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불상 (3)- 왕륜사(王輪寺) 대장륙금상(大丈六金像)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이제껏 살펴본 한국의 고대-중세 거대불상은 세 개. 황룡사 장륙상, 만복사 대동불, 그리고 복령사 대동불 세구입니다. 이제 네번째 거대불상입니다 (다만 만복사를 다룰때 대동불을 같이 넣었으므로 그것이 (2)번입니다). 

참고로 15미터급 복령사 대불을 다룬바 포스팅입니다:
일본 동대사 청동대불

오늘 소개하는 대불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지은 개경십찰(十刹)중 하나인 '왕륜사(王輪寺)'의 장륙금불입니다. 원래 불교에서 '장륙불상'이란 단어의 어원은 부처님의 키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키는 8척인데 부처님은 그 곱인 1장 6척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장 6척의 불상을 보통 장륙불상이라 합니다. 이것은 주척(周尺)으로, 부처님의 상을 조각하거나 탱화를 그릴 때 사바세계에 나타난 열응신(劣應身, 장륙신불의 다른 이름)의 키에 의지할 것이므로, 옛부터 불상의 높이를 보통 1장 6척으로 한 것은 이러한 이유죠. 만일 좌상(앉아있는)으로 한다면 입상의 5분의 3, 곧 9척 정도가 되는데, 이것도 장륙상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평균적인 잣대일뿐 황룡사나 만복사 장륙존상에서도 볼 수 있듯, 그보다 훨씬 거대한 장륙상들이 존재했지요. 장륙상의 범위를 조금 더 좁혀본다면 이는 화엄경의 주존불로 화엄종에서 주예배불로 존중받아 크게 유행을 본 본 불상이기도 합니다. 

그럼 왕륜사의 유명한 금대불을 만나기전, 우선 왕륜사의 전성기 모습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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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십찰 왕륜사(王輪寺)

왕륜사는 태조이래 역대 고려왕들이 불사를 지낸 대사찰로 그 유명한 태조 왕건의 개경십찰중 하나입니다. 919년에 세워진 사찰로 [고려사절요]에는 화려했던 왕륜사에 대한 전성기 묘사가 생생하게 전합니다. 

고려사절요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신묘 18년(1231), 송 소정 4년. 금 정대 8년. 몽고 태종 3년
송 나라 상인이 물소[水牛] 네 마리를 바쳤으므로, 최우가 인삼 50근과 광포(廣布) 300 필을 주었다. 8월에 최우가 수레[輦]를 바쳤는데 금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색 전(氈)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왕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고, 제조를 감독한 대집성(大集成)에게 안장 갖춘 말ㆍ의복ㆍ홍정(紅鞓) 등을 하사하였다. 조금 뒤에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할 때에 물소에 수레를 매어 타고 가니, 도로에서 서로 다투어 가며 구경하였다.

고려 고종대인 13세기초, 당대 권력가인 무신 최우가 고려 고종대에 송나라사신에게 받은 물소 네마리가 이끄는 수레를 금은비단과 오색 전으로 만들어 화려하기 그지 없는 모양으로 만들어 이를 타고, (고려) 고종이 왕륜사로 행차를 하고 있고 이를 수많은 백성들이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음은 전성기인 공민왕대의 기록입니다.

공민왕
무신 17년(1368), 원 지정 28년ㆍ대명 태조 고황제 홍무 원년
○ 5월에 왕이 격구(擊毬)를 구경하였다.
○ 왕의 생일에 중 3천 명을 왕륜사(王輪寺)에서 밥을 먹였다.
○ 6월에 왕이 왕륜사(王輪寺)의 영전은 불우(佛宇)가 협소하여 중 3천 명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즉시 명하여 헐어버리고 마암(馬岩)에 옮겨 짓게 하니,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이 왕륜사에 (무려) 3천명의 승려를 수용하기가 비좁다고 절을 중창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백성들에게 당연히 원성을 삽니다).  거꾸로 말하면 왕륜사에 들일 수 있는 승려가 줄잡아 3천명대임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사실 공민왕이 왕륜사에게 애정을 쏟은 이유는 노국공주의 영전을 왕륜사에 모시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절을 중창해도 모자라, 그 오른쪽에 다른 거대한 영전건물을 지으려 합니다 (이때 규모가 얼마나 큰지 기둥하나에 수십명의 인부가 깔려죽는 일까지 생기죠, 바로 드라마 '정도전'의 1회 첫장면입니다). 많은 기록이 있지만 동문선만 살펴보자면 "처음에는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웠는데, 사치를 다하고 극진히 화려하게 하여 몇 해가 되어도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땅을 마암(馬巖)의 서쪽에 골라서 지었는데, 더욱 굉장함을 다하여 노력과 비용이 몇만 냥에 이르렀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왕륜사가 이미 장대한 절임에도 또다시 극도로 사치스러운 3층건물을 노국공주를 위해 짓는다고 비판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왕륜사의 규모를 볼 수 있죠.

