 '지명'처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 절 터는 본래 큰 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에 사는 여러 무리들이 하루 밤 사이에 메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따라서 두두리를 '왕가수(왕가숲)'자체로 고려하는 연구도 진행해 볼만 합니다. 그리고 왕가수(숲)이 현재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는 정보밖에 없는데, 사실 이 왕가숲의 위치를 비정해볼 수 있는 기록이 삼국유사 귀교편에 등장하죠.

즉,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荒川) 언덕 위에 (경성(京城)의 서쪽에 있다) 가서 귀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속에 매복하여 엿보니..."라는 구절에 월성서쪽 황천언덕위라는 위치가 나오고 더군다나 그 다음 문장에 '용사들이 숲속에'서 숨어서 봤다는 구절이 나오는 걸 보면 왕가숲이 이 위치에 있었음을 쉽게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57년~65년에 간행된 [여지도서 輿地圖書]의 古跡 편에도 '왕가수'와 '두두리'의 기록이 전합니다:
王家藪 在府南十里州人祀木卽之地木卽俗稱豆豆里自鼻荊之後俗事豆豆里其盛高宗十八年蒙古元師撤禮塔來討著古與之死東京馳奏有木卽言我已到敵營元師某某人也我等五人欲與交戰期以十月十八日若送兵鞍馬我等便當報捷因以詩寄崔瑀曰壽天災祥非一貫人人居此未曾知除災致福是難事天上人間捨我誰瑀信之私備盡韂鞍馬遣內侍金之蓆逸之其後無驗

명확한 것은 '두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요귀들'일 것입니다. 사실 현재 많은 번역이 '두두리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맥상 '衆'은 사람이 아닌 말 그대로 '무리'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묘사' 3층불전은 마치 귀교처럼 두두리에 사는 요귀들이 하룻밤에 만든 건축물이 됩니다.

흥미로운 접점은 만약 '두두리'가 지명이고 '왕가숲'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귀교'를 만든 집단이 이 '영묘사 3층불전' 역시 똑같이 '하룻밤'만에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이겠죠.

최근 탑동 신원사터근처에서 발굴되고 있는 실제 추정 '귀교鬼橋'
도깨비= 나무방망이라는 착각의 시작점

한국의 도깨비는 뿔과 방망이가 없었을까라는 글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우리 도깨비에 대한 최근의 EBS방영영상등에서 분명한 오류는 '나무방망이'를 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사료에 이미 '금방망이, 쇠방망이'등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한국도깨비는 나무방망이'만'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사실 '나무방망이'기록은 어떤 특정 설화에서도 발견된 바 없는 희안한 선입견입니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나온 물건일까요?

그 출처가 바로 이 '두두리'신앙에서 나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두리는 목랑(木郞) 또는 목매(木魅) 혹은 '목신'이라라고도 하는데, 목매는 나무의 이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억시니, 기이한 공포 (천예록 중 두억신편)이라는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던 것처럼 사료의 기록에 명확히 이매와 망량은 도깨비와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야차, 도깨비, 망량등이 혼재되는 경향이 언제부터인지는 또다른 과제겠지만, 적어도 조선중기 이응희의 [옥담시집]이나 전기의 정도전의 기록들을 보면 이매-망량은 확실히 그 자체로 '목신' 즉 '나무귀신/정령'입니다. 즉 산수와 목석의 정기(精氣)가 엉겨서 된 요괴(妖怪)를 망량이나 이매라고 합니다.

옥담시집의 예를 보자면:
망량은 숲 속에 숨고 / 魍魎林間伏
여우와 살쾡이는 골짜기 아래 숨네 / 狐狸澗底藏

여우와 이리는 골짜기에서 놀라고 / 狐狸驚絶澗
망량은 산에서 도망친다 / 魍魎走窮山

여우며 살쾡이들이 숲을 잃어버렸거니 / 狐狸失林莽
망량은 어디에 깃들건가 / 魍魎安所憑
가련쿠나 저 바위 위의 소나무 / 可憐石上松
말라 죽은 채 높은 산에 서 있구나 / 枯死立崚嶒
등 여러차례 등장하죠.

정도전의 경우 아예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그 산과 바다와 음(陰)과 허(虛)의 기운, 풀과 나무와 흙과 바위의 정기는 감염[染]되고 융화[融]하여 이매망량[魑魅魍魎]이 되었도다. 이는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며 저승과 이승의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아니하지만 하나의 물(物)이다.

