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전 발견한 고려시대 정이오 친필문서 내용 공개. 역사

일주일전에 해외옥션을 통해 발견했던 고려말-조선초의 문인 정이오(鄭以吾, 1347~1434년) 선생의 친필문서가 있었습니다.

고문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블로그 이웃분들(적륜님, windxellos님)께서 이런 저런 내용을 조금씩 알려주신 바 있는데, 중간에 '왜구를 방비하는 성을 쌓아야 한다'는 내용부터 전반적인 내용이 잘리거나, 일반적인 간찰(서찰)의 내용이 아닌듯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이자리를 빌어 정보를 주신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던 와중 역시 이웃이신 남중생님께서 결정적인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남해읍성"에 대한 건의를 정이오가 올린 기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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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남해현(南海縣) 편: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하나가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ㆍ거제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ㆍ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版圖)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軍務)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ㆍ사천ㆍ명주(溟州)ㆍ고성(固城)ㆍ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ㆍ소금ㆍ벼ㆍ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 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狁)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虎牢)에 성을 쌓으니 초인(楚人)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개 성보(城堡)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烽燧)가 있으니,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하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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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옥션소개에서 간찰체로 알려진 이 문서는 위의 내용중 '파란색'으로 된 부분만을 담고 있는 앞 부분이 잘린 글이 됩니다. 본 글은 구라량(仇羅梁, 지명) 만호(萬戶, 관직명)이자 남해현(南海縣) 현량을 겸직한 임덕수(任德秀)가 태종 4년(1404)에 남해읍성을 지은 것을 칭찬하는 축성기(築城記)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정확한 연대는 1404년이며, 남해읍성을 건설한 것을 축하한 글입니다. 남해읍성의 현재 상태를 보고 싶으시다면 읍성연구로 유명한 팬저님의 다음 시리즈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008년 도로공사중 발견된 남해읍성 성곽 (사진출처- 팬저님 블로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해읍성의 높이는 13척, 즉 3미터 94센티가량이 됩니다 (사진출처 상동). 따라서 아래의 높이에서 돌로 두세단 정도 더 쌓은 높이였던 것 같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원문입니다 ('성곽'이라고 씌여있는 부분부터 왼쪽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이 글을 '기문'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기문(記文)이란 이러한 글을 말합니다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을 말한다.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글이다. 옛사람이 기(記)라고 이름을 한 문장은 너무나 광범하여 일체의 기사문(記事文)과 기물문(記物文)을 포괄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 이 글은 기문중에서도 어떤 건축물을 축성할때 쓰는 문장인 대각명승기(臺閣名勝記)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사실 정이오는 기문으로 유명한 분인데, 유명한 진포해전 (특히 최무선의 화약부분으로 유명한)을 기록한 '화약고기' 역시 '기문'에 속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편지'(즉 간찰)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간찰체'인지에 대한 여부는 관련자들이 한번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발견한 글이 완전히 새로운 고려말의 내용이 아닌 이미 전하는 내용이라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 문서의 형식과 필체는 서지학적인 분명한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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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15/01/06 10:51 # 삭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고려말 조선초 왜구준동은 한국사의 중요 분기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조정이나 조선조정에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게
    결국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고 한일간의 힘의 역전관계가 도래했다고 보여지네요
    명나라는 그렇다치고 여진이든 왜국이든 최소한 둘중에 하나는
    힘으로 제압하는..그런 방책이 있었어야 된다고 봅니다
    여진 왜국 모두에게 교린관계를 맺고 필요할때만 잠시 무력을 쓴건
    아무리봐도 잘못한것 같네요
    ... 여진 같은 경우 명나라와의 영토 문제등 복잡하니
    좀 여유가 있을때 단순히 대마도 공격 정도가 아니라
    규슈 정벌 같은 걸로 왜국 본토에 타격을 주고 실질적인 견제를 해야했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5/01/06 23:49 #

    예나 지금이나 그래서 힘의 관계라는게 미묘한듯 합니다. 그때는 모르고 넘어갔는데 후대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으니...
  • 남중생 2015/01/06 22:07 #

    그렇다면 이건 대각명승기(臺閣名勝記)에 해당하겠군요! 그리고 환단고기...(악!)
  • 역사관심 2015/01/06 23:52 #

    말씀대로 같습니다. 이 글이 당시 읍성현판이나 돌에 새겨졌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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