왕륜가(王輪歌)

왕륜사 동쪽에선 연장 소리 울려 퍼지고 / 王輪寺東斤斧聲
왕륜사 서쪽에선 향화가 맑게 피어올라라 / 王輪寺西香火淸
수많은 소 땀 흘린 게 끝내 뭘 위함일꼬 / 萬牛流汗竟何功
높이 솟은 전각에 맑은 바람 가져옴이리 / 高出霄漢來淸風 
중략
왕륜사는 만고에 삼한을 진압하고 있어 / 王輪萬古御三韓
구정처럼 우뚝하고 반석처럼 안전하거늘 / 峙如鼎重安如盤
잦은 토목 공사로 민심을 이산시키면서 / 難將木石散民間
도리어 충의심을 격동시키긴 어렵고말고 / 反激義膽催忠肝
중략

바로 목은 이색(李穡 1328~1396년)의 [목은집]에 나오는 왕륜가라는 기록으로, 왕륜사의 규모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사실 공민왕은 이 외에도 타국의 사신들에게 황금불상을 선물하고, 왕륜사에서 나온 사리를 고려궁궐안에 안치할 정도로 왕륜사와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고려사 > 卷四十一 世家 卷第四十一 > 恭愍王 18年 > 10월
왕이 회왕과 오왕의 사신들에게 황금불상을 선물하다  | 1369년 10월 3일(음), 1369년 11월 2일(양), 공민왕 18년
冬十月 甲子 王在王輪寺, 宴淮王·吳王使二使, 各獻黃金佛一軀, 時王方惑浮屠, 故因所好爲贄.

공민왕 4(恭愍王四)
경술 19년(1370), 대명 홍무 3년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하여 부처의 치사리(부처의 이에서 나온 사리)와 호승(胡僧) 지공(指空)의 두골을 보고, 대궐 안에 맞아들였다.

재밌는 기록으로 왕륜사 주지가 '고기반찬'과 차를 왕에게 진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충렬왕때의 일입니다.
충렬왕 (忠烈王)
무신 34년(1308)
○ 무인일에 신효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왕륜사(王輪寺)까지 들렸는데, 주지 인조(仁照)가 차를 드리고 고기반찬을 올렸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인 황금장륙상으로 넘어가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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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걸려 만든 왕륜사 대장륙상

[고려사] 기록을 보면, 왕륜사의 장륙상이 처음으로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1277년 2월 15일(음), 1277년 3월 20일(양), 충렬왕 3년
卷二十八 世家 卷第二十八 > 忠烈王 3年 > 2월
왕륜사의 장육소상이 완성되다 
甲戌 王輪寺丈六塑像成, 王與公主, 親設法會.

장륙상은 1277년에 완성되는데, 주목할 부분은 '소상' 즉 진흙이나 석고로 만든 상이라고 나옵니다. 이러한 소상은 당대인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장륙'소상'이 과연 뒤에 소개할 주인공인 '장륙금상'과 동일한 것인지는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는 바로 다음 기록의 연대때문입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의 [동국이상국집]에 왕륜사 장륙금상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합니다. 기록이 길어서 부분부분 잘라보겠습니다.

동국이상국전집
왕륜사(王輪寺)의 장륙금상(丈六金像)이 보인 영검을 수습(收拾)한 데 대한 기(記)

자세히 상고하건대 불법(佛法)이 우리나라에 파급된 이후 중앙에서 지방에까지 사찰이 연달아 있으며, 불상이 없는 절이 없다. 다만 모든 부처는 일체(一體)인데 무릇 불상이 있는 곳에 영응(靈應)이 나타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이것은 범부(凡夫)로서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신통(神通)하는 방편(方便)에 있어서는 자유자재하여 가능한 것도 없고 불가능한 것도 없으니, 또한 색상(色相)으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광령(光靈)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나타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우선 그 작용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기회에 따라서 그 영응을 나타내는 일도 있으니, 이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방편을 보이는 바로서 대개 지인(至人)의 세쇄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세속 사람의 보통 눈으로 본다면 어찌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서, 신앙심을 극도로 내지 않겠는가? 신앙심이 지극하면 부처는 문득 이에 응하고 그 영응도 또한 더욱 나타나리니, 이것은 세상에서 시끄럽게 전하는, 아무 절 아무 불상은 큰 영험이 있다는 따위이다.

지금 도성(都城)의 북쪽에 왕륜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해동(海東)의 종파가 항상 법륜(法輪)을 전파하는 큰 사찰이다. 이 절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의 장륙금상(丈六金像) 1구(軀)가 있다.

이 구절에 바로 왕륜사 장륙금상이 등장합니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손모양이 다르죠, 왼손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쌈)을 하고 있습니다. 손모양은 시대에 따라 조금 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고려사에 나오는 장륙소상이 이 장륙금상이 아닐수도 있느냐, 그 이유는 바로 기록의 연대때문입니다. 이규보는 1241년 사망합니다. 그런데 '장륙소상'은 1277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당연히 기록연대가 맞질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다른 장륙상이 왕륜사에 두 구이상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세 구'라는 이야기가 포스팅 말미에 있습니다). 왕륜사 장륙'금'상은 아래 기록에 나오지만 997년에 완성됩니다. 또한, '비로자나불'은 8세기에서 9세기 (즉 700년대에서 80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유행합니다.