즉 '목매'라는 의미는 말그대로 나무의 이매, 즉 동의어반복에 가까운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요괴/요괴연구에서는 '도깨비 혹은 두억시니'와 혼재해버리는 겁니다. 사실 저 윗구절도 필자가 번역한 것이지, 현재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도깨비 두억시니는 숲속에 숨고'라고 멋대로 해석해두고 있습니다 (도깨비는 혹은 두억시니(야차)는 숲속에 사는 특정요귀가 당연히 아닙니다).

더 이상한 것은 두두리는 두드린다라는 의미로 갑자기 확대해석, 그러므로 두두리의 신체(神體)는 나무방망이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라는 식의 논지를 펴는 겁니다. 이래서 나아가 도깨비의 신체가 나무방망이였다는 설화도 전승되는 사실로 미루어, 두두리를 도깨비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생겨납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게 타당한 가설같으신가요? 필자는 확대해석의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더 웃기는 것은 저 견해는 그래도 두두리의 신체가 나무방망이같은 것이고, 따라서 도깨비의 실체가 나무방망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EBS의 저 화면을 보면 갑자기 도깨비가 '들고 다니는 물건'이 나무방망이라는 것으로 한번 더 재확대해석됩니다. 정말 멋대로지요. 

아닙니다

참고로 이러한 하룻밤 전설들을 근거로 두두리 신앙 집단이 협업집단으로 공동노동에도 참여했음을 추론하기도 합니다.아쉽게도 이후 두두리 신앙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3층불전기록이 전하는 영묘사라는 사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靈妙寺 라는 단어 그리고 불귀신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 사찰명 靈妙寺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두두리의 무리가 하룻밤에 만든 불전'을 가진 이 절의 명칭은 말 그대로 신령(神靈)스럽고 기묘(奇妙)한 사찰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명칭은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 권3 탑상4 영묘사장육조, 권3 탑상4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조]에 전하는 것이고, 사실 세가지 이명이 더 있습니다. 

한가지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조, 권2 기이2 효공왕조, 권4 의해5 양지사석조, 권4 의해5 이혜동진조]와 [삼국사기의 전 조목]에서는 영묘사(靈寺)로 여기서는 '사당 묘'자를 씁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동탑 기단부의 명문(名文)에 영묘사(妙寺)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떨어질 영'자를 쓰죠. 선림원종(禪林院鐘)의 명문에는 “영묘사(妙寺)”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름답게 그리고 영묘사는 '밀교'사찰이었습니다. 같은 밀교의 대법당인 '사천왕상'과의 묘한 접점은 신라의 미켈란젤로 '양지스님'의 조각이 두 사찰에 공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발견됩니다. 같은 7세기 건립된 밀교대사찰 '사천왕사'의 조각과 영묘사터에서 발굴된 (아마도 신라귀면와중 가장) 그로테스크한 귀면와를 보면 (양지스님작) 영묘사의 당대분위기도 어느정도 느낄수 있을 겁니다.
사천왕사 부조 (7-8세기)
영묘사 출토 귀면와 (8세기경)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635년에 (혹은 632년) 경주에 세워진 사찰로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 일대를 영묘사지(靈廟寺址)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즉, 어디 있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전설의 사찰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면 왼쪽 붉은 실선부근입니다. '흥륜사터'가 있는데, 저 곳은 영묘사터로 추정되는 강력한 비정지중 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 황룡사가 보이시죠). 
이 영묘사는 그 이름답게 '화귀, 즉 불귀신'이 된 청년의 설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수이전]이 원전인데 [삼국유사]에 인용된 유명한 이야기로 활리역(活里驛) 사람인 지귀(志鬼)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사모하여 그 사랑의 불길로 영묘사의 탑을 태우고 자신은 화귀(火鬼)가 되었다고 나오죠.

지귀는 신라 활인의 역인이다. 선덕왕의 단아하고 수려함을 사모하고 근심하고 눈물을 흘려 모습이 초췌해졌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불러 말하였다. "짐이 내일 영묘사에 가서 향을 피울 것이다. 너는 그 절에서 짐을 기다려라."
지귀는 다음날 영묘사 탑 아래에 가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홀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왕은 절에 도착하여 향을 피우고는 지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팔찌를 빼어 가슴에다 놓고 궁으로 돌아갔다. 후에 왕의 팔찌가 가슴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왕을 기다리지 못할 것을 한탄했다. 그 안타까움에 오래도록 기절해 있다가, 마음의 불이 일어나서 그 탑을 불태웠다.
-삼국유사
일본인 삽화가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신라 화귀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 기록을 간단히 보면 선덕여왕이 얼마나 영묘사와 (또한 사천왕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글을 보면 당시 영묘사내에 '옥문지'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두리가 하룻밤에 메운 연못의 일부분인지도 모르겠군요).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萬]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 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取殺之 百濟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王無恙時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武>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선덕여왕이 세 가지일을 미리 알다 (중 발췌):
제27대 덕만(德曼)[혹은 만(萬)으로 쓰기도 함]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무릇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씨를 뜰에 심도록 명령하고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여러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뽑아서 급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西郊)로 나가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명이 와서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라는 자가 남산령(南山嶺)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병력 1천 2백 명이 있었는데, 이를 쳐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는 왕이 병을 앓지 않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니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 사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중략 .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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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묘사에는 거대한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황룡사처럼).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묘사장육조에 “선덕왕이 절을 세우고 소상을 만든 인연에 관하여는 양지법사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善德王創寺塑像因緣 具載良志法師傳). 경덕왕 23년 (764년)에 장륙불상을 다시 도금하는데 벼 2만 3,700석이 들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그 유명한 신라의 미켈란젤로 '양지'의 (이분이 그 기괴한 천왕사조각들도 만들었죠) 이 책은 전하지 않습니다.