통일신라-고려초기 비로자나 철불 (중앙박물관 소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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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니, 옛날에 거빈(巨貧)ㆍ교광(皎光)이라는 두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그들은 함께 금상(金像)을 주조(鑄造)할 것을 발원(發願)하여 속언(俗諺)의 이른바 동량(棟梁 동냥[動鈴])을 하였다. 그 동량이라는 것은 승려가 남에게 시주(施主)하기를 권유하여 불사(佛事)를 영위(營爲)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거빈이 그 일을 주관하고 교광이 이를 보좌하였는데, 거빈이 하루는 갑자기 보조자인 교광에게 말하기를,“일이란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다. 그런데다 나이조차 늙었으니, 반드시 일을 잘 마치지 못할 것이다.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스스로 분신 자살해야 하겠다. 너는 나의 사리(舍利)를 주워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유한다면 시주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뒤에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그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병신년 8월 15일에 마하연(摩訶衍) 방장(方丈)의 북쪽 봉우리에서 분신 자살하였다. 교공(皎公)이 그 유언에 따라 영골(靈骨)을 거두어 상자에 담아서 짊어지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유하니, 임금으로부터 높은 벼슬아치나 선비들과 서인에 이르기까지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재물이 산처럼 쌓였다.

판방리(板方里)에 산직(散職)으로 있는 한 장관(將官)이 있었는데 그는 곤궁하여 시주할 재물이 없으므로 13세 된 딸을 바쳐서 심부름이나 시켜주기를 원하였다. 교공은 부득이 그를 받았다. 이때 성남(城南)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어떤 장군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는 늙고 자식이 없었으므로 속전(贖錢)을 바치고 그 여자를 양녀(養女)로 삼기를 원하여 베[布] 5백 단(段)을 바쳤다. 

또 성대동(星臺洞)에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는 집이 가난하여 시주할 만한 좋은 물건이 없었으므로 그가 보배로 여기는 큰 거울을 시주하고는 이내 말하기를, “이 거울은 오랫동안 남에게 가 있어 지금도 아직 돌려받지 않았으므로 당장 바칠 수는 없으니, 쇠를 녹이는 날까지는 꼭 찾아서 가지고 가겠소.” 하였다. 교공은 그렇게 하기를 응낙하였다. 

그러나 막상 그 쇠를 녹이는 날에 이르러는 약속한 시일이 오랜지라, 깜박 잊고 거울 임자에게 통고하지 않은 채 주조하였다. 그런데 불상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모양은 잘 갖추어져서 단아하고 근엄하였으나 오직 가슴에 이지러진 데가 있었다. 중이 매우 불안해한 나머지 보완하여 주조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거울 주인이 불상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차탄하였다. 그러나 이미 시주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드디어 그 거울을 가지고 가서 바쳤다. 그 거울을 불상 가슴의 이지러진 곳에 대어보니, 그 이지러진 틈과 거울이 꼭 맞았다. 그래서 임시로 끼워두고 다음날 글자를 새긴 뒤에 때워넣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새벽에 보니, 거울이 이미 저절로 합해져서 꼭 녹여 부은 것 같아 조금도 흔적이 없었다. 도성에서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것이 영험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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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면 이 '금불'을 만들기 위해 당대 고려왕부터 관리, 선비, 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원이 시주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시주를 받기 위해 대불을 만들기로 한 스님 둘중 하나인 거빈이 분신하고 그 사리를 다른 스님인 교광법사가 가지고 다니며 완성을 했을 정도의 프로젝트였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완성된 후, 가슴부분에 거울을 박아 넣었음이 나오죠. 이 기록을 보아도 불상의 화려함과 규모를 짐작할수 있는데, 다음 구절을 보면 더욱더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이 완성되자 절로 실어 들여 이날로 금당(金堂)에 안치하려고 하였으나 문이 낮아서 불상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 아침에 문 위의 중방을 떼낸 뒤에 들여놓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 불상이 이미 들어가 자리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다. 이것이 영험의 둘째다.

여기 보면 불상이 너무 커서 금당의 문위에 붙어있는 중방을 해체한 다음 들여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래 나오지만 이때가 997년, 보통 왕륜사정도의 대찰의 중금당의 문의 크기는 대단했을 겁니다. 중방이란 것은 문위에 붙은 가로나무지지대를 말하는 것으로 아래는 평범한 한옥그림입니다만, 중세 사찰 중금당의 규모는 이런 그림과는 비교가 안되죠.
여기서 일단 기록을 끊고 (세번째 영험은 건축과는 별 관계가 없는 고로 제외합니다),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다음 부분은 역시 장륙금상의 '규모'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이 전한 것으로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는 것을 들으면, 장륙금상을 절로 모셔들이려 할 때 큰 수레에 싣고 끄는 자가 무려 수만 명이나 되어 길을 메웠으며, 돈시(豚市)의 상인(商人)들도 또한 수희심(隨喜心)을 일으켜서 힘을 모아 수레를 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힘을 이렇게 썼지만 수레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주관한 중이 이상하게 여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바라보니, 돼지 떼가 수레바퀴를 끼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악업(惡業)의 장애가 된 것을 깨닫고 그 사람들에게 수레를 밀지 못하게 금한 다음에야 수레가 곧 굴러갔다 한다. 이것이 영험의 다섯째다.

장륙금상이 완성된 후 이를 왕륜사로 끌고 갈때, 마을의 늙은이들이 본 장면입니다. 무려 수만명이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동원된 인원수를 추정하게 합니다) 금상을 태운 수레를 끌고 가는데, 그 수레가 너무 무거워서 끌고가기 힘든 장면이 나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정확히 장륙금상이 완성된 시기가 나옵니다.

또 고금의 온 나라 사람들이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에 장차 변고가 있을 때에는 장륙금상이 먼저 땀을 흘려서 징조를 보였으며, 장륙금상이 땀을 흘리면 진흙으로 만든 좌우 보처(補處)의 소상(塑像)과 돌에 새긴 《화엄경(華嚴經)》 속에 있는 모든 여래세존(如來世尊)ㆍ불(佛)ㆍ보살(菩薩) 등의 글자들도 모두 젖었으나 그 밖의 글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다. 이것은 장륙금상이 우리 국가를 수호하여 사전에 깨우쳐 준 것이다. 이것이 영험의 여섯째다. 교공이 이 불상을 주조한 것은 성종 8년 즉 송(宋) 나라 단공(端拱) 원년인 무자년(988, 성종 7)에 시작하여 정유년(997, 성종 16)에 이르기까지 무릇 10년이 걸려서 완성하였다.

988년부터 주조하기 시작, 거의 10년이 걸려서 997년 완성한 대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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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공(傑公)이 전한 말을 상고하면, “절이 일찍이 화재를 만나 모든 문적(文籍)과 장륙영험십여조기(丈六靈驗十餘條記)가 모두 불타버렸다. 이제 빈도(貧道 중의 자칭)가 전하는 것은 다만 유루된 나머지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영험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유루된 것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면 추가하여 여기에 부기해도 또한 좋겠다.

걸공(傑公)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0세기이후 동국이상국집이 씌여진 13세기사이에 왕륜사에 대화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장륙상을 만든 과정에 생긴 영험함을 설명한 문서도 사라집니다.

오직 최 시중이 중을 대접한 일에 대한 이야기만은 동일하지 않다. 걸공의 말에 의하면,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전에 와서 걸식하였다.……” 하고, 불도를 닦고 있는 늙은이들이 지금 말하는 바에 의하면, “공이 매일 중 한 명씩 밥 접대를 하는데, 그의 종에게 시키기를 ‘너는 나가서 중을 찾아오되 먼저 만나는 중이 인연이 있는 중이니, 반드시 그 중을 맞아오너라’ 하였다. 종이 어느날 나가서 중을 찾는데, 의복이 남루하고 형상이 매우 추하게 생긴 중 하나가 있었다. 종이 그를 피하고 또 다른 중을 찾았으나 다시 그 중이 나타났다. 이렇게 하기를 네댓 번 거듭하였으나 종이 그 추한 것을 싫어하여 선뜻 맞아오기를 즐겨하지 않고 돌아와서 그 상황을 공에게 아뢰니, 공이 성내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말한 인연 있는 중이다. 너는 빨리 가서 맞아오너라’ 하였다. 종이 나가 보니, 또 그 중이 있었다. 그래서 맞아들이어 공이 밥을 준 것이다.……” 한다. 이 이야기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두 가지가 다 이상한 데가 있으므로 모두 기록해 둔다.

국가에서 장륙상을 안치한 전각이 퇴잔(頹殘)했다고 해서 이를 보수하게 하였다. 지금의 상국(相國) 청하 최공(淸河崔公)이 매우 진력한 바 있다. 공은 또 불개(佛蓋)와 당개(幢蓋)가 많이 낡고 해졌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런 것은 다 불교 의식의 대표적인 것이다. 성대하게 꾸미지 않으면 불교 의식의 가장 큰 것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고, 곧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영조(營造)하게 하니, 온갖 보배의 광채가 눈이 부시게 찬란하여, 정말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공이 장륙금상의 영험에 대한 유기(遺記)를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다만 그 기록이 모두 방언과 속어로 되어 있어서 오래 전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 명하여 글로 쓰게 하였다. 나는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문을 쓴다. 을유년(1225, 고종 12) 12월 일에 조의대부 시국자 좨주 한림시강학사 지제고(朝議大夫試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知制誥) 이규보(李奎報) 자(字) 춘경(春卿)은 삼가 적고, 다시 송(頌)으로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여기보면 역시 10-13세기 사이에 장륙상을 모신 대금당이 퇴락해서, 다시 크고 화려하게 중수했음이 나옵니다.

청정한 부처의 한 몸은 / 淸淨一體
달이 가을 물에 비친 것 같다 / 月映秋水
가까이 가면 환하게 밝건만 / 卽之朗然
잡으려면 멀도다 / 攬之邈矣
비로자나의 경지는 / 毗盧境地
본래부터 사의를 초월한 것이다 / 本絶思議
그 상을 만든 것도 꿈이요 / 造像者夢
그것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 讚者亦爾

이 시는 바로 장륙금상을 찬양한 시입니다. 그럼 아들인 이험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이외에, 당대의 '이규보'가 직접 왕륜사 장륙상을 묘사한 글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1478년 조선초기의 문집인 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에 다음의 이규보 글이 전합니다. 아마도 이 글이 동국이상국집의 원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고 겹치는 부분은 모두 제외합니다).