[삼국유사] 권 3 양지사석조의 기록은 더 자세합니다.
양지(良志)가 영묘사에 장육존상(丈六三尊)·천왕상(天王像)과 전탑(殿塔)의 기와를 만들고 현판을 썼다. 양지가 장육존상(丈六三尊)을 만들 때 스스로 선정 (참선상태)에 들어가 잠념없는 상태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온 도성의 백성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유행하는 노래에 일렀다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서럽더라, 서럽도다 이 몸이여, 공덕(功德) 닦으러 오라.(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지금까지 이 지방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힘든 일을 할때는 다들 이것을 부르는데 이는 대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비용으로 곡식 2만 3,700석이 들었다.

따라서 이때 '전탑 (벽돌탑)'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성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벽돌을 만들 진흙을 날랐다는 것을 보면 이 장육상과 탑의 규모가 대강 유추됩니다- 거기에 3층불전까지 생각하면 영묘사라는 절의 규모가 대강 파악되지요.또 경덕왕 23년(764)에 이 양지의 장육상을 금으로 칠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김창호 (2007)에 따르면 이 장육상은 석가삼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고려할 점은 삼국사 영묘사 장육조와 양지사석조의 기록이 미묘하게 다르죠- 즉, 불상자체와 불상을 다시 도금하는데 쓰인 비용이 '쌀 2만 3,700석'이 들었다고 각각 되어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후일 이곳에서 전탑벽돌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벽돌들이 불타있다면, 저 '화귀'가 태운 걸 겁니다.(..)

어찌되었건 장대한 규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쌀 2만 3천여석은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느정도의 비용일까요? 한석(한섬)은 신라때 부터 쓰였으며 성인 한 사람의 1년간 소비량 또는 장정 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고 합니다. 최치원의 '연복사비문'의 주(注)에 '유제일두위섬(斞除一斗爲苫) 십육두위유(十六斗爲斞)'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유(斞:16말)에서 1말을 제한 것을 섬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쌀 1만석을 160kg으로 계산해 보면 쌀 80kg 2만가마에 해당하므로 쌀 1만석 = 2만가마 × 20만원(80kg 쌀한가마) = 40억원정도로 봅니다. 따라서 쌀 2만 3,700석이라는 규모는 거의 수십억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불상자체를 만든 비용으로 봐야 할 듯 하죠 (도금이 아니라).
 
당대 영묘사의 위용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영묘사의 앞 길에 왕이 나아가 열병식을 거행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幸靈廟寺 前路閱兵 觀阿?薛秀眞六陣兵法) 라고 되어 있어, 바로 앞에서 왕이 신라군대의 병법진을 관람할 정도로 거대한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왕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도 나옵니다. "영묘사 남쪽에서 오성제를 행하였다.(靈廟寺南 行五星祭) (권 7)."

[삼국사기]에서는 각종 사고기록이 나옵니다. 마치 앞서 '화귀'이야기처럼 문무왕 2년(662) 2월·문무왕 6년(666) 4월조·문무왕 8년(668) 12월 조·성덕왕 2년(703) 7월에 절에 화재가 있었으며, 문무왕 3년(663) 5월에는 영묘사 문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나옵니다. 성덕왕 11년(712)에 그 김유신(金庾信) 의 부인이 이곳에 출가하여 머물렀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현 경주박물관 앞에 전시중인 흥륜사(영묘사추정)터 8-9세기 석수조:
현전하는 신라사찰 역대 최대의 물탱크입니다. "하늘빛 구름 그림자"'라고 씌여 있습니다.