왕륜사 장륙금상 영험수습기(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
이규보(李奎報)

살펴보건대 불법(佛法)이 삼한(三韓)에 파급되자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벌려선 사찰(寺刹)들이 서로 바라다보이며,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은 절이 없다. 다만 모든 부처는 한 몸인데 무릇 불상을 모신 곳 중에서 영험(靈驗)이 드러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은 범부(凡夫)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그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여러 부처와 보살의 신통(神通)하는 방편(方便)은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가능한 것도 없고 불가능한 것도 없는 것이니, 또한 눈에 보이는 빛깔과 형상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명과 영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잠깐 그 작용을 감추었을 뿐이다. 중략.

지금 도성(都城)의 북쪽에 왕륜사(王輪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해동의 종파가 항상 모든 법의 힘을 전파하는 사찰(寺刹)이다. 이 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장륙금상(丈六金像) 하나가 있다. 들으니, 옛날 거빈(巨貧)과 교광(皎光)이라 하는 두 사람의 비구(比丘)가 있었다. 둘이서 황금 불상을 주조(鑄造)할 것을 발원(發願)하고 속된 말로 동량(棟梁)이란 것을 하였다. 동량이란 것은 무릇 중이 남에게 시주(施主)하기를 권유하여 불사(佛事 부처에게 봉사하는 일)를 영위(營爲)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거빈이 그 일을 주관하고 교광이 보조하였는데, 거빈이 하루는 갑자기 보조자 교광에게 말하기를, “일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다. 더구나 나이도 늙었으니 반드시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마땅히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서 스스로 분신(焚身)하여 죽어야 하겠다. 너는 나의 사리(舍利)를 수습하여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유한다면 즐겨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뒤라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곧 그 산에 들어가 도(道)를 닦았다.

병신년 8월 15일에 이르러 마하연(摩訶衍) 방장(方丈)의 북쪽 봉우리에서 산 채로 그의 몸을 불살랐다. 교공(皎公)이 그의 유언에 의하여, 사리를 거두어 상자에 담아 스스로 짊어지고 서울에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하니 위에서부터 높은 벼슬아치와 선비들과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재물이 산같이 쌓였다. 판방리(板方里)에 산직(散職 보직〈補職〉이 없는 벼슬)으로 있는 장관(將官)이 있었는데, 빈궁하여 재물은 시주할 수 없고 다만 13 세쯤 된 딸이 있었다. 이 딸을 바쳐서 심부름이나 시켜주기를 원하자 교공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때 성남(城南)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장군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속전(贖錢)을 바치고, 이 계집아이를 데려다가 양녀(養女)로 삼기를 원하고 베[布] 5백 필을 바쳤다. 또 성대동(星臺洞)에 과부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시주할 만한 좋은 물건이 없어서 그가 보배롭게 여기던 큰 거울을 시주하면서 말하기를, “이 거울은 오랫동안 남에게 가 있어서 지금도 아직 돌려받지 않았으므로 당장에 갖다 바칠 수는 없습니다만 쇠를 녹여 붓는 날까지는 꼭 찾아다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교공이 “좋습니다.” 하고 승낙하였다. 그런데 그 쇠를 녹여 붓는 때에 이르러서 그동안 시일(時日)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깜박 잊고 거울 임자에게 통하지 못한 채 쇠를 녹여 부었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모양이 잘 갖추어져서 만족할 만하며, 단아(端雅)하고 근엄(謹嚴)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직 가슴에 이지러진 데가 있었다. 중이 매우 불안하여 마침내 채워서 녹여 부을 것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거울의 주인이 불상이 이미 주조되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한탄한 다음 이미 시주한 것이므로 그 거울을 갖고 가서 바치었다. 그 거울을 불상의 가슴에 있는 이지러진 자리에 가져다 놓아보니, 그 이지러진 틈이 거울과 더불어 잘 맞물렸다. 그래서 임시로 끼워두고 내일로 늦추어 글자를 새긴 뒤에 때워 넣기로 하였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서 보니 거울이 이미 제 스스로 합하여져서 꼭 녹여 부은 것같이 조금도 흔적이 없었다. 도성에서 보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게 되었으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영험한 첫 번째 일이다.

불상이 이루어졌으므로 절 안으로 들어가서 이날로 금당(金堂)에 안치(安置)하고자 하였으나 문이 낮아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을 기(期)하여 문 위의 중방(中枋)을 모두 들어낸 뒤에 들여놓기로 하였다. 아침이 되어서 보니 불상(佛像)이 이미 단정하게 제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영험한 두 번째 일이다. 시중(侍中) 최정안(崔精安)이 항상 장륙금상(丈六金像)을 깊이 존경하였다. 그 집이 절의 남쪽 이웃에 있었으므로 매번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절의 문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말에서 내려 불상을 향하여 예배(禮拜)한 뒤에 갔으며, 퇴근할 때 조종문(朝宗門)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고 걸어서 절문을 지난 뒤에 말을 타곤 하였다. 무릇 새로 나는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불상 앞에 바친 뒤라야 감히 맛보았고, 이따금 법당(法堂)에 가서 손수 차(茶)를 끓여서 공양하기도 하였다 (주: 고려대의 '차와 사찰'의 관계가 다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홀연(忽然)히 꿈에 장륙금상이 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는 것이 진실로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절의 남쪽 마을 응양부(鷹揚府)에 사는 늙은 군사의 귀의(歸依)하는 마음만은 못하다.” 하였다. 공이 이튿날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찾으니 과연 한 명의 늙은 군사가 있었다. 공이 친히 가서 방문하고 묻기를, “네가 항상 아무 절의 장륙상(丈六像)을 존경한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또 그를 존경해서 특별히 어떤 일을 하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늙은 제가 중풍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지가 이미 7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저녁과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그곳을 향하여 합장(合掌)할 뿐입니다. 어찌 따로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늙은 내가 부처 섬기는 것이 너만큼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구나.”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녹봉(祿俸)을 받을 때마다 문득 1곡(斛)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세 번째 일이다.