영묘사의 위치와 발굴
여러가지 추측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홍사준선생은 1962년 글에서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에 송화산 기슭 아래 서천(西川) 변에서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신라시대의 초석과 함께 노출된 바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불우조에 “부 서쪽 5리에 있다.”라는 기록과 [삼국유사] 선덕여왕지기삼사조의 영묘사 옥문지 기록이 실제로 부합된다는 점에서 경주 동천동 일대를 영묘사지로 추정한 바도 있습니다. 
현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영묘사 기와편들

하지만 위의 지도에 나오는 사정동 국당리에 비정되던 흥륜사지(興輪寺址)에서 1976년에 “영묘지사(靈廟之寺)”, “대령묘사조와(大令妙寺造瓦)”의 명문(銘文) 기와편이 나옵니다.  김원주 (1983)에 따르면 앞서 살펴본 기록처럼 [삼국사기] 674년 영묘사 앞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병법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위치는 지금의 형산강과 동천을 끼고 있는 그 천변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영묘사는 현재의 서천 변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으며 2002년 최효상과 김호상은 “영묘(靈廟)”, “영묘(靈妙)”, “영묘(令妙)”, “영묘(零妙)”의 기와편과 벽돌(塼)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이 김원주의 의견에 신뢰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김원주 설의 '서천'은 바로 지도의 왼쪽에 보이는 작은 물길 (서천)입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홍륜사지)

사진에 보시다시피 그럼에도 (왜인지) 영묘사지는 본격적인 발굴을 한 적은 없고 다만 1977년과 1978년, 1988년에 부분적으로 시굴 조사 및 수습발굴이 이루어져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기의 2개의 층위, 금당지,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목탑지로 추정되는 기단유구, 동서회랑지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신창수 (2002)의 논문을 보면 "발굴 결과에 따라 영묘사는 삼국 시대에 창건되어 유지되다가 통일 신라 후기에 와서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황룡사(皇龍寺)와 분황사(芬皇寺)의 예를 볼 때 선덕여왕 당시에는 1탑 가람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쌍탑식 가람이 들어섰고, 『삼국유사』 권4 의해5 이혜동진조에서와 같이 750년을 전후하여 좌우경루가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탑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당시 부분발굴 보고서라든가 터를 찍은 사진등은 전혀 찾을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다시 덮혀있다면 본격적인 발굴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됩니다만...

또한 "신라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인면문 와당(人面文 瓦當) (아래 사진)이 일제시대 출토된 바 있고, 이 70년대말의 부분발굴에서는 수렵문전(狩獵文塼)과 영묘사지 이외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 귀면전(鬼面塼) 등의 많은 와전(瓦塼)이 출토되었습니다. 
사실 이 인면문 와당은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72년 다나카씨라는 사람에게 다시 돌려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귀면와 전체

영묘사는 생각보다 오래전까지 버텼던 것 같습니다. 우선 서두에서 설명한 15세기의 3층불전이 남아있는 기록도 그러하지만, 권벌(權撥)에 의하여 쓰여진 [충재집(沖齋集)]에 16세기, 1514년 성균관(成均館) 존경각(尊經閣)이 불에 탄 다음 해에 영묘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따라서 완전히 사라진 시점은 생각보다 가까운 16세기초가 됩니다. 

사족으로 그 유명한 '에밀레 종' 역시 조선중기까지는 영묘사에 걸려 있다가, 읍성으로 옮겨집니다. 아무쪼록 두두리신앙과, 거대한 3층불전, 그리고 목탑과 전탑등이 있었고, 신라청년이 불귀신이 된 화려하고도 영묘한 밀교식대찰 '영묘사'의 실체가 드러나서, 현재 한국사회에 더 많이 회자되고 시사점을 주면 합니다. 

*(사실 이런 밀교사찰의 고대미는 한국사회에선 완전하게 잊고 있는 기억이죠- 아예 존재자체가 구현된 것이 현재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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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광란의무리 2014/12/02 20:44 # 삭제

    잘봤습니다. 둥지님 글은 항상 흥미롭네요.
  • 역사관심 2014/12/03 02:10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중생 2014/12/07 15:14 #

    설화 속의 도깨비 혹은 두두리가 다리, 우물 등의 토목 공사에 능한 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두두리 신앙집단이 협동 노동(혹은 길드 같은 노동 조합?)을 일궜을 거라는 추측 역시 굉장히 설득력 있습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들이 흙장난을 할 때 부르는 두꺼비 노래도, 왜 두꺼비에게 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혹시 "도깨비"의 발음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면, 토목 공사에 능한 도깨비에게 새 집을 지어달라고 기원하며 그 댓가로 (도깨비들이 모여 사는) 헌집을 주겠다는 주술적인 노래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되는군요.
  • 역사관심 2014/12/15 11:34 #

    정말 말씀대로 흥미로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두꺼비 집이라는 이야기도 특이하긴 합니다. 왜 하필 두꺼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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