또 최 시중(崔侍中)이 녹봉을 받는 날에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앞에 와서 밥을 비는 것이었다. 공이 밥을 주어 먹게 하고, 그가 마시고 씹는 모습을 보니 보통 사람과 다른 데가 있었다. 그래서 따로 밥 한 말을 지어서 가져다 주니 다시 다 먹어 버리고 남기는 것이 없었다. 공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녹봉의 한 휘[斛]를 시주하고 하인을 시켜 지고 따라가게 하였는데, 문밖에 나가자 굳이 종을 돌려보내고 스스로 지고 돌아갔다. 공이 듣고 급히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으나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공이 친히 나가서 쫓아가는데 쌀을 짊어진 중 한 사람이 왕륜사(王輪寺)의 문으로 들어간 자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곧 절에 들어가 찾았으나 또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마침 장륙금상(丈六金像)을 예배하고자 하여 금당(金堂)에 들어가보니, 녹미(祿米) 한 휘가 불상의 향탁(香卓) 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그 중이 바로 장륙금상의 권화(權化)라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네 번째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 옛날의 수좌승 걸(傑)이 종문(宗門)의 대사(大士)인 정림(正林)이란 자에게 전한 것이다. 정림은 뒤에 또한 승관(僧官)이 되었으니, 다 불문(佛門)의 노장(老匠)들로서 신실하고 독실한 대화상(大和尙)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를 망령되게 전하였겠는가. 그리고 옛 늙은이들이 전하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입에 분명하게 전파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장륙금상을 바야흐로 절에 모시려 할 때, 큰 수레에 싣고 끄는 자가 무려 백만 명이나 되어 큰길을 메웠다고 한다. 그중에는 돼지고기를 파는 상인(商人)들도 있어서 또한 수희심(隨喜心 남의 좋은 일을 보고 따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힘을 모아 수레를 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힘이 이와 같건만 수레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맡은 중이 이상하게 여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바라보니, 돼지떼가 수레바퀴를 잡고 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악업(惡業)으로 인해 장애(障碍)가 된 것을 깨닫고 그 사람들에게 수레를 밀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수레는 곧 움직여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다섯 번째 일이다. 
중략.
========

최소 10-최대 18미터급 대불

이상으로 고려당대의 찬란했던 왕륜사 금당과 대금불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궁금증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단한 비로자나 대금불의 진짜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에 관한 것이죠. 정말 고맙게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미 고려대가 지나고 왕륜사가 폐사지된 후인 15세기 (조선전기-중기)에 개성을 유람한 조선선비들의 기록인 '유송도록(遊松都錄)'에 이 왕륜사에 대한 시가 몇 점 전합니다. 이 유송도록에 그 유명한 (추후 더 소개할) 개성 연복사 5층전각에 대한 시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중 성현(成俔, 1439∼1504년), 허침(許琛, 1444 ~ 1505년)과 채수 (蔡壽, 1449 ~ 1515년)의 시를 살펴보죠. 

王輪寺
채수
드높은 전각은 황량하고
스님마져 보이지 않는데

황금으로 빚은 부처만 
고고하게 우뚝 서있다.
(중략)

우선 채수의 시입니다. 이미 공민왕대이후 개경의 몰락을 보여주듯 왕륜사도 퇴락, 폐사지로 변한 쓸쓸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황금으로 빚은 부처'는 고고하게 서있음이 나오죠. 또한 인상적인 구절은 '드높은 절집'이라는 구절로, 금당의 높이가 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동행했던 '성현'의 시입니다.

王輪寺
성현

대(大)전각 황량하고 
스님은 보이지 않는데

황금 큰 부처가 혼자서 
높이 앉았네. 

티끌이 선탑(禪榻)에 쌓였으니 
바람이 비질하고, 

밤이 창살에 어두운데 
달이 등불되는 것이, 

늙은 농부 밭을 갈다가 
옛 섬돌 일으키고, 

지나는 사람 길을 물어 
높은 언덕 지나가누나. 

높이 선 한 조각 시냇가의 돌은, 
만고에 말없이 흥하고 망하는 일 다 보았다네
======
역시 대규모의 전각과 그 안에 대황금불이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구체적 높이가 나오는 '허침'의 시입니다.

王輪寺
허침

저녁달 아래 바람 속에서
새롭게 일소를 짓는다.

불문과 세속
어느것이 참이고 거짓인가?

이미 삼생을 이해하는 스님은 없고
오직 여섯길 넘는
육신불만 남아있다.

낡은 바람벽은
달팽이가 겨워낸 침에 그림까지 개먹어들고

무너진 담장은
풀벌레가 토해 낸 이슬에 가시덤불까지 축축하다.

오랜 세월 속에
이미 신통력도 다하여

얽히고 섥킨 억겁의 업보를
정말 헤아리기도 어렵다.
===

이 시가 아주 중요한데 여기보면 '여섯 길'의 육신불이 남아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통척에서 '한 길'이라는 단위는 원래는 성인의 키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차차 길게 잡아 8척(자, 2미터 40센티) 또는 10척 (3미터 10센티)을 가리키게 됩니다. 따라서 6길이라 함은 최소 1미터 70센티를 기준으로 삼아도, 10미터 20센티가 되고 8척으로 삼으면 14미터 50센티급의 높이가 됩니다. 또한 10척으로 삼으면 (복령사 기록과 같은 15세기 영조척기준), 6길은 18미터가 됩니다. 이는 앞서 소개한 5길의 복령사 대불보다 더 큽니다. 사실, 대불을 끌고 가는 장면을 보면 이해가 되지요.

따라서 왕륜사의 장륙금상 (비로자나불)은 엄청난 대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 고려시대의 대불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은 전공자중에서도 관심있는 소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맨 처음 나오는 사진의 중앙박물관 소재 비로자나철불도 실제로 보면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겨우 2미터정도입니다. 이것의 무려 5- 6배가 넘는 규모라면 거의 일본의 동대사 대불 (16.2미터)에서 느끼는 느낌이라 생각합니다.
비슷한 느낌의 대불로 최근에 주조된 국내불상을 들자면 좌고 15미터 각원사 청동대불이 될 것입니다 (귀길이 1.75미터, 손톱길이 30센티). 1977년 주조된 불상으로 이런 규모의 비로나자대불이 금당안에 있었던 것이지요. 고대-중세 한국의 대사찰들에는 역시 이러한 규모의 대불이 들어갈 중금당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각원사 청동대불

왼쪽의 단층금당을 비교하면 대불의 규모가 보입니다. 이런 규모의 불상이 들어갈 수 있는 중세금당의 규모의 느낌이 얼추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시기 추강 남효온(南孝溫, 1454~1492년) 역시 이 대불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기행(紀行) 중
신선들 노닐었던 노을빛 자하동 / 遊仙紫霞洞
신선 떠난 뒤 땔나무 풀밭 되었네 / 仙去樵牧場
그 곁 왕륜사는 반 넘어 퇴락하여 / 王輪半頹落
음침한 방 안에 대불상이 울고 있네 / 丈六啼陰房
떨어지는 달빛이 붉은 잎 비추는데 / 落月照紅葉
말 울음소리에 솔바람이 길게 부네 / 馬鳴松風長
시를 짓느라 밤늦도록 앉았노라니 / 尋詩坐到夜
그 옛날 일들이 처량할 뿐이로다 / 古事成凄凉

그런데, 이 남효온의 다른 기록에 필자가 처음에 추측했던 것 처럼 '최소 2구 이상의 대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개성을 유람한 기록인 [송경록(松京錄)]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송경록 중.
봉우리 뒤에 작은 동네가 있으니, 묵사동(墨寺洞)이다. 조금 있다가 내려와서는 왕륜사에 들어가서 장륙(丈六) 세 개를 보았다. 또 내려오다가 수락석(水落石)을 만나 정중, 자용과 함께 냇물에서 목욕하였다.

비로자나삼존도 (고려후기, 독일 쾰른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이 고려불화는 바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위 왕륜사기록과 일치하는 시기의 그림으로, 비로자나 삼존도입니다. 즉,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있는 구도죠. 혹시 이 세구의 대불이 거대하게 주조되어 있던 건 아닐까요?

아무튼 왕륜사의 대장륙상이 황룡사의 그것만큼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덧글

  • Esperos 2015/01/21 09:27 #

    조선시대 세종이 정한 주척의 길이가 21 cm 정도지만, 불경이 번역된 중국 한나라 시절의 주척이 약 23 cm라고 하므로 (후한에선 조금 더 길어짐), 23 cm 단위로 8척은 184, 1장 6척은 368 cm가 되지요. 한 척이 30 cm쯤 되는 것은 당대척(영조척)입니다.
  • 역사관심 2015/01/21 09:45 #

    아 그렇지 않아도, 제글중 복령사 부분을 다시 찾아보다가 말씀하신 부분을 언급했던 기억이 나서, 첨가하려 했었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복령사글중 아래의 부분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길이단위는 리(釐), 푼(分), 치(寸), 자(尺), 장(丈)으로 10리=1푼, 10푼=1치, 10치=1자, 10자=1장입니다. 보통 15세기의 단위로 한 장을 주척(周尺)과 영조척(營造尺)으로 따지는데, 주척은 당시 21.3 센티, 영조척은 31.6센티였습니다. 차천로의 기록은 광해군(1575~ 1641년)시대에 해당합니다. 영조척의 경우 태조때는 32.21, 세종때 32.08, 그리고 성종대에 31.19, 광해군대는 31.07센티입니다. 보통 토목, 건축등에 영조척을 쓰므로 영조척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보통 한 장(丈, 한 길)을 3미터로 다루는 것은 이 영조척이 이분야에 활발히 쓰이기 때문입니다 (주척은 보통 측우라든가 수표, 천문등을 측정할때 씁니다). 이렇게 보면 차천로당대의 한 장(한 길이라고도 함)은 10자이며, 따라서 3미터 10센티가 되는 것입니다.
  • ㅇㅇ 2015/01/21 11:17 # 삭제

    확실히 임진왜란 이전 한국 불교의 모습은 전에도 말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십년간의 몽골 침략을 겪고 나서도 계속 그러했다는게 중요하네요
    그런데 1592년을 기점으로 그 모든게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렸으니
    그 이후에도 제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그런거 보면 임진왜란의 피해라는게 진짜 심각했던것 같습니다
    요즘 인터넷보면 임진왜란 아니더라도 저런 유적 유물들 남아있지 못했을꺼란
    주장이 횡행하던데 왜 자꾸 그런 헛소리가 떠돌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조선측 피해를 축소해서
    유교사대부의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왜군의 만행을 최대한 적게 부각시킬려고
    하는것인지..
    그런 퇴행적 역사인식이 왜 한국인터넷이나 한국역사학계에
    떠돌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형 변종식민사관인건지
    아니면 인식론적 허무주의에 빠진 탈근대 역사관 때문인지

    참 안타깝네요

  • 역사관심 2015/01/21 12:52 #

    임란이 한국 문화유산의 단절에 가장 주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라는 if는 의미없는 논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학의 강세로 불교문화가 탄압받았다하더라도 회암사등 상징적인 몇몇 사찰이 사라졌을뿐, 많은 유산이 살아남았겠죠. '건축'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 의미없는 논쟁할 시간에 생산적인 일들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프랑켄 2015/01/22 00:39 #

    숭유억불 정책이 사찰의 중건 및 재건을 할 여력을 없애버렸단 말입니다. 전쟁도 무시할 순 없지만 목조건물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해 다타면 다시 재건해야 하는데 절을 관리할 승려가 천민으로 전락하고 양반들 시중을 들어야 했던 상황에 무슨 재력이 있어 유자한다 말입니까?

    물론 주인장 말대로 유산이 남아 있을 순 있겠죠 가마쿠라 대불처럼 전각이 태풍으로 날아가 버려도 굳건히 남아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거대 불상만 달랑 남아있는 것이 재대로 된 유산인가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며 더군다나 변변한 구리광산이 없어 일본에서 수입해와야만 했던 조선의 사정상 돈돼는 불상을 가만 놔둘지가 심히 의문입니다.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판테온의 청동지붕을 벗겼던 사례처럼 재활용(???)아주 잘 했을 거 같은데요
  • 역사관심 2015/01/22 05:07 #

    프랑켄님의 말씀도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if를 따지는 일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수 없겠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저 역시 무의식적으로 가정을 하곤 합니다-당연하지요). 다만, 현실적으로 임진왜란당시 피해를 입은 건축문화가 극심하게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 사실만을 들여다보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즉,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피해가 있었으며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를 담론화하는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임란의 피해를 이야기할때 (이것은 프랑켄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이버등 댓글에서도 '그것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이랬을 것이다라는 식의 논지를 끌어가는 사람이 종종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식의 결과적으로 논점이 흐려져버리게 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 그러한 논지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담론을 개인적으로는 생산적으로 별로 보지 않으며 피해의 상황을 직시하고 개선하는 쪽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쪽에 더 집중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말씀대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없었다할지라도, 조선시대 교조화된 성리학풍토에서 당연히 불교는 억압되고 퇴락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또한 개성 역시 위의 싯구들에서 보이듯 이미 전왕조와의 단절을 통해 쇠락하고 있었지요. 또한, 조선중기이후의 흐름이 전대의 건축의 중건을 단절시켰다는 점도 크게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은 각자의 의견이 다를뿐입니다), 대규모의 국제적 전쟁의 주전장이 몇번이나 반복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통시적 문화의 존속성은 비교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 역시 가정일뿐입니다만. 또한 다른 의견으로 뼈대만 남은 불상이라도 저는 문화유산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역시 의견차는 있을수 있겠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5/01/21 11:48 #

    고려시대 불교는 참으로 신기했죠 이 작은나라에 뭐 구리 큰절이 많았는지... 그만큼 불교를 믿고 나라가 극락정토가 되길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셨으니까요

    여튼 엄청난 불상들이 있었네요...
  • 역사관심 2015/01/21 12:53 #

    사실 나라규모와 상관없이 대단한 문화유적들이 타국에도 있곤 하죠 ^^
    이런 문화재들이 '있었는 줄도' 모르는 현재 한국사회가 안타깝고 답답하긴 합니다.
  • 낙으네 2015/01/23 13:00 # 삭제

    개인적으로 불상의 모습을 보는걸 좋아합니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이랑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편안해지죠. 이 불상도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남아있었다면 고려후기의 대형불상의 유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텐데......
  • 역사관심 2015/01/23 13:43 #

    그러게 말입니다 ㅠㅜ... 3d로라도 고증하에